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응형
Notice
Recent Posts
Recent Comments
관리 메뉴

★ image or real

쿵푸팬더(2008), 용의 전사와 니체적 자기극복 본문

영 화/애니메이션

쿵푸팬더(2008), 용의 전사와 니체적 자기극복

유쾌한 인문학 2010. 4. 15. 09:59
반응형





쿵푸팬더(Kung Fu Panda)
드림웍스가 2008년도에 내놓은 최고의 애니메이션 쿵푸팬더.  아마 보신들이 상당할 것으로 예상된다.  흥행에도 대성공한 아주 유명한 작품이니 말이다.  이 작품을 가지고 당시 중국에서 시비를 건것으로 기억된다.  주로 문제삼은 지점은 중국의 상징적 동물인 팬더의 묘사에 문제가 있다는 식으로 시비를 걸게 되는데 사실 이 얼마나 웃긴 상황인가.  사실 애시당초에 말도 안되는 것을 두고 문제를 삼은 것인데 사실 그 본질적 이유는 다른 곳에 존재한다.  그게 뭘까?  그건 쿵푸팬더가 던져주는 메세지에 존재한다. 


Copyright (c) Dream Works. All rights reserved.


네안의 용의 전사와 니체
항상 쿵푸 고수가 되기를 꿈꿔왔던 팬더는 자신의 영웅인 무적의 5인방의 피규어를 매일 같이 바라보며 꿈속에서 무적의 5인방을 거느리면서 악당을 물리치는 상상을 해오곤 한다.  꿈이라고 하는 것이 참 재미있는지라 그 순간만큼은 완벽한 나의 모습에 빠져들기도 하고 꿈속에서 이루어지는 완벽한 나의 세상속에서 만족감을 얻은 채 그속에서 빠져나오지 못하는 현상도 나타나곤 한다.  사실 이런 현상은 인간이라면 누구나 다 가지고 있는 그런 종류의 것 아니겠는가?  여러분들도 머리속에서 상상의 나래를 펼치며 그 상상속에서 완벽한 나의 모습에 도취감을 느끼곤 할테니 말이다. 

하지만 상상은 상상에서 끝날뿐 짧은 만족은 곧 현실로 돌아오면서 사라지게 된다.  바로 이때 사람이 보여주는 태도는 크게 두가지라고 할 수 있다.  그 상상속의 나에게 집착하여 그속으로 빠져들어가는 사람들과 현실속에 존재하는 나를 직시하면서 나 스스로를 초월하려고 하는 자세에 이르기까지 말이다.  그리고 우리는 전자의 경우를 상당히 많이 발견 할 수 있다.  일종의 정신병이라고 할 수 있을까?  상상속의 나에게 집착하게 되면 상징적 주체인 나를 부정하게 된다.  그속에서 살아가길 원하면서 그 속에 존재하는 가공의 인물들과 대화를 나누는 것이다. 

팬더는 그렇게 항상 꿈속에서 무적의 5인방과 대화를 나누며 자신만의 세상에서 살아가게 된다.  그러던 어느날 대사부가 용의 전사를 뽑는 날이 오게 되고 그것을 구경하기 위해 팬더는 절로 향하게 된다.  하지만 팬더는 절에 너무 늦게 도착하여 내부로 들어가지 못하게 되어 무적의 5인방이 벌이는 화려한 쿵푸를 제대로 구경하지 못하게 된다.  이에 절내부로 들어가기 위해 갖은 애를 쓰다 화약을 이용하여 들어가게 되는데 그만 일이 잘못되어 하늘로 높이 치솟아 오르게 되고 절의 중심으로 떨어지게 된다.  그런데 해필 대사부가 용의 전사를 지목하기 위해 손가락을 드는 그 순간 손가락 바로 앞으로 떨어지게 되고 만다.  이를 두고 대사부는 이것또한 운명이라며 팬더를 용의 전사라고 지목해버린다. 

이부분이 참 재미있는 측면인듯하다.  우연성이 불러온 필연성이라는 부분 말이다.  이는 우연성과 필연성은 사실 하나라는 사고관이다.  무슨말일까?  우리는 흔히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것들에 의해 지배당하여 살아가곤 한다.  어떠한 일이 발생했을때 그것을 놓고 필연성이라는 사고를 전제하여 뭐든 당연하다고 여겨버리는 것이다.  하지만 곰곰히 생각해보면 필연성이라는 것도 그 인과를 따지고 들어가보면 수많은 우연들의 연속으로 이루어진 우주에서 보기 힘든 확률를 가진 사건의 발생이라는 것이다.  그렇기에 필연이라는 것은 우연성과 반드시 하나가 되기에 세상엔 우연은 존재하지 않게 된다.

