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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린 브로코비치, 환경을 지킨 작은 손길의 승리

근대 이성에 대한 믿음과 합리성에 대한 신봉이 가장 극적으로 들어나는 부분은 바로 공리주의적 태도일 것이다.  신에 대한 의무의 시대에서 이성과 합리성에 의해 권리의 시대로 넘어가는 근대는 공리주의적 결과론에 입각하여 자본주의의 발전과 결합하면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게 된다.  즉 사유재산과 시장을 중시하는 자본주의는 공리주의와 결합하여 개인의 경쟁력과 성과를 중시하여 최대한의 결과를 얻어내면서 최대한의 경제적 발전을 이끌어내는 것이다.  이러한 공리주의의 태도는 비단 경제의 영역 뿐만 아니라 근대 민주주의 발전에도 큰 영향을 끼치게 된다.  의사결정에 있어서 다수결에 입각한 결정 방법론과 자본주의의 결합된 발전은 중세적 계급제도를 무너뜨리게 되고 시민혁명을 통한 새로운 계급 구조의 구성에 기여하게 된다.  즉 시민혁명과 자본주의의 발전은 자연스럽게 부르주아 계층이라는 새로운 지배계층을 형성하며 근대의 계급구조를 만들어나가게 된다.  이렇듯 공리주의는 근대의 형성에 있어서 비단 윤리의 부분을 넘어 다방면에서 영향을 끼치게 된다. 


공리주의는 전형적인 목적론적 사고관의 하나로서 도구적 이성론과 결합을 하게 되면 지나친 성과 위주의 태도로 인해 지독하게 폭력적인 양상을 보여주게 되며 이러한 양상은 영화 에린 브로코비치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이 작품은 미국에서 벌어진 PG&E 사건을 기반으로 한 작품으로 한 기업이 돈을 벌기 위해 부정한 수단을 이용하게 되고 그로 인해 엄청난 피해를 입은 주민들이 거대 기업과 법정 싸움을 벌여 이긴다는 내용이다.  일단 결과적으로 바라보았을때 기업의 발전은 많은 사람들을 고용하여 그들을 가난에서 벗어나게 할 수 있는 이점을 가지게 된다.  이에 이성은 도구적 이성으로 변질된채 최고의 결과를 이끌어내기 위한 방법론으로 모든 것을 철저하게 수치화한 이후 최대의 효율을 가져오는 수단이 최고의 도구로서 바라보게 된다.  이에 PG&E라는 회사가 내린 결론은 중크롬이라는 인체에 굉장히 해로운 물질을 사용하더라도 그로 인해 근처 마을 사람들이 입는 피해는 중크롬의 사용으로 인한 이익보다 더 크다는 결론을 내리고 이를 쉬쉬한채 암묵적으로 사용하게 된다.  이러한 상황을 공리주의적 입장에서 바라본다면 뭐라고 할 수 있을까?  PG&E라는 회사는 초거대 대기업으로서 엄청난 사람들을 고용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회사가 최대한의 이윤을 남겨 최대한의 성장을 해낸다면 더 많은 사람들을 고용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어느 정도의 희생은 감내할 수 있는 것이 아닐까?  공리주의자들은 감내할 수 있다고 대답할 가능성이 대단히 높다.  하지만 이는 나에게 당장 닥치지 않았을때에만 ‘그렇다’라고 대답할 수 있는 것이지 막상 나에게 닥칠 가능성이 높아진다면 어느 누가 ‘그렇다’라고 대답을 할까?  이러한 사건은 비단 미국의 예를 볼 것 없이 한국의 현실에서도 쉽게 확인할 수 있다.  S그룹의 반도체 회사에서 사람들이 백혈병으로 죽어나가더라도 사람들은 자신에게 닥칠 일이 아니기에 너무 나도 쉽게 대기업의 손을 들어준다.  이유인즉슨 그 기업이 우리를 먹여살리기 때문이라고 말하는데 이런 식의 논리라면 자신에게 그런 일이 닥치더라도 본인은 그걸 무조건 감내해야만 한다.  하지만 과연 그런 사람이 있을까?  기업의 이익과 국가의 발전을 위해 나의 백혈병을 감내하겠다고 외치는 사람이 과연 존재할까?  그렇다면 이러한 모순된 결론을 이끌어내는 공리주의란 도대체 무엇일까?





