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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르시스(Narcisse), 나르시즘을 표현한 솔로 본문

발 레/현대 발레

나르시스(Narcisse), 나르시즘을 표현한 솔로

유쾌한 인문학 2010. 11. 6. 21: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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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르시스
안무가는 미하일 포킨이며 1911년 디아길레프발레단 즉 발레 뤼스를 통해 몬테 카를로에서 초연된다.  당시 장치 및 의상은 레옹 박스터가 맡았게 된다.  이 작품에 대해서도 아는바는 전혀 없다.  일단 남성 솔로 작품이다.  흔치 않은 남성 솔로인데 이는 미하일 포킨이 주로 행했었던 남성 무용수의 위치 조절 작업에 기반한 것으로 보인다.  처음 작품을 보았을때 든 기분은 니진스키를 염두에 두고 만든 작품인걸까? 라는 생각이었다.  왠지 모르게 니진스키가 떠오른다고 할까나.  아니 아마 맞을 것이다.  아무리봐도 니진스키가 계속 떠오르니 말이다.

이 작품은 음악과 안무의 조화가 아주 멋지다.  음악의 형상화라고 보아도 무방할 정도로 완벽하게 일치된 모습을 보여준다.  역시 포킨이라는 말이 절로 나올정도라고나 할까.  나르시스라는 제목에서 알 수 있듯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그리스 신화속의 나르키소스를 주인공으로 하여 만든 작품이다.  그래서 극 중반에 물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확인하는 장면도 등장한다. 


블라드미르 바실리예프
이작품은 요즘에도 지속적으로 올려지고 있는 것으로 확인되고 있다.  가장 최근 2008년도의 공연 동영상도 쉽게 구할 수 있었으니 말이다.  아래의 동영상은 블라드미르 바실리예프(Vladimir Vasiliev)의 영상이다.  1940년 생으로 여전히 생존하고 있는 무용수로 구소련 시절 볼쇼이 발레단의 전설과 같은 무용수이다.  영상이 상당히 많이 남겨져있는데 주로 아내인 막시모바(Maximova)와 함께한 영상물이 대다수이다. 

막시모바와 바실리예프는 가히 구소련의 전설과 같은 무용수들로서 막시모바는 작년에 타계하였다.  바실리예프의 명성이 극도로 알려지게 된 작품은 유리 그리고로비치의 스파르타쿠스이다.  그 작품의 초연을 맡게 되는데 아주 카리스마있으면서 강인한 명성을 떨치게 된다.  스파르타쿠스는 상당히 고난이도의 안무로 유명한데 특유의 부부간의 파트너쉽으로 완벽하게 소화해내면서 가히 최고의 공연을 이루게 되며 그 영상물이 흑백으로 현재 전해지고 있다. 






나르시즘
나르시즘에 대해서 알아보자.  정신분석에서 거울단계는 1세 전후의 어린아이에게서 발생하는 현상이다.  주의할 부분은 어린아이와 거울이라는 비유는 하나의 상징적 표현이지 진짜 거울을 생각해서는 안된다.  아이가 거울을 보고 거울에 비친 이미지를 보게 되면 어떤 현상을 보이게 될까?  흔히 동물들이 그 이미지가 자신인 것으로 생각을 못하듯이 어린아이 역시 처음엔 그 이미지를 혼동하게 된다.  그러다 어느 순간 거울에 비친 이미지가 자신의 이미지라는 사실을 인식하게 된다.

거울을 보면서 아이는 자신이 하나의 전체로서의 완전한 형태를 띄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하지만 아이는 아직 1세 전후이므로 자신의 몸을 완벽하게 통제하지 못하는 경험을 가지고 있다.  즉 자신의 신체를 완전하게 통제하지 못하는 개인적 경험과 거울속의 완벽한 이미지는 서로 상충하게 된다.

이때 아이는 자신의 불완전한 신체를 자신이라고 생각하기보다 거울속의 이미지를 자신이라 생각하고 자신과 동일시하게 된다.  이 동일시의 과정은 매우 중요한데 이 동일시를 통하여 아이는 자신을 완전한 존재로서 인식할 수 있기 때문이다.  즉 이미지에 매료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동일시는 결국 이미지와 자신을 햇갈리게 함으로 소외적이라 할 수 있다.  불완전한 자신보다 완전한 이미지를 자신과 동일시하니 소외적일 수 밖에 없다.  즉 거울 속의 완전한 이미지를 자신으로 여기면서 불완전한 자신의 신체에 대한 경험과 기억은 무의식의 영역으로 추방당하는 것이다.


이러한 매료와 소외의 사이에서 지독한 나르시즘이 발생하게 된다.  즉 나르시즘은 이미지에 매료된 자신의 모습이라 볼 수 있는 것이고 만약 자신의 이미지를 통한 자기 도취가 사라지는 순간에는 다시 억압된 무의식의 자신의 신체에 대한 파편화된 소외가 떠오르며 자신을 지배하게 될 것이다.  결국 나르시즘은 도취와 소외의 중간에 서있는 현상이라 볼 수 있다.

아무튼 이러한 완전한 이미지의 동일시를 통한 완전한 존재로서의 인식은 결국 불완전한 자신이 타자가 되는 대가를 치르면서 얻는 것이다.  자아는 이러한 완전한 이미지에 대한 소외와 매료의 과정에서 생겨난다.  자아는 이미지의 효과들로서 이미지가 조직하고 구성하는 특성에 의해 형성된다.  이것이 상상계의 기능이다.  자아는 결국 환영의 이미지에 근거하는 것이고 이러한 완전한 이미지를 자신이라고 착각하게 만들고 이를 유지하는 것이 주된 기능이다.  

완전한 이미지는 주체, 파편화된 자신의 신체는 자신이라 칭했을때 주체와 자신은 경쟁의 구도를 이루게 된다.  이러한 주체와 자신과의 경쟁관계는 1차적 내부적 갈등이라고 할 수 있으며 이것이 확장되면 2차적 갈등.  즉 타자가 만들어낸 이미지와 자신이 경쟁하게 된다.  테제는 안티테제에 의해 존재할 수 밖에 없으므로 결국 타자의 인식 즉 타자의 이미지는 자신이 존재하기 위한 필수적 요소이다.  이는 나와 같은 이미지가 매개되었음을 의미한다.  결국 자아는 타인 즉 외부세계를 통해 형성된다는 결론이 내려진다.  여기에서 데카르트의 코키토적 사고방식이 무너지는 경험을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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