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응형





벼랑 위의 포뇨, 에코 페미니즘이란 무엇인가?

생명이 넘치는 바다.  그 바다에 가라앉은 폐선에서 포뇨는 아버지 후지모토와 함께 살아가고 있다.  수많은 바다속 생명들과 평화로운 나날을 보내던 어느날 호기심 많은 포뇨는 해파리를 타고 바다 위로 올라온다.  그곳에서 저인망선의 그물에 휩쓸린 포뇨는 그만 유리병에 갇혀 버린다.  유리병에 갇힌채 해변가로 떠내려온 포뇨는 인간 소년 소스케의 도움으로 구출된다.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의 후기 작품 중 하나인 벼랑 위의 포뇨는 환경 파괴에 대한 메세지를 직접적으로 전달한다.  인간이 생선을 잡으며 살아가는 연해는 타이어, 유리병 그외 기타 온갖 쓰레기들로 넘쳐나는 상황이다.  포뇨의 아버지 후지모토는 포뇨를 구하기 위해 바다 속에서 추적하는데 그 과정에서도 엄청난 쓰레기들의 향연이 벌어진다.  포뇨의 아버지 후지모토는 이러한 인간을 경멸하는 것으로 보인다.  후지모토는 이상한 녹색 약을 모으고 있는데 그걸 다모으면 인간의 시대는 끝나고 바다의 시대가 열린다고 말한다.  하지만 포뇨는 인간이 되고 싶어 한다.  소스케와 같이 팔과 다리를 가진채 자신이 좋아하는 소스케와 함께 살아가고 싶은 것이다.  

인간 중심적 환경론과 생태 중심적 환경론

1963년 4월 레이첼 카슨은 미국의 CBS 리포트라는 시사토론 프로그램에 출연한다.  그곳에서 그녀는 침묵의 봄 을 통해 제기하였던 살충제 사용에 대해 토론을 한다.  여기에서 중심에 선 살충제는 DDT였다.  레이첼 카슨의 주장은 단순 명료하다.  과도한 DDT의 사용으로 인해 더이상 봄이 와도 새들이 울지 않는다는 것이다.  우리가 아무것도 모른채 행하는 수많은 화학물질의 사용과 환경 파괴 행위들은 궁극적으로 인간에게 심각한 문제를 일으키고 있다.  DDT를 살포한 지역에서 새들이 죽어나는 현상이 발견되었고 이는 인간에게도 다양한 문제를 야기하였다.  당시 상대 토론자였던 화이트스티븐스 박사는 우리가 살충제 사용을 포기하면 곤충과 질병이 넘쳐 암흑시대로 돌아갈 것이라고 경고하며 레이첼 카슨은 아무것도 모르면서 자연만을 중요시하는 광신자에 불과하다고 비난한다.  심지어 어떤이는 레이첼을 두고 공산주의자라고 비난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녀의 이러한 노력은 미국에서 1969년 국가환경정책법의 제정을 이끌어낸다.  그리고 침묵의 봄은 전세계적으로 환경 보호와 환경 윤리에 대한 중요성을 상기시키고 1922년 리우 선언을 이끌어내는 원동력이 된다.  

환경운동은 크게 보아 인간 중심적 환경론과 생태 중심적 환경론 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양쪽 모두 자연을 보호하고 존경해야 한다는 공통점을 가지지만 그 이유는 약간 다르다.  인간 중심적 환경론은 인간이 자연을 보호하지 않으면 우리 자신을 해치기에 자연을 보호해야한다고 주장하는 반면 생태 중심적 환경론의 경우는 자연 그 자체의 가치가 중요하기에 환경을 보호해야 한다고 말한다.  즉 인간 중심적 환경론은 철저하게 인간의 관점에서 내려진 인간의 번영을 위한 환경운동에 불과한 것이다.  그렇기에 이들은 상황에 따라서 인간에게 더 큰 이득이 온다면 환경을 파괴하는 것도 얼마든지 정당화된다.  상황에 따라선 나무를 베어도 되고 동물이 위험하다면 사살할 수도 있다.  철저하게 자연은 인간의 도구의 위치에 서게 되는 것이다.

