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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캉 정신분석의 이해 본문

인 문/정신분석

라캉 정신분석의 이해

유쾌한 인문학 2012. 11. 26. 0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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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캉 정신분석의 이해

 타인이나 타 문명에 대한 이해를 위해 시간과 거리를 둔 채 관찰해야 한다는 구조주의의 기본적 태도는 타인에 대한 관찰을 넘어 나 자신에게도 적용할 수 있다.  나는 나를 너무나도 잘 알고 있다는 데카르트의 자아 명증성은 사실 모호한 측면이 많다.  생각을 멈추는 순간의 나는 무엇인지? 그리고 내안에 존재하는 ‘또 다른 나’라는 형태의 정확히 알 수 없는 다른 무엇의 경험은 무엇인지?  이러한 경험을 두고 "내 안에 있는 타인" 또는 "나는 하나의 타인이다"라는 말로 설명이 가능할 것이며 이는 데카르트의 주체관을 철저하게 의심스러운 것으로 만들게 된다.  진정한 나를 알기 위해선 내안에 있는 ‘또 다른 나’를 거리를 둔 채 응시하고 관찰하여 내 안에 있는 그를 바깥에서 객관적으로 바라보아야 한다.  이러한 구조주의의 성과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인 라캉의 정신분석학은 랑그 언어학을 통해 프로이트로 돌아가자고 주장하게 되며 이를 통해 인간을 바라보는 태도를 더욱 크게 변화하게 된다.



상상계과 자아의 형성 - 거울단계와 나르시즘

헤겔의 주인과 노예의 변증법이 보여주는 가장 극적인 면은 주체의 형성과정에 대한 관점이다.  단순하게 바라보자면 주인은 스스로 주체로 서는 자이며 노예는 주인에 종속된 삶을 살아가는 자로서 주인의 인정에 의해 주체로 서게 된다고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도리어 주인은 그의 삶 전반을 노예에게 의존하여 살아가는 존재로서 주인의 주체성은 노예가 그를 주인으로 인정해주었을 때 성립하게 된다.  노예는 노동이라는 다른 측면을 통해 자신을 확인할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지기에 주인보다 더 자유로운 존재가 된다.  결국 주인이야 말로 노예와 같은 삶을 살아가는 자이며 노예야 말로 주인의 삶에 가까운 존재가 된다.  이를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인간의 주체성은 상대방과의 투쟁을 통한 상호인정에 의존한다는 것이다.  인간이 자아를 형성하기 위해서는 '' 이외의 타자와 대립이 전제되어야한다.  이른바 변증법에서 말하는 테제와 안티테제의 대립이다.  테제가 존재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안티테제가 있어야만 하며 인간에게 있어 최초의 안티테제의 등장은 언어를 배우지 못한 유아시절 거울에 미친 이미지를 통해 나타난다고 한다.  이를 두고 거울단계라고 표현하며 이 단계를 통해 자아를 형성하게 된다. 


거울단계[1]는 언어를 배우지 않은 6개월에서 18개월 사이의 어린아이에게서 발생하는 현상이다.  거울단계의 진입 이전의 아기는 자신의 몸을 완벽하게 제어할 수 없기에 자신의 신체가 파편화되어있다는 원초적 환상을 가지게 되며 그와 동시에 자신과 대상을 구분하지 못한채 모든 것이 뒤엉켜버리는 경험을 하게 된다.  그러다 어느 시점에 아이는 거울에 비친 이미지를 보게 되고 그 이미지를 자신으로 받아들이는 거울단계에 진입하게 된다.  처음 거울단계에 진입했을때는 흔히 동물들이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자신으로 생각하지 못하듯 어린아이 역시 그 이미지를 혼동하게 되지만, 어느 순간 거울에 비친 이미지가 자신의 이미지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즉 아이는 거울 속의 이미지를 보면서 자신이 가지고 있는 파편화된 신체의 경험과는 달리 하나의 완전한 전체성을 가지고 있다는 점을 깨닫는 것이다.  하지만 여전히 아이는 자신의 몸을 완벽하게 통제하지 못하는 파편화된 신체의 경험을 가지고 있으므로 이러한 경험은 거울속의 완벽한 이미지와 서로 상충하게 된다.  이때 아이는 자신의 불완전한 신체를 자기라고 생각하기보다 거울 속의 이미지를 자기라 생각하여 자신과 동일시하게 된다.  즉 이미지에 매료되는 것이며 이러한 전체성의 경험은 상당한 쾌락을 가져오게 된다.  나르시스 신화는 이러한 거울단계를 잘 보여주게 된다.  호수에 비친 자신의 모습에 매료되어 애정을 품는 나르시스의 모습이야 말로 거울 이미지에 매료된 자신의 모습을 보여주는 전형이다.


