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이트와 라캉의 무의식

무의식을 발견한 프로이트의 업적이 철학에 주는 영향은 그 어떤 말로도 표현할 수 없을 만큼 거대하다.  특히 근대적 주체라는 주제와 관련해서 무의식의 발견은 가히 혁명이라 칭할 수 있을만큼의 영향을 끼치게 된다.  근대적 주체는 자기투명성을 가지는 주체이다.  자기투명성이란 내가 내자신을 완벽하게 통제하고 완전한 자율성을 가진채 그 어떤 것도 나의 사유와 인식을 방해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모든 인간은 독립되어 있고 고립되어 있는 주체성을 가지며 모든 것은 나의 책임아래에 있고 나의 통제 아래에 이루어진다.  하지만 이러한 자아 중심의 동일성 주체는 무의식이라는 이름 하에 철저히 무너진다.  내가 생각하지 않은 곳에서 존재하고 나의 생각이 내가 무엇인지 모르는 곳에서 의도치 않게 영향을 받는다면 자기투명성을 가지는 단일한 주체는 무너지게 된다.  더욱이 프로이트가 발견한 초자아는 내 안에 존재하는 금기의 기준 즉 타자에 대한 생각을 제시한다.  나의 내면에 내가 아닌 다른 타자의 생각과 기준이 존재한다는 사고방식은 더이상 주체 중심의 철학을 불가능하게 만든다.  즉 프로이트의 등장으로 인해 근대 주체철학이 무너지게 되는 것이다.

 

(1) 프로이트와 무의식

정신분석은 프로이트의 히스테리 연구[1]에서부터 시작된다.  당시 히스테리에 대한 인식은 굉장히 부정적이었다.  히스테리는 여성에게서만 확인이 되는 질환이라거나 꾀병이라고 바라보는 경우가 많았으며 이는 여성에 대한 비하적인 태도에 다름이 없다.  히스테리의 어원을 추적해보더라도 이러한 태도는 어렵지 않게 확인할 수 있다.  히스테리의 어원은 자궁을 뜻하는 hysteron으로서 히스테리는 자궁이 방황하는데서 비롯되는 여성만의 질병으로 바라보게 된다.  자궁의 방황이라는 말도 흥미로운데 자궁이 운래 있어야 할 위치에서 벗어나 신체의 다른 곳을 방황한다는 의미로서 이는 여성의 방황으로 이어져 가정적이지 못한 여자, 품위가 없는 여자, 방종한 여자 따위가 히스테리를 앓는다는 식으로 나아가게 된다.  하지만 프로이트는 이러한 기존의 생각 예컨대 히스테리는 여성의 신체와 관련된 병이라는 생각과 불성실하고 타락한 여성들과 관련된 병이라는 사회문화적인 설명과 거리를 둔채, 정신적인 문제에서 그 원인을 찾게 된다.  즉 히스테리의 원인을 유아기의 어떤 경험과 기억에서 찾는 것이다.  프로이트에 의하면 사람은 과거에 발생한 어떤 사건을 통해서 외상(트라우마)을 가지게 된다.  보통 그러한 사건은 고통스러운 경험인 경우가 대부분이기에 그것은 억압된다.  하지만 기억은 억압될지언정 그 순간의 감정은 남게 되고 그것이 히스테리의 징후 예컨대 마비, 두통, 몽유병, 실어증, 경련 따위로 나타나게 된다.  즉 억압된 것은 의식을 검열을 피해 다양한 증상으로 교묘히 드러나는 것이다.

프로이트가 활동하던 19세기는 여성들에게 있어 굉장히 고통스러운 시대였다.  근대를 맞이하여 인간 중심적 주체관이 성립되었지만 이는 철저하게 남성 위주의 주체관에 불과하다.  여성은 여전히 남성에게 종속된 일종의 소유물로서의 지위를 점하게 되며 당대 여성에게 요구되는 것은 가정에 충실한 현모양처로서의 모습이다.  하지만 점점 발전해나가는 시대상과 이성적 주체에 대한 믿음은 여성에게도 싹트게 되고, 그로 인해 여성들은 적극적으로 사회적 활동을 하고 싶어하는 욕망을 가지게 된다.  하지만 여전히 사회는 보수적이었기에 여성들에게 기회는 주어지지 않는다.  이 괴리가 바로 당대 여성들의 히스테리의 주된 원인으로 작용한다.  즉 현실과 이상의 모순이 트라우마로 작동하는 것이다.  히스테리를 치료하기 위해서는 억압된 감정상태를 풀어내는 것이 중요하다.  정동(精動)을 풀어내는 것이 중요해진다.  정동이란 트라우마를 일으키는 기억에 얽혀있는 감정의 고착 상태를 말하는 것으로 정동이 제대로 소산되지 않으면 히스테리적 신체 증상으로 나타나게 된다.  당시 프로이트의 동료 의사였던 브로이어는 정동을 풀어내기 위해 말이나 행동을 통해 풀어내는 방법을 취하게 된다.  즉 정동의 원인을 알아내어 그것을 환자에게 말해주어 해결을 하는 방식이다.  이것을 두고 카타르시스 치료법이라 칭한다.  이때만 하더라도 최면에 의존하는 양상을 많이 보여주게 되는데 프로이트는 최면이 억압된 기억을 확인하는데 좋은 방법이 아니라고 판단하여 자유연상법을 이용하게 된다.  자유연상은 환자가 머리속에 떠오르는 다양한 심상이나 단어 또는 생각을 자유롭게 말해 그것을 통해 기억을 해석하는 방법론이다.

프로이트가 히스테리 연구를 통해 알아낸 것은 히스테리 환자의 신체적 증상은 억압된 기억과 그것에얽힌 정동과 깊은 관련이 있다는 점이다.  히스테리 환장의 증상들은 무의식과 연관하여 해석할때 의미를 가지며 이러한 무의식은 인간의 의식과는 별개의 독자적인 무엇으로 보인다.  결국 프로이트는 히스테리 연구를 통해 무의식을 발견하게 된 것이다.  인간의 무의식은 언제나 회귀하여 의식을 뒤흔든다.  그리고 이렇듯 흔들리는 의식은 히스테리라는 신체적 증상 뿐만 아니라 꿈을 통해서도 확인이 가능해진다. 

오이디푸스 컴플렉스 - 꿈의 해석, 성에 관한 세편의 해석

프로이트의 정신분석 연구에서 획기적인 전환점이 되는 것은 바로 꿈의 해석[2]의 발간이다.  히스테리 연구를 통하여 무의식을 발견한 프로이트는 이러한 무의식의 징후가 히스테리 환자를 넘어서 일상적인 생활에서도 확인할 수 있는 것을 깨닫게 된다.  예를 들어 일상 생활에서 행하는 농담이나 말실수, 꿈 등을 통해서 무의식의 징후를 확인할 수 있으며 그 중심에 서는 것이 바로 꿈이다.  꿈은 인간이라면 누구나 행하는 것이기에 꿈을 해석하여 무의식을 확인할 수 있다면 무의식은 히스테리 환자에게서만 발견되는 것이 아닌 인간이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는 보편적인 것이 된다.  프로이트는 꿈을 무의식에 억압된 내용들을 드러내는 하나의 수단으로 바라본다.  꿈은 잠재적인 꿈의 사고와 그것이 외현된 것인 꿈의 내용으로 나누어 볼 수 있으며, 잠재적인 꿈의 사고가 외현될때 꿈 작업이라는 과정을 거치게 된다.  즉 잠재적인 꿈의 사고를 꿈 작업을 통해 번역하여 현시화된 것이 꿈의 내용이 된다.  꿈의 사고는 있는 그대로 드러나기보다는 꿈 작업을 통해 변형시켜 외현된다.  꿈 작업은 크게 보아 압축[3]과 전치[4]로 나누어 볼 수 있으며, 꿈 작업을 통해서 잠재적인 꿈의 사고는 상징과 이미지로 변화된다.  이를 상징적 표상화라 말하며 이는 다시 이차적 정교화의 과정을 거쳐야 한다.  이차적 정교화의 과정이란 상징과 이미지로 변환시킨 것들을 하나의 이야기로서 엮어내는 것을 말한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꿈은 재해석되어야 하는 무엇이라는 것이다.

꿈을 통해 무의식에 보편성을 부여하기 위해서 동원되는 것이 바로 오이디푸스 컴플렉스이다.  오이디푸스 컴플렉스는 오이디푸스 신화에서 따온 것으로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지를 소유하고 싶다는 욕망을 지칭한다.  프로이트는 이러한 욕망을 문명화 과정과 동일하게 바라본다.  문명은 인간으로 하여금 해야할 것과 하지 말아야 할 것을 엄격히 구분하여 제시한다.  이를 통해 인간의 본능적인 욕구들을 적절히 길들여 제어하게 되고 이를 통해 원할한 사회생활이 가능해진다.  하지만 문명화는 자연스럽게 욕망의 억압을 가져올 밖에 없으며 이러한 과정은 오이디푸스 컴플렉스의 과정과 동일하다.[5]  어머니를 가지고 싶은 욕망은 아버지의 법을 수용함으로써 금지되지만 인간은 언제나 금지된 욕망을 바라게 된다.  이에 인간은 억압된 것을 다양한 형태의 증상으로 드러내게 된다.  따라서 문명화된 인간은 다양한 형태의 신경증이나 더 나아가 정신병 따위를 필연적으로 가질 수 밖에 없으며, 그것은 신체의 질병 또는 유전적인 문제에서 기인하는 것이 아니라 무의식에서 기인하는 것이다.

