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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호인, 당신의 소중한 삶을 지켜드립니다. 본문

영 화/한국 영화

변호인, 당신의 소중한 삶을 지켜드립니다.

유쾌한 인문학 2014. 1. 24. 0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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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호인, 당신의 소중한 삶을 지켜드립니다.

1980년대 부산.  상업 고등학교를 졸업한 송우석(송강호 분)은 독학으로 사법고시를 합격한 이후 판사까지 지낸 독보적 인물이다.  대전지법에서 판사를 하다 돈이나 많이 벌까 해서 부산으로 내려와 변호사를 개업한다.  하지만 그는 돈도 빽도 없는 고졸 변호사에 불과하다.  비빌 곳이 없던 송우석은 아무도 쳐다보지 않던 부동산 등기 업무에 손을 댄다.  자신을 알리기 위해 찌라시 명함을 만들어 길거리에서 돌리는 등 세간의 비웃음을 무시한채 최선을 다한 그는 결국 많은 돈을 번 인기 변호사가 된다.  그때 가난한 고시생 시절 돈이 없어 밥만 먹고 도망갔던 식당을 찾아가 주인 아줌마(김영애 분)에게 사죄하고 단골이 된다.  그러던 어느날 주인 아줌마의 아들 진우(임시완 분)가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경찰에 납치되듯 잡혀가게 되고 불법 고문을 당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돈이나 많이 벌면 좋을거라 생각했던 속물 변호사는 자신이 알고 있던 상식이 무너지는 현장을 보자 극도로 분노하여 사건의 변호를 맡는다.

주인공 송우석은 자살로 생을 마감한 노무현 전대통령을 모델로 삼는다.  실제로 이 작품 속의 소소한 사건들은 노무현의 삶에서 그대로 가져온 것이다.  밥을 먹다 도망간 사건, 막노동하며 공부한 일들, 호화요트(?)를 몰던 취미까지.  모든 것이 노무현의 삶에 얽힌 이야기들이다.  그리고 이 작품의 배경이 되는 부림 사건은 노무현이 인권변호사로 탈바꿈하게 된 계기이다.  그래서일까?  개인적으로 이 작품이 만들어진다는 소식을 들었을때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이런걸 만들어도 괜찮은 걸까?”  이런 의문은 나만의 생각이 아니었나보다.  끊임없이 상업영화임을 강조하고 노무현과 거리를 두려는 제작자의 말에서 무의식적인 외압의 두려움을 느낄 수 있었다.  그런데 다른 한편으로 이 의문이 머리 속에 떠오른 순간 갑자기 너무 우스워졌다.  21세기가 시작된지도 13년이 지난 지금 이런 생각이 드는게 너무 웃긴 것이다.

하지만 이 작품은 현 정부를 비판하는 영화가 아니다.  그냥 실제로 있었던 과거의 사건과 사람에 대한 이야기이다.  게다가 영화 자체는 대중의 감정에 호소하는 휴머니즘 법정 영화의 모습을 띈다.  까놓고 말해 저런 영화는 흔하디 흔한 것이다.  그런데 왜 이런 막연한 생각들이 떠오른 것일까?  혹자는 현정부의 야만성을 말하지만 그것보다는 현시대에 만연하고 있는 비상식에서 찾을 수 있다.  난 분명히 최선을 다해서 열심히 살아가고 있는데 뭐하나 되는 일도 없고 항상 불안에 떨면서 살아야하는 현 상황이 영화적 카타르시스와 만나 최고의 효과를 이끌어낸 것이다.  결국 이 작품의 흥행 요인은 그 무엇도 아닌, 상식이 통하지 않는 시대 한복판에서, 너무나도 당연한 상식이 무너지는 재판을 바라보며, 나의 소중한 삶을 대변해 줄 수 있는 무엇에 대한 갈망으로 볼 수 있다.

이는 새누리당 원희룡 의원의 말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그는 페이스북에서 "국가가 국민에게 부당한 폭력으로 군림할때, 변호인 같은 사람들의 용기와 희생으로 민주화 시대로 넘어설 수 있었다"면서 "공안의 과잉과 정치의 마비는 옛날이나 지금이나 국민과 권력의 대결구도를 가져온다는 역사의 경험을 늘 성찰해야 한다"고 말하였다.  사실 현재 한국 사회는 여전히 공안정국이 형성된채 종북몰이가 만연하는, 심지어 헌법이 보장한 노동권마저도 부정되고 있는 비상식의 시대 한복판에 서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한가지 질문을 던져볼 수 있다.  원의원이 말하는 공안의 과잉이라는 현상은 왜 생기는 것이며 국민과 권력의 대결구도라는 것은 도대체 무엇을 의미하는지, 그리고 왜 현시대는 비상식의 시대가 되어버린 것인지에 대해서 말이다.