이러한 동일시의 과정이 상당히 중요한데 이를 통해 아이는 자신을 완전한 존재로서 인식하여 자아를 형성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결국 최초로 다가오는 통합된 나에 대한 경험은 거울 속에 비친 이미지 즉 타자를 통해서 획득하게 되며, 자아는 이미지가 가지고 있는 특징과 형태를 통해 구성된다.  하지만 이러한 동일시는 근본적으로 소외를 불러올 수밖에 없다.  거울속의 이미지가 가지는 완벽에 가까운 이상적 자아는 여전히 남아있는 불완전한 신체의 경험과 상충하기 때문이다.  아이는 끊임없이 완전한 상을 보여주는 이미지에 이끌리지만 자신의 신체에서 오는 경험은 여전히 불완전하며, 더욱이 완전한 이미지가 보여주는 이상적 자아는 본질적으로 타자이기에 불안을 내포하게 된다.  그렇기에 아이는 상당한 공격성을 드러내게 된다.  따라서 자아를 획득한다는 것은 완전한 안정성과 통일성의 확보가 아닌 균열의 순간을 맞이한다는 것이고 이 균열의 경험은 끊임없이 이상적 자아를 위협하게 된다. 


공격성은 나르시스 신화에서 다시금 확인할 수 있다.  나르시스는 호수에 비친 자신의 모습에 사랑을 느끼게 되며 끝내 그 이미지가 자신임을 알지 못한채 호수에 들어가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이를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이미지에 대한 지나친 매료가 가지고 있는 공격성과 자살에 대한 충동이다.  예컨대 시험을 준비하는 사람이 있다.  그는 자기 자신에 대한 확신과 자신감이 넘쳐흐르는 상태였지만 지속적인 실패를 경험하게 된다.  이러한 실패를 많이 경험한 사람들은 나르시즘의 붕괴 즉 자기 도취가 사라지는 경험을 하게 되고 이럴 때 꽤나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신체에 대해 분노를 표출하곤 한다.  머리를 벽에 툭툭 박는다던지 심하면 자살에 이르기까지 말이다.  이러한 신체에 대한 분노는 나르시즘의 붕괴에서 비롯된 현상으로 매료가 사라진 순간 억압된 파편화된 신체의 경험이 다시금 되살아나면서 소외를 반복하게 된다.  이때 공격성이 다시금 솟구쳐 오르는 것이다.  다른 예를 들어보자면 인형을 가지고 놀 때 흔히 인형의 팔다리를 자른다던지 목을 때어 낸다던지 따위의 행동을 하게 된다.  이러한 인형에 대한 폭력성도 파편화된 신체의 경험에서 오는 폭력성과 구조적으로 같다고 볼 수 있다. 


정리하자면 거울단계에서 비친 이미지는 한편으론 ''이면서 다른 한편으론 거울에 비친 타자이기도 하다.  이러한 상상계는 완벽에 가까운 모습을 보여준다.  완벽한 자신의 이미지를 자신과 동일시하였으니 무엇 하나 내 마음대로 안 될 이유가 없는 곳이다.  이때의 아이는 자신을 이미지 또는 어머니와 동일시한 채 이것만이 세상의 모든 것이라 여기는 환상을 가지게 되며 이를 이자적 구조의 세상이라 칭한다.  결국 상상계는 한편으론 완벽한 세상이면서 다른 한편으론 불안을 내포하는 양상을 드러낸다.  하지만 세상은 이자적 구조가 아닌 수많은 사람들이 살아가는 다자적 구조이고 그 속에는 법과 원칙이 존재한다.  사람은 이자적 구조를 넘어 현실의 세계로 나아가야하는 것이다.  이것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 바로 언어의 기능이다.  인간은 언어체계를 내재화 할 때 현실의 사회생활이 가능하게 되며 이 순간 인간은 주체를 정립하게 된다.  이것이 상징계의 역할이다.


거울단계는 주체를 바라보는 태도에서 혁명과도 같은 관점을 가져오게 된다.  즉 데카르트 이후부터 내려온 자아 명증성 즉 '생각하는 나가 존재하는 나'라는 절대 주체적 개념이 붕괴된다는 것이다.  절대주체의 관념 하에서는 주체는 코키토 또는 칸트의 형식을 통해 내부에서 비롯하게 되지만 거울단계를 통해서 확인되는 주체의 기원은 거울에 비친 이미지 즉 외부에서 비롯하게 된다.  결국 데카르트는 모든 것을 의심한 채 단 하나의 자명한 진리 즉 코키토를 정초하게 되지만 라캉의 이르면 데카르트의 의심은 미완에 불과할 뿐이며, 코키토는 철저하게 상상계의 자아에 불과한 것이 된다.  진정한 인간 주체는 상상계의 자아가 아닌 언어 질서 속에서 발견이 된다.  이러한 관점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인간은 스스로 존재하는 것이 아닌 타자에 의해 존재 당해진다는 것이다.



상징계와 주체의 형성- 오이디푸스 컴플렉스와 아버지의 법

라캉은 기본적으로 소쉬르의 언어학을 받아들이지만 소쉬르의 이론을 대폭 수정하게 된다.  즉 기호가 가지는 자의성과 기호들의 상호관계에 의한 가치의 측면은 받아들이지만, 기의가 우선한다는 태도와 기호가 가지는 불가분성에 대해서도 의문을 품게 된다.  이에 라캉은 소쉬르의 기호 모델을 수정하여 기표를 우위에 두게 되고 소쉬르가 상정한 기표와 기의 사이의 가로선의 의미도 수정하게 된다.  기호 = 기표/기의로서 기표를 우위에 두게 되며 /의 의미는 소쉬르와는 다르게 분리와 억압의 선을 의미하게 된다.  이에 따르면 기표는 기의보다 우월한 위치에 놓이게 되고 기의는 /에 의해서 기표에 닿지 못한 채 항상 미끄러지게 된다. 