행위 공리주의와 규칙 공리주의

공리주의는 적용 방법에 따라서 행위 공리주의와 규칙 공리주의로 나뉘게 된다.  즉 어떤 상황 속에서 어떠한 판단 기준을 내세울 것인가에 대한 판단 기준이 다르다는 것이다.  행위 공리주의란 개별적인 상황 속에서 어떤 행위가 다른 행위보다 더 큰 이익을 가져오는 경우 그것은 옳다고 본다.  행위 공리주의는 일반성을 가진 규칙이라기 보다는 각각의 개별적 상황속에서 더 큰 이익을 가져오기만 한다면 각기 다르게 적용될 수 있는 특징을 가진다.  예를 들어 거짓말을 하지 말라 라고 했을때 이는 일반적인 상황 속에서는 사회 전체에 이익을 가져오기에 타당한 것이다.  다들 거짓말만 한다면 이익보단 손해가 더 클테니 말이다.  하지만 거짓말을 하는 것이 이득이 되는 상황도 존재한다.  테러리스트가 나에게 협박을 하며 어떤 정보를 얻어내려고 할때 그 정보를 준다면 수백만명이 죽는 상황이라면 거짓말이 더 큰 이익을 가져오기에 정당화된다.  결국 행위 공리주의란 각각의 개별적인 상황속에서 각각의 행위에 대한 기준만 제시해줄 뿐이며 각각의 상황에서 행위자는 항상 이익과 손해를 계산해야 한다.  하지만 이러한 계산은 모든 상황 속에서 행해져야 하고 또 한편으론 잘못된 정보에 의해 계산이 잘못 이루어질 수도 있다.  이에 행위 공리주의는 생산적이지 못하게 된다.  이를두고 반생산성 비판이라 칭한다.  행위 공리주의는 더 큰 난점을 가져오기도 한다.  예컨대 부모님이 큰 병에 걸렸다고 해보자.  우리는 보통 부모님의 치료를 위해 최선의 노력을 다해야 한다는 점을 직관적으로 알고 있다.  하지만 행위 공리주의의 입장에서 부모님의 치료가 큰 이익이 되지 않고 되려 부모님의 죽음이 이익이 된다면 과감하게 부모님을 죽이라고 명하게 된다.  이러한 측면이 바로 반직관적 비판이라 칭하게 되며 이러한 두가지 측면이 행위 공리주의가 가지는 한계점이다.   


영화로 들어가 일반적인 상황에서는 생명과 건강을 보호하는 것이 사회 전체의 공리에 적합하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사람은 각각이 노동력이자 세수이며 미래세대까지 낳을 수 있는 측면을 감안한다면 완전한 의미에서 사회의 재산과 같은 위치에 놓이게 된다.  그렇기에 사람의 생명과 건강의 유지는 굉장히 중요해진다.  하지만 상황에 따라서 다르게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즉 사회 전체의 인간이 아닌 특정 지역의 인간들로 한정하게 되면 되려 그 특정 지역의 사람들의 생명과 건강을 포기하는 것이 더 큰 이득을 가져올 수도 있다.  실제로 영화속 사건에서는 그 특정지역에 중크롬을 사용함으로 인한 이득이 그 지역의 사람들이 입을 피해보다 더 크다고 판단했기에 그런 행위를 과감하게 행한 것이다.  이렇듯 행위 공리주의는 상황에 따라서 제각기 다르게 적용할 수 있는 문제점이 발생하게 된다.  더욱이 PG&E 회사가 행한 그 계산이 정말 진정한 의미에서 옳바른 계산인지는 영화의 결론만 보더라도 회의적일 수 밖에 없다.  그들은 엄청난 규모의 배상을 했기 때문이다.  결국 상황에 따른 계산은 굉장히 반생산적일 수 밖에 없으며 다른 한편으론 생명과 건강에 대한 가치 우위의 직관이 무너지게 되는 반직관적 상황에 직면하기도 한다.


