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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터 드랍스 온 버닝 락(1999), 남겨지는 욕망 본문

영 화/프랑스 영화

워터 드랍스 온 버닝 락(1999), 남겨지는 욕망

유쾌한 인문학 2010. 9. 28. 20: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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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터 드랍스 온 버 닝 락(Water Drops On Burning Rocks)
오종 감독의 4번째 중장편 영화이다.  프랑소와 오종은 98년도에 '바다를 보라'를 비롯한 세개의 작품을 내놓게 되고 99년도에는 크리미널 러버와 워터 드랍스 온 버닝 락을 내놓게 된다.  다작 작가라고 볼 수도 있겠지만 아무래도 아직 초기인지라 실험적인 면모가 많이 보이고 영화 자체가 간결하기에 매년 수개의 영화를 찍는게 그렇게 어렵진 않을꺼 같다.  혹자는 그렇게 각본이 쉽게 쉽게 나오느냐? 라고 물을 수도 있겠지만 인식의 틀이 넓어져있다면 보는 시각 자체가 상당히 넓어지기때문에 그다지 어려울 것도 없다.  더군다나 프랑스인 아닌가?

어쨌든 이 작품을 제일 처음 보았을때 느낌 감정은 당혹 이 한마디로 깔끔하게 정리가 가능할 것 같다.  뭘까?  왜 이런걸 만든건지.  처음엔 동성애 영화인가? 라고 생각했지만 특유의 불쾌함은 느껴지지 않았다.  사실 나는 이성과는 별개로 감정적으로 동성애를 굉장히 혐오하는 사람인데 분명 등장하는 동성 성관계 장면 앞에서 그런 느낌이 들지 않는 이유는 동성애 그 자체에 포인트가 놓이는 영화가 아니기 때문이다.

극을 영화로 만든거라 4막구조로 이루어지게 된다.  내용을 간단히 말해보자면 프란츠(포스터 1번 남성)는 안나(포스터2번 여성)와 결혼을 하고 함께 살려고 하는 계획중인 청년인데 어느날 레오폴드(포스터 4번 남성)의 유혹에 이끌려 그의 집으로 들어오게 된다.  대화를 나누다 둘은 성관계를 맺게 되면서 1막이 내린다.  2막에서는 둘은 이미 동거중인데 지속적으로 다툼이 일어난다.  강압적이고 군림하려고 드는 레오폴드의 태도에서 프란츠는 당황스러움을 느끼지만 그를 너무 사랑하기에 이해하려고 한다.  3막에서 둘의 대립은 더욱 극심해지고 거의 회복불가능할 정도로 보일만큼 다툼이 커지게 된다.  레오폴드는 잠시 일을 하러 출장을 가게 되고 그때 4막이 시작된다. 

4막에 들어 안나가 등장하여 프란츠를 그에게서 벗어나게 하고 자신과 함께 하기를 요구하고 둘은 떠나기로 하는데 그때 레오폴드가 등장한다.  레오폴드를 처음만난 안나는 거의 묘한 매력에 빠져들게 되고 이때 레오폴드의 옛 연인인 베라(포스터3번 여성)가 등장한다.  안나와 베라를 침실로 들여보낸 후 레오폴드가 들어가지만 레오폴드는 안나와 섹스를 할뿐이다.  실망한 베라는 나와 프란츠와 대화를 나누게 되고 프란츠는 결국 자살을 선택한다. 




충족될 수 없는 남겨지는 욕망
일단 이 영화는 공간적으로는 집안에서 모든 것이 이루어지게 되고 등장인물은 총 4명에 불과하다.  초저예산 영화라고 볼 수 있는 작품인데 한정된 공간과 4명의 인물의 관계를 조명하는 영화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그 조명하는 방법이 아주 독특하다.  보통의 흔해빠진 영화들은 이런 그림 하에선 4각관계를 들고올 가능성이 높은데 이 작품은 그렇지 않다.  위의 포스터에서 보이는 제일 오른쪽에 서있는 레오폴드가 주도권을 가지고 어떤 파워를 가진 즉 군림하는 자라면 그외 3명은 그에 의해서 재창조된 인물 또는 규정된 인물들이라고 보아도 무방할 정도로 소극적이면서 꽉 잡혀버리는 양상을 보여준다.

