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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추억(2000), 탈성애의 저항과 섹슈얼리티의 지향 본문

영 화/프랑스 영화

사랑의 추억(2000), 탈성애의 저항과 섹슈얼리티의 지향

유쾌한 인문학 2011. 3. 16. 0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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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추억(Sous Le Sable, Under The Sand)
오종 감독의 5번째 장편영화이다.  이 작품이 사실상 첫번째 국내 정식 개봉 영화인걸로 알고 있다.  한국에는 2002년도에 개봉하게 된다.  이 작품 이후부터는 오종의 모든 작품들이 국내에 개봉하게 된다.  오종의 작품들은 철저하게 성담론에 입각한 작품들이 대부분이다.  즉 성이라고 하는 것을 다양하게 바라보는 것이 핵심적 시각이라 볼 수 있다.  보통 성을 바라보는 보편적 시각은 생물학적 구분으로 남자, 여자 이렇게 단순하게 생각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는 이렇게 간단하게 도식화되어 이분화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오늘날 비정상이라고 규정되어지는 다양한 젠더성 역시 분명한 하나로서의 성을 이룰 수 있는 것이고 이것들의 다양함의 인정에서 만족도가 높아지게 된다. 

멀리 볼거 없이 오늘날에는 그나마 인정받고 있는 동성애만 보더라도 고대에는 지극히 정상적이고 당연한 젠더중 하나였으며 어떤 문화권에서는 이를 되려 존중하고 존경하는 모습까지도 보여주게 된다.  결국 젠더라는 것이 가지는 정상과 비정상성은 철저하게 규정된 것에 다름아니다.  현재의 시각을 소급하여 고대인을 이상하게 볼 것이 아니라 순객관적으로 바라볼 필요성이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순객관적 시각은 현대에도 여전히 유효하다.  규정된 사고에서 벗어나 단순히 바라본다면 비정상으로 여겨지는 수많은 젠더들은 사실 비정상일 이유가 하나 없다.  피해를 주는 것도 아니고 불쾌함을 느껴야할 당위도 존재하지 않는다.  느껴지는 불쾌함은 철저한 교육의 산물일뿐이다.

우리가 흔히 받아들이는 생물학적 남녀의 구분도 획일적으로 남 그리고 여로 결론 지을 수 있는 성격이 아니다.  같은 생물학적 분류내에서도 얼마나 다양한 형태의 태도가 존재하는가?  하지만 이 안에서도 정상과 비정상에 대한 규준은 정확히 적용되어 여성이 섹스를 함에 있어서 허용되는 태도와 허용되지 않는 태도를 정확히 구분하고 이를 정상과 비정상으로 나누어버리게 된다.  이러한 하나하나의 비정상의 규정은 철저하게 인간에게 있어 억압으로 다가올 수 밖에 없다.  비정상으로 규정지었지만 분명 존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오종의 5번째 영화인 사랑의 추억도 이러한 측면에서 바라보면 아주 간명하게 다가온다. 


탈성애의 저항과 섹슈얼리티의 지향
이 작품에서 주인공인 여성(마리)은 아주 매혹적인 중년 여성이다.  한국에서는 거의 늙은 아줌마 취급 받을 나이이지만 항상 거울을 바라보며 주름을 방지하기 위해 아이크림을 바르고 자신을 꾸미는데 노력한다.  중요한건 자신의 나이듬을 인정하지 못해 소녀처럼 살고자하는 그런 성격의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현상태 그대로의 자신을 인정한채 그 안에서 여성성을 상실하지 않기 위한 노력이라고 보는 것이 정화하다.  이부분이 대단히 중요한 측면이다.  여성들은 어느정도 나이가 들어 늙게되면 스스로 여성으로서의 모든 것을 포기해버리는 경향이 나타난다.  이는 문화권에 따라 조금 차이가 있긴하지만 전반적으로 보았을때 나이든 여성이 여성으로서의 성을 추구하는 것은 분명 비정상으로 규정되는 곳이 많기에 생겨나는 현상이다.  마리는 이러한 관념에 순응하지 않고 자신의 매혹적인 모습을 유지하려고 노력하게 된다.
  남편의 실종 이후에도 마리의 이런 태도는 변하지 않는다.  파티에 나갈땐 매혹적인 빨간색 드레스를 입고 운동도 열심히 하며 수영장에서 수영을 할때도 수영장 내의 다른 중년과 정확히 대비되는 매력을 뿜어낸다. 