이에 대한 대안으로 등장하는 것이 규칙 공리주의이다.  규칙 공리주의란 사회적으로 더 큰 공리를 산출하는 규칙을 정해놓고 어떤 상황 속에서 그 규칙에 속하는 행위를 한다면 그것은 옳다는 식이다.  사실 행위 공리주의처럼 각 개인이 어떤 행위를 함에 있어 항상 계산을 해야할 필요는 없다.  공리가 크다고 사회적인 합의가 있는 규칙을 정해놓고 그것에 따라 행위를 하는게 더 합리적이다.  합리적인 인간이 모인 사회집단은 최대한의 공리를 위한 규칙들을 다양하게 상종하게 될 것이다.  위에서 본 거짓말 예시를 보자.  거짓말을 하지 말라는 것은 가장 기초적인 규칙이다.  따라서 우리는 일차적으로 여기에 따른다.  하지만 이러한 종류의 일차 규칙들이 서로 충돌을 하는 경우는 중대한 가치를 침해하지 않는 더 큰 공리를 따른다는 규칙을 둘 수 있을테고 이에 테러리스트에게 협박당하는 경우 우리는 중대한 가치를 위해 즉각적으로 거짓말을 행할 수 있다.  이러한 규칙은 의무론의 태도를 일부 가져와 최상위의 규칙 즉 최종 규칙을 설정하고 하위의 규칙은 최종 규칙에 따라서 판단하도록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러한 관점 하에서 영화를 바라보자면 영화의 결론인 PG&E사의 패소와 엄청난 규모의 보상금은 사회 전반이 내세운 사람의 생명과 건강에 대한 최고 우위의 가치설정과 그것을 지킬 것을 요구하는 규칙에 의한 것으로 바라볼 수 있다.




 

고전적 공리주의와 현대 공리주의

공리주의는 벤담의 양적 공리주의와 밀의 질적 공리주의로 나누어 볼 수 있으며 이 차이점은 목적(결과)을 바라보는 시선의 차이로서 특히 경제학의 발전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게 된다.  벤담의 양적 공리주의에 의하면 행위를 함에 있어 애매한 윤리적 선택의 상황에 직면했을때 철저하게 경제적으로 계산을 하여 쾌락이 크면 클수록 옳바른 행위라고 판단하게 된다.  이러한 양적 공리주의는 쾌락주의 원리라고도 불리며 결과가 좋으면 그 어떤 수단도 정당화된다는 식이다.  각각의 개인은 윤리적 선택의 상황에서 쾌락을 양을 계산하여 선택을 해야 하며 이를 위해 벤담은 쾌락 계산법이라는 것을 만들기도 한다.  즉 강도, 지속성, 확실성, 근접성, 다산성, 순수성, 파급범위를 종합하여 쾌락의 점수를 매기는 식이다.  이러한 양적 공리주의는 아주 저급한 형태의 쾌락을 추구한다는 비판과 쾌락의 점수를 매긴다는 사고 방식 자체가 너무 가변적이고 인간의 삶을 단순화시켜 바라본다는 비판이 존재한다.  더욱이 벤담에 의하면 예컨대 영화 매트릭스의 상황도 정당화될 수 있다.  굳이 인간이 실존하는 무엇으로서 모든 것을 감내하고 살아가기 보다는 그냥 기계에 의해 사육된채 매트릭스라는 가상의 세계 안에서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다면 그리고 그것이 실제세계보다 더 쾌락이 크다면 당연히 정당화될테니 말이다.  결국 배고픈 소크라테스보단 배부른 돼지가 훨씬 낫다는 결론이 내려지는 것이 양적 공리주의이다.


이러한 벤담의 난점을 제거하기 위해 밀은 질적 공리주의를 주장하게 된다.  밀에게 있어 행복이란 최소한의 고통을 의미하며, 쾌락은 그 수준이 낮음에서 높음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형태로 존재하게 된다.  저급한 형태의 쾌락 예컨대 식욕이나 성욕 등을 지나치게 추구하게 되면 행복보다는 되려 더 큰 고통을 안겨주기 마련이다.  식욕의 지나친 추구는 비만이라는 고통을 가져올테고 성욕에 대한 과도한 집착은 정신을 공허하게 만들뿐이다.  이에 밀은 쾌락은 다양한 형태로 존재할 수 있으며 쾌락의 질은 상하급으로 나뉜다고 말하며 저급 쾌락보다는 고급 쾌락을 추구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예컨대 문화나 예술, 지식, 자유 따위에 대한 쾌락이 성욕, 식욕, 수면욕 따위의 쾌락보다는 상위에 있다는 것이고 이러한 것에 대한 추구를 통해 양적 공리주의가 가지는 한계를 넘어서게 된다.  하지만 여기에도 문제점은 존재한다.  공리주의가 가지는 가장 큰 장점은 객관성 즉 깔끔하게 계산이 가능하다는 것인데 질적 공리주의에서는 이것이 굉장히 모호해진다.  영화를 보는 쾌락과 그림을 그리는 쾌락 중 어느 것이 더 우월한 쾌락일까?  더욱이 밀의 공리주의는 무어의 자연주의적 오류에 의해 직격탄을 맞게 된다.  공리주의자들은 ‘선’의 개념을 자연적으로 정의내려 ‘선’을 쾌락과 동일시하게 된다.  하지만 무어에 의하면 ‘선’이란 정의를 내릴 수 없는 단순 속성으로서의 특징을 가지게 된다.  예컨대 노란색을 보았을때 우리는 노란색을 개념지을 수 없다.  노란색은 단순 속성으로서 노란색을 전혀 모르는 사람에게 노란색을 설명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하지만 개라고 하는 동물은 복합 속성을 가진 것으로서 네발달린 포유동물이라는 식으로 개념정의가 가능해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을 쾌락이라는 식으로 정의를 내린다거나 ‘선’을 최대다수 최대행복으로 정의내리는 것은 자연주의적 오류에 빠지게 되는 것이다.  이를 확인하기 위해 무어가 전개하는 것이 바로 열림물음 논증이다.  예컨대 1. “선은 쾌락이다”라고 정의 내린 후 2. “쾌락은 선한가?”라고 되묻는 것으로서 열림물음 논증은 자연스럽게 동어 반복의 모순을 가져오게 된다.  즉 2번에다 1번을 대입을 하게 된다면 “쾌락은 쾌락이다”라는 동어반복으로 빠지게 되는 식이다.  결국 이러한 비판에 따르면 ‘선’을 비롯한 모든 가치의 문제는 자연적으로 정의할 수 있는 것이 아닌 직관적으로 알 수 있는 것이 된다.


