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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파이더맨

우연히 거미에 물려 초인의 힘을 가지게 된 한 아이는 그 힘을 이용하여 영웅의 길을 걷게 된다하지만 그 영웅의 길이라는 것이 순탄치만은 않다힘에 도취된 소년은 힘을 왜곡되어 사용하기도 하고 수많은 힘을 가지고 있는 악당들은 스파이더맨에게 악영향을 끼치게 된다이렇듯 샘 레이미 감독이 연출한 스파이더맨 시리즈의 전체적인 흐름은 우연히 영웅이 되어버린 한 소년이 가지는 자신 영웅으로서의 자신과 영웅이 아닌 평범한 한 소년으로서의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고민이 주를 이루게 된다특히 스파이더맨에서 주로 강조되는 것은 스파이더맨이 가져야할 책임에 대한 부분이다스파이더맨이 가져야할 힘에 대한 책임과 통제를 지속적으로 강조하면서 그와 동시에 스파이더맨과 대적하는 악당은 그 힘에 도취되어 책임을 도외시하는 양상을 대립시켜 나타냄으로써 큰 틀에서의 주제의식을 잡아나가게 된다그렇다면 영웅으로서의 책임이라는 것은 도대체 어떤 것을 의미하는 것일까?



양심과 욕망

인간에게는 기본적으로 오욕(五慾)이라는 형태의 욕망이 자리하고 있다.  만약 인간을 이러한 욕망에 충실한 존재로 바라본다면 인간은 지독하게 이기적인 존재가 될 것이지만 인간에게는 양심이라는 것도 존재하기에 이를 통해 기본적인 욕망을 제어할 수도 있다.  즉 인간의 마음에는 욕망과 양심이 동시에 존재하며 우리는 의지를 통해서 이 사이를 방황하며 선택을 하게 된다.  예컨대 우리가 스파이더맨이 되었다고 생각을 해보자.  그렇다면 그 막강한 힘과 익명성을 이용하여 과연 무엇을 할 것인가?  은행을 털어 재물욕을 채워 편안하고 안락한 삶을 살아가는 것을 꿈꾼다면 우리의 의지를 욕망을 향해 발현시켰다고 볼 수 있을 것이며 반대로 악당을 처단하고 선을 위해 자신을 힘을 사용한다면 우리의 의지는 양심을 통한 선한 행위의 실현으로 나아갔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의지가 선택하는 양심이라는 것도 굉장히 모호한 모습을 보여줄 수 밖에 없다.  일단 의지 그 자체도 언제 어느 방향의 선택을 할지 알 수 없으며 그 양심이라는 것도 지독히 주관적인 부분으로서 사람마다 조금씩 다르게 나타날 수 있기 때문이다.  즉 각 개인이 가지는 양심은 각자가 옳다고 여기는 것에 대해서 말해줄뿐 무엇이 옳은가에 대해서는 대답을 하지 않는다.  이는 영화속에서도 확인 할 수 있는데 스파이더맨의 선한 행위에 대해서 우호적인 모습을 보여주는 사람들이 있는 반면 그에게 의구심을 품는 사람들도 존재한다.  더욱이 스파이더맨 자체도 약간의 모순을 가지게 되는데 그는 한편으론 범죄자들을 막아내어 사람들을 구해내는 모습을 보여주지만 다른 한편으론 법 제도 위에서 서있기도 한 존재인 것이다.  여기에서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양심에 따른 행위 그 자체가 보편 타당한 도덕 규칙이 될 수는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보편적인 도덕 규칙을 어디에서 가져올 수 있는지 그 근원은 무엇인지가 문제된다. 





자연주의

자연주의 윤리설에 의하면 보편적 도덕규칙은 사실 그 자체에서 찾을 수 있으며 윤리학을 과학적 방법으로 환원하여 가치판단의 문제를 사실에서 찾아 해결하고자 한다.  즉 자연주의에 의하면 가치판단은 사실판단과 동일시 되며 가치판단 역시 사실판단과 마찬가지로 경험적으로 증명이 가능하다고 본다.  이러한 자연주의적 윤리관은 몇가지 특징 을 가지게 되는데 첫번째로 도덕 판단을 과학과 같은 방법론을 통해 검증할 수 있다고 생각하게 되며 두번째로는 도덕적 정의를 사실적 정의로 바꿀 수 있다는 것이다.  예컨대 ‘옳은 것’을 ‘최대다수 최대행복을 가져오는 것’으로 정의하거나 ‘나쁘다’를 ‘고통을 가져오는 것’, ‘좋다’를 ‘즐겁다’로 정의한다면 이는 전형적인 자연주의적 정의이다.  결국 핵심은 가치판단으로서의 옳다, 나쁘다 따위를 경험할 수 있는 자연적 사실로서 정의내린다는 것이며 이를 통해 경험적으로 증명이 가능해진다.  이러한 자연주의의 대표격으로 홉스, 벤담과 밀의 공리주의를 들 수 있다.  하지만 이러한 자연주의적 윤리설은 무어에 의한 비판으로 직격탄을 맞게 된다.  이를 두고 흔히 자연주의적 오류라고 칭하며 자연주의 오류는 크게 봐서 정의주의적 오류와 연역적 오류로 나누어 바라볼 수 있다.  