동성애라는 것이 그다지 중요하지 않는 이유는 바로 이부분에서 존재한다.  즉 사랑의 주종관계라고 해야 할까?  그런 측면이 부각되는 작품이다보니 종의 위치에 있는 자가 남자이냐 여자이냐 성전환자이냐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는 결론이 내려진다.  되려 자연적으로 존재하는 두가지 성과 인간의 기술이 만들어낸 성전환자라는 제3의 형태까지 등장시킴으로 인해 주종관계를 확대시켜 제시하게 된다.  주의 위치에 서는 사람의 성별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엄밀히 말하자면 여성이라도 상관은 없다.  중요한건 그가 가지고 있는 지위와 힘 그리고 질서 그 자체에 존재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레오폴드를 남성으로 선택한 것은 일반적인 관객들에 대한 배려라고 할 수 있겠다.

위에서 사랑의 주종관계라는 표현을 하였지만 사실 이는 정확한 표현이라고 보기 힘들다.  사랑이라고 하는 특정하고 특수한 좁은 감정을 중심에 놓게 되면 보편성을 상실하게 된다.  즉 이 영화를 보고 '저것이 사랑이다'라고 모든 사람이 이해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나만 해도 이해가 안가니깐.  저게 무슨 사랑인가?  내보기엔 쾌락에 미친 인간들로 밖에 안보인다.  그렇기에 사랑에 지나치게 집착하는것은 텍스트를 바라보는 방법에 약간 문제가 있다고 할 수 있다.  결국 핵심은 욕망 그 자체에 존재한다.  사랑을 버리고 욕망이라는 넓은 감정을 중심에 놓는다면 보편성을 획득할 수 있게 된다. 

인간이 가지고 있는 욕망이라는 것의 근본적 원인은 결여에서 비롯한다.  이 결여는 자아 형성 이전에 존재하던 결여에서부터 자아 형성 이후 상징적 질서의 도입 이후 발생하는 어머니의 박탈에서 비롯되는 결여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형태로 나타나게 되고 이것을 끊임없이 채워나가길 원하는 것이 바로 욕망이다.  하지만 또 한편으론 욕망이라는 것은 그 실체가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해서 그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끊임없이 원하지만 결코 채워지지 않고 끊임없이 남겨지는 무엇이라고 할 수 있다.

예를 들어 당신의 어떤 고통 슬픔 따위를 언어로 의미화 하여 타인에게 이야기 한다고 하였을때 그 감정은 절대로 타인에게 그대로 전달 될 수가 없다.  아무리 묘사를 잘하고 잘 설명한다 해도 타인은 당신의 마음을 100프로 이해할 수 없고 반드시 남겨진 무언가가 존재한다는 것이다.  또 다른 예로 당신이 무언가를 원한다고 했을때 그것이 원하는 그 순간 즉각적으로 이루어진다고 한들 당신의 욕망은 결코 채워지지 않은채 무언가 남게 된다.  이것이 바로 욕망이라는 것이 가지는 특징이다. 

영화로 돌아가 레오폴드의 과거이 연인인 베라와 현재의 연인인 프란츠는 레오폴드를 지독하게 사랑한다.  너무나도 사랑하지만 양자가 가지고 있는 각각의 욕망이 언어로 기표화되면서 상대방에게 다가가는 순간 끊임없이 결여가 발생하게 된다.  그러니 다툼이 생기는것 아니겠는가?  더욱이 양자가 가지는 욕망의 크기도 다르기 때문에 한쪽에 상징적 질서가 부여되게 된다.  그 질서 안에서 욕망들이 부유하고 있다고 보면 정확할 것이다.  그렇기에 이 영화에서 레오폴드는 단 한명의 인물이라기 보다는 어떤 질서 그 자체가 된다.