아무튼 팬더는 그렇게 용의 전사가 되어 수련에 들어가지만 무적의 5인방에게서 무시당하게 되고 사부 역시 그를 무시하는건 매한가지이다.  하지만 팬더가 보여주는 진실성에 눈뜬 무적의 5인방은 그를 서서히 받아들이게 된다.  그러던 어느날 타이론이 감옥에서 탈출하게 되고 설상가상으로 대사부는 시푸 사부에게 큰 가르침을 준 이후 사망하게 된다.  그 가르침을 받은 시푸사부는 결국 그에 따라 팬더를 수련시키게 된다. 

그런데 막상 수련에 돌입해보니 팬더의 성장이 매우 눈부시다.  순식간에 꽤나 높은 수준에 이르러버린다고나 할까.  이때 대사부의 가르침이 자연스럽게 떠오르게 된다.  세상에 우연은 존재하지 않는다.  나무는 때가 되면 꽃을 피우기 마련이고 때가되면 열매를 맺기 마련이며 복숭아 나무씨에서는 반드시 복숭아 나무가 나올뿐이다.  이러한 선문답같은 질문의 본질은 복숭아 나무 씨 안에는 복숭아가 될 수 있는 모든 것들이 이미 내포되어 있다는 것이다.  결국 팬더에게도 그 내면에 눈뜨지 못하고 아직 때를 기다리고 있는 가능성이 존재한다는 것이고 그것이 아직 싹트지 않았을 따름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대사부의 가르침은 타우론과 비교해보았을때 더욱 명확하게 다가온다.  타우론은 시푸 사부의 각별한 보살핌을 받으며 정말 열심히 수련해왔지만 대사부는 타우론을 용의 전사로 지목하기를 거부하게 된다.  왜 일까?  타우론은 정말 열심히 수련을 하였지만 그가 행한 수련은 타자의 욕망을 자신의 욕망으로 바꾼것에 다름아니다.  자기 내면에 있는 씨앗을 발견하였다기 보다는 타인이 욕망한 것을 스스로 욕망한 것에 다름아니라는 점이다.  그렇기에 그는 아무리 열심히 수련을 하여 아주 강해졌다 하더라도 깨달음을 얻은 대사부를 이길 수는 없었고 그렇기에 감옥에 갇히게 되는 것이다. 

아무튼 드디어 용의 전사가 될 수 있는 비법이 적힌 두루마리를 팬더는 획득하게 되지만 막상 열어보니 그안에는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다.  텅빈 공간.  되려 거울처럼 미끈하게 되어 있는 두루마리는 팬더의 얼굴을 비출뿐이다.  하지만 팬더는 자기 아버지의 한마디로 인해 깨달음을 얻게 된다.  맛있는 국수 국물을 만들기 위한 비법따윈 존재하지 않으며 오직 자신에 대한 믿음에서 그 국물이 나온다는 그 한마디에서 두루마리에 비친 자신의 얼굴의 의미를 깨닫게 되는 것이다. 

바로 여기에서 니체적 성찰을 확인할 수 있다.  타자의 욕망에 집중하기보다는 자신의 내부에 존재하는 씨앗에 집중하고 그 씨앗들을 끊임없이 싹틔우기 위해서 노력하는 지속적인 자기 극복적 성찰.  이 성찰들을 통한 끊임없는 발전적 양상은 어떻게 보면 우연으로 가득차보이지만 그 모든것은 자신의 행위에서 비롯된 필연성이라는 것이다.  아무튼 깨달음을 얻은 팬더에게 타우론은 상대가 될 수가 없는 것이고 그렇게 팬더는 마을을 지키게 되고 과거 자신이 항상 상상해왔던 꿈속에서 그리던 무적의 5인방을 거느리던 꿈이 현실로 이루어지게 된다.


Copyright (c) Dream Works. All rights reserved.


마무리
자 이제 제일 처음 던졌던 질문으로 돌아가보자.  중국은 왜 이 영화에 그렇게 시비를 걸었을까?  그 이유는 팬더가 보여주는 니체적 자기극복 그 자체가 문제가 되는 것이다.  아무래도 중국은 여전히 정치적으로는 공산 1당주의이다보니 대중들이 지속적으로 자기극복으로 나아가는 것은 상당히 문제가 되는 지점이라 할 수 있겠다.  1당 공산 독재가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역시 인민들이 아무 생각없이 주어진 상황속에서 살아가는 것이 중요할테니 말이다.  뭐 개인적인 생각일뿐이고...

아무튼 이 영화는 간단하면서도 참 어려운 질문을 던져준다.  내안의 씨앗을 발견하고 그것에 집중하여 항상 자기극복할 수 있는 성찰적 태도.  감히 아무나 이룰 수 없는 최고의 경지이다.  물론 많은 사람들이 이러한 사실을 머리로 알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지만 과연 그게 아는거라고 할 수 있을까?  안다면 실천해야 한다.  실천하지 못하는 앎은 진정한 앎이 아니다.  진정한 앎을 깨달았다면 그건 반드시 실천으로 이어질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나도 여전히 모른다.  진정한 깨달음은 아무나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만 이해할 따름이다.

반응형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