고전적 공리주의의 입장에서 영화적 상황을 바라보자.  PG&E의 중크롬으로 인한 환경오염은 극심한 상태이고 그로 인한 피해자의 수도 거의 600여명에 달하는 어마어마한 숫자이다.  이 소송에서 이기기 위해서는 중크롬 배포 사실을 본사가 알고 있었다는 것을 입증해야 하며 그것을 입증하지 못한다면 소송기간, 배상금액 등 모든 것이 불투명해지게 된다.  실질적인 재판으로 돌입하게 되면 그 기간이 극도로 길어져 10년 안에는 끝나지 않을 것이 명약관화한 상황이기도 하다.  더욱이 법적 절차에서 배심제를 채택하고 있는 미국의 법제 안에서는 배심원을 합리적으로 납득시킬 수 있는 합리적 근거와 증거가 필요하다.  전문가가 아닌 일반인을 대상으로 한 합리성와 증거의 제시이기에 굉장히 높은 설득력을 가져야할 것임은 말할 것도 없다.  이러한 측면은 공리주의적 민주적 절차라는 관점에서 굉장히 올바른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현실의 문제로 돌아와 예컨대 S 기업의 사업장 환경으로 인해 직원에게 백혈병이 발병한 상황을 바라본다면 오로지 공리적 민주 절차가 직관적으로 옳다고 바라보기엔 무리가 따르게 된다.  이른바 입증책임의 문제로서 주장하는 자가 입증을 해야 한다는 기본 논리에 의해 피해를 입은 근로자가 자신의 병에 대한 증거와 인과관계를 입증해야 하는 것이 현실인바 이는 굉장히 무리가 따를 수 밖에 없다.  약자인 개인이 어떻게 그런 전문적이고 과학적인 부분을 입증하여 대기업을 상대로 소송을 진행 할 수 있을까?  누구나 직관적으로 그것은 옳지 않다고 여길 수 밖에 없을 것이며 이를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공리적인 성격을 가지는 민주적 절차도 상황에 따라선 굉장히 불합리할 수가 있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전적 공리주의의 입장에선 민주적 절차를 통한 최대 다수의 행복과 안정된 절차 위에서 구성되는 고급 쾌락을 위해 이는 감내해야 하는 것에 불과할 것이다.