프로이트는 인간이 가지는 성충동의 에너지를 리비도[6]라고 칭한다.  리비도는 본능이나 사랑 따위의 감정을 일으키는 근원적 에너지를 말하며, 이는 신체의 각 성감대에 달라붙어 충동을 조직한다.  프로이트는 인간의 성은 본능적인 것이 아니라 충동적인 것이라고 설명한다.  본능은 아주 기초적인 1차적인 생존을 위한 것들로 이루어진 반면 충동은 본능이 지속적으로 반복하여 만족되는 과정 속에서 느낀 경험을 따르는 것을 말한다.  예컨대 배가 고프면 생존을 위하여 1차적으로 음식을 먹게 된다.  그리고 음식을 먹는 행위를 통해서 얻어지는 만족은 자연스럽게 충동을 일으키게 된다.  따라서 배가 더이상 고프지 않아도 지속적으로 그 만족에의 충동을 좇아 손가락을 빤다던지 등의 행위를 하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충동을 일으키는 리비도가 결합되는 성발달은 크게보아 구순기, 항문기, 남근기의 3단계를 거치게 된다.  중요한건 이는 단계적으로 진화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며 각 단계는 동시에 존재하게 되며 충동은 이 3단계를 넘어서 각각의 문화나 개인적인 경험에 따라서 또 다르게 나타날 수도 있다.

정신 기구 - 정신분석학의 근본 개념

프로이트는 무의식의 구조를 체계화하여 제시하게 되는데 이를 정신 기구 모델이라 한다.  프로이트의 2차 정신 기구 모델은 크게 자아, 이드, 초자아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이는 오이디푸스 컴플렉스를 극복한 인간이 보여주는 인격의 분화로서 인격은 자아와 이드, 초자아로 각기 나뉘어진채 갈등하고 균형을 이루게 된다.  무의식은 단일한 것이 아니다.  이드와 초자아로 나누어진채 충돌이 발생하는 곳이 무의식이며 자아는 이 둘의 관계를 중재한다.  이드는 도대체 무엇인지 알 수 없는 충동 에너지로 가득찬 리비도 그 자체로 볼 수 있다.  이드에는 그 어떤 제한도 금기도 존재하지 않는다.  자유로운 충동 에너지 그 자체인 것이며 이드는 무조건적인 요구만을 가지게 된다.  따라서 이드는 무조건적인 요구의 만족을 위해 환상을 만들어내기도 한다.  현실에는 존재하지 않는 환상을 통해 만족을 얻으려고 하는 것이다.  이러한 이드는 철저히 쾌락원칙을 따른다.  쾌락원칙은 쾌락의 양은 최대한 늘리고 불쾌의 양은 줄이려는 것으로 원시적인 본능에의 추구이다.

반면 자아는 의식에 귀속되는 것으로서 이드의 무조건적인 요구를 적절히 제어한다.  자아의 목적은 인간의 자기보존이다.  이드의 무조건적인 요구와 충동은 현실에서 적절히 제어되어야 한다.  이러한 제어를 담당하는 것이 자아이다.  자아는 현실원칙을 따른다.  현실원칙은 쾌락에 대한 지나친 집착을 자제하고 쾌락이 즉각적으로 만족되지 않더라도 참고 감내하여 현실에 적응해야 하는 것을 말한다.  이에 이드는 자아에 의해서 제한되고 적절히 제어된다.  즉 자아에 의해 맹목적인 충동을 만족시키려고 환상을 만드는 것은 제한되며 현실 속에서 만족을 얻을 수 있는 대상을 찾아 자신을 성장시키고자 한다.  자아는 이드를 맹목적으로 반대하는 것이 아니며 도리어 이드의 맹목성을 제한하여 자기보존을 행하면서 만족을 얻을 수 있는 길을 찾는 것이다.

초자아는 절대적 금기를 말한다.  초자아의 형성은 오이디푸스 컴플렉스와 밀접한 관계를 가진다.  어머니를 욕망하는 것을 금지하려는 아버지의 법은 초자아를 만드는 근간이 된다.  오이디푸스 컴플렉스를 통해 아이는 아버지에게서 한편으론 두려움을 품지만 다른 한편으론 아버지와 같은 사람이 되고 싶은 생각을 가지게 된다.  따라서 초자아는 한편으론 이상적 자아로서의 역할과 다른 한편으론 금기를 설정하는 역할을 가지게 된다.  이에 아이는 초자아가 제시한 이상적 자아를 충실하게 따라가게 됨과 동시에 금기의 설정을 내면화하여 내면에 양심을 담게 된다.  양심을 통하여 스스로 금기를 지키고 사회 규범을 따르도록 설정하는 것이다.  이때부터 아이는 성충동을 적절히 제어하게 되고 끊임없이 솟아오르는 성충동을 승화시키는 법을 배우게 된다.  흔히 사춘기 아이들에게 운동을 통해서 성충동을 해소하라고 말하는 것이 승화의 대표적인 예이다.

 

(2) 라캉 정신분석의 이해

타인이나 타 문명에 대한 이해를 위해 시간과 거리를 둔 채 관찰해야 한다는 구조주의의 기본적 태도는 타인에 대한 관찰을 넘어 나 자신에게도 적용할 수 있다.  나는 나를 너무나도 잘 알고 있다는 데카르트의 자아 명증성은 사실 모호한 측면이 많다.  생각을 멈추는 순간의 나는 무엇인지? 그리고 내안에 존재하는또 다른 나라는 형태의 정확히 알 수 없는 다른 무엇의 경험은 무엇인지?  이러한 경험을 두고 "내 안에 있는 타인" 또는 "나는 하나의 타인이다"라는 말로 설명이 가능할 것이며, 이는 데카르트의 주체관을 철저하게 의심스러운 것으로 만들게 된다.  진정한 나를 알기 위해선 내안에 있는또 다른 나를 거리를 둔 채 응시하고 관찰하여 내 안에 있는 그를 바깥에서 객관적으로 바라보아야 한다.  이러한 구조주의의 성과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인 라캉의 정신분석학은 랑그 언어학을 통해 프로이트로 돌아가자고 주장하게 되며, 이를 통해 인간을 바라보는 태도를 더욱 크게 변화하게 된다.  프로이트의 자아, 이드, 초자아 구조론은 프로이트 이후 두가지 경향으로 나뉘어 발전하게 된다.  첫째는 자아를 중심에 놓은채 성숙하고 바람직한 욕망의 추구와 미성숙하고 비정상적인 욕망은 배제하여 사회의 적응력을 높이는 자아심리학이다.  즉 성숙한 자아를 발달시켜 사회 적응력을 높이는 것이다.  하지만 라캉의 정신분석은 자아심리학에 대한 반기에서 시작한다.  라캉의 정신분석학은 이드를 중심에 놓은채 자아는 상상계의 산물에 불과하므로 무의식에 존재하는 주체를 중심으로 나아간다.

상상계과 자아의 형성 - 거울단계와 나르시즘

헤겔의 주인과 노예의 변증법이 보여주는 가장 극적인 면은 주체의 형성과정에 대한 관점이다.  단순하게 바라보자면 주인은 스스로 주체로 서는 자이며, 노예는 주인에 종속된 삶을 살아가는 자로서 주인의 인정에 의해 주체로 서게 된다고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도리어 주인은 그의 삶 전반을 노예에게 의존하여 살아가는 존재로서 주인의 주체성은 노예가 그를 주인으로 인정해주었을 때 성립하게 된다.  하지만 노예는 노동이라는 다른 측면을 통해 자신을 확인할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지기에 주인보다 더 자유로운 존재가 된다.  결국 주인이야 말로 노예와 같은 삶을 살아가는 자이며 노예야 말로 주인의 삶에 가까운 존재가 된다.  이를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인간의 주체성은 상대방과의 투쟁을 통한 상호인정에 의존한다는 것이다.  인간이 자아를 형성하기 위해서는 '' 이외의 타자와 대립이 전제되어야한다.  이른바 변증법에서 말하는 정과 반의 대립이다.  정이 존재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반이 있어야하며 인간에게 있어 최초의 반의 등장은 언어를 배우지 못한 유아시절 거울에 비친 이미지를 통해 나타난다고 라캉은 말한다.  이를 두고 거울단계라고 표현하며 이 단계를 통해 자아를 형성하게 된다.