첫번째 정의주의적 오류는 자연주의적 윤리관의 두번째 특징에서 비롯된다.  위의 예를 가져와 ‘게임은 좋다’라는 명제는 ‘게임은 즐겁다’라는 명제로 치환가능하며 이 둘은 같은 의미로서 참이다.  하지만 ‘게임은 즐겁다 그러나 게임은 아이들에게 좋은가?’ 라는 명제를 ‘게임은 즐겁다 그러나 게임은 아이들에게 즐거운가?’라는 명제로 바꾼다면 이 둘은 분명히 다른 의미를 가지게 된다.  이것이 바로 정의주의적 오류이다.  두번째로 연역적 오류는 가치 판단은 사실 그 자체로부터 확인할 수는 없다고 말한다.  즉 사실과 당위는 근본적으로 다른 성격의 것으로서 가치는 사실에서 추론되지 않는다.  예컨대 ‘아이들이 게임을 할때는 부모의 관심을 필요로 한다’라는 사실 명제에서 ‘아이들이 게임을 할때는 부모는 아이들에게 관심을 보여야만 한다’라는 당위는 추론되지 않는다.  즉 사실명제로서 ‘관심을 필요로 한다’고 해서 당위인 ‘관심을 보여야만 한다’를 반대로 ‘관심을 보이지 않아야 한다’로 바꾸더라도 모순이 없기 때문이다.  만약 ‘아이들이 게임을 할때는 부모는 아이들에게 관심을 보여야만 한다’라는 당위명제를 정당화 하기 위해서는 사실 명제에 덧붙여 다른 규범 전제가 필요하며 여기에서 확인할 수 있는 것은 당위는 사실로부터 도출되는 것이 아니라 또 다른 규범 전제 즉 다른 당위를 통해서 도출된다는 점이다.  결국 자연주의 오류란 가치판단으로서의 당위 판단을 사실판단으로 착각하는 것에서 비롯되는 것으로 이 오류를 통해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자연주의적 윤리설은 과학적 경험을 통해 증명될 수 있는 성격의 것이 아니라는 점이며 보편적 도덕 규칙 역시 사실판단에서는 확인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직관주의와 자연법

직관주의는 자연주의와는 반대로 도덕적 진리를 자연적 요소가 아닌 직관을 통해 확인하려는 견해로서 인간은 직관이라는 능력을 가진채 이 능력을 이용하여 도덕적으로 옳은 행위에 대해 판단 할 수 있다고 본다.  이러한 직관주의의 특징으로 첫번째는 자명한 도덕적 진리의 존재에 대한 확신이며 둘째는 이러한 자명한 진리에 대한 즉각적인 인식이다.  즉 도덕적 가치는 너무나도 자명하고 확실한 것이기에 논증을 통해서 정당화 하는 것이 아니라 직관에 의해 즉각적으로 인식하는 것이 된다.  이러한 직관주의는 다양한 형태로 확인될 수 있는데 그중 자연법과 칸트를 들 수 있다.