정치상의 적이 도덕적으로 악할 필요는 없으며, 미학적으로 추할 필요도 없다. 경제적인 경쟁자로서 등장해야 하는 것도 아니다.  적이란 바로 타인, 이방인이며, 그 본질은 특히 강한 의미에서 낯설고 이질적인 존재라는 것으로 족하다.  따라서 극단적인 경우에는 적과의 충돌이 일어날 수 있으며, 이 충돌은 미리 규정된 일반적 규정에 의해서도, 또한국외적이고따라서공정한3자의 판결에 의해서도 해결될 수 없다.  - 정치적인 것의 개념

독일의 헌법학자 칼 슈미트는 비상사태(예외상태)를 선언할 수 있는 초법적 권력을 긍정하는 법학자로 유명하다.  그에 의하면 도덕적인 것의 최종적인 구별이 선과 악이며, 미적인 것에서는 아름다움과 추함, 경제적인 것에서는 이()와 해()이듯, 정치적인 것은 어느 무엇도 아닌 적과 동지의 구별에 기반하고 있다.  그리고 종교, 도덕, 경제 등 다양한 영역들에서 벌어지는 충돌은 상황에 따라서 언제든 정치적인 것으로 바뀔 가능성 앞에 놓여있다.  이게 도대체 무슨 의미일까?  우리는 다양한 영역에서 수많은 사람들과 충돌을 일으키며 살아간다.  종교적인 측면, 경제적인 측면, 정치적인 측면 등은 각각 선과 악, 이익과 불이익, 진보와 보수 따위의 범주로 구별이 이루어지기에, 그 사이에서 충돌이 발생하는 것이다.  그런데 종교적, 정치적 충돌 따위가 극도로 심화될 경우에는 우리편과 니편이라는 동지와 적의 구분으로 나아갈 가능성이 대단히 높다.  예컨대 진보와 보수의 충돌이 극대화되면 우리편은 동지로 남에 편은 적으로 상정되는 것이다.  이러한 대립이 극도로 심하게 격화되버리면 국가 내부에 심각한 분열을 일으킬 수 밖에 없다. 

바로 이지점에서 비상사태를 선언할 수 있는 초법적 권력이 중요해진다.  즉 적과 동지만이 존재하는 극단적인 이원론은 국가의 분열을 불러올 가능성이 대단히 높기에, 국가권력은 임의적으로 국가 내부의 모든 사람들을 동지로 만들어야할 필요성이 대두된다.  이를 위해 활용되는 것이 바로 외부의 적이다.  재미있는 것은 외부의 적이 존재한다면 희안하게도 내부의 모든 대립들은 일시에 사라진채 동지로 바뀐다는 점이다.  만약 외부의 적을 앞에 두고 이것은 국가권력의 독재이자 폭력이 아니냐?”라고 말한다면 그 사람은 외부의 적과 내통한 사람이 되어 처단당하게 된다.  따라서 사람들은 자의이던 타의이던 동지로 바뀌어야만 하는 것이다. 

칼 슈미트의 견해는 현 시대에도 상당히 큰 의미를 가진다.  오늘날 한국 사회에서 벌어지는 수많은 대립상은 언제든지 적과 동지라는 형태로 그 모습이 바뀔 수 있는 것이 분명한 현실이다.  특히 문제가 되는 것은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대립이다.  급격히 늘어나는 비정규직자들은 심각한 박탈감에 의해 같은 입장의 사람들을 동지로 그외의 자들을 적으로 바꾸어 대립할 가능성이 대단히 높다.  이때 국가권력은 그것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 외부의 적을 활용한다.  따라서 우리 사회에서 북한의 존재와 공안정국의 가치는 여전히 크다고 할 수 있다.  그 어떤 대립상도 해결할 수 있는 확실한 대안이기 때문이다.  결국 부림사건의 본질은 멀쩡한 사람을 간첩으로 몰아세운채, 그 어떤 반대의 의견도 말해서는 안되는, 내부의 획일화를 도모하기 위한 수단이였던 셈이다.