거울단계[7]는 언어를 배우지 않은 6개월에서 18개월 사이의 어린아이에게서 발생하는 현상이다.  거울단계의 진입 이전의 아기는 자신의 몸을 완벽하게 제어할 수 없기에 자신의 신체가 파편화되어있다는 원초적 환상을 가지게 되며, 그와 동시에 자신과 대상을 구분하지 못한채 모든 것이 뒤엉켜버리는 경험을 하게 된다.  그러다 어느 시점에 아이는 거울에 비친 이미지를 보게 되고 그 이미지를 자신으로 받아들이는 거울단계에 진입하게 된다.  처음 거울단계에 진입했을때는 흔히 동물들이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자신으로 생각하지 못하듯 어린아이 역시 그 이미지를 혼동하게 되지만, 어느 순간 거울에 비친 이미지가 자신의 이미지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즉 아이는 거울 속의 이미지를 보면서 자신이 가지고 있는 파편화된 신체의 경험[8]과는 달리 하나의 완전한 전체성을 가지고 있다는 점을 깨닫는 것이다.  하지만 여전히 아이는 자신의 몸을 완벽하게 통제하지 못하는 파편화된 신체의 경험을 가지고 있으므로 이러한 경험은 거울 속의 이미지와 서로 상충하게 된다.  이때 아이는 자신의 불완전한 신체를 자기라고 생각하기보다 거울 속의 이미지를 자기라 생각하여 자신과 동일시하게 된다.  즉 이미지에 매료되는 것이며 이러한 전체성의 경험은 상당한 쾌락을 가져오게 된다.  나르시스 신화는 이러한 거울단계를 잘 보여주게 된다.  호수에 비친 자신의 모습에 매료되어 애정을 품는 나르시스의 모습이야 말로 거울 이미지에 매료된 자신의 모습을 보여주는 전형이다.

이러한 동일시의 과정이 상당히 중요한데 이를 통해 아이는 자신을 완전한 존재로서 인식하여 자아를 형성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결국 최초로 다가오는 통합된 나에 대한 경험은 거울 속에 비친 이미지 즉 타자를 통해서 획득하게 되며, 자아는 이미지가 가지고 있는 특징과 형태를 통해 구성된다.  하지만 이러한 동일시는 근본적으로 소외를 불러올 수밖에 없다.  거울속의 이미지가 가지는 완벽에 가까운 이상적 자아는 낯선 타자이자 지속적으로 바뀌어나가는 대상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어린아이는 거울에 비친 자신의 이미지를 통해 자아를 형성하지만 이는 성인이 된 이후에도 반복된다.  상상계의 거울 작용은 한번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성장과정과 관계없이 지속적으로 반복된다는 것이다.  예컨대 인간은 성장 과정 속에서 자신에게 영향을 주는 사람을 많이 만나게 된다.  그 중 아주 큰 영향을 주는 사람이 존재한다면 꽤나 많은 사람들은 그 사람을 하나의 이미지로 삼아 그 사람처럼 되고자 한다.  심지어 가끔씩 단순히 닮으려는 것을 넘어 그 사람과 똑같이 되고자 하며 자신의 자아가 그 사람인 것으로 착각하는 경우도 발생한다.  이때의 자아 역시 이미지를 통해서 구성된 것에 다름이 없다.  결국 거울단계가 우리에게 전해주는 것은 선험적이고 본질적인 자아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겨울 단계에서 나타나는 자아의 소외는 여전히 남아있는 불완전한 신체의 경험과 상충한다.  아이는 끊임없이 완전한 상을 보여주는 이미지에 이끌리지만 자신의 신체에서 오는 경험은 여전히 불완전하며, 더욱이 완전한 이미지가 보여주는 이상적 자아는 본질적으로 타자이기에 불안을 내포한다.  그렇기에 아이는 상당한 공격성을 드러내게 된다.  따라서 자아를 획득한다는 것은 완전한 안정성과 통일성의 확보가 아닌 최초의 균열의 순간을 맞이한다는 것이고 이 균열의 경험은 끊임없이 이상적 자아를 위협하게 된다.  이러한 공격성은 나르시스 신화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나르시스는 호수에 비친 자신의 모습에 사랑을 느끼게 되며 끝내 그 이미지가 자신임을 알지 못한채 호수에 들어가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이를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이미지에 대한 지나친 매료가 가지고 있는 공격성과 자살에 대한 충동이다.  이미지는 한편으론 이기에 나르시즘에 빠져들지만 다른 한편으론 타자이기에 공격하여 없애고자 한다.  이에 문명은 이러한 공격성을 자제시키기 위해 도덕률을 내세우게 되며 대표적으로 칸트의 정언명령을 들 수 있다.  이러한 도덕률은 사실상 초자아와 다름이 없다.[9]  정리하자면 자아는 거울단계에서 비친 이미지를 매개로 하여 구성된 것에 불과하다.  자아는 ''이면서 거울에 비친 타자이기도 하다.  이러한 상상계는 완벽에 가까운 모습을 보여준다.  완벽한 자신의 이미지를 자신과 동일시하였으니 무엇 하나 내 마음대로 안 될 이유가 없는 곳이다.  이때의 아이는 자신을 이미지와 동일시한 채 이것만이 세상의 모든 것이라 여기는 환상을 가지게 되며 이를 이자적 구조의 세상이라 칭한다.  이것이 상상계가 주는 상상적 안정감이다.  하지만 상상계는 앞서 살펴본바와 같이 소외와 불안도 내포하게 된다.  따라서 상상계는 한편으론 안정감을 주는 세상이면서 다른 한편으론 불안을 내포하는 양상을 드러낸다.  

거울단계는 주체를 바라보는 태도에서 혁명과도 같은 관점을 가져오게 된다.  즉 데카르트 이후부터 내려온 자아 명증성 즉 '생각하는 나가 존재하는 나'라는 절대 주체적 개념이 붕괴되는 것이다.  근대적 주체는 자아명증성을 가지게 되지만 거울단계를 통해서 확인되는 주체는 거울에 비친 이미지 즉 바깥에서 비롯하게 된다.  데카르트는 모든 것을 의심한 채 단 하나의 자명한 진리 즉 코키토를 정초하게 되지만 라캉의 이르면 데카르트의 의심은 미완에 불과할 뿐이며, 코키토는 철저하게 상상계의 자아에 불과한 것이 된다.  이러한 관점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인간은 스스로 존재하는 것이 아닌 타자에 의해 존재 당해진다는 것이다.  뒤에 자세히 살펴보겠지만 인간의 욕망은 스스로의 욕망이 아닌 타자에게서 인정받고자 하는 욕망에 불과하다.  이렇듯 타자에게 의존적인 인간의 모습은 최초로 자아를 구성하는 거울단계에서 이미 확인이 되는 것이다.  자아는 이미지에 의해 구성된 것에 불과하므로 인간은 왜곡될 수 밖에 없으며 그 존재의 확실성을 보장받을 수도 없다.  따라서 진정한 의미의 는 의식적 자아가 아닌 무의식에서 찾아야한다.

상징계와 무의식

세상은 이자적 구조가 아닌 수많은 사람들이 살아가는 다자적 구조이고 그 속에는 법과 원칙이 존재한다.  즉 사람은 이자적 구조를 넘어 현실의 세계로 나아가야하는 것이다.  이것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 바로 언어이다.  인간은 언어체계를 내재화 할 때 현실의 사회생활이 가능하게 되며 이 순간 인간은 주체를 정립하게 된다.  이것이 상징계의 역할이다.  상징계는 우리가 통제할 수 없는 선험적인 성격을 가지며 인간이 주체가 되어 사회생활을 영유하기 위해서는 상징계에 종속되어야 한다.  주체는 상징계에 의해 구성되며 이미 존재하는 그 구조에 갇혀 있는 것에 불과하다.  상징계는 언어와 같이 구조화된 체계에 불과하다.  이는 영화 매트릭스를 통해 쉽게 알 수 있다.  매트릭스의 세계관은 매트릭스 내의 세계와 매트릭스 바깥의 실재로 양분된다.  매트릭스 내부의 세계는 컴퓨터로 프로그램화된 온갖 기호들의 조합물로서 컴퓨터 프로그램이 언어와 같이 구조화되어 있다면 매트릭스 내의 세계는 상징계적 세계에 불과하다.  우리가 일상적으로 살아가는 세상 역시 매트릭스의 세계와 같이 언어로 구조화되어있는 상징계적 세계이며 우리는 이 상징계적 세계에서 하나의 주체로서 살아가게 된다.