중세에 인간을 지배하던 원칙의 중심에는 신과 자연법이 있다.  신이 창조한 세상의 모든 만물에는 신이 창조할 당시에 부여한 나름의 목표가 있으며 만물은 그 신의 섭리에 따라서 그 존재 의미를 찾아가게 된다.  이러한 신의 섭리를 두고 신의 지혜로서 영원법이라 칭하며 신에 의해 창조된 만물은 영원법 종속된다.  신의 창조원리에서 인간은 독특한 지위를 가지게 되는데 인간은 다른 생물과는 달리 이성을 가지고 있는 특별한 존재이다.  그와 동시에 인간 역시 신에 의해서 창조된 존재이기에 창세 당시에 신이 부여한 소명과 전우주적 신적 섭리에 의해 종속 당하는 존재이기도 하다.  인간 역시 신의 창조물이기에 이러한 신의 창조 의지와 영원법에 따르게 되지만 인간이 가지고 있는 특수성 즉 이성을 가진 존재라는 측면에 의해 수동적인 입장이 아닌 능동적인 입장에서 영원법에 참여하게 된다.  이렇듯 인간이 자신이 가지고 있는 이성을 활용하여 능동적인 측면에서 신의 의지에 참여하여 일정한 규칙을 발견하게 되는 것이 자연법이다.  이러한 자연법은 인간 이성에 의해서 파악할 수 있는 모든 시대, 모든 사회에 보편 타당한 도덕법으로 아퀴나스의 사상의 핵심을 이루는 사고관이다.  반면 인간이 인위적으로 설정한 실정법은 각기 다른 사회에 따라서 조금씩 다른 모습을 보일 수 밖에 없으며 실정법은 자연법에 근거를 두게 된다.  정리하자면 영원법 - 자연법 - 실정법의 순으로 논리 근거를 찾을 수 있게 된다.  그리고 인간은 이성을 가진 존재로서 자연법에서 도덕적 의무들을 도출해내게 되며 이때 인간은 이성과 직관의 힘으로 선한 행위에 대한 직관적 인식을 가질 수 있다고 바라보게 된다.  이러한 태도를 통해 근대 직관주의가 등장하게 되며 그중 칸트에게 가장 큰 영향을 주는 것은 바로 규칙 직관주의이다.  즉 존재하는 규칙을 직관적으로 확인하여 각 상황에서 옳은 행위와 그른 행위를 결정하여 행동을 하게 된다는 사고방식으로 보편적인 도덕 규칙은 인간의 도덕적 직관을 통해 확인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선의지와 영웅의 책임

합리론과 경험론의 기본적인 대립은 도덕의 영역에서도 비슷한 양상으로 진행이 된다.  합리론은 신의 성실함 또는 본유관념을 통해서 행위의 옳고 그름에 대해서도 이성에 의해서 그것을 발견하여 옳은 행위를 할 수 있다고 한다.  반면 경험론 특히 홉스는 오직 존재하는 것은 이기적 본성과 욕망이며 이러한 욕망의 충족을 통해 행복에 이르는 것이 바로 도덕적이라고 바라보게 된다.  이렇듯 인간이 특정한 목적을 가지고 자기 나름대로의 행위 규칙을 정하는 것을 준칙이라고 칭한다.  이러한 준칙은 지극히 개인적인 행위 규칙으로서 보편성을 가질 수 없으며 이는 홉스식의 욕망에 충실한 행위에 대한 수단일 뿐이다.  즉 최대한의 이익과 욕망의 충족을 위해 최적화된 수단을 선택하기 위한 행위 규칙인 것이다.


칸트는 기본적으로 이러한 경험론자들의 태도를 받아들이지 않는다.  옳은 행위라는 것을 인간의 본능과 경험에 의해서 변화무쌍한 것으로 바라보는 태도는 문제가 있다고 여기게 되고 옳은 행위는 보편성과 필연성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한다.  즉 준칙을 넘어선 보편적인 도덕 규칙 즉 도덕 법칙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도덕법칙은 그 어떤 수단 목적성도 가지지 않는 그 자체로서 선한 것이어야 한다.  이를 위해 칸트가 주장하는 것은 바로 선의지이다.  선의지가 있기에 우리는 옳은 행위와 그른 행위를 구분할 수 있으며 옳다고 하는 것의 의미를 깨달을 수 있게 된다.  선의지가 없이 얻어낸 이익이나 행복은 결국 의미가 없다.  모든 행위에는 선의지가 동반될때에만 옳은 행위로 평가될 수 있으며 그것만이 도덕적 가치를 가지게 된다.  


"이세상에서나 이 세상 밖에서나 절대적으로 선하다고 불릴 수 있는 것으로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선의지 밖에 없다.  용기, 결단력, 인내 등의 측면도 많은 부분에 있어서 의심의 여지가 없이 좋고 바람직한 것이지만 그것을 이용하는 의지가 선하지 않다면 자연이 준 재능들도 극히 사악하고 잘못될 수가 있다.  ....   최대의 노력으로도 성취하는 것이 아무것도 없을지언정 여전히 선의지만큼은 완전한 가치를 가지는 것으로 보석처럼 남아있어야만 한다. - 윤리 형이상학 정초" 


선의지가 있는 인간으로서 판단되기 위해서는 행위를 함에 있어 자신의 개인적인 성향이나 이익과 철저하게 분리된채 오로지 의무 자체만을 위해 행위해야 한다.  즉 우리가 선한 행위를 하는 이유는 오직 그것이 선한 행위이기 때문이다.  심지어 내가 어떤 행위를 함으로 인해 좋은 결과가 나올지라도 선의지가 없다면 도덕적이라고 칭찬받을만한 일이 아니다.  반대로 선의지를 가지고 행한 일이 안좋은 결과를 가져오더라도 그것은 도덕적으로 옳은 일이 된다.  그렇다면 선의지란 도대체 무엇인가? 라는 질문이 던져질 수 있는바 선의지는 무조건적인 가치이며 이 가치는 목적이나 수단의 달성에 의존하지 않는 절대적 가치라고 말한다.  


