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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로크백 마운틴, 강요된 이성애와 젠더의 문제

만년설과 넓은 초원 그리고 수천마리의 양떼가 방목되어 있는 브로크백 마운틴.  8월의 한여름 두청년인 에니스(히스 레저 분)와 잭(제이크 질렌할 분)이 방목된 양떼를 관리하기 위해 산으로 오른다.  서로 처음 본 둘은 약간의 서먹함이 있었지만 점차 가까워지게 되고 급기야 단순한 우정을 넘은 감정을 확인하기에 이른다.  그 감정은 급작스럽게 이루어진 성관계를 통해 더욱 혼란스럽게 다가온다.  상당히 보수적인 미국 남부에서 자란 두사람에게 다가온 동성을 향한 사랑이라는 감정은 어떤 면에선 상당히 위험할 수 있다.  자신들이 속해있는 사회와 문화는 그것을 철저하게 비정상으로 치부하여 공동체를 위협하는 없애야할 것으로 바라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 지점에서 한가지 질문을 던져볼 수 있다.  왜 영화 속의 사회는 동성애를 기피하는 문화를 가지게 된 것일까? 사실 두명의 동성이 서로 사랑을 하던 말던 타인의 삶과는 크게 관계가 없다.  물론 당사자의 부모님에게는 큰 충격을 줄 순 있겠지만 그들이 없어져야 할만큼 큰 위해를 끼친다고 보기는 힘들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동성애를 금기하게 됐을까? 

페미니즘과 차별의 문제

오늘날 한국사회에서 페미니즘을 이야기하면 상당히 안좋은 시선을 받기 쉽다.  꽤나 많은 사람들이 현대의 여성들은 오히려 남성보다 더 상위에 있으며 법적, 문화적, 경제적 모든 면에서 여성에 대한 배려가 이루어지고 있기에 도리어 남성과의 역차별이 문제가 된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이러한 주장은 어느 정도의 한계가 있는바 그 혜택을 받는 대상이 교육받은 중산층 이상의 여성만으로 한정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실제로 이는 단순한 편견을 넘어 페미니즘 운동이 가지고 있는 근본적 한계이다.  앞서 지속적으로 이야기하였듯 페미니즘 이론은 특정계층의 여성만을 대상으로 삼는 한계를 보여준다.  문제는 그러한 특정한 여성을 기준으로 삼은채 그들이 여성 전체를 대표하는듯한 보편적 여성을 창출한다는 점이다.  이에 여전히 억압받고 차별받는 저학력 저소득 계층의 여성들은 보편적 여성과 여성의 공통된 경험이라는 미명아래에 무시된다.  그렇다면 과연 저학력 저소득 여성과 고학력 중산층 여성이 같은 여성이라고 볼 수 있는 것일까?  여성이라고 하여 과연 다 같은 여성이라고 볼 수 있는 것일까?

이러한 상황에서 주디스 버틀러의 이론은 많은 시사점을 던져준다.  단순히 여성을 위한 이론을 넘어 모든 차별받고 억압받는 사람들에 대한 이론의 가능성을 연것이다.  주디스 버틀러의 페미니즘 이론은 단순히 여성운동을 넘어 섹스와 젠더 그 자체를 해체하기에 이른다.  섹스와 젠더가 해체되자 우리가 정상이라고 생각했던 모든 것들이 사실상 지배적 권력과 다양한 형태의 범주(민족, 언어, 교육 등)들에 의해 구성된 것에 불과하다는 사실이 드러난다.  정상의 범주에 있는 모든 것들이 사실상 구성된 것에 불과하다면 비정상으로 치부되는 것들의 복권이 가능해진다.  이것이 바로 주디스 버틀러의 퀴어 이론이다. 

생물학적 결정론과 젠더

우리는 흔히 섹스는 생물학적으로 결정된 것이고 젠더는 사회문화적으로 구성된 것이라고 생각하며 이는 가부장제 사회를 비판하는데 매우 효과적이다.[1]  즉 여자는 이래야 하고 저래야 한다는 식의 규정된 여성성은 가부장제가 만들어낸 젠더에 불과하다고 비판하는 것이다.  섹스와 젠더의 구분은 생물학적 결정론의 태도에 저항하기에 매우 효과적이다.  예컨대 여자는 몸이 약하기 때문에 어떤 일은 할 수 없다, 여자는 아이를 낳아야하기 때문에 사회생활을 할 수 없다, 여자는 감정적으로 태어났기 때문에 이성적이고 논리적인 일은 할 수 없다는 식의 태도가 바로 결정론이 가져온 여성차별의 문제이다.  생물학적 결정론의 입장에서 바라본다면 여성은 그렇게 결정되어 있기 때문에 차별받는 것은 당연해진다.  하지만 여자라서 할 수 없다는 것들이 사회문화적으로 만들어진 규범성을 띈다면 생물학적으로 결정된 섹스때문에 할 수 없다는 말은 불가능해진다.  따라서 여성 차별의 문제는 젠더 때문에 발생한 편견의 문제가 되며 편견으로 얼룩진 젠더를 걷어내어야 성차별의 문제를 극복할 수 있게 된다. 