우월한 위치에 놓인 기표는 소쉬르의 기호모델과 마찬가지로 기표의 연쇄를 통해 언어 체계를 만들어내게 되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기표의 체계로서 의미를 가지지는 않는다.  즉 기의는 /에 막혀있기에 언어를 통한 의사소통이 불가능하다.  의사소통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기표와 기의가 만나는 지점이 필요한데 그것을 고정점이라고 말한다.  즉 기표의 연쇄체 아래에서 끊임없이 미끄러져 흐르기만 하는 기의는 고정점에서 기표와 만나는 것이 가능해지며 이때 의사소통이 가능해진다.  예를 들어 나는 불어를 할 줄 모르는데 어느 프랑스인이 나에게 다가와 길을 묻는다고 해보자.  프랑스인은 끊임없이 나에게 이야기를 할 것이고 그것들은 기표들이 모인 문장이다.  하지만 나는 불어를 모르기에 그 뜻을 알 수가 없다.  기표가 기의와 연결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기의는 프랑스인이 말하는 기표 아래를 끊임없이 미끄러질 뿐이기에 나는 결코 그의 말을 알 수가 없다.  하지만 한순간 의사소통이 가능해지는 순간도 있다.  손가락을 들어 나를 가리키면서 내가 이름을 말하고 상대방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면서 으흥? 이라고 말한다면 그는 자신의 이름을 말할 것이다.  이때가 바로 고정점이 발생하는 순간이다. 


하지만 이러한 고정점은 소쉬르의 기호 이론과 같이 불가분의 의미관계를 의미하지는 않는다.  고정점은 잠시동안 의미작용이 가능해지는 임시적인 지점에 불과하다.  이와 더불어 라캉에 의하면 무의식은 인간이 상징계에 진입하여 주체로 거듭날 때 형성된다고 하며 이러한 무의식은 야콥슨의 은유와 환유의 두 가지 문법을 통해 언어체계와 같이 구조화되어 있다고 바라본다.  따라서 무의식은 상징계가 인간에게 미치는 효과이자 언어체계와 같이 구조화되어있기에 해석되어야 하는 무엇이다.  



오이디푸스 컴플렉스와 팔루스

상징계는 우리가 통제할 수 없는 선험적인 성격을 가지며 인간이 주체가 되어 사회생활을 영유하기 위해서는 상징계에 종속되어야 한다.  주체는 상징계에 의해 구성되며 이미 존재하는 그 구조에 갇혀 있는 것에 불과하다.  인간이 주체가 된다는 것은 타인에 의해서 이름이 불려지는 것부터 시작하게 된다.  타인에 의해 누구 집 아들, 누구 집 딸 따위로 불려진다는 것은 나 자신이 완전한 하나의 개체로서 사회 구조 속에 위치를 점하게 된다는 것이며, 이러한 이름 불려짐은 타인에 의해서 인정을 받고 싶어 하는 욕망의 한 측면을 잘 보여주게 된다.  오이디푸스 신화의 주된 핵심이 바로 이러한 인정을 받고 싶다는 욕망에 대한 것이며 그 중심에 서는 핵심적 기표가 바로 팔루스이다.  


오이디푸스의 첫 번째 단계는 상상계이다.  아기는 이자적 관계에서는 어머니의 욕망의 대상이 되기를 원한다.  즉 어머니는 무언가를 결핍하고 있으며 그 결핍을 자신이 매꾸어 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러한 상상적 관계는 상상적 팔루스[2]라는 기표에 의해 형성되며 이때 팔루스는 고정된 기의를 가지진 않는다.  마치 어머니의 욕망이 고정되어 있지 않듯이 말이다.  상상적 팔루스는 어머니가 상실하였거나 어머니가 욕망하는 것으로 판단되는 것으로 아기는 이 팔루스와 동일시를 추구하게 된다.  이것이 상상계가 가지는 기본적인 모습이다.  아이는 스스로를 팔루스라 여겨 자신이 어머니의 결여를 완전히 채워줄 수 있다고 생각하며, 자신이 어머니의 결여를 채워줄 수 있기에 어머니도 나를 사랑한다고 생각하게 된다.  즉 완전한 상상적 합일의 세계인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어머니가 가지고 있는 결여에 자신을 맞추는 것에 불과하다.  어머니의 결여가 정확히 무엇인지는 알 수 없지만 아이는 끊임없이 변화하는 그 결여에 맞추어 가야하는 존재에 불과하게 된다.  더욱이 어느 순간 다가오게 되는 아버지라는 존재는 자신이 과연 정말로 어머니의 팔루스가 맞는지에 대한 의문에 휩싸이게 한다. 