영화속에서 피터는 평범한 학생이었는데 어느날 거미에게 물리면서 어마어마한 능력을 가지게 된다.  피터의 입장에서 바라보자면 전형적인 소년으로 우연히 얻게된 자신의 힘에 도취되는 양상을 보여주게 된다.  피터의 삼촌은 평범한 아이였던 피터가 갑자기 변한듯한 모습을 보이자 강한 힘에는 강한 책임이 따른다는 것을 강조하게 되지만 피터가 뛰어난 능력을 가지고 행하는 것은 좋아하는 메리 제인에게 잘보이기 위해 돈을 버는 것이다.  자신의 힘에 도취되어 욕망에 충실한 행동을 보이던 피터는 자신에게 약속한 돈을 주지 않는 고용주에게 화가나 그곳을 털러온 도둑을 고의적으로 놔주게 되고 이에 도망간 도둑은 우연히 피터의 삼촌을 살해하기에 이른다.  강한 책임이라는 것은 과연 어떤 것을 말하는 것일까?  영화적인 맥락에서 바라본다면 그 힘을 사용함에 있어 선하고 옳바른 방향으로 이끄는 것이 될 것이다.  하지만 힘에 도취된 피터는 그 힘을 지극히 욕망에 충실한 양상으로 사용하게 된다. 자신의 욕망에 충실한 것이 항상 그른 결과만을 가져오는 것은 아니다.  욕망이라고 하는 것이 항상 추악한 형태만을 보여주는 것은 아니고 되려 선한 행위에 대한 욕망도 존재할테니 말이다.  더욱이 지극히 이기적인 욕망에 의해서 행한 행위가 좋은 결과를 가져올 수도 있다.  예컨대 메리 제인은 그다지 가정환경도 좋지 않고 그녀의 주변에 있는 남자친구라는 사람도 그렇게 좋아보이진 않는다.  반면 피터는 과학에 뛰어난 재능을 가진 미래가 어느 정도 보이는 인재이다.  따라서 우연히 얻게 된 자신의 능력을 잘 활용해서 메리 제인을 자신의 여자로 만든다면 궁극적으로 좋은게 아닐까?  힘에 도취된 피터는 자신의 능력을 이용해 우연히 길에서 위험에 처한 사람을 구해줄 수도 있을 것이다.  이 역시 결과적으로 나쁠 것이 없다.  하지만 결국 이는 선의지가 없는 행위에 불과하기에 칸트에 의하면 선하고 옳은 행위라고 볼 수는 없다.  위험에 처한 사람을 구해준다고 한들 이는 자신의 힘의 과시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결국 피터는 삼촌의 죽음과 삼촌이 자신에게 남긴 강한 힘에는 강한 책임이 따른다는 그 말을 되새겨 듣고 자신의 힘에 따르는 책임을 다하기로 결정한다.  이에 자신은 스파이더맨이라는 심벌을 만들어 허구의 주체를 창조하게 되고 그 가면을 뒤집어 쓴채 빌딩 사이를 날아다니게 된다.  스파이더맨이 되어 빌딩 사이를 날아다니는 그의 행동은 옳은 행위를 해야 한다는 나름의 선의지에 입각한 모습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만약 이기적인 목적에서 그런 행위를 한다면 굳이 자신을 숨긴채 허구의 가면을 쓸 필요는 없을 테니 말이다.  되려 이기적이고 도취에 빠진 상태라면 자신을 적극적으로 내보이고 싶은 욕망에 휩쌓이게 될 것이다.  이것이 스파이더맨1의 주된 주제이다.  하지만 이러한 스파이더맨의 모습은 어느정도의 한계를 가지게 되며 과연 이때의 스파이더맨이 보여주는 행위가 진정한 의미에서 선의지를 가진 행위인가? 라는 의문도 같이 던져지게 되며 작품은 스파이더맨2로 이어지게 된다.