레오폴드가 가지고 있는 이러한 상징적 질서로서의 힘은 베라와 프란츠의 입장에서 어린시절 다가왔던 오이디푸스의 경험과 일치한다.  프란츠는 5살때 어머니의 이혼 하게 되고 새아버지를 매우 증오한다.  두어번 정도 새아버지와 관련된 꿈을 꾸는데 그가 코트를 입은채 자신의 침대로 들어와 자신을 겁탈하는 것이 주된 내용이다.  이러한 꿈 자체가 어머니와 관련된 결여 그리고 아버지 좀 더 정확히는 질서에 대한 두려움이라고 할 수 있다.  중요한건 프란츠는 레오폴드를 욕망함으로써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결여가 채워질거라 생각했겠지만 그것은 가능하지가 않다는 점이다. 

질서 자체를 두려워하되 그것 자체를 욕망하는 상황이기에 즉 프란츠는 스스로 레오폴드와 같은 질서가 되고 싶은 욕망이 있기에 문제가 발생한다.  이러한 프란츠가 가지는 질서로서의 욕망은 총 두번에 걸쳐 등장하게 된다.  한번은 2막 마지막에서 레오폴드를 침실로 먼저 보내놓고 자신이 코트를 입은채 침실로 들어가는 장면과 4막에서 안나의 등장 이후 안나를 침실에 먼저 보내놓고 자신이 코트를 입고 들어가는 장면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다.  결국 이 영화에서 코트라는 매개는 대단히 중요한 상징을 가지게 된다. 

여기에서 프란츠와 베라의 궁극적인 차이점이 드러나게 된다.  과거 레오폴드의 연인이었던 베라는 원래 남자였다.  그 역시 프란츠와 똑같이 레오폴드의 곁에서 살았지만 어느 순간 레오폴드는 베라에게서 지겨움을 느끼게 된다.  영화에서 직접적으로 나오진 않지만 베라도 역시 레오폴드가 됨으로써 질서 그 자체가 되길 원했음은 어렵지 않게 예상할 수 있다.  그도 남자니깐.  그리고 베라 역시 아마 프란츠와 마찬가지로 끊임없이 레오폴드와 충돌이 생기게 되고 다툼이 벌어졌을 것이다.

급기야 레오폴드가 자신을 멀리하게 되자 그때 베라의 선택은 성전환이다.  성전환을 통해 여성이 된다는 것은 레오폴드가 가지고 있는 상징적 질서로의 편입을 거부한다는 것을 의미하게 된다.  결여는 채워질 수 없는 것인데 그것을 인정하지 못한채 레오폴드에게서 결여를 끊임없이 채우려고 하다보니 저 상황까지 가게 된것이다.  하지만 의미화 구조로서의 질서는 결코 결여를 채워줄 수 없기에 베라는 끝내 버림받게 된다. 

이러한 현실을 잘 이해한 프란츠의 마지막 선택은 자살이다.  독약을 먹은 뒤 어머니에게 자신이 독약을 먹었다고 말을 하지만 어머니의 반응은 냉담하다.  사실 인간이 가지는 최초의 결여는 어머니의 상실에서 비롯된다.  즉 어머니의 욕망의 대상이 내가 아니라 아버지의 페니스라는 사실을 깨달았을때 둘은 분열되고 이때 결여가 발생하게 되는바 그 결여를 다른곳에서 찾았지만 찾지 못하고 마지막 순간 어머니에게 말을 해보았지만 어머니는 끝까지 새아버지의 페니스만을 욕망할뿐이기에 냉담한 양상을 보여주게 된다.  프란츠는 자신이 질서가 될 수 없음을 깨달았고 그와 동시에 베라처럼 되기를 원하지도 않았기에 죽음을 선택하는 것이다.  그들은 질서의 피조물이니깐.




마무리
프랑스 영화는 골이 아파서 좀 기피하게 되는데 이 영화 역시 상당하다.  대충보면 뭐 이런 영화가 다있나?  싶을 정도로 특이하고 공감이 안가는 영화이지만 인식의 범위를 조금만 확장시켜 영화를 바라보면 상당한 보편성을 가지고 있는 작품이라는 점을 확인할 수 있게 된다.  개인적으론 참 재미있게 본 영화인데 특히 마음에 든건 극중에서 안나로 등장하는 배우이다.  내가 왜 이런말을 하는지는 영화를 본사람만이 이해할 수 있을터.  그냥 내스탈이야 라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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