영화 시작과 동시에 마리는 남편(쟝)과 휴가를 떠나게 되고 휴가중 해변에서 남편은 실종된다.  남편은 전형적인 중년 남성인데 이 역시 남성성을 상실한 남자이다.  뚱뚱하며 성적인 매력은 전혀 없으며 부인에게서도 성적인 감흥을 느끼지 못한다.  그렇다고 부인을 사랑하지 않는건 아니다.  그냥 철저하게 남성성이 결여되버린 것이다.  이 또한 여성과 마찬가지로 중년의 남성이 가져서는 안되는 문화가 비정상으로 규정한 섹슈얼리티의 상실을 정확히 대변한다.  영화속에서 쟝의 이러한 성향은 색상을 통해 상징되는데 휴가중 해변가로 나갈때 마리는 빨간색 원피스를 입고 가 파란색 깔개위에 몸을 누이지만 쟝은 빨간색 깔개위에 몸을 누이는 걸 거부한채 수영을 하러 가게 되고 이에 실종된다.  쟝에게 제시된 빨간색 깔개와 나란히 눕지 않은채 떠남은 그가 상실한 섹슈얼리티를 정확히 대변한다.  이렇듯 빨간색은 대단히 중요한 색상이다.  이러한 색상을 통한 섹슈얼리티와 캐릭의 성적 측면의 강조는 오종 영화 전반에서 확인할 수 있는 부분이다.

이러한 일상 속에서 놀라운 사실이 등장하는데 남편은 분명 실종되어 죽었음이 확실히 추정되는 상황에서 남편의 부재를 받아들이지 않는다.  결국 그녀는 집안에서 남편의 환상과 함께 살아가게 된다.  남편이 없음에도 남편의 셔츠를 사려고 하고 아무도 없는 집안에서 남편의 환상과 함께 식사하고 이야기를 나눈다.  마리의 혼자됨을 걱정한 친구들이 소개해준 뱅상을 만나고 데이트하면서 그녀는 과감하게 남편인 쟝에게 이야기하기도 한다.  뱅상과 섹스를 할때는 과감하게 상위로 올라가 뱅상에게 원하는 애무를 요구하고, 혼자 자위를 할때는 두개의 손을 상상하는데 쟝과 뱅상이 각각 자신을 애무하는 것을 상상하여 자위의 도구로 이용한다.  이렇듯 마리는 자신의 여성성과 성적 욕망을 철저하게 유지하고 남성을 유혹하는 상황을 즐기는 양상도 보여준다.

하지만 끝내 그녀가 극복할 수 없는 것은 바로 남편의 부재라는 자명한 사실이다.  대상상실로 인해 리비도의 철회과정에서 그는 상실된 대상과 동일시하여 애도를 거치지 못한채 자아상실 우울증으로 나아가게 되고 이러한 우울증은 공동묘지 옆에 집을 구하는 장면과 홀로 앉은 지하철 장면에서 잘 표현된다.  쟝의 부재는 단순하게 남편의 상실로 볼 수 없다.  이 부재는 여성성을 확인받고자 하는 대상의 상실이다.  남성성을 상실한 쟝을 지속적으로 유혹하고 그를 통해 확인되는 여성성의 확인은 자신의 존재의 확인에 다름아니다.  결국 쟝의 부재를 인정하지 않는 것은 존재의 무너짐에 대한 저항이라고 볼 수 있다.  텅빈 쟝의 사무실과 빈 의자에서 그녀가 보는 것은 사라진 자신이다.  그렇기에 쟝의 시체를 발견하였다는 경찰의 신고를 그녀는 처음엔 무시한다.  뱅상에게도 차가운 눈빛을 보내는데 뱅상의 받아들임은 쟝의 부재를 인정하는 것이기에 문제가 생긴다.  점점 무겁게 다가오는 쟝의 부재에 대한 진실은 결국 그녀를 경찰서로 이끌고 그곳에서 그는 쟝의 시체를 바라보게 되고 그녀는 일순간 무너지게 된다.  해변에 홀로 앉은채 눈물을 흘리던 그녀는 누군지 알 수 없는 어느 대상을 향해 뛰어가면서 영화는 마무리 된다.


마무리
결국 쟝의 부재가 의미하는 것은 여성성 상실에 대한 두려움이라고 볼 수 있다.  장의 시체의 확인을 통해 급격한 무너짐을 경험하지만 누군가를 향해 뛰어가는 마지막 장면은 그녀의 능동적면을 부각시킨다.  중년여성에게 강요되는 탈성애적 모습이 아닌 섹슈얼리티의 추구와 욕망.  이것을 통한 존재의 확인이야 말로 이 작품의 핵심인 것이다.  사실 오늘날 많은 중년 여성들은 이러한 자신의 섹스를 상실하면서 급격한 우울증으로 빠져드는 면모를 자주 보여준다.  그렇다고 과감하게 추구하기엔 사회 전반의 인식이 대단히 억압적이기에 그리할 수도 없다.  결국 이 자체가 전반적인 여성성에 대한 폭력이 된다.  이러한 측면이 프랑스 감독을 통해서 그려지는 것이 흥미로운데 상당히 개방적이라 생각되는 그 문화권에서도 이러한 현상이 존재한다는 것일 테고 이는 한국에서 더욱 크게 다가오지 않은가 판단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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