스파이더맨1이 영웅의 책임에 대한 자각이라면 2탄은 그 책임에 함몰되어 자신의 삶이 붕괴되는 영웅의 고뇌가 담겨 있는 작품이다.  스파이더맨은 자신의 책임 의식에 입각하여 최선을 다해 모든 사람을 구하려고 애쓰게 되고 그로 인해 피터로서의 삶은 철저하게 망가지게 된다.  학교 생활은 엉망 진창에 메리 제인은 자신에게서 점점 마음이 떠나고 있는 상태이며, 자기가 가장 사랑하는 친구인 해리는 스파이더맨을 저주하고 있는데다, 자신이 일하는 신문사에선 연일 자신을 최고의 악당이라고 보도하는 지경에 툭하면 자신을 해고하려고 하니 말이다.  이러한 심적 불안속에서 스파이더맨으로서의 힘조차도 점점 잃어가는 상황에 처하게 된다.  결국 영웅의 책임이라곤 하지만 어느 정도의 균형이 필요해진 상황이다.  스파이더맨2에서 가장 인상 깊은 장면은 꿈속에서 죽은 삼촌과 대면하는 장면이다.  그안에서 삼촌은 다시금 책임감의 진정한 의미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게 된다.  하지만 피터는 이미 망가질때로 망가진 상황에 놓여져 있으며 더욱이 자신이 원하는 삶을 얻을 수도 없는 상황에 이르렀기에 결국 스파이더맨을 포기하게 된다.  사실 피터가 스파이더맨을 포기하더라도 그것을 놓고 비난할 수는 없다.  피터가 가지게 되는 강한 힘에 대한 책임은 그것을 악하게 사용하지 않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실행되었다고 볼 수 있으며 되려 그가 그 힘을 이용하여 사람들을 돕는 영웅이 될 것인지의 여부는 스스로의 선택에 달린 것에 다름이 없다.  오히려 피터가 밤마다 도시를 날아다니기보다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우수한 과학적 재능을 이용하여 과학적 업적을 추구하는 것이 더 나은 결과를 가져올 수도 있으니 말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선택은 선의지에 입각한 행위가 아닌 것이 되는 걸까?  피터는 스파이더맨을 포기한 이후 나름 자신을 되찾고 행복한 일상을 되찾는 듯 보였지만 결국 또 다시 혼란에 빠져들게 된다.  한편으론 범죄률이 급증하여 자신을 부르는 시민들의 목소리가 신경이 쓰이고 그렇다고 자신이 사랑하는 메리 제인을 되찾아온 것도 아니다.  이에 끊임 없이 고민하고 방황하던 피터는 결국 숙모의 말에 이끌려 자신을 되찾게 된다.  즉 우리안에 있는 영웅을 발견하여 정직하고 고귀한 삶을 이끌어나간다면 스파이더맨이 아닌 평범한 인간도 영웅이 될 수 있다는 말이다.  결국 선의지에 입각한 행위라는 것은 꼭 스파이더맨이 되어 영웅이 되는 것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진정한 의미에서의 선의지란 자신의 행위가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정확히 직시한채 초월적 자유를 가진 존재로서 현상을 넘어 그 자체로서 선하다고 할 수 있는 행위를 하는 것이 될 것이며, 자신의 행위 전반을 선의지에 입각하여 행한다면 내안의 영웅과 모순성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의미가 될 것이다


하지만 이 또한 스파이더맨3에 이르면 무너지기 시작한다.  피터로서의 삶과 스파이더맨으로서의 삶이 균형을 이루게 되었지만 피터는 다시 과거의 모습으로 돌아간다.  영웅으로서 사람들을 구하고 다니기는 하지만 다시금 자신의 힘에 도취되기 시작한 것이다.  자신에게 환호하고 자신을 사랑해주는 스파이더맨의 모습에서 강한 자부심과 기쁨 심지어 스타의식까지 느끼기에 이른다.  하지만 자신에게 심각하게 도취된 스파이더맨은 자신이 사랑하는 주변인들의 삶이 철저하게 망가져 가는 것을 전혀 인식하지 못하게 된다.  그러던 어느날 피터는 놀라운 사실을 알게 되는데 자신의 삼촌을 죽였다고 생각했던 사람이 알고보니 공범에 불과하고 총을 쏜 진범은 다른 사람이었다는 것이다.  그가 바로 샌드맨이다.  이때부터 피터는 오직 복수만이 머리속에 남게 되고 이에 외계 생명체가 피터를 잠식하게 되면서 사실상 선의지를 완전히 상실하게 된다.  선의지를 상실한 스파이더맨은 영웅의 책임감은 커녕 나르시즘과 복수심만이 남은 왜곡된 영웅의 모습으로 나타난다.  완전히 변해버린 스파이더맨은 평소엔 행하지 않던 살인마저도 과감하게 실행하게 되지만 정작 또 다른 복수의 주체인 숙모는 그것을 원하지 않는다.  선의지를 상실한 스파이더맨은 무엇하나 꺼릴 것이 없기에 아주 강력한 모습을 보여주게 되며 복수심에서 샌드맨과 맞서 결론적으로 좋은 결과를 가져오기도 하지만 결국 그는 완벽하게 위험한 인물일 수 밖에 없다.  나르시즘에 빠진 도취적 영웅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이렇듯 스파이더맨 시리즈는 영웅이 보여줄 수 있는 다양한 형태의 모습을 그려내어 그안에서 던져지는 도덕적 의무에 대해 다각도로 이야기하는 괜찮은 수작이다.  