오이디푸스 컴플렉스의 두 번째 단계는 이러한 상상적 팔루스를 포기하고 상징적 팔루스로 나아가는 것이며 그것을 가능케 하는 것이 바로 아버지의 법[3]이다.  아버지는 아주 강력한 존재로서 어머니와의 상상적 합일의 관계를 그만두라고 명령하게 되며 이때 아이는 어머니가 욕망하는 팔루스가 자신이 아니라 아버지임을 깨닫게 된다.  더욱이 아버지가 보여주는 강력함과 거세에 대한 공포는 아이로 하여금 상상적 팔루스와의 동일시를 포기하도록 이끌어나간다.  거세 공포는 진짜 거세가 아닌 부재와 결여의 인식이 합쳐진 상징적 의미로서, 이때 아이는 자신이 결여된 존재라는 것을 깨닫게 되며 그와 동시에 어머니 역시 팔루스가 없는 결여된 존재임을 알게 된다.  즉 거세 공포는 환유관계를 통해 인접한 결여의 인식을 가져온다는 것이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 속에서 치환을 확인할 수 있다.  어머니의 욕망을 상징하는 기표가 아버지라는 기표로 치환되는 것이다.  이러한 치환을 통해서 아이는 상징계로 진입하게 되며 이때 팔루스를 대하는 태도에 변화가 생기게 된다.  상상적 팔루스에서 아이는 스스로 팔루스가 되고자 하지만 상징적 팔루스는 팔루스를 가지고자 하는 것으로 바뀌게 된다.  이러한 변화는 아버지가 속해있는 상징계에 상징적 팔루스가 있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며 따라서 아이는 팔루스를 찾아 상징계로 진입하게 된다.  상징계로 진입한 아이는 상징계의 구조 안에서 위치를 점하여 자리 잡게 되며 그 안에서 팔루스를 가지기 위해 타인의 욕망을 욕망하게 된다.  그것이 바로 위에서 살펴본 타인에 의해 이름 불려진다는 것으로 이때 인간은 주체로서 자리매김하게 된다.  하지만 이러한 주체로의 정립은 자연스럽게 또 다른 소외[4]를 불러 올 수밖에 없다.  아버지의 법을 받아들이고 어머니를 포기하는 과정은 결국 상징적 거세의 과정이며 그곳에서 박탈과 소외가 발생한다.  그리고 이때 주체는 초자아라는 것을 형성하게 되며 이를 통해 근친상간의 금지를 내면화하고 그것에 죄의식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오이디푸스의 이야기 속에서 다양한 형태의 정신질환이 도출된다.  대표적으로 신경증과 정신병으로 나누어 볼 수 있으며 신경증은 히스테리와 강박증 두 가지 형태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신경증은 원억압에 성공하여 상징계로 진출하는데는 성공하게 되지만 그 억압된 내용이 분출하려는 힘이 너무 강하고 초자아의 힘 즉 상징계의 금지가 약하게 다가올 때 폭발적으로 분출해버리는 증세로서, 이는 상징계를 거부하고 상상계로 지속적으로 돌아가려는 상태를 뜻하게 된다.  그 중 히스테리는 여성에게서 주로 발견이 되는데 거울단계의 실패가 주된 이유이다.  거울단계의 실패는 자연스럽게 이자구조 속에서 자신이 환영받지 못하고 사랑받지 못한 존재라는 느낌을 가지게 된다.  강박증은 이자구조 속에서 히스테리와 달리 엄청난 사랑을 받았다는 자신감에서 비롯한다.  이러한 자신감에서 비롯한 과잉된 나르시즘은 거세에 대한 공포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그 공포에서 벗어나기 위한 방법으로 강박증세가 나타난다고 본다.  정신병은 완전히 다른 형태로서 원억압 자체를 거부하고 상징구조 자체를 거부하여 완전한 상상의 세계에 함몰되어버린 상태를 말한다.  그곳은 완전한 나만의 세계이기에 어떠한 문제도 있을 수 없는 그런 세계이다.



타인의 욕망

라캉은 타자를 소타자와 대타자로 나누게 된다.  소타자는 상상계에서 등장하는 거울에 비친 이미지로서의 타자를 말하며 이는 상상계에 속해있는 타자이다.  대타자는 크게 두가지 의미를 가지는데 첫째는 상징계 그 자체를 의미하며 둘째는 아버지와 같은 상징계의 구현자이다.  대타자가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은 상상적 동일시에 대한 욕망과 욕구를 억압한 채 아버지의 법에 종속되는 것이다.  이에 라캉은 무의식은 대타자의 담론이라고 말하면서 다른 한편으론 인간의 욕망은 타인의 욕망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상징계에 들어선 인간은 타인에 의한 이름 불려짐 즉 타인의 인정에 의해서 주체로서 자리매김하게 된다.  아이가 상징계로 진입한 이유는 어머니(타인)가 욕망하는 팔루스가 상징계에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어머니의 인정을 얻기 위해서는 어머니가 욕망하는 것을 가져야 한다.  따라서 아이는 상징계 안에서 상징계가 만들어낸 욕망인 타인의 욕망을 욕망하도록 강요받게 된다.  타인이 욕망하는 것을 소유하여 타자가 나를 인정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욕망은 상징계 즉 언어 체계에 의해서 만들어지고 언어를 통해서 주체에게 강요되며 팔루스를 통해 끊임 없이 가지고자 노력하는 기표로 자리매김하게 된다.  따라서 욕망은 언어에 의해서 만들어지는 것에 다름이 없다. 