인간 중심적 환경론은 도구적 이성론의 지배를 강하게 받고 있는 환경론이다.  이는 1부에서 지속적으로 살펴보았듯 근대 이성의 본질적인 한계이다.  데카르트의 코키토 명제는 인간만이 세계와 우주의 중심에 설 수 있는 유일한 존재이며 그외 자연의 사물들은 철저하게 객채에 불과하기에 인간은 만물을 지배할 수 있다고 여긴다.  인간만이 이성을 가진 존재이자 우주의 중심에 설 수 있는 존재이기에 환경을 어떤식으로 다룰지는 철저하게 인간의 입장에서 선택할 수 있다.  이러한 태도는 과거 신 중심적 사고관에서도 쉽게 확인할 수 있다.  신은 인간에게 모든 자연물을 정복하고 다스시라고 명령한다.  “자녀를 많이 낳고 번성하여라.  땅을 다스리고 살아라.  바다의 물고기와 공중의 새들과 땅 위에서 살아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려라.”   기독적 사고관 하에서도 이미 모든 자연으로 도구로 사용하라는 태도는 어렵지 않게 확인할 수 있다.  이를 두고 박이문은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가치는 언제나 평가된 가치이고, 평가 주체를 전제로 한다.  오직 인간만이 평가 주체일 수 있고, 오로지 인간만이 자신의 욕망과 목적 그리고 그와 관렪여 어떤 대상이나 현상을 가치로 의식할 수 있다.”   인간 중심적 환경론에 따르면 오직 인간만이 세계의 중심에 선채 가치를 매길 수 있는 존재이기에 자연은 얼마든지 평가되고 수정될 수 있는 것이 된다.

생태 중심적 환경론은 모든 것을 수치화하고 부품화하는 자연관을 거부한채, 자연을 도구가 아닌 하나의 본질적 가치로서 설정하여 자연을 중심에 놓는 환경운동을 전개한다.  이들에 의하면 자연의 모든 구성원은 전부 윤리적 배려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  단순히 커다란 포유물이나 파충류따위의 생물을 넘어 박테리아, 흙, 물, 공기 따위에도 윤리적 배려를 행해야 한다.  정리하자면 모든 지구상의 생명 또는 비생명은 전부 그 자체로서 가치를 가지며 인간은 다양한 가치들을 판단하거나 축소시킬 권한이 없다.   하지만 이러한 태도에는 상당한 비판이 가해진다.  과연 어떤 것이 존재한다는 이유만으로 본질적인 가치를 가진것으로 볼 수 있는지가 의문이며 도대체 자연의 그 본질적 가치라는 것이 무엇인지도 상당히 애매하다.  아무튼 중요한 것은 이러한 두가지 환경론은 에코페미니즘의 이론적 근거이자 뿌리의 역할을 한다는 점이다.

에코페미니즘, 어머니로서의 자연

오래된 지혜를 의미하는 에코페미니즘은 1974년 프랑소와 도본느의 저서 페미니즘 또는 파멸에서 처음 언급된 이후 지속적으로 발전한 이론으로 오늘날에는 페미니즘 운동의 제3물결이라고 칭해질 정도로 중요한 위치를 점하고 있다.  에코페미니즘에 의하면 자연 파괴와 여성 억압 사이에는 가부장제에 의해 억압 받는다는 중대한 공통점을 가진다.  자연과 여성은 백인남성 가부장제와 기술문명, 가부장적 자본주의 따위에 의해 철저하게 억압받는다.  더욱이 자연의 파괴는 여성에게 치명적인 피해를 안겨준다.  예를 들어 지나친 화학물질의 사용으로 인해 여성들의 기형아 잉태률이 높아지게 되었으며 그로 인해 여성들은 신체적 정신적으로 고통받게 된다.  따라서 여성들은 적극적으로 환경 운동에 나서야 할 필요성이 있다고 말한다.  샤를린 스프레트낙은 에코페미니즘으로 진입하는 방법으로 크게 세가지가 있다고 말한다.   첫째는 사회주의 계급 이론이 여전히 피지배 계급으로 남아있는 여성과 자연의 문제를 등안시하기에 진입하는 경우이다.  둘째는 여성적인 것을 숭배하고 초월보다는 내재를 강조하는 자연에 기초한 여신 종교에 참여하여 진입하는 경우이다.  이들은 인류학의 성과를 이용하여 고대 여신들을 발굴하고 대지의 여신인 가이아를 숭배한다.  셋째는 환경보호운동을 전개하던 여성들이 환경 운동의 지나친 남성 편향성의 한계를 느껴 진입하는 경우이다.  