정언명령과 악당의 모습

선의지를 동반하는 도덕적 규칙은 단순히 유용성이나 공리를 위한 것이 될 수 없다.  선의지를 동반하는 행위는 보편적 규칙에 따라야 하며 이러한 규칙이 타당성을 얻기 위해 최고원리로서의 도덕법칙을 만족해야 한다.  즉 선의지에서 도덕법칙을 끌어낼 수 있어야 하며 이를 위해 칸트는 다시금 형식을 가져오게 된다.  도덕법칙은 선의지가 가지고 있는 내용적 측면이 아니라 선의지의 형식적 측면이다.  이러한 형식은 선험적이면서 보편적인 것으로 의지의 내용은 철저하게 제외된채 오로지 보편성을 담보할 수 있는 형식만이 도덕법칙으로서 기능하게 된다.  결국 순수이성비판에서 살펴보았던 인식의 형식틀은 실천이성비판에서도 그대로 이어지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보편성을 담보할 수 있는 형식을 위해 내세우는 것이 바로 정언명령이다.  정언명령은 보편적이고 필연적이어야 하기에 가언명령과 같은 형태로 규정되어서는 안된다.  가언명령은 일종의 조건부 명령으로서 예컨대 당신이 대접받기를 원한다면 먼저 남을 대접하라는 명제에서 처럼 명령을 수행하기 이전에 어떤 조건이 붙어 있는 것을 의미한다.  가언명령에는 조건이 붙어 있으므로 그 행위를 하려는 인간이 그 조건을 추구하지 않는다면 그 행위 자체가 이루어질 가능성이 없어다는 문제를 가진다.  반면 정언명령은 그 명령으로 인한 행위 결과와 상관 없이 특정한 행위 그 자체가 선이기에 무조건 수행해야 하는 명령을 의미한다.  이러한 정언명령에는 그 어떤 목적도 개입해서는 안된다.  오로지 도덕이기 때문에 행하는 것으로서 ‘의무를 위한 의무’로서의 성격을 가지게 된다.  이러한 정언명령이 도덕규칙의 척도가 되기 위해서 보편화 가능성을 내세우게 되고 이러한 보편화 가능성을 파악하기 위해 세가지의 형식을 내세우게 된다. 


1. 너의 행위의 준칙이 너의 의지에 의해 보편적 법칙이 되는 것처럼 행위하라.

첫번째 조건이 말하는 것은 내가 세운 준칙이 모든 사람들에게 보편성을 가질 수 있다면 그것은 도덕적으로 옳은 행위가 된다는 것이다.  반면 내가 세운 준칙(행위의 이유나 법칙)이 모든 사람들에게 보편성을 가질 수 없다면 그것은 자기 모순을 가진 것으로서 도덕적으로 옳지 않은 행위가 된다.  이에 대해 칸트는 네가지 예를 들게 되는데 그중 첫번째는 거짓 약속의 예제이다.  A. 나는 나의 필요한 것을 얻기 위해 거짓 약속을 해야 한다.  라는 개인적인 준칙을 세웠다고 했을때 이것을 보편화 하게 되면 B. 누구던지 필요한 것 얻기 위해 거짓 약속을 해야 한다. 라는 명제가 나오게 된다.  하지만 이 명제는 자기 모순을 가지고 있는바 애시당초에 거짓된 약속 즉 이행될 가능성이 없는 약속이라는 것을 보편적으로 따를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다른 예로는 자살하는 것을 들 수 있다.  A. 내가 고통이 너무나도 크다면 자살을 할 수 있다.  이 준칙을 보편화 한다면 B. 누구든 고통이 쾌락보다 많아진다면 자살을 할 수 있다.  라는 명제가 나오게 된다.  하지만 이 역시 자살을 하게 되면 쾌락 그 자체의 가능성이 무너진다는 자기 모순을 가지게 된다. 


2. 당신이나 다른 사람의 인격에 있어 그의 인간성을 언제나 목적으로 대하고 결코 수단으로만 대하지 않도록 행위하라.