라캉은 기본적으로 소쉬르의 언어학을 받아들이지만 소쉬르의 이론을 대폭 수정한다.  기호가 가지는 자의성과 기호들의 상호관계에 의한 가치의 측면은 받아들이지만, 기의가 우선한다는 태도와 기호가 가지는 불가분성에 대해서 의문을 품는다.  이에 라캉은 소쉬르의 기호 모델을 수정하여 기표를 우위에 두고 소쉬르가 상정한 기표와 기의 사이의 가로선의 의미도 수정한다.  기호 = 기표/기의로서 기표를 우위에 두게 되며 /의 의미는 소쉬르와는 다르게 분리와 억압의 선을 의미하게 된다.  이에 따르면 기표는 기의보다 우월한 위치에 놓이게 되고 기의는 /에 의해서 기표에 닿지 못한 채 항상 미끄러지게 된다.  여기서 기의가 무의식이라면 기표는 무의식이 드러난 징후이다.  예컨대 농담이나 꿈, 말실수 따위의 기표를 통해서 징후가 드러나고 이를 해석하여 기의를 확인하는 것이다.  따라서 /는 억압의 선으로서 작동한다.  프로이트에 따르면 꿈은 압축과 치환이라는 꿈의 작업을 거쳐 꿈의 내용으로 표현된다.  이러한 압축과 치환은 소쉬르의 랑그의 체계와 은유 및 환유와 대응한다.  따라서 무의식은 언어와 같이 구조화된것으로 볼 수 있다.

우월한 위치에 놓인 기표는 소쉬르의 기호모델과 마찬가지로 기표의 연쇄를 통해 언어 체계를 만들어내게 되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기표의 체계에 불과하며 의미를 가지지는 않는다.  즉 기의는 /에 막혀있기에 언어를 통한 의사소통이 불가능하다.  의사소통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기표와 기의가 만나는 지점이 필요한데 그것을 고정점이라고 말한다.  즉 기표의 연쇄체 아래에서 끊임없이 미끄러져 흐르기만 하는 기의는 고정점에서 기표와 만나는 것이 가능해지며 이때 의사소통이 가능해진다.  예를 들어 나는 불어를 할 줄 모르는데 어느 프랑스인이 나에게 다가와 길을 묻는다고 해보자.  프랑스인은 끊임없이 나에게 이야기를 할 것이고 그것들은 기표들이 모인 문장이다.  하지만 나는 불어를 모르기에 그 뜻을 알 수가 없다.  기표가 기의와 연결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기의는 프랑스인이 말하는 기표 아래를 끊임없이 미끄러질 뿐이기에 나는 결코 그의 말을 알 수가 없다.  하지만 한순간 의사소통이 가능해지는 순간도 있다.  손가락을 들어 나를 가리키면서 내가 이름을 말하고 상대방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면서 으흥? 이라고 말한다면 그는 자신의 이름을 말할 것이다.  이때가 바로 고정점이 발생하는 순간이며 이를 기반으로 하여 의미를 넓혀 의사소통이 가능해진다.

하지만 이러한 고정점은 소쉬르의 기호 이론과 같이 불가분의 의미관계를 의미하지는 않는다.  고정점은 잠시동안 의미작용이 가능해지는 임시적인 지점에 불과하다.  하나의 기표는 다양한 기의와 결합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정신분석에 입각한 해석은 절대적이지 않다.  기표와 기의는 다양하게 결합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예컨대 어떤 꿈을 해석한다 하더라도 꿈이라는 기표에 하나의 기의만이 존재하는 것은 아니며 다양한 의미로 해석이 가능한 것이다.  이와 더불어 라캉에 의하면 무의식은 인간이 상징계에 진입하여 주체로 거듭날 때 형성된다고 하며, 이러한 무의식은 야콥슨의 은유와 환유의 두가지 문법을 통해 언어체계와 같이 구조화되어 있다고 바라본다.  따라서 무의식은 상징계가 인간에게 미치는 효과이자 언어체계와 같이 구조화되어있기에 해석되어야 하는 무엇이 된다.  

오이디푸스 컴플렉스와 주체의 형성

인간이 주체가 된다는 것은 타인에 의해서 이름이 불려지는 것에서 시작한다.  타인에 의해 누구 집 아들, 누구의 엄마, 회사에서 대리, 과장 따위로 불려진다는 것은 나 자신이 완전한 하나의 개체로서 상징계적 사회 구조 속에서 위치를 점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러한 이름 불려짐은 타인에 의해서 인정을 받고 싶어 하는 욕망의 한 측면을 잘 보여준다.  오이디푸스 신화의 주된 핵심이 바로 이러한 인정을 받고 싶다는 욕망에 대한 것이며 그 중심에 서는 핵심적 기표가 바로 팔루스이다.  

오이디푸스의 첫 번째 단계는 상상계이다.  이자적 관계에서 아기는 어머니의 욕망의 대상이 되기를 원한다.  즉 어머니는 무언가를 결핍하고 있으며 그 결핍을 자신이 매꾸어 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러한 상상적 관계는 상상적 팔루스[10]라는 기표에 의해 형성되며 이때 팔루스는 고정된 기의를 가지진 않는다.  마치 어머니의 욕망이 고정되어 있지 않듯이 말이다.  상상적 팔루스는 어머니가 상실하였거나 어머니가 욕망하는 것으로 판단되는 것으로 아기는 이 팔루스와 동일시를 추구하게 된다.  이것이 상상계가 가지는 기본적인 모습이다.  아이는 스스로를 팔루스라 여겨 자신이 어머니의 결핍을 완전히 채워줄 수 있다고 생각하며, 자신이 어머니의 결핍을 채워줄 수 있기에 어머니도 나를 사랑한다고 생각하게 된다.  완전한 상상적 합일의 세계인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어머니가 가지고 있는 결핍에 자신을 맞추는 것에 불과하다.  어머니의 결핍이 정확히 무엇인지는 알 수 없지만 아이는 끊임없이 변화하는 그 결핍에 맞추어 가야하는 존재에 불과하게 된다.  더욱이 어느 순간 다가오게 되는 아버지라는 존재는 자신이 과연 정말로 어머니의 팔루스가 맞는지에 대한 의문과 불안에 휩싸이게 한다. 

오이디푸스 컴플렉스의 두 번째 단계는 이러한 상상적 팔루스를 포기하고 상징적 팔루스로 나아가는 것으로 그것을 가능케 하는 것이 바로 아버지의 법[11]이다.  아버지는 아주 강력한 존재로서 어머니와의 상상적 합일의 관계를 그만두라고 명령하게 되며 이때 아이는 어머니가 욕망하는 팔루스가 자신이 아니라 아버지임을 깨닫게 된다.  아버지가 보여주는 강력함과 거세에 대한 공포는 아이로 하여금 상상적 팔루스와의 동일시를 포기하도록 이끌어나간다.  아이는 지속적으로 어머니를 욕망하여 어머니의 인정을 받고 싶지만 그것은 거세공포 앞에서 포기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이때 아이는 자신이 결핍된 존재라는 것을 깨닫게 되며 그와 동시에 어머니 역시 팔루스가 없는 결핍된 존재임을 알게 된다.  즉 거세 공포는 어머니로부터 인정받고자 하는 욕망을 환유관계를 통해 아버지의 법으로 바꾸어 버린다.  그리고 이때 벌어지는 욕망의 환유연쇄를 통해서 무의식이 구성된다.  무의식은 상상적 팔루스를 포기하고 상징계의 주체가 됨으써 구성되는 것이다.  아이는 상징계로 진입하게 되며 이때 팔루스를 대하는 태도에 변화가 생기게 된다.  상상적 팔루스에서 아이는 스스로 팔루스가 되고자 하지만 상징적 팔루스팔루스를 가지고자 하는 것으로 바뀌게 된다.  이러한 변화는 아버지가 속해있는 상징계에 상징적 팔루스가 있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며 아이는 팔루스를 찾아 상징계로 진입하게 된다.  이때 주체는 초자아를 형성하게 되며 이를 통해 근친상간의 금지를 내면화하고 그것에 죄의식을 느끼게 된다. 

상징계로 진입한 아이는 대타자에 의해 아버지와 같이 위치를 점하여 자리 잡게 된다.  그것이 바로 위에서 살펴본 타인에 의해 이름 불려진다는 것으로 인간은 언어적 구조로 구성된 상징계 안에서 나를 표현할 수 있는 기표를 찾게 된다.  그 기표를 통해 내가 누군가에게서 이름이 불려질때 인간은 주체로서 자리매김하는 것이다.  예컨대 아이를 낳아 엄마가 된 미경이라는 사람이 있다고 해보자.  이때 미경은 아이를 통해 그 아이의 엄마라는 상징기호를 획득한다.  즉 그녀는 누구의 엄마로서 불려진다는 것이다.  그랬던 미경은 어느날 대학교수로 임용을 받았다.  대학교수로 임용을 받는다는 것 또한 상징계 안에서 하나의 상징기호를 획득하였음을 의미한다.  이때부터 미경은 누구의 엄마이자 대학교수라는 상징기호를 통해 불려져 주체가 된다.[12]  주체는 연속성을 가지지 못한 채 끊임없이 재형성된다.  즉 주체라는 것은 다양한 타인의 욕망이라는 상징 기호에 불과하며 주체는 다양한 상징기호를 지속적으로 만들어나가면서 재형성된다.  이렇듯 상징계는 주체들 상호간에 관계를 만들어나가는 선험적인 질서이자 구조이며 법이며, 라캉은 대타자를 상징계에 위치시킨다.