이러한 측면을 잘 보여주는 이야기가 포의 도둑맞은 소설이다.  간단하게 이야기를 언급해보자면 왕비는 왕이 봐서는 안 되는 편지를 읽게 되는데 그 순간 갑자기 왕이 방안으로 들어오게 된다.  이에 깜짝 놀란 왕비는 그 편지를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탁자 위에 놓게 되는데 그때 그 장면을 보게 된 장관은 아무도 몰래 그 편지를 바꿔치기 하여 훔치게 된다.  이에 왕비는 그 편지를 되찾고자 경찰을 동원하지만 경찰은 편지를 찾지 못한다.  왜냐하면 장관은 그 편지를 탁자위에 구겨진 종이쪽지처럼 아무렇게나 놓았기 때문이다.  편지를 찾지 못하게 되자 왕비는 탐정 뒤팽에게 사건을 맡겨 편지를 되찾게 된다. 


이 이야기에서 편지는 팔루스의 역할을 하게 되지만 이는 철저하게 기표에 불과하고 대응되는 기의는 없기에 우리는 그 편지의 내용을 끝까지 알 수는 없다.  이러한 측면은 이야기 속 곳곳에서 발견된다.  왕비는 그 편지의 내용을 왕에게 들켜서는 안되기에 말하지 않는다.  왕에게 들켜서는 안 된다는 것은 그 이면에 존재하는 상징계의 법 즉 금기가 존재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더욱이 이 편지는 많은 사람들의 손을 떠다니게 되는바 이를 통해 기표가 가지는 환유적 성격을 잘 보여주게 된다.  다른 한편으로 편지가 만들어낸 기표의 구조 안에서 각 주인공들이 점하게 되는 위치의 측면도 확인할 수 있다.  왕비는 절대로 그 편지 내용을 왕에게 들켜서는 안 된다.  왜냐면 들키게 된다면 왕비는 왕에게서 인정을 받을 수 없기 때문이다.  장관이 편지를 훔치는 주된 이유는 그 편지를 이용해 왕비를 자기 손안에 넣고 조종하고자 하는 욕망 때문이다.  이 말은 장관은 편지를 통해 왕비에게서 인정을 받고 싶다는 것에 다름이 아니다.  결국 편지라는 기표의 연쇄구조 안에서 각자는 타인의 인정을 얻고자 하는 욕망을 드러낸다.


더 쉬운 예를 들어보자면 아파트를 들 수 있겠다.  우리 사회에 흐르는 아파트에 대한 욕망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이다.  하지만 모든 사람들이 과연 정말로 아파트를 욕망하는가? 라고 했을 때는 의문이 들 수밖에 없다.  주택에서 살아가는 걸 더 선호하는 사람들도 분명히 많을 테니 말이다.  아파트를 선호하는 이유는 타인이 아파트를 욕망하기에 내가 그것을 가짐으로써 타인의 선망의 대상이 되는 것을 욕망하는 것에 다름이 없다.  아파트를 가진다는 것은 타인이 나를 인정해준다는 것이며 그 인정을 욕망하는 것이다.  이는 비단 아파트를 넘어 좋은 대학, 좋은 직장, 명품 등도 마찬가지이다.  이를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상징계는 주체에게 저러한 것들을 욕망하여 가지게 될때 타인이 너를 인정할 것이라고 강요한다는 것이며 이것이야 말로 타자의 욕망을 욕망하는 전형적인 예가 될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아파트나 명품을 가진다고 해서 완전한 충족을 얻지는 못한다.  충족을 얻지 못하기에 욕망은 끊임없이 다른 것으로 환유적으로 치환해 나간다.  따라서 욕망이란 무엇인지? 그리고 무엇 때문에 욕망은 충족될 수 없는지에 대해 다시금 의문이 던져지게 된다.



욕망의 주체와 결여

무의식은 언어구조와 같이 기표의 체계로서 이루어져있다.  기표의 체계는 / 아래로 흐르는 기의와 대응하는 의미를 가지지 않는다.  따라서 주체는 무언가를 욕망하지만 기표의 체계 위에서 그것을 찾기에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는 알 수 없다.  그래서 주체는 지속적으로 타자의 욕망을 받아들이면서 그것에 의문을 품게 된다.  서울대라는 타인의 욕망을 충족한다 한들 그것은 다시 좋은 직장이라는 다른 타인의 욕망으로 치환된다.  끊임없는 환유적 치환의 과정 속에서 수많은 타인의 욕망의 진짜 의미에 대해 의문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의문이 발생하는 지점에서 주체는 분열된 양상을 보여주게 된다.  즉 상징계에서 자리매김한채 아버지의 법에 따르는 기표로 드러나는 의식 주체/ 밑으로 흐르는 상징계에서 배제된 무의식의 주체이다.