두번째 형식의 핵심은 수단으로만 대하지 말고 '동시에' 목적으로도 대하라는 것이다.  인간은 이성을 가진 특별한 동물로서 근대에 들어와 스스로 주체의 위치에 서게 된다.  이렇게 주체가 된 인간은 다시금 스스로 초월적 위치에 자리매김하며 개념짓는 자의 가능성을 열게 된다.  즉 인간은 가치를 부여하는 자로서의 위치를 점하게 된다는 것인데 인간이 가치를 부여함에 있어 똑같은 인간에게도 목적이 아닌 수단으로서만 대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결국 가치를 부여하는 자로서의 인간은 하나의 주체로서 모든 인간과 동일한 무제한의 가치를 가지게 된다.  


3. 각자가 규칙을 보편적으로 입법하고나 할때 그 규칙은 각자의 의지에 의해 자신에게 부과될 수 있는 규칙이어야 한다.

이는 어떤 규칙을 예컨대 신이나 부모나 국가에 의해서 강제적으로 강요받지 않은채 각 개인이 스스로 그 규칙을 자신에게 적용하여 따르는 것을 의미한다.  이와 반대로 타율성을 가지는 규칙은 국가나 사회에 의해서 강제적으로 따르도록 의무지어진 것으로 이러한 형태의 규칙은 정언 명령이 될 수가 없고 오로지 각 개인이 스스로 자율성을 가진채 그것을 자신에게 적용할 수 있어야만 한다.  



영화속에서는 다양한 형태의 악당들이 등장한다.  그리고 그 악당들 역시 대단한 능력들을 가지게 된다.  스파이더맨은 우연히 그러한 능력을 얻었다곤 하지만 스파이더맨과 대적하게 되는 악당들은 대부분 어떠한 실험이나 스스로 원해서 되는 경우가 많다.  물론 샌드맨의 경우는 조금 다르긴 하지만 일단 우연일지라도 실험의 요소로서 탄생했다는 점에서 동일한 양상을 가지게 된다.  1탄에서의 고블린은 군사 무기를 주로 만드는 회사의 임원으로 회사가 몰리게 되자 무리한 실험을 진행 자신을 실험 대상으로 삼다가 고블린이 되어버리고 2탄에서는 핵융합 실험을 하던 박사가 그 실험의 실패와 그로 인한 부인의 죽음을 이유로 그 역시 괴물이 되어버린채 실험에 집착하게 된다.  스파이더맨의 친구인 해리 역시 자신의 아버지의 죽음에 스파이더맨이 관여해있음을 알게 되고 이에 증오를 품으면서 괴물이 되어버리게 되며 샌드맨은 약간 다르긴 하지만 우연히 가지게 된 그 힘을 가지고 자신의 목적을 위해 최선을 다해 악행을 저지른다.  


이러한 악당들은 그들 나름대로 이유가 있기 마련이다.  하지만 그들의 이유는 정언명령에 입각해 보았을때 바람직한 행동이 될 수가 없다.  그들이 내세우는 이유로서의 행위 준칙은 보편성을 가질 수도 없으며 보편화하게 되는 순간 자기 모순에 빠지게 된다.  샌드맨의 경우를 보자면 그의 행위 준칙은 다음과 같다.  A. 딸을 살리기 위해서 나는 도둑질을 한다.  이 명제를 보편화 하면 B. 자식의 생명과 안전을 위해 범죄를 해도 된다. 라는 명제가 도출된다.  그렇다면 모든 사람들이 자식을 위해 도둑질을 한다면 서로가 서로의 것을 훔치고 사회의 질서가 무너지는 상황이 도출될 것인데 그것이 과연 자식들의 안전과 생명에 도움이 된다고 할 수 있을까?  이 역시 자기 모순이 된다.  닥터 옥터퍼스의 경우에 마찬가지인데 괴물이 되어버린 이후 그의 행위 준칙은 A. 아무리 위험한 과학 실험이라도 나의 욕망을 위해서 행할 수 있다.  이 명제는 보편화하면 B. 아무리 위험한 과학실험도 그것의 목적이 옳바르다면 행할 수 있다.  이 핵융합 실험이 성공한다면 인류는 더 싸고 많은 에너지를 얻어 더 나은 삶을 영위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작게는 도시가 크게는 나라가 더 크게 보아 인류 전체가 멸망해버릴 가능성이 있다면 그게 무슨 소용일까?  결국 이 명제는 자기 모순을 가지게 된다.  