하지만 이러한 주체로의 정립은 자연스럽게 또 다른 소외[13]를 불러 올 수밖에 없다.  아버지의 법을 받아들이고 어머니를 포기하는 과정은 결국 상징적 거세의 과정이며 그곳에서 소외가 발생한다.  즉 상징계로 진입하면서 무언가를 잃어버려 주체에게 빈공간 즉 결핍이 생긴다는 것이다.  기호는 기표/기의로 이루어진다.  하지만 /는 억압의 선이기에 기표와 기의는 고정점을 통해서만 만날 수 있다.  고정점은 의미가 부여되는 순간이지만 그 의미에는 반드시 잔여를 남기게 된다.  주체 역시 상징기호를 통해 누군가에 의해 불려지게 되지만 그 불려짐은 완벽하지 않다.  항상 어떤 결핍을 남기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근원적으로 채워질 수 없는 결핍 무의식에 있지만 무엇인지 알 수는 없는 무엇이다.  주체는 빈공간 즉 결핍을 매우기 위해 욕망을 선택하게 되지만 그 어떤 욕망도 결핍을 채워줄 수 없기에 이것은 끊임 없이 다른 것으로 치환된다.

타인의 욕망

상징계에 들어선 인간은 타인에 의한 이름 불려짐 즉 타인의 인정에 의해서 주체로서 자리매김하게 된다.  아이가 상징계로 진입한 이유는 어머니(타인)가 욕망하는 팔루스가 상징계에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어머니의 인정을 얻기 위해서는 어머니가 욕망하는 것을 가져야 한다.  따라서 아이는 상징계 안에서 상징계가 만들어낸 욕망인 타인의 욕망을 욕망하도록 강요받게 된다.  타인이 욕망하는 것을 소유하여 타자가 나를 인정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며 이를 통해 결핍을 매우고자 하는 것이다.  이러한 욕망은 상징계 즉 언어 체계에 의해서 만들어지고 언어를 통해서 주체에게 강요되며 팔루스를 통해 끊임 없이 가지고자 노력하는 기표로 자리매김하게 된다. 

이러한 측면을 잘 보여주는 이야기가 에드거 앨런 포의 도둑맞은 편지[14]이다.  간단하게 이야기를 언급해보자면 왕비는 왕이 봐서는 안 되는 편지를 읽게 되는데 그 순간 갑자기 왕이 방안으로 들어오게 된다.  깜짝 놀란 왕비는 그 편지를 아무 것도 아닌 것처럼 탁자 위에 놓게 되는데 그때 그 장면을 보게 된 장관은 몰래 그 편지를 바꿔치기하여 훔치게 된다.  이에 왕비는 그 편지를 되찾고자 경찰을 동원하지만 경찰은 편지를 찾지 못한다.  왜냐하면 장관은 그 편지를 탁자위에 구겨진 종이쪽지처럼 아무렇게나 놓았기 때문이다.  편지를 찾지 못하게 되자 왕비는 탐정 뒤팽에게 사건을 맡겨 편지를 되찾게 된다.  이 이야기에서 편지는 팔루스의 역할을 하게 되지만 이는 철저하게 기표에 불과하고 대응되는 기의는 없기에 우리는 그 편지의 내용을 끝까지 알 수 없다.  이러한 측면은 이야기 속 곳곳에서 발견된다.  왕비는 그 편지의 내용을 왕에게 들켜서는 안되기에 도둑맞은 사실을 말하지 않는다.  왕에게 들켜서는 안 된다는 것은 그 이면에 상징계의 법 즉 금기가 존재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더욱이 이 편지는 많은 사람들의 손을 떠다니게 되는바 이를 통해 기표가 가지는 환유적 성격을 확인할 수 있다.  다른 한편으로 편지가 만들어낸 기표의 구조 안에서 각 주인공들이 점하게 되는 주체적 위치의 측면도 확인할 수 있다.  왕비는 절대로 그 편지 내용을 왕에게 들켜서는 안 된다.  왜냐면 들키게 된다면 왕비는 왕에게서 인정을 받을 수 없기 때문이다.  장관이 편지를 훔치는 주된 이유는 그 편지를 이용해 왕비를 자기 손안에 넣고 조종하고자 하는 욕망 때문이다.  이 말은 장관은 편지를 통해 왕비에게서 인정을 받고 싶다는 것에 다름이 아니다.  결국 편지라는 기표의 연쇄구조 안에서 각자는 타인의 인정을 얻고자 하는 욕망을 드러낸다.

더 쉬운 예를 들어보자면 아파트를 들 수 있다.  우리 사회에 흐르는 아파트에 대한 욕망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이다.  하지만 모든 사람들이 과연 정말로 아파트를 욕망하는가? 라고 했을 때는 의문이 들 수밖에 없다.  주택에서 살아가는 걸 더 선호하는 사람들도 분명히 많을 테니 말이다.  아파트를 선호하는 이유는 타인이 아파트를 욕망하기에 내가 그것을 가짐으로써 타인의 선망의 대상이 되는 것을 욕망하는 것에 다름이 없다.  아파트를 가진다는 것은 타인이 나를 인정해준다는 것이며 그 인정을 욕망하는 것이다.  이는 비단 아파트를 넘어 좋은 대학, 좋은 직장, 명품 등도 마찬가지이다.  다른 예로 사춘기를 겪고 있는 아이들에게 친구라는 존재는 상당히 중요하다.  그 이유 역시 타자에 의한 불려짐으로 설명이 가능하다.  인간이 속해 있는 사회의 크기는 개개인마다 다르다.  중고등학교 학생들이 속해 있는 사회의 크기는 가정, 학교, 학원 정도로 한정된다.  대학생이 속해 있는 사회의 크기는 가정, 학교, 동창, 학원, 모임 등으로 넓어지고 회사원은 더 넓어질 것이다.  더불어 회사원 사이에서도 좋은 회사와 상대적으로 안좋은 회사가 가지는 사회의 크기는 다르다.  중고등학교 학생들의 경우는 사회의 외연이 너무 작다.  따라서 친구들 사이에서 이름이 불려지는 것은 상당히 중요한 일이다.  이름이 불려져야만이 그 작은 사회안에서 위치를 점하여 주체로서 자리매김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아이들은 친구들의 욕망을 욕망하게 된다.  좋은 메이커의 옷, 친구들이 행하는 말투, 행동거짐 하나하나가 친구의 욕망을 욕망하는 것이며 그것을 같이 행함으로써 주체로서 불려지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이유를 통해 중고등학생들의 몰개성화 현상도 설명이 가능하다.  너무 작은 사회적 풀 안에서 주체로 자리매김하려다보니 그 안에서 확인되는 타인의 욕망의 풀이 너무 작은 것이다.

이를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상징계는 주체에게 저러한 것들을 욕망하여 가지게 될때 타인이 너를 인정할 것이라고 강요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아파트나 명품을 가진다고 해서 결핍을 매꿔 완전한 충족을 얻지는 못한다.  충족을 얻지 못하기에 욕망은 끊임없이 다른 것으로 환유적으로 치환해 나간다.  사실 주체의 욕망은 상징계에 위치한 대타자의 인정을 통해서만이 의미를 부여받게 된다.  따라서 주체는 자신의 진정한 욕망이 무엇인지 알지 못한채 끊임없이 대타자의 욕망을 자신의 욕망인 것처럼 착각한채 쫓게 된다.  그러므로 주체는 대타자의 욕망이 가지는 의미가 무엇인지 그리고 무엇 때문에 욕망은 충족될 수 없는지에 대해 다시금 의문을 던지게 된다.

결핍과 욕망의 주체

무의식은 언어구조와 같이 기표의 체계로서 이루어져있다.  기표의 체계는 / 아래로 흐르는 기의와 대응하는 의미를 가지지 않는다.  따라서 주체는 무언가를 욕망하지만 기표의 체계 위에서 그것을 찾기에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는 알 수 없다.  주체는 지속적으로 타자의 욕망을 받아들이면서 그것에 의문을 품게 된다.  서울대라는 타인의 욕망을 충족한다 한들 그것은 다시 좋은 직장이라는 다른 타인의 욕망으로 치환된다.  끊임없는 환유적 치환의 과정 속에서 수많은 타인의 욕망의 진짜 의미에 대해 의문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의문이 발생하는 지점에서 주체는 분열된다.  즉 상징계에 자리매김한채 아버지의 법에 따르는 의식 주체/ 밑으로 흐르는 상징계에서 배제된 무의식의 주체가 그것이다.