라캉은 욕구, 요구, 욕망을 엄격하게 구분한다.  욕구는 아주 단순 형태의 식욕, 수면욕, 성욕 따위를 말하며, 요구는 욕구를 타인에게 전달하는 것을 말한다.  그리고 욕망은 요구 너머에 존재하는 충족될 수 없는 무엇을 말하며 결핍과 밀접한 관계를 가진다.  예를 들어 어린 아이가 계속 울고 있을 때 부모는 배가 고프다고 생각하여 밥을 주지만 그치지 않는다.  이에 부모는 대변을 봤나하고 확인하고 일부로 기저귀도 갈아주지만 그래도 그치지 않는다.  이는 아이가 자신의 요구를 명확하게 전달하지 못했기 때문에 생겨나는 현상이다.  즉 아이가 아무리 부모에게 요구하더라도 그 요구는 완전히 충족될 수 없기에 항상 결핍을 남기는 것이다.  이 결핍에서 생겨나는 것이 바로 욕망이다.  즉 욕망은 영원히 충족될 수 없는 결핍을 채우고자 하는 것이다.


보통 식욕, 성욕 따위의 자연적 욕구는 타인과는 아무 상관이 없는 것처럼 보인다.  배고프면 밥을 먹으면 되는 것이고 잠이 오면 자면 되는 것이라 생각하는 것이다.  하지만 모든 욕구들은 어느정도 타인과의 관계를 매개할 수 밖에 없다.  배가 고프다하여 무한정 먹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아무거나 먹을 수 있는 것이 아니기에 먼저 먹을 수 있는 것과 먹을 수 없는 것에 대한 구분이 선행된다.  즉 음식들 사이에 인간 위주의 경계를 그어 나에게 이로운 것과 해로운 것을 나누는 것이다.  더욱이 음식을 먹는 것 또한 무한히 가능한 것이 아니다.  음식은 무한재가 아니기에 타인과의 충돌이 일어나게 된다.  성욕의 문제로 넘어서면 타인과의 관계는 더욱 중요해진다.  타인의 허락 없이는 성관계 자체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자연적 욕구에는 어떤 외부적 대상의 정립을 필요로 한다.  단순하게는 자연적 욕구를 충족시킬 수 있는 음식물과 같은 대상의 정립에서, 그 대상과 갈등하게 되는 타인에 이르기까지 반드시 자신의 외부의 어떤 존재를 상정할 수 밖에 없다.  인간은 그 외부의 존재를 매개하여 자연적 욕구에서 사회적 욕구까지 만족을 얻으려 하게 되고 그 과정에서 인정 욕망이 발생하게 된다. 


주체는 상징계에 있다고 여겨지는 팔루스를 지속적으로 요구하게 된다.  하지만 그것은 결코 채워질 수 없는 영원한 결여로 남게 된다.  그것은 상징계 바깥에 있는 것으로 결여 자체가 상징계의 효과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결여의 인식을 통해 욕망이 형성된다.  주체는 끊임없이 욕망을 찾아 해매지만 기표의 연쇄사슬 위에서 그것을 찾으니 기의는 기표 아래에서 미끄러질 뿐이다.  이에 타자의 욕망을 소유하여 욕망을 충족해보지만 그것으로도 결여는 채워지지 않는다.  고급 아파트를 가진다 한들 그것을 왜 가져야 하는지? 에 대한 의문은 다시금 남기 마련인 것이다.  이에 인간은 끊임없는 결여를 채우기 위해 환유적 치환을 지속적으로 해나가게 된다.  좋은 직장을 얻어도 충족이 안 된다면 다시 고급 아파트로 그래도 충족이 안 되면 또 다른 타인의 욕망으로 치환해 가는 것이다. 


이를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상징계는 완전무결하지 않다는 것이다.  요구하는 순간 그 요구는 완벽히 만족이 안 되기에 다시 결여를 낳게 된다.  결여가 존재하기에 그것을 채우기 위해 다시 또 요구하게 된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이 바로 욕망이다.  따라서 주체는 욕망을 알 수 없다.  타자의 욕망을 욕망하라고 명하기에 그것을 가지기 위해 노력하지만 도대체 그 타자가 욕망하는 것이 무엇인가에 대한 의문만이 남게 된다.  이때 주체는 자신과 마찬가지로 타자 역시 결여되어 있음을 알게 된다.  타자 역시 결여되어있기에 타자의 욕망을 욕망해서는 그것을 채울 수가 없다.  도대체 무엇인지 알 수 없는 것이 타자의 욕망이며 그것에 대한 의문을 던질 수 있는 지점에서 주체는 타인의 욕망과 자신을 구별하여 분리된다.  주체는 이러한 소외와 분리의 과정을 지속적으로 반복하는 양상을 보여주게 되며 따라서 주체는 연속성을 가지지 못한 채 끊임없이 재형성된다. 



실재계

주체는 끊임없이 결여를 채우기 위해 욕망하지만 그것은 결코 채워지지 않는다.  그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에 라캉은 후기에 들어 실재의 문제에 천착해 들어간다.  앞서 살펴본 결여가 말해주는 것은 상징계가 완전하지 않다는 것이며 상징계로서 설명할 수 없는 상징계의 바깥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언어를 익혀 상징구조에 종속된다는 것은 일상적인 현실 그 자체가 상징화되었다는 것을 말해준다.  예컨대 우리는 언어를 배우는 순간 고양이라는 대상과 직접적으로 대면할 수 없게 된다.  언어를 익히면서 철저히 언어의 상징구조에 따라서 고양이라는 개념과 대면하게 되는 것이다.  마치 칸트의 형식과 현상처럼 말이다.  하지만 언어로 표현이 안 된다고 해서 실재가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실재는 상징계 이전에 존재하는 것이며, 상징화할 수 없는 것이다.  실재는 언제나 그대로 있다.  다만 인간이 언어구조에 의해 상징화되어 주체가 되었기에 언어체계로 포섭이 안 될 뿐이다.  이것의 대표적인 예가 바로 근친상간이다.  사회 구조는 반드시 일종의 금지를 가지게 된다.  사회구성원에게 하지 말아야할 것을 요구하는 것으로 인간이 주체가 되기 위해서 상상계의 합일적 세계에서 포기해야 하는 핵심적인 부분이 바로 근친상간의 금지인 것이다.  이렇듯 실재는 근친상간과 같이 사회 구조가 유지되기 위해서 배제되는 것들이다. 