더욱이 영화속 악당들은 하나같이 메리 제인을 이용하여 스파이더맨을 잡으려는 시도를 하게 된다.  어떻게 보면 이 영화에서 메리 제인만큼 안타까운 인물도 없을듯하다.  저런일을 지속적으로 당한다면 외상후스트레스 장애가 심각할 수 밖에 없을듯한데 말이다.  아무튼 중요한 것은 메리 제인은 한명의 인간으로서 정당한 가치를 가진 존재로서 대해야만 하는데 오직 자신의 특정한 목적을 위해서 철저하게 수단으로만 이용하는 측면이 보인다.  이는 결국 정언명령의 두번째 형식에 따라서 굉장히 나쁜 행위가 될 수 밖에 없다.  



마무리

스파이더맨 시리즈는 상당히 잘만들어진 히어로 영화이다.  다만 스파이더맨3가 조금 산만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전체적인 주제의 연속성이라는 측면에선 괜찮은데 산만해도 너무 산만하다.  영화 시간은 2시간 20분에 달하는데 정리가 전혀 안되니 말이다.  적당히 버릴건 버리고 취할건 취하는 형태로 가져야되는데 싸그리 다 집어넣을려니 결론적으로 망조가 될 수 밖에 없지 않나 생각된다.  아쉬운 측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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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바닐라로맨스

    | 2012.09.12 08:47 신고 | PERMALINK | EDIT | REPLY |

    개인적으론 저는 경험론을 더 신봉?합니다.

  2. digoutblue02

    | 2012.09.13 04:01 | PERMALINK | EDIT | REPLY |

    다른 것은 이해가 잘 되지 않지만 인간을 하나의 목적을 이루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해서는 안된다는 것은 확실히 공감이 되는군요.

    현실에서 위선자들이 가장 많이 사용하는 멘트가 본인의 안위와 이익을 위해서 타인에게 책임을 미루거나 그 사람이 가진 소유물을 교활한 방법으로 취하려드는데, 이런 놈들은 항상 이런 말을 입에 달고 살죠.

    "다 너를 위해서야." 진정으로 다른 사람을 위한다면 이 따위 생생내는 말따위는 하지 않습니다.

    사설이 좀 길고 그다지 글의 주제와 상관없는 댓글을 쓴 것 같은데 아무튼 블로그에 씌여진 글들을 읽어보니 굉장히 알찬 글들이 많군요. 앞으로 자주 와서 읽고 사색하겠습니다.^^.

  3. 안용태의 유쾌한 인문학

    | 2012.09.14 02:03 신고 | PERMALINK | EDIT |

    그게 젤 핵심이죠. 인간을 수단으로 대하지 말고 목적으로 대하라..

    정말 맞는말인데 그 맞는말이 그다지 지켜지지는 않는 현실..ㅎㅎㅎ

  4. 레오 ™

    | 2012.10.08 17:41 신고 | PERMALINK | EDIT | REPLY |

    타인에게 홀려 자신의 의도에 벗어난 ..나쁜 행동을 할 우려도 크다는 생각입니다

  5. 훈이아빠

    | 2012.10.08 22:42 | PERMALINK | EDIT | REPLY |

    영웅적인 성을 철학적 정언명제로 풀이한다. 이게.가능 할까요? 이 명제를 완성하기 위해서는 영운 이란 명제의 정의 부터 확고히 내려져야 합니다. 만일 영웅이란.명제의 정의가 블안정히다면 나머지 글은 말장난에 블과합니다. 영웅의 개념의 선과 칸트의 선험적 선 또는 기타 선의.개념은.철학 개론서 하 두줄 일고 이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영웅의 개념 정리부터 하심이.어떠실런지요?

  6. 안용태의 유쾌한 인문학

    | 2012.10.11 06:43 신고 | PERMALINK | EDIT |

    ㅋㅋㅋ 아 이거 묘하게 웃긴데...

    자 이자리에서 논하는건 행위에 대해서만 좁혀서 말하고 있죠?

    근데 당신은 엉뚱한 걸 가져오네?? 영웅의 선이라..
    자 이런걸 보고 무슨 오류라고 할까요? 맞춰보세요.

    이런식의 논리라면 보자. 왠만한 윤리학 교과서에 나와있는 예는 다 병신소리가 되겠어요??

    하여튼 댁같은 사람들은 뭐랄까?? 말은 참 쉬워..

    당신 블로그에 써놓은 글을 두어개 읽어보니 지적인 면모가 너무 돋보입니다. 눈부실지경이에요.

    맞춤법, 띄어쓰기 죄다 틀려가며
    도대체 선을 말하고 싶은건지 성을 말하고 싶은건지 ㅉㅉㅉ

    아무튼 싸질러놨으니 스스로 그런 글을 쓰셔야죠??
    기대하겠습니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7. | 2013.04.15 00:21 | PERMALINK | EDIT | REPLY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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