이러한 적과 동지의 대립은 송우석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녹록치 않았던 자신의 세상을 버텨내고 이겨낸 그에게 서울대 데모꾼들은 경멸의 대상일 수 밖에 없을 것이다.  공부하기 싫어서 데모나 한다는 그의 발언들은, 내가 속할 수 없었던 그리고 나를 경멸하였던 그들을 적으로 상정한채 적개심을 드러낸다.  하지만 송우석의 친구인 기자 윤택(이성민 분)에게는 그런 우석이야 말로 정말로 경멸스러운 사람에 불과하다.  자신의 열등감을 해소하기 위해 눈과 귀를 닫은채 성공을 자축하고 거들먹거리는 그가 못마땅한 것이다.  하지만 송우석과 이윤택의 대립을 두고 누가 옳다 그르다고 말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니다.  시대가 수상하다하여 모든 사람들이 바깥으로 나가 바리게이트를 치고 짱돌을 들어야 한다고 강요한다면 그것이야 말로 또 다른 폭력에 불과하다.  결국 두 친구의 대립과 짱돌론은 가치관의 차이가 적과 동지라는 형태로 바뀐 것에 불과하다.

적과 동지의 대립은 많은 부분에 있어서 갈등만을 불러 올 수 밖에 없으며 그 안에서 고통받는 것은 어느 누구도 아닌 바로 나와 당신이다.  적과 동지로 분열된 정치적인 것 안에서 전셋값, 취업난 따위로 고통받고 있는 우리의 삶은 외면받고 있다.  모든 정치인들이 민생을 외치지만 그들에게 민생은 그다지 중요한 요소가 아니다.  오직 파괴해야할 적만이 그들의 유일한 관심사인 것이다.  그러다보니 자연스럽게 우리나라는 여전히 독재가 필요하다라는 극단적인 말까지 나오기에 이른다.  이러한 상황들을 보고 있자면 칼 슈미트의 혜안이 그저 놀라울 뿐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언제까지 적과 동지로 분열된채 갈등해야하는 것일까?  적과 동지라는 이 범주를 없애버릴 수 있는 방법은 없는 것일까?  이 질문은 우석과 윤택이 어떻게 하면 화해할 수 있을지 그리고 어떻게 하면 국가와 국민이 대립하지 않을 수 있을지에 대한 질문으로 이어진다. 

사실 이문제의 결론은 대단히 간단한 것일지도 모른다.  적과 동지의 이항 대립을 없앨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은 소통을 통하여 서로를 이해하는 것이다.  혹자는 아직도 케케묵은 소통을 논하느냐고 반문할 수도 있지만 이 문제가 해결되지 않고선 그 어떤 대안도 제대로 작동할 수가 없다.  문제는 왜 소통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는지 그리고 어떻게 해야 진정한 의미의 소통이 가능한지이다.  어쩌면 소통이라는 것은 의심에서 시작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호기심을 가진채 그건 뭐냐고 물을 수 있는 자유를 허용하였을때 거기에서 소통이 시작되는 것이다.  예컨대 어린 아이가 무언가를 물었을때 쓸데 없는거 묻지 말고 가서 공부나 하라고 윽박지른다면 거기에서 소통은 그 즉시 멈춰버린다.  의문은 해결되지 않은채 적개심만 남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아이를 인정하고 질문에 응답해준다면 대화는 이어지게 되고 그 안에서 소통이 시작될 수 있다.

의사소통과 관련하여 가장 눈여겨볼 철학자는 바로 위르겐 하버마스이다.  진정한 의미에서 의사소통이란 어떤 의미를 가지는 것일까?  단순하게 내가 말을 하면 상대방은 내 말을 듣기만 하면 그걸로 끝나는 것일까?  사실 이런 식의 의사소통은 굉장히 일방적인 관계로 나타날 수 밖에 없다.  누군가는 말하고 누군가는 그 말에 무조건 따라야만 하기 때문이다.  도리어 진정한 의미의 의사소통은 사람들 사이의 직접적인 상호이해로 볼 수 있다.  즉 누군가의 말을 듣는 사람은 언제든지 의문을 가질 수 있으며, 질문을 통해 상대방의 대답을 요구할 수 있을때 서로간의 이해에 도달할 수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그 어떤 의문도 용납하지 않는 일방적인 의사소통은 타인에 대한 강요에 불과하며 이는 또 다른 적과 동지를 낳을 수 밖에 없다.  하버마스는 직접적인 상호이해를 위해 의사소통적 합리성이라는 개념을 제시한다.  나홀로 세상 만사를 다 옳게 판단할 수 있는 생각에서 벗어나, 우리를 중심에 놓은채 서로간에 대화와 인정을 통해 상호이해가 이루어질때 성립하는 것이 바로 의사소통적 합리성이다.