에코페미니즘에는 다양한 견해들이 상존할 수 있으며 이는 여성과 자연의 관계에 대한 태도에서 뚜렷하게 드러난다.  첫째는 여성과 자연을 단절해야 한다는 주장으로 대표적으로 보부아르를 들 수 있다.  여성이 차별당하는 이유는 여성과 자연을 동일시하기 때문이라고 바라본다.  자연과 동일시된 여성은 생물학적 한계로부터 벗어날 수 없기에 출산, 육아 따위에 의해 사회적 활동이 제약된다.  따라서 여성은 자연과의 관계를 단절시켜야 한다고 말한다.  반면 여성과 자연의 연관성을 재확인하려는 견해도 있는바 대표적으로 메리 데일리를 들 수 있다.  중요한 것은 여성과 자연의 상호 연관성에 대해서 연구하는 과정에서 모든 차별과 억압에는 한가지 공통점이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인종차별, 여성차별, 계급차별, 자연파괴에 이르기까지 이 모든 것들에는 가부장제가 중심에 놓여있다.  사회주의 혁명에 성공하였음에도 이 차별들이 근본적으로 해결되지 못한 이유는 가부장제 그 자체가 상하 위계질서에 기반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가부장제는 다양한 모습을 통해서 나타난다.  

첫째로 가부장적 자본주의를 들 수 있다.   마리아 미스는 이를 두고 따라잡기식 개발의 신화라고 말한다.   물질적으로 풍요롭고 편리한 생활이 이루어지는 도시에서의 삶은 현대적 유토피아의 전형이라고 볼 수 있으며 이는 뒤쳐진 국가나 사람들이 최선을 다해서 성취해야할 유토피아이다.  하지만 이러한 사고방식은 근본적인 문제점을 가지고 있다.  소위 말하는 선진국이 이뤄낸 물질적 풍요는 저개발국들을 착취하고 탄압하여 이루어낸 것에 불과하며 이러한 선진국과 저개발국의 관계를 식민지관계라고 부른다.  식민관계론은 더욱 확장하여 중심부와 주변부의 관계 역시 식민지관계로 바라본다.  예를 들어 인간과 자연의 관계, 남성과 여성의 관계, 서울과 지방의 관계, 도시와 시골의 관계가 그것이다.  이는 강준만의 내부식민지론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강준만은 지방이 피폐해진 이유로 지나친 교육열을 든다.  지방의 우수한 인재가 서울로 가서 공부를 하는 것이야 말로 지방의 발전과 개인의 발전에 도움이 된다고 믿기에 지방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자녀들을 서울로 보내기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한다.  하지만 이러한 생각은 전형적인 내부 식민지 근성에 다름이 없다.  사실 이러한 믿음은 일종의 이데올로기적 신화에 불과하다.  상위에 놓인 중심이 하위에 놓인 주변부의 모든 것을 별볼일 없고 가치 없는 것으로 평가절하하고 이를 주변부의 사람들이 받아들여 내재화하면 식민지관계가 형성된다.  