주체는 상징계에 있다고 여겨지는 팔루스를 지속적으로 요구한다.  하지만 그것은 결코 채워질 수 없는 영원한 결핍으로 남게 된다.  그것은 상징계 바깥에 있는 것으로 결핍 자체가 상징계의 효과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결핍의 인식을 통해 욕망이 형성된다.  라캉은 욕구와 욕망 그리고 요구를 엄격하게 구분한다.  욕구는 아주 단순 형태의 식욕, 수면욕, 성욕 따위를 말하며 요구는 욕구를 타인에게 전달하는 것을 말한다.  그리고 욕망은 요구 너머에 존재하는 충족될 수 없는 무엇을 말하며 결핍과 밀접한 관계를 가진다. 예를 들어 어린 아이가 계속 울고 있을 때 부모는 배가 고프다고 생각하여 밥을 주지만 그치지 않는다.  이에 부모는 대변을 봤나하고 확인하고 일부로 기저귀도 갈아주지만 그래도 그치지 않는다.  이는 아이가 자신의 요구를 명확하게 전달하지 못했기 때문에 생겨나는 현상이다.  즉 아이가 아무리 부모에게 요구하더라도 그 요구는 완전히 충족될 수 없기에 항상 결핍을 남기는 것이다.  이 결핍에서 생겨나는 것이 바로 욕망이다.  즉 욕망은 영원히 충족될 수 없는 결핍을 채우고자 하는 것이다.

주체는 끊임없이 욕망을 해결하고자 해매지만 기표의 연쇄사슬 위에서 그것을 찾으니 기의는 기표 아래에서 미끄러질 뿐이다.  이에 타인의 욕망을 소유하여 욕망을 충족해보지만 그것으로도 결핍은 채워지지 않는다.  고급 아파트를 가진다 한들 그것을 왜 가져야 하는지? 에 대한 의문은 다시금 남기 마련인 것이다.  이에 인간은 끊임없는 결핍을 채우기 위해 환유적 치환을 지속적으로 해나간다.  좋은 직장이라는 상징기호를 얻어도 충족이 안 된다면 다시 고급 아파트로 그래도 충족이 안 되면 또 다른 타인의 욕망으로 치환해 가는 것이다. 

이를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상징계는 완전무결하지 않다는 것이다.  요구하는 순간 그 요구는 완벽히 만족이 안 되기에 다시 결핍을 낳는다.  결핍이 존재하기에 그것을 채우기 위해 다시 또 요구하게 된다.  따라서 주체는 욕망의 대상이 무엇인지 알 수 없다.  타자의 욕망을 욕망하라고 명하기에 그것을 가지기 위해 노력하지만 도대체 그 타자가 욕망하는 것이 무엇인가에 대한 의문만이 남는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상징계에 의해 포섭되지 못하는 무언가가 존재한다는 것이다.  언어로서 표현할 수 없는 언어 체계에 의해 구성된 상징계로 표현할 수 없는 잔여가 존재한다는 것이다.  영화 매트릭스에서 네오는 이러한 잔여를 강하게 느낀다.  그는 자신이 살아가는 세계가 무언가 이상하다는 것을 느낀다.  이에 네오는 매트릭스라는 것이 무엇인지 끊임없이 찾아해매며 그것을 알기위해 해킹을 한다.  컴퓨터 프로그램을 해킹을 한다는 것은 결국 구조화된 언어를 해킹하는 것과 같은 의미를 가진다.  하지만 언어 구조를 해킹한다고 해서 매트릭스를 알 수는 없다.  그가 찾는 것은 프로그램화된 세계 바깥에 존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이 바로 실재이다.

실재계

근대 계몽주의에 입각한 이성에 대한 믿음과 과학의 발전은 합리성이라는 이름하에 세상 모든 것을 설명할 수 있다고 말한다.  즉 과학적 지식과 수학적 엄밀성이 세상 만물을 다 설명할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상징계에 맞도록 설명된 세상에 불과하다.  우리는 가끔 신문에서 기이한 일들을 만나곤 한다.  예컨대 아이가 트럭에 깔리자 초인적인 힘으로 그 트럭을 들어올리는 어머니의 이야기 따위가 그것이다.  합리적이고 과학적인 설명으로는 어머니가 트럭을 들어올리는 저 괴력을 설명할 수가 없다.  이러한 경험은 비합리적인 것으로서 과학의 바깥에 존재하는 것이다.  라캉은 이런 부분을 바로 실재라고 칭하며 실재계에 대해여 논하게 된다.

주체는 끊임없이 결핍을 채우기 위해 욕망하지만 그것은 결코 채워지지 않는다.  그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에 라캉은 후기에 들어 실재의 문제에 천착해 들어간다.  앞서 살펴본 결핍이 말해주는 것은 상징계가 완전하지 않다는 것이며 상징계로서 설명할 수 없는 상징계의 바깥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언어를 익혀 상징구조에 종속된다는 것은 일상적인 현실 그 자체가 상징화되었다는 것을 말해준다.  예컨대 우리는 언어를 배우는 순간 고양이라는 대상과 직접적으로 대면할 수 없게 된다.  언어를 익히면서 철저히 언어의 상징구조에 따라서 고양이라는 개념과 대면하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언어로 표현이 안 된다고 해서 실재가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실재는 상징계 이전에 존재하는 것이며 상징화할 수 없는 것이다.  실재는 언제나 그대로 있다.  다만 인간이 언어구조에 의해 상징화되어 주체가 되었기에 언어체계로 포섭이 안 될 뿐이다.

사회 구조는 반드시 일종의 금지를 가진다.  사회구성원에게 하지 말아야할 것을 요구하는 것으로 인간이 주체가 되기 위해서 포기해야 하는 것 중 가장 핵심적인 부분이 바로 근친상간의 금지이다.  인간은 근친상간의 금지를 받아들임으로써 사회 속에서 주체로서 살아갈 수 있게 되지만 이로 인해 소외도 발생한다.  이렇듯 실재는 근친상간과 같이 사회 구조가 유지되기 위해서 배제되는 것들이다.  하지만 배제되었다고 하여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상징계에 의해 포섭이 안될뿐 그것은 언제나 그자리에 그대로 있다.  상징계는 금지를 통해서 형성되며 금지가 존재하기에 인간은 욕망을 싹트게 된다.  즉 사회와 인간 주체는 금지를 수용함으로써 형성되지만 그 상징계가 배제해버린 무엇에 대한 금지때문에 실재를 향한 욕망이 싹트게 된다.  영화 매트릭스에서 기계와 인간이 전투를 벌이는 황폐한 현실은 실재로서 그것은 언제나 그곳에 그대로 있었다.  다만 사람들은 매트릭스 프로그램 내에서 즉 상징계 내에서 살아가기에 그 실재를 알지 못할 뿐이다.  그렇다고 실재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황폐하고 황량한 실재는 언제나 그곳에 그대로 있다. 

인간은 이러한 실재를 가끔 자신의 의지를 벗어나는 경험을 통해서 조우하게 되며 실재가 상징계를 뚫고 회귀하는 것을 라캉은 증상이 말한다.  그리고 그 중심에 서는 것이 바로 트라우마이다.  트라우마는 정신적 외상으로 도대체 어떻게 할 수 없는 충격적인 경험에서 비롯된다.  너무 어린 시절 목격하게 된 부모의 성관계나 충격적인 사고의 경험을 예로 들 수 있다.  트라우마는 억압된 실재와 조우하게 되는 순간으로 언어로서 상징화가 되지 않는 즉 언어로 표현이 잘 안되어 끊임없는 고통을 주게 되는 실재이다.  예컨대 너무나 사랑하던 연인이 눈앞에서 자살하는 크나큰 상처와 고통을 입은 사람이 있다고 해보자.  그 사건은 이 사람에게 엄청난 트라우마로 남아 유사한 상황만 오면 그 고통이 되살아날 것이다.  자신은 그 고통을 표현하여 어떻게 해서든 상징화 하여 극복하려 하겠지만 그 어떤 말로 설명을 하든 그 고통은 반드시 무언가를 남기게 된다.  이러한 트라우마가 하나의 증상으로 나타나게 되는 것은 앞에서 살펴본 고정점이 발생하였기 때문이다.  즉 상징계와 실재계 역시 고정점을 통해서 임시적으로 연결될 수 있으며 그때 확인할 수 있는 다양한 증상들 중 대표적인 것이 트라우마이다. 