우리는 이러한 실재를 가끔 경험을 통해서 조우하게 되며 그 중심에 서는 것이 바로 트라우마이다.  트라우마는 정신적 외상으로 도대체 어떻게 할 수 없는 충격적인 경험에서 비롯된다.  너무 어린 시절 목격하게 된 부모의 성관계나 충격적인 사고의 경험을 예로 들 수 있다.  트라우마는 실재와 조우하게 되는 순간으로 언어로서 상징화가 되지 않는 즉 언어로 표현이 잘 안되어 끊임없는 고통을 주게 되는 실재이다.  예컨대 너무나 사랑하던 연인이 눈앞에서 자살하는 크나큰 상처와 고통을 입은 사람이 있다고 해보자.  그 사건은 이 사람에게 엄청난 트라우마로 남아 유사한 상황만 오면 그 고통이 되살아날 것이다.  자신은 그 고통을 표현하여 어떻게 해서든 상징화 하여 극복하려 하겠지만 그 어떤 말로 설명을 하든 그 고통은 반드시 무언가를 남기게 된다.  이러한 트라우마가 하나의 증상으로 나타나게 되는 것은 앞에서 살펴본 고정점이 발생하였기 때문이다.  즉 상징계와 실재계 역시 고정점을 통해서 임시적으로 연결될 수 있으며 그때 확인할 수 있는 다양한 증상 중 대표적인 것이 트라우마이다.  라캉은 실재계에 있는 사회 구조에 의해 억압된 그것을 (, das Ding)이라 칭한다.  이는 상징계에서는 만날 수 없는 것으로 칸트의 물자체와 대응하는 것이다.  물은 원초적인 상실이자 근원적으로 금지되어있는 대상으로 언어의 지배를 받는 사회 구조에서는 결코 찾을 수 없는 것이기에 욕망이 향하는 곳은 결국 물이 될 수밖에 없다.  그리고 이러한 물 그 자체를 향한 욕망을 순수 욕망이라 칭하게 된다.



죽음 충동과 주이상스

프로이트의 쾌락원칙[5]은 쾌락의 양은 최대한 늘리고 불쾌의 양은 줄이려는 것으로 사회구조가 제시하는 금기의 한계점으로 역할을 하게 된다.  이와 대비되는 것이 현실원칙으로 쾌락에 대한 지나친 집착을 자제하고 쾌락이 즉각적으로 만족되지 않더라도 참고 감내하여 현실에 적응해야 하는 것을 말한다.  쾌락원칙은 쾌락을 추구하되 불쾌는 피하려고 하는 특징 때문에 사회구조가 제시하는 금기를 넘어설 수가 없다.  즉 실재를 향해 나아갈 수가 없다.  만약 실재를 조우하고자 한다면 자연스럽게 사회의 금기를 넘어서야하며 그것은 필연적으로 불쾌를 가져올 수밖에 없다.  따라서 쾌락원칙은 사회구조가 허용한 최대한의 쾌락이 될 것이다.  상징계의 금기를 어긴다는 것은 일련의 처벌이 따를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실재를 끊임없이 갈망하는 욕망은 쾌락원칙과 대치되는 양상을 보여줄 수밖에 없다. 


라캉에 따르면 주체는 끊임없이 죽음 충동에 이끌리게 된다.  이때의 죽음은 진짜 죽음 즉 자살 같은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상징계의 끝자락을 의미한다.  따라서 죽음 충동은 쾌락원칙을 뛰어넘고자 하는 것이며 상징계가 금지한 실재에 이끌리는 것이다.  사회 구조가 금지를 설정하고 그것을 강요하게 되면 그것을 원인으로 하여 욕망이 싹트게 된다.  즉 금지하기에 욕망이 생기는 것이다.  끊임없이 타자의 욕망을 충족해보아도 결여는 남게 된다.  서울대에 가더라도 충족되지 않는 결여는 남게 되며 좋은 직장, 멋진 결혼 생활, 명품을 얻더라도 결여는 남게 된다.  따라서 주체는 사회가 금지하는 그곳에 결여를 채워줄 수 있는 더 큰 절대적인 쾌락을 주는 것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게 되며 이를 두고 라캉은 주이상스(jouissance)라 칭한다.  주이상스는 단순하게는 오르가즘을 의미하지만 향유, 희열 등으로 번역되며, 주이상스는 쾌락원칙을 넘어서는 것이기에 고통을 동반하는 쾌락이라는 의미도 가지게 된다.  쾌락원칙을 넘어서는 순간 사회구조는 금지를 넘어선 주체에게 벌을 가할 것이기 때문이다.  결국 죽음충동은 상징계 내에서의 삶에 대한 죽음의 선언에 다름이 없으며 주이상스는 물(, das Ding)에 대한 향유에 다름이 없다.