이러한 관계는 인간과 자연 사이에서도 반복된다.  현대 산업사회는 소비를 최대의 미덕으로 삼는다.  최대한의 편안함과 풍요로움을 위해서는 끊임없이 소비해야 하는 것이다.  하지만 지나친 소비는 자연스럽게 환경파괴를 불러올 수 밖에 없다.  더 많은 생산을 위해 농약을 치고 더 많은 보석을 얻기 위해 산을 파헤친다.  편리한 교통을 위해 너도나도 자동차를 끌고 다니고 편리한 식사를 위해 가공식품을 사먹는다.  그로 인해 인간들은 과도한 스트레스, 아토피, 대기오염 등으로 고통받고 있다.  이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은 소비를 줄이는 것인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산업 자본주의가 제시한 이데올로기적 유토피아에 함몰되어 소비를 자제하지 못한다.  도리어 사람들은 과학기술이 더욱 발전하면 이 모든 문제를 해결해줄 수 있을거라 믿으면서 더 큰 소비를 향해 나아간다.   이 과정에서 자연은 철저하게 원자재로서 분해되어 소비되고 오염되어 버린다.  하지만 이러한 유토피아는 지속적인 착취와 억압 없이는 이루어질 수 없는 공염불에 불과하다.  누군가의 희생이 지속적으로 이루어지고 있지만 애써 모른척 할뿐인 것이다.

둘째로는 과학 기술을 들 수 있다.   근대 과학은 가장 객관적이고 보편적인 지식체계로서 간주된다.  하지만 여기에서도 가부장제를 확인할 수 있다.  객관적이라는 미명아래에 남성은 이성적이고 여성은 비이성적이며 비합리적이라고 말한다.  과학기술은 철저하게 남성적인 영역에 불과하다.  이는 한국 사회를 보더라도 어렵지 않게 확인할 수 있다.  불과 20년전만 하더라도 여성이 공과대학에 진학하는 것은 상당히 기이한 일이었으며 설사 공과대학에 진학하더라도 현장에서 좋은 지위를 얻기는 어려웠다.  더욱이 과학 기술은 전문가와 비전문가를 독단적으로 나누기에 이른다.  반다나 시바는 이를 출산의 과정을 통해 설명한다.   과거 임산부는 아이를 낳는 진정한 주체였으나 근대 이후 산부인과 기술이 발전하게 되면서 어머니는 출산의 과정에서 완벽히 배제된다.  아무리 임산부가 자연 출산을 하고 싶더라도 전문가가 제왕절개를 해야 한다고 선언내리면 그렇게 해야만한다.  “분화되고 단편화된 지식에는 한가지 기만이 내재해 있는데 이런 지식은 비전문가의 지식을 무지로 치부해버리며 인위적인 분할을 통해 지식 자체의 무지를 감출 수 있다는 점이다.”   이를 두고 반다나 시바는 환원주의 과학의 폭력이라 말한다.  환원주의 과학은 자연과 여성으로부터 그들의 생산의 힘과 잠재력을 빼앗으며 도리어 자연과 여성을 하나의 원자재이자 기계 부품으로 바라본다.  이에 여성의 생식과 출산 역시 하나의 원료이자 생산과정에 불과하게 된다.  물론 과학 기술은 이것을 합리적이고 객관적이라는 미명아래에 정당화된다.  

생명의 모태 바다 그리고 그 오염

이 작품의 가장 인상 깊은 장면은 바다 아래 가득히 쌓여있는 쓰레기를 치우는 장면이다.  저인망선을 이용하여 쓰레기를 거둬드리는데 너무 많은 쓰레기들은 감당을 못할 정도이다.  우리는 여름이 되면 9시 뉴스를 통해 해변가 쓰레기에 대한 기사를 자주 접하곤 한다.  한여름 해운대 해수욕장으로 피서를 온사람들은 끝도 없이 쓰레기를 버린다.  특히 밤이 되면 이러한 모습은 더 심해지는데 끝도 없이 널려있는 담배꽁초와 술병들은 아름다운 백사장을 온대간대 없이 만들어버린다.  그들이 쓰레기를 아무렇지도 않게 버리는 이유는 누군가 해결해줄 것이라는 막연한 믿음 때문이다.  어차피 술에서 깨어나 아침에 백사장에 나가보면 다시 깨끗해져있으니 말이다.  그 많은 쓰레기중 얼마나 많은 수가 바다로 흘러들어갔을까?  이렇듯 바다를 파괴하는 인간이 너무나도 싫었던 후지모토는 인간을 포기한채 바다 속에서 살게 된다. 