라캉은 실재계에 속해있지만 사회 구조에 의해 억압된 그것을 (, das Ding)이라 칭한다.  이는 상징계에서는 만날 수 없는 것으로 칸트의 물자체와 대응하는 것이다.  물은 원초적인 상실이자 근원적으로 금지되어있는 대상으로 언어의 지배를 받는 사회 구조에서는 결코 찾을 수 없는 것이기에 욕망이 향하는 곳은 결국 물이 될 수밖에 없다.  그리고 이러한 물 그 자체를 향한 욕망은 칸트의 선의지와 같은 것으로서 어떤 목적성이나 대상에 의해서 결정되지 않는 성격을 가지며 이를 두고 순수 욕망이라 한다.  물은 금기를 통해서 나타나는 것으로 과잉된 환상으로서의 성격을 가진다.  오이디푸스 컴플렉스에서 아버지는 아이에게 강력한 금기를 제시한다.  이러한 강력한 금기는 마치 아버지가 엄청난 쾌락과 향략을 가지고 있는듯한 환상을 품게 한다.  따라서 어머니의 몸 역시 환상의 대상이 된다.  상징계에 진입한 주체는 절대로 가질 수 없는 것이기에 과잉된 환상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쾌락원칙과 죽음 충동

프로이트의 쾌락원칙[15]은 쾌락의 양은 최대한 늘리고 불쾌의 양은 줄이려는 것으로 사회구조가 제시하는 금기의 한계점으로 역할을 하게 된다.  이와 대비되는 것이 현실원칙으로 쾌락에 대한 지나친 집착을 자제하고 쾌락이 즉각적으로 만족되지 않더라도 참고 감내하여 현실에 적응해야 하는 것을 말한다.  쾌락원칙은 쾌락을 추구하되 불쾌는 피하려고 하는 특징 때문에 사회구조가 제시하는 금기를 넘어설 수가 없다.  즉 실재를 향해 나아갈 수가 없다.  만약 실재를 조우하고자 한다면 자연스럽게 사회의 금기를 넘어서야 하는데 그것은 필연적으로 불쾌를 가져올 수밖에 없다.  따라서 쾌락원칙에서 얻어지는 쾌락은 사회구조가 허용한 최대한의 쾌락이 될 것이다.  상징계의 금기를 어긴다는 것은 일련의 처벌이 따를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에 실재를 끊임없이 갈망하는 충동은 쾌락원칙과 대치되는 양상을 보여줄 수밖에 없다. 

라캉에 따르면 주체는 끊임없이 죽음 충동에 이끌리게 된다.  이때의 죽음은 진짜 죽음 즉 자살 같은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상징계의 끝자락을 의미한다.  따라서 죽음 충동은 쾌락원칙을 뛰어넘고자 하는 것이며 상징계가 금지한 실재에 이끌리는 것이다.  사회 구조가 금지를 설정하고 그것을 강요하게 되면 그것을 원인으로 하여 욕망이 싹트게 된다.  즉 금지하기에 욕망이 생기는 것이다.  끊임없이 타자의 욕망을 충족해보아도 결핍은 남게 된다.  서울대에 가더라도 충족되지 않는 결핍은 남으며 좋은 직장, 멋진 결혼 생활, 명품을 얻더라도 결핍은 남는다.  따라서 주체는 사회가 금지하는 그곳에 결핍을 채워줄 수 있는 더 큰 절대적인 쾌락을 주는 것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게 되며 이를 두고 라캉은 주이상스(jouissance)라 칭한다.  주이상스는 단순하게는 오르가즘에서 향유, 희열 등으로 번역되는 것으로 이는 인간이 상징계에 진입하여 상징기호를 통해 주체가 되었을때 생기게 되는 결핍을 근원으로 삼는다.  주이상스는 쾌락원칙을 넘어서는 것이기에 고통을 동반하는 쾌락이라는 의미도 가진다.  쾌락원칙을 넘어서는 순간 사회구조는 금지를 넘어선 주체에게 벌을 가할 것이기 때문이다.  결국 죽음충동은 상징계 내에서의 삶에 대한 죽음의 선언이며, 주이상스는 물(, das Ding)에 대한 향유에 다름이 없다.

라캉이 실재계를 통해 주장하는 것은 다음과 같다.  인간은 사회 구조가 요구하는 법과 규범, 문화 질서에 종속된 채 타인의 욕망만을 욕망하며 허용된 쾌락만을 추구하면서 살아가기보다는 도리어 실재를 만나 주이상스를 획득하는 삶이 더 옳다고 말하며 그것을 욕망의 윤리라 칭한다.  영화 매트릭스를 보면 쾌락원칙과 주이상스의 차이를 쉽게 확인할 수 있다.  네오는 끊임없이 매트릭스라는 무엇인지 알 수 없는 대상에 대한 욕망에 휩쌓인다.  매트릭스는 자신의 공허한 결핍을 매꾸어줄 수 있는 무엇처럼 여겨진다.  그러다 그는 모피어스를 만나 빨간약을 선택하게 되고 그때 그는 상징계에서 벗어나 실재를 만나게 된다.  네오는 매트릭스가 설정한 금기의 선을 넘어선 인물로서 매트릭스에 의해 강력한 처벌을 받아 요원들에게 쫓기게 된다.  매트릭스를 벗어난다는 것은 상징계의 금기를 벗어난다는 것이며 이것이 바로 죽음 충동으로 이는 매트릭스를 벗어나 그 너머로 가고자 하는 충동이다.  반면 사이퍼는 이러한 실재의 삶을 견딜 수가 없다.  이에 매트릭스 안으로 돌아가 매트릭스가 제시하는 쾌락만을 추구하며 살기를 바란다.  매트릭스가 제시하는 쾌락은 매트릭스의 유지 즉 사회공동체의 유지를 담보로 물질적 쾌락을 약속한다.

라캉에 의하면 오늘날의 도덕이 가지는 위기는 욕망의 윤리를 통해서 해결할 수 있으며, 도덕은 전통적 가치를 과감하게 배제하고 과거 전통적 가치가 배제하였던 실재를 향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것을 가능하게 해주는 것이 승화이다.  승화(sublimation)는 일상적인 대상에 물(, das Ding )의 지위를 부여하는 것이다.  주체는 결코 물 그 자체를 만날 수 없다.  물은 과잉된 환상의 성격을 가지기 때문이다.  따라서 라캉은 승화를 통해 일상적인 대상에 물의 지위를 부여하여 실재를 향유하게 되며 이를 통해 직접적인 만족을 얻게 된다.  라캉이 얘기하는 승화의 대표적인 예가 중세의 궁정풍 사랑이야기이다.  이는 높은 귀족의 부인을 사랑하는 기사의 이야기로 기사가 사랑하는 여인은 이미 결혼을 한 여자이고 높은 지체를 가지고 있는 대상이다.  기사는 그녀를 사랑하지만 그것은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이자 이루어져서도 안 되는 사랑의 양상을 보여준다.  여기서 귀족 부인은 평범한 대상에 불과하지만 물의 지위를 부여받은 존재이다.  그렇기에 귀족 부인은 아주 이상적이고 고귀한 양상을 보여주게 되며 그녀를 향한 금지된 욕망은 그녀를 더욱 더 고귀한 양상으로 이끌어나가게 된다.  그리고 이러한 슬프고 아름다운 사랑은 시인에 의해 노래 불려진다.  라캉에 따르면 이때 불려지는 시인의 노래 즉 예술도 승화의 전형적인 예로서 작용한다.  예술은 상징계에 포섭되지 않는 실재를 표현할 수 있는 창조활동이자 가능성이기 때문이다.  결국 승화는 상징계에 완벽하게 종속된 주체가 실재와 만날 수 있는 가능성이며 결코 채울 수 없는 결핍을 환상을 통해 충족시키는 것이다.

흔히 실재는 뭔가 어둡고 기괴하며 이해할 수 없는 것으로 그려지는 경우가 많다.  매트릭스에서 네오가 실재를 직면했을때 느끼는 강력한 거부감 역시 그러한 맥락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실재가 꼭 부정적인 늬앙스로 그려질 이유는 없다.  실재는 상징계에 포섭될 수 없는 곳으로 언어로 표현될 수 없는 논리와 상식이 무너지는 곳이다.  우리 사회에서 부동산 재개발이라는 상징기호는 우리에게 많은 쾌락을 약속한다.  재개발이라는 상징 기호를 따른다는 것은 상징계 내에 쾌락원칙에 만족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재개발은 가끔씩 실재를 만나 여실없이 무너지게 된다.  그 대표적인 예가 바로 용산 참사일 것이다.  그 참사를 통해 재개발이라는 상징기호가 이야기하는 장미빛 쾌락이 허구임이 밝혀진다.  그 이면에 존재하는 참사라는 실재는 잔인하게 그지 없다.  다른 예로 신자유주의를 들 수도 있다.  신자유주의라는 상징기호는 우리에게 무한한 부와 쾌락을 약속한다.  하지만 이 또한 비정규직이라는 실재 앞에서 여실없이 무너진다.  결국 상징계는 불완전하다는 것이며 상징계는 모든 것을 포섭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신자유주의와 재개발이라는 언어적 표현과 상징기호는 그 이면에 있는 고통받는 사람들이라는 실재를 포섭하지 못한다. 

우리는 일어날 수 없는 일이 발생하는 것을 흔하게 경험하곤 한다.  그럴때 설명할 수 없는 일이 일어났다고 표현하곤 한다.  도대체 이해할 수 없고 설명할 수도 없는 어마어마한 에너지가 현실에서 나타나는 순간이 바로 주이상스가 긍정적인 역할을 하는 순간이다.  이를 통해 우리는 상징계의 허구성과 그 이면에 있는 실재라는 진실을 알게 된다.  만약 인간의 삶이 이성과 합리성의 지배만을 받는 상징계내에서만 이루어진다면 답답하기 이를때가 없을 것이다.  일상적이고 반복되는 삶 속에서 우리는 흔히 일탈을 꿈꾸곤 한다.  저곳에 가면 나의 결핍을 채워줄 수 있고 뭔가가 있을거라는 생각 이것은 우리에게 여유를 던져준다.  상상계와 상징계 그리고 실재계는 설명처럼 딱 나누어지는 것은 아니다.  한덩어리로 뭉그트려진채 우리의 삶을 지배하는 요소이다.