라캉이 실재계를 통해 주장하는 핵심은 우리는 더 이상 사회 구조가 요구하는 법과 규범, 문화 질서에 종속된 채 타인의 욕망만을 욕망하면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하면 실재를 만나 그 속에서 주이상스를 획득할 수 있는가에 놓인다.  상상계와 상징계 그리고 실재계는 설명처럼 딱 나누어지는 것이 아니다.  한덩어리로 뭉그트려진채 우리의 삶과 함께하는 요소이다.  이에 라캉은 저 속에서 실재를 찾으라고 말하며 그것이 욕망의 윤리이다.  라캉에 의하면 오늘날의 도덕이 가지는 위기는 욕망의 윤리를 통해서 해결할 수 있으며, 도덕은 전통적 가치를 과감하게 배제하고 과거 전통적 가치가 배제하였던 실재를 향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것을 가능하게 해주는 것이 승화이다.  승화(sublimation)는 일상적인 대상에 물(, das Ding )의 지위를 부여하는 것이다.  주체는 결코 물 그 자체를 만날 수 없다.  실재계는 애시 당초 접근이 안 되며 더욱이 그곳에 있는 물은 무엇인지조차 모르는 것으로 그러한 것과 조우한다는 것은 가능하지가 않다.  따라서 환상 속에서 승화를 통해 일상적인 대상에 물의 지위를 부여하여 실재를 향유하게 된다. 


라캉이 얘기하는 승화의 대표적인 예가 중세의 궁정풍 사랑이야기이다.  이는 높은 귀족의 부인을 사랑하는 기사의 이야기로 기사가 사랑하는 여인은 이미 결혼을 한 여자이고 높은 지체를 가지고 있는 대상이다.  따라서 기사는 그녀를 사랑하지만 그것은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이자 이루어져서도 안 되는 사랑의 양상을 보여준다.  여기서 귀족 부인은 평범한 대상으로 물의 지위를 부여받은 존재이다.  그렇기에 귀족 부인은 아주 이상적이고 고귀한 양상을 보여주게 되며 그녀를 향한 금지된 욕망은 그녀를 더욱 더 고귀한 양상으로 이끌어나가게 된다.  그리고 이러한 슬프고 아름다운 사랑은 시인에 의해 노래 불려진다.  라캉에 따르면 이때 불려지는 시인의 노래 즉 예술도 승화의 전형적인 예로서 작용한다.  예술은 상징계에 포섭되지 않는 실재를 표현할 수 있는 창조활동이자 가능성이기 때문이다.  결국 승화는 상징계에 완벽하게 종속된 주체가 실재와 만날 수 있는 가능성이며 결코 채울 수 없는 결여를 환상을 통해 충족시키는 것이다.


흔히 실재는 뭔가 어둡고 기괴하며 이해할 수 없는 것으로 그려지는 경우가 많다.  물론 실재는 지속적으로 말했듯 알 수 없는 것은 분명하지만 그것이 꼭 부정적인 늬앙스로 그려질 이유는 없다.  실재는 상징계에 포섭될 수 없는 곳으로 언어로 표현될 수 없는 논리와 상식이 무너지는 곳이다.  우리는 일어날 수 없는 일이 발생하는 것을 흔하게 경험하곤 한다.  그럴때 설명할 수 없는 일이 일어났다고 표현하곤 하는데 그 또한 상징계와 실재계 사이에 고정점이 발생한 순간이라고 볼 수 있다.  도대체 이해할 수 없고 설명할 수도 없는 어마어마한 에너지가 현실에서 나타나는 순간이 바로 주이상스가 긍정적인 역할을 하는 순간이다.  만약 인간의 삶이 이성과 합리성의 지배만을 받는 상징계내에서만 이루어진다면 답답하기 이를때가 없을 것이다.  일상적이고 반복되는 삶 속에서 우리는 흔히 일탈을 꿈꾸곤 한다.  저곳에 가면 나의 결여를 채워줄 수 있고 뭔가가 있을거라는 생각 이것은 우리에게 여유를 던져준다.  상상계와 상징계 그리고 실재계는 설명처럼 딱 나누어지는 것은 아니다.  한덩어리로 뭉그트려진채 우리의 삶을 지배하는 요소이다. 



[1] 거울은 실제 거울이 아닌 비유적인 표현으로 거울상으로서의 어머니의 존재를 상정하게 된다아이는 어머니의 행동을 관찰하여 거울과 같은 이미지를 생성하여 일체감을 느끼게 된다그리고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거울신경세포이다이 세포의 존재를 통해 인간이 타인의 감정에 동화되거나 타인의 행동을 따라하는 것을 설명하게 된다.

[2] 팔루스는 실제의 남성 성기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 욕망의 대상이자 결핍을 채워주는 대상물로서의 상징적 표현이다.

[3] 아버지는 상징적인 의미이며 법은 상징계를 의미한다.

[4] 2차 소외

[5] 정신분석학의 근본 개념 - 프로이트 전집 11, 열린책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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