결국 벤담이나 밀의 고전적 공리주의가 주장하는 행복이나 쾌락이라는 것은 굉장히 모호한 측면을 가질 수 밖에 없으며 이로 인해 공리주의는 회의주의의 비판에 직면하게 된다.  예컨대 과연 한 개인이 행복하다는 것을 타인이 어떻게 알 수 있으며 그것을 수치화하는 것이 과연 가능한지 그리고 인간의 마음이란 단일한 형태로 환원할 수 없는 굉장히 복합적인 양상으로 드러나기 마련인데 그것을 어떻게 행복과 쾌락이라는 단일한 가치로서 환원시킬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한 비판인 것이다.  더욱이 행복이라는 감정은 결국 심리상태에 불과한 것인데 이러한 불확실한 심리상태로서의 행복이 과연 최대 다수의 복리를 위한 모든 정신적 물질적 활동을 포함할 수 있는가? 라는 질문도 던져진다.  결국 모든 비판의 핵심은 공리를 위한다는 모든 것들이 행복이라는 단순한 형태의 심리 상태로 환원될 수 없다는 것이다.  이러한 비판에 직면한 공리주의는 현대에 이르러 극적인 변화를 이끌어내게 되는바 고전적 공리주의가 내세우는 행복과 쾌락이라는 개념을 다른 것으로 대체하려고 시도하게 된다.  그것이 바로 선호 만족(preference-satisfaction)이라는 개념이다.  선호 만족과 행복은 동일하지 않은 개념이다.  행복은 각 개인이 자신이 가지고 있는 선호를 충족시켜나가는 과정에서 얻게 되는 부산물의 성격을 가지게 되고 행위의 동기가 행복과 쾌락이라는 주장을 반복하게 되면 선결문제 요구의 오류에 빠지게 된다.  따라서 행복 그 이전에 존재하는 선호에 대한 충족과 그 만족을 공리주의의 핵심 개념으로 가져오는 것이다.  이러한 선호 만족이라는 개념을 취하게 됨으로써 가져오는 가장 큰 이득은 공리 그 자체를 개인적 측면에서 세계적 측면으로 그 외연을 확장할 수 있다는 것이다.  즉 개인의 마음에 머물던 행복을 더 넓게 가져갈 수 있게 된다.  그렇다면 영화 매트릭스에서 주어지는 저급한 형태의 쾌락에 대한 욕망은 논리적으로 거부하는 것이 가능해진다.  조금 더 고통스럽더라도 그러한 삶을 선호하지 않는다면 거부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에 현대 공리주의자들의 주된 목표는 행복과 쾌락의 극대화가 아닌 선호 만족의 극대화가 된다. 

 

선호만족이라는 관점에서 영화를 바라보게 되면 생명과 건강은 굉장히 높은 가치를 가질 수 밖에 없다.  생명과 건강이 보장이 안되는 상황에서 어떤 선호와 행복을 논할 수 있을까?  행복과 선호는 나의 자기보존이 확실시 되는 하에서 의미가 있을 뿐이다.  하지만 이 또한 일자리의 문제와 연계되어 들어가면 다시금 논의는 복잡해지게 된다.  영화속의 중크롬의 사용이나 현실에서 반도체 공장에서 비롯되는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해 가장 적합한 방식은 무엇일까?  공장의 폐쇄이다.  그리고 이러한 관점은 생명과 건강이라는 관점하에서 타당해보일 수도 있겠지만 그런 식의 선택은 이루어지지 않는다.  이유는 간단한바 공장을 폐쇄시킴으로 인해 생겨나는 문제는 상상을 초월한다.  경제 전반에 미치는 영향과 그 공장이 위치해있는 지역경제의 문제를 생각해보면 그렇게 쉽게 결정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즉 이것을 타당하게 하기 위해서는 그 손해를 넘어서는 엄청난 이득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따라서 공장을 폐쇄시킨 이후 얻게 되는 건강과 생명의 이익의 불확실함과 공장폐쇄 이후에 생겨나는 경제적 문제의 확실함 사이에서 균형을 요구하게 된다.  이러한 것이 바로 공리주의의 관점인 것이다.  결국 정리하자면 이 입장에서는 선호만족이라는 개념을 가져와 그 외연을 넓히는데 성공하더라도 결론적으로 절대적인 권리는 있을 수 없게 된다.  더욱이 현대와 같이 그 전체가 보이지도 않는 복잡계적 시스템의 지배하에 있는 사회에선 어떠한 것도 압도적인 권리성을 담보하지는 않는다.  따라서 굉장히 유연한 사고관이 중요해지는 것이 공리주의의 관점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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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저녁노을*

    | 2012.10.26 06:45 신고 | PERMALINK | EDIT | REPLY |

    다소 어려운 영화로군요. 노을이에겐...ㅎㅎ

    좋은날 되세요.

    잘 보고가요

  2. 바닐라로맨스

    | 2012.10.26 09:55 신고 | PERMALINK | EDIT | REPLY |

    행위공리주의와 규칙공리주의라...
    같은 공리주의지만 그 적용이 많이 다르네요 ^-^

  3. Lipp

    | 2012.10.26 17:21 | PERMALINK | EDIT | REPLY |

    그리 심각하게 본 영화가 아닌데 용짱님 글을 보니 뭔가 놓친 느낌?? ㅎㅎ
    소더버그와 로버츠의 만남으로 둘다 윈윈 했던 작품.. 프리티 우먼이 이젠
    연기를 좀 하는구나 느꼈던 영화로만 기억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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