[1] 프로이트, 히스테리 연구, 김미리혜 옮김, 열린책들

[2] 프로이트, 꿈의 해석, 김인순 옮김, 열린책들

[3] 압축은 무의식적 사고가 단순한 형태의 이미지나 표상을 통해서 드러나는 것으로 잠재적인 꿈의 사고가 압축되고 혼합되어 단순한 형태로 드러나는 것을 의미한다.  보통 꿈속의 이미지는 대단히 단순하게 나타나지만 그것이 가지고 있는 중첩된 의미는 상당히 복잡한 경우가 많다.  이러한 압축은 의식의 검열을 피하고 무의식적 사고가 가지는 진정한 내용을 숨기기 위해서이다.

[4] 전치는 무의식적 사고가 좀 더 수용가능한 부차적인 요소와 결합되어 드러나는 것을 말한다.  즉 허용한 가능한 사상이나 감정또는 소망으로 전치되는 것을 말하며 이는 방어기제의 하나이다.  전치는 압축과 마찬가지로 의식의 검열을 피하기 위한 하나의 방법으로서 꿈 내용을 왜곡시켜버리는 작업이다.  상황에 따라선 잠재적 꿈의 사고와 완전히 반대되는 상황이나 기호로 전치되기도 한다.

[5] 프로이트, 문명 속의 불만, 김석희 옮김, 열린책들

[6] 프로이트, 성에 관한 세편의 해석, 오현숙 옮김, 을유문화사

[7] 거울은 실제 거울이 아닌 비유적인 표현으로 거울상으로서의 어머니의 존재를 상정하게 된다.  아이는 어머니의 행동을 관찰하여 거울과 같은 이미지를 생성하여 일체감을 느끼게 된다.  그리고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거울신경세포이다.  이 세포의 존재를 통해 인간이 타인의 감정에 동화되거나 타인의 행동을 따라하는 것을 설명하게 된다.

[8] 어린아이들은 아직 신체가 완전히 발달하지 않았기에 몸을 완벽하게 통제하지 못한다.  이때 느끼는 감각이 바로 파편화된 신체의 경험이다.

[9] 알렌카 주판치치실재의 윤리, 이성민 옮김, 비 출판사(도서출판 b)

[10] 팔루스는 실제의 남성 성기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 욕망의 대상이자 결핍을 채워주는 대상물에 대한 상징적 표현이다.

[11] 아버지는 상징적인 의미이며 법은 상징계를 의미한다.

[12] 오이디푸스의 이야기 속에서 다양한 형태의 정신질환이 도출된다.  대표적으로 신경증과 정신병으로 나누어 볼 수 있으며 신경증은 히스테리와 강박증 두 가지 형태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신경증은 원억압에 성공하여 상징계로 진출하는데는 성공하게 되지만 그 억압된 내용이 분출하려는 힘이 너무 강하고 초자아의 힘 즉 상징계의 금지가 약하게 다가올 때 폭발적으로 분출해버리는 증세로서, 이는 상징계를 거부하고 상상계로 지속적으로 돌아가려는 상태를 뜻하게 된다.  그 중 히스테리는 여성에게서 주로 발견이 되는데 거울단계의 실패가 주된 이유이다.  거울단계의 실패는 자연스럽게 이자구조 속에서 자신이 환영받지 못하고 사랑받지 못한 존재라는 느낌을 가지게 된다.  강박증은 이자구조 속에서 히스테리와 달리 엄청난 사랑을 받았다는 자신감에서 비롯한다.  이러한 자신감에서 비롯한 과잉된 나르시즘은 거세에 대한 공포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그 공포에서 벗어나기 위한 방법으로 강박증세가 나타난다고 본다.  정신병은 완전히 다른 형태로서 원억압 자체를 거부하고 상징구조 자체를 거부하여 완전한 상상의 세계에 함몰되어버린 상태를 말한다.  그곳은 완전한 나만의 세계이기에 어떠한 문제도 있을 수 없는 그런 세계이다.

[13] 2차 소외

[14] 에드거 앨런 포, 우울과 몽상, 홍성영 옮김, 하늘연못

[15] 프로이트, 정신분석학의 근본 개념 - 프로이트 전집 11, 열린책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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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바보바보바보

    | 2014.03.26 20:11 신고 | PERMALINK | EDIT | REPLY |

    내 욕망이란 게 결국은 타인에 의해(내가 성장한 사회에 의해) 만들어진 거라면, 그럼 진짜 자신의 욕망이란 건 불가능한 얘긴가요? 어떤 사람은 그 욕망에 힘들어 하는데 비해 또 어떤 사람은 그 욕망에 충실하게 사는 건 어디에서 기인하는 걸까요?

  2. 예술치료

    | 2015.04.28 18:14 신고 | PERMALINK | EDIT |

    예를들어 부모님이 갓태어난 아이에게 성공적이고 충족된 인생에 대한 자신의 욕망을 부여하잖아요. 그건 부모의 자신의 욕망이지만, 결국 그 부모들 도 자신들의 충족되지 않은 꿈과 열망이 타자로부터 기인해온거죠. 다른 사람들과 비교해서 자신의 아이가 잘 살았으면 좋겠다던지, 자신의 삶처럼 안살게 하고싶다던지. 그건 전부 타자의 영향이라고 봅니다.

  3. yiyips714

    | 2014.04.10 00:19 신고 | PERMALINK | EDIT | REPLY |

    그 어려운 라캉에 대하여 아주 잘 설명해주셔서, 외국인임에도 불과하고, 아주 선명하고 조리있게 쉽게 이해가되도록 글을 써서 너무 감사합니다. 타인의 인증을 받는것이 사람의 현실이고 본능이므로, 칭찬으로 필자에 대하여 인증하겠습니다

  4. 송다정

    | 2015.04.11 16:35 신고 | PERMALINK | EDIT | REPLY |

    제가 급해서 그러는데 글을 읽어보니 프로이트에 대해서 잘아시는 것같아 문의 드립니다 ~혹시 프로이트가 나는 고양이를 고양이라고 부른다 라고 한 부분의 뜻을 아시는지요? 교수님께 물어보니 여성 비하발언이라고 하시는데 제가 계속 찾아보고 찾아봐도 모르겟어서요 ~혹시시간괜찮으시다면 답변좀 부탁드립니다 ㅠㅠ

  5. 안용태 용짱

    | 2015.04.11 16:42 신고 | PERMALINK | EDIT |

    너무 막연하네요 맥락 설명이 더 필요해요

  6. 송다정

    | 2015.04.11 17:45 신고 | PERMALINK | EDIT |

    프로이트의 히스테리 연구에서 도라에대한 분석이 나오잖아요~책에 나는 신체기관들과 과정들을 그 기술적 명칭으로 부를것이다. 그리고 이 명칭들이 환자에게 알려져 있지 않다면, 나는 그것을 환자에게 가르쳐 줄 것이다.나는 고양이를 고양이라고 부른다.라고 나오는데 여기서 고양이가 여성을 뜻하는 것 같은데 왜 고양이를 그렇게 표현한게 여성 비하발언일까 하는 의문이 들어서요...ㅠㅠ좀 도와 주셔요 ㅠ 찾아보니 도라의 두번째 꿈에서 숲과 님프가 동시에 작용해서 여성의 성적인 것을 은유한다와 나는 고양이를 고양이라고 부른다가 연결된다고 하던데 도무지 왜그런지 모르겟어요..

  7. 송다정

    | 2015.04.11 17:56 신고 | PERMALINK | EDIT |

    이글에서는 용짱님이 언어를 익히면서 철저히 언어의 상징구조에 따라서 고양이라는 개념과 대면하게 되는 것이다 라고 쓰여져 잇으시던데 뜻을 알고 싶습니다 ~~

  8. 엥겔스

    | 2016.06.08 21:06 신고 | PERMALINK | EDIT | REPLY |

    저기 죄송한데요 라캉이 자기 욕망에 충실해라는 말은 어떤 의미에서 쓴것인가요? 대타자의 욕망의 노예가 되지 말라는 뜻인가요? 그러니까 내가 그토록 바라고 열망하는 것을 사실 대타자도 가지고 있지 않다는것을 깨닫는거를 말하나요? 대타자가 빗금그어져 있다는걸 깨달으면 그 다음 일어나는 것은 뭔가요?? 인간인 이상 다시 새로운 상징적 질서 속으로 진입하게 되나요? 아니면 실재의 틈새에 머무르나요? 실재의 틈새에 머무르는 삶을 묘사하자면 어떤 삶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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