바다는 어떤 곳일까?  우리 모두가 알다시피 바다는 생명의 요람이다.  지구의 모든 생명은 바다에서 시작되었고 인간 역시 바다에서 태어났다.  인간이 태어나기전 양수로 가득찬 자궁에서 자라나듯 바다는 지구 모든 생명의 자궁역할을 하게 된다.  그런데 한번 상상을 해보자.  어머니의 자궁이 쓰레기로 가득차있다면 어떨까?  인간이 지속적으로 쓰레기를 바다에 투척하는 행위는 사실상 어머니의 자궁에 쓰레기를 버리는 것과 다름이 없다.  영화의 후반에 포뇨가 인간이 되기 위해 지상으로 나오는 과정에서 거대한 해일이 일어 지상의 많은 부분이 물에 잠겨 버린다.  이에 포뇨와 소스케는 배를 타고 나가다 어느 한 부부를 만나게 된다.  포뇨는 아이를 안고 있는 부부에게 스프를 선물하면서 아이에게 먹이려고 한다.  하지만 너무 어린아이는 스프를 먹을 수 없기에 어머니가 대신 먹고 젖을 통해 아이에게 건네 준다.  모든 생명은 바다에서 시작하여 생명에서 생명으로 이어진다.  그런데 인간이 바다를 더럽힌다는 것은 그 원초적인 것을 더럽히는 것에 다름이 없고 그 최대의 피해자는 어느 누구도 아닌 인간이다.  이 지점에서 주의해야할 것은 지나친 인간 중심적 환경론을 내세워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인간이 피해를 입기 때문에 쓰레기를 버리지 말아야 한다는 논리는 상황에 따라서 언제든지 역전될 수 있는 논리이다.  따라서 도리어 자연을 하위에 놓는 가부장제적 권력 관계 그 자체를 극복하여 자연과 하나되는 삶을 추구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볼 수 있다. 

물고기였던 포뇨와 그 상징

포뇨는 원래 물고기였는데 소스케의 피를 햝아 먹은 이후 인어가 되어버린다.  그 이후 포뇨는 사람으로 변했다가 인어로 변했다가 물고기로 변했다 하면서 왔다 갔다 하게 된다.  이러한 포뇨의 모습은 일종의 상징으로 작용한다.  즉 인간의 모태는 바다이고 인간 역시 바다에서 시작되어 진화한 존재라는 것을 표현하기 위한 장치인 것이다.  포뇨는 사람이 되고 싶은 아이이다.  하지만 그녀는 바다 여신의 아이이자 물고기이기에 인간이 되기 위해선 진화와 같이 중간단계를 거쳐야 할 것이다.  모든 생명은 바다에서 진화를 하지만 인간들은 그 바다를 더럽히고 있는 상황이다.  결국 포뇨는 자신이 태어난 자궁을 더럽히고 오염시키는 인간들을 비판하는 상징인 것이다.  더 흥미로운 부분은 포뇨가 인간을 욕망하면 할수록 마법의 힘을 잃어간다는 것이다.  바다의 여신은 포뇨가 인간이 되면 마법을 완전히 잃어버린다고 말한다.  사실 포뇨가 가지는 마법의 원천은 결국 자연의 힘이라고 볼 수 있다.  생명의 창조와 같은 도대체 이해하기 힘든 모든 위대한 힘은 자연에서 비롯된다.  따라서 인간이 마법을 부릴 수 없는건 자연과의 소통하는 법을 잃어버렸다는 상징이 되는 것이다.