서양 정치의 근본적인 대당 범주는 동지-적이 아니라 벌거벗은 생명-정치적 존재, 조에-비오스, 배제-포함이라는 범주쌍이다.  정치가 존재하는 것은 인간이 언어를 통해 자신에게서 벌거벗은 생명을 분리해내며, 그것을 자신과 대립시키는 동시에 그것과의 포함적 배제 관계를 유지하는 생명체이기 때문이다.”[1]

하지만 이것은 결코 쉽게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 이유는 설국 열차에서 살펴본 아감벤의 호모 사케르 이론에서 찾을 수 있다.  위의 글에서 알 수 있듯 아감벤은 정치적인 것을 적과 동지로 구별하지 않는다.  그는 도리어 벌거벗은 생명과 정치적 존재를 통해 정치적인 것을 정의하려고 한다.  여기서 벌거벗은 생명(조에)이란 정치 권력에 의해서 보호받지 못하는 자를 의미하며, 정치적 존재(비오스)는 권력에 의해 보호를 받는 자들을 말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정치적 존재는 언제든지 벌거벗은 생명이 될 수 있다는 가능성이다.  그 가능성은 막연한 공포심을 불러일으킨다.  안그래도 불안한 내 삶이 조에로 전락해버린다면 더 힘들고 고단해질 것은 자명한 사실이다.  이에 사람들은 스스로를 감시하고 훈육하여 비오스로 남기 위해 애쓰게 된다. 

부림 사건과 같은 사법 폭력이 묵인될 수 있었던 이유 역시 여기에서 찾을 수 있다.  진우를 비롯한 수많은 억울한 사람들이 잡혀가자 김상필 변호사(정원준 분)는 그들을 변호해줄 변호사를 찾는데 주력한다.  하지만 어느 누구도 그 변호를 맡으려 하지 않는다.  한편 송우석의 사무장인 박동호(오달수 분) 역시 이 모든 사실을 알고 있지만 송우석에게 말하지 않는다.  그 이유는 공안사건에 함부로 발을들였다간 조에가 되버릴 가능성이 다분하기 때문이다.  진우를 외면해버린다면 송우석과 박동호는 거대한 건설회사의 전속 변호사가 되어 안정적인 삶을 유지하는 것이 가능하다.  하지만 진우의 고문 사실을 알게된 송우석은 그의 변호를 맡게 된다.  논리적 비약에 가까운 어떤 변화가 일어난 것이다.

“국민들의 적극적인 정치 참여와 인터넷의 발달로 대의정치가 도전을 받고 있습니다.  이에 대해서도 정부와 국회는 능동적으로 대처할 필요가 있습니다.”[2]

이명박 전 대통령의 2008 7 12일 국회 시정연설을 통해서 알 수 있는 것은 직접민주주의에 대한 두려움이다.  사실 대통령의 연설문이라는 것이 독자적으로 만들어질 수 없음을 생각해본다면 당시 정부요인들 전반에 이러한 생각이 만연했음을 알 수 있다.  즉 정치는 정치 전문가에게, 경제는 경제전문가에게, 그 무엇의 전문가도 아닌 국민은 그냥 잠자코 있어야 하는 것이 당시 정부의 생각인 것이다.  사실 대의제가 가지고 있는 가장 큰 문제점은 바로 주권자의 정치적 무관심과 대표들이 행사하는 권력에 대항할 수 없다는 점이다.  이미 모든 권력을 위임해버렸기에 더이상 어떻게 할 수 없는 한계에 놓이는 것이다.  그리고 권력을 가진 사람들은 적과 동지의 범주를 활용하여 주권자들을 훈육하고 길들이려고 노력하게 된다.

근대 민주주의는 처음부터 조에의 권리 주장과 해방으로서 등장했으며, 끊임없이 생명 그자체를 하나의 삶의 방식으로 변형시키려 한다는 즉 조에의 비오스를 찾아내려고 한다. ...  근대 민주주의는 벌거벗은 생명에서 인간의 자유와 행복을 실현하려고 한다.”[3]

하지만 바로 이 지점에서 극복의 가능성 또한 찾을 수 있다.  훈육되지 않은 주체의 회복과 대의제 민주주의의 극복을 통해서 적과 동지의 범주를 없앨 수 있는 것이다.  즉 모든 권력을 일방적으로 넘겨버리지 않은채 직접민주주의를 실현하고, 조에가 될 것만 같은 두려움에서 벗어나 우리를 중심에 놓은채 상호이해로 나아간다면, 적과 동지라는 정치적 범주에서 벗어나는 것이 가능해진다.  즉 벌거벗은 생명이야 말로 내 몸에 박힌 권력에서 벗어나, 진정한 정치적 주체로 나아갈 수 있는 하나의 가능성인 것이다.



[1] 조르조 아감벤, 호모 사케르, 박진우 옮김, 새물결, 2008, p45

[2] 이명박 전 대통령의 2008 7 12일 국회 시정연설

[3] 위의 책, p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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