이 작품에서 해일을 표현하는 방식이 상당히 인상 깊다.  해일을 단순한 파도로 그리지 않고 거대한 물고기들이 헤엄쳐오는 것으로 표현한 것이다.  하지만 극중 사람들의 눈엔 그냥 거대한 파도로 밖에 보이지 않는다.  사실 해일의 본질이 거대한 물고기인지 그냥 파도인지는 아무도 알 수 없다.  현대 과학의 입장에서는 합리적이고 객관적으로 판단하여 파도라고 이야기하겠지만 자연과 소통하는 방법을 아는 인간이라면 그것을 두고 거대한 물의 물고기라고 표현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만약 파도를 두고 거대한 물고기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면 현대 과학은 그를 두고 미쳤거나 비합리적인 사람으로 치부해버릴 것이다.  현대과학의 환원주의는 모든 다른 앎의 방법을 배제하여 자연에 대한 인간의 인식능력을 축소시킨다.  실제 소스케는 거대한 파도가 물고기로 보이고 그 위를 달리는 포뇨도 보인다.  현대 과학의 시각으로 보지 않고 자연과 소통하면서 바라본다면 완전히 다른 인식도 가능한 것이다.  어떻게 보면 어린아이와 같은 순수한 마음을 가진 존재만이 자연과 소통하는 방법을 알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소스케의 진실된 마음

영화의 마지막에 다달으면 포뇨는 점차 힘을 잃어 거품으로 변해간다.  이때 바다의 여신인 포뇨의 어머니는 소스케에게 묻는다.  “소스케 우리 포뇨는 인간이 되고 싶어서 마법의 뚜껑을 열어버렸어요.  인간이 되기 위해선 포뇨의 진짜 모습을 알면서도 그래도 좋아하는 남자애가 있어야 해요.  당신은 포뇨가 예전에 물고기였다는 것을 알고 있나요?  포뇨는 당신의 피를 먹고 인어가 됐어요.  그런데 당신은 포뇨가 인어라도 상관이 없나요?”  이에 대한 소스케의 대답은 단순 명료하다.  “저는 물고기 포뇨도 인어 포뇨도 인간 포뇨도 전부다 좋아요.” 만약 소스케가 물고기라서 싫다고 했다면 포뇨는 거품이 된채 사라졌을 것이다.  혹자는 이를 두고 어린 아이이기에 너무 쉽게 대답한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 같다.  하지만 소스케의 저 손쉬운 대답은 하나의 중요한 메세지를 전달해준다.  

우리는 어떤 존재자를 그 본질에 관계없이 순수하게 바라볼 수 있을까?  이건 정말로 어려운 일일 것이다.  인간은 지배적 이데올로기에 함몰된채 껍데기에 집착할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만약 포뇨의 본모습을 놓고 고민을 한다면 그건 포뇨의 가치를 놓고 평가를 하는 것에 다름이 아니다.  평가를 한다는 것과 그 결론에 따라 그녀의 생사 여탈까지 결정짓는다는 것이야 말로 전형적인 근대성의 발로에 다름이 없다.  내가 세상의 중심이기에 모든 것을 평가내리고 그의 운명을 결정짓겠다는 태도인 것이다.  현대인은 이러한 오만에 쉽게 빠져든다.  자연의 본질이 무엇이든 상관없이 내가 평가내리고 운명을 결정짓는다는 태도는 내가 상위에 위치해있다는 가부장제적 태도에 다름이 아니다.  마지막으로 포뇨 어머니의 대사를 살펴보자.  포뇨가 인간이 되는 것에 실패하면 거품이 되어버릴 수도 있다는 포뇨 아버지의 걱정에 그녀는 이렇게 대답한다.  “우린 원래 물거품에서 태어난걸요.”  우리 모두는 결국 하나의 거품에 불과하였고 그 거품은 위대한 대자연에서 나온 것이다.  거품에 불과했던 인간이 서로를 등급매기고 차별하고 착취하는 이 모든 행동들이 얼마나 의미없고 허무한 것일까?  바다의 여신은 우리에게 그렇게 가슴을 울리는 한마디를 던져주었다.



반응형
Write your message and submit
« PREV : 1 : 2 : 3 : 4 : 5 : ··· : 33 : NEXT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