하지만 이러한 태도는 근본적인 한계를 지니게 되는데 사회문화적으로 구성된 젠더를 치워내면 진정한 여성의 본질이 나타난다는 이원론으로 빠져드는 것이다.  젠더가 지배적 권력에 의해 구성된 것이라면 섹스는 지배적 권력과는 상관없는 그 자체로서 본질적이고 순수한 것이 된다.  섹스/젠더 이원론은 여성을 비하하는 생물학적 결정론의 태도에 저항할 수 있게 해주었지만 동시에 여성의 생물학적 섹스는 성스럽고 자연적이며 중요한 것으로 여기게 된다.  즉 여성의 생물학적 섹스가 더 우위에 서있는듯한 결론이 내려지는 것이다.  더욱이 여성의 섹스는 모든 여성에게 주어진 단 하나의 본질처럼 여겨짐으로서 생물학적 결정론과 사실상 다를바 없는 태도를 보여준다.  바로 이 지점에서 주디스 버틀러의 논의가 시작된다.

젠더트러블

버틀러는 생물학적 섹스 자체도 젠더의 효과에 불과하다는 주장을 펼친다.  즉 생물학적 섹스와 젠더 사이에는 필연적인 관계가 없으며 인위적으로 결합된 것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남자라는 섹스를 가진다고 하여 남성성이라는 젠더를 가져야할 이유는 없으며 마찬가지로 여자라는 섹스를 가진다고 하여 여성성이라는 젠더를 가져야할 이유도 없다.  남자라는 섹스를 가진채 여성성을 가져 여자같은 남자가 있을 수 있고 반대로 남자같은 여자가 있을 수도 있지만 우리는 흔히 남자는 남성성을 가져 여자를 사랑하게 될 것이고 여자도 반대로 남자를 사랑하게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남성 또는 여성이라는 단어로서 모든 남성과 모든 여성을 하나로 묶어낸다는 것이 과연 가능한지는 의문이 들 수 밖에 없다.  여성이라는 섹스를 가지고 태어난다고 하여 모든 여성들이 다 같은 것은 아니다.  백명의 여성이 있다면 그들의 젠더는 인종, 계급, 지역, 민족 등 다양한 정체성들이 교차하면서 나타날 수 있지만, 자유주의 페미니즘과 급진주의 페미니즘은 이들을 보편적 여성 또는 여성의 공통된 경험이라는 말로서 단순하게 환원시켜 버린다.[2]  수많은 여성들을 하나의 단어로서 환원시키려는 시도는 여성을 바라봄에 있어 어떤 본질을 상정하는 것에 불과하다.  이때 여성의 본질은 생물학적 섹스를 통해서 형성된다.  여성이 가지고 있는 공통된 성기라는 생물학적인 특징을 통해서 보편적 여성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보편적 여성은 상당한 폭력성을 내포한다.  그 안에 포섭될 수 없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다.  에르퀼린 바뱅(Herculine Barbin)은 양성인간으로 여자로 태어난 뒤 뒤늦게 남성적 이차성징이 발현되어 동료 여교사와 성관계까지 맺는다.  바뱅이라는 사람은 남성다움과 여성다움이라는 젠더로는 분류 할 수 없고 생물학적 남성과 여성이라는 섹스로도 분류가 되지 않는 존재이다.  양성인간이나 간성, 트렌스젠더 같은 제3의 성은 분명히 존재하지만 남성과 여성이라는 이분화된 섹스 기준에서는 저들을 설명할 수 없다.  따라서 저들은 괴물이나 비정상 또는 치료받아야할 무엇으로 전락해버린다.  푸코는 성의 역사에서 섹스는 절대적 본질로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진 것에 불과하다고 주장한다.  세상에는 다양한 섹슈얼리티가 존재하지만 마치 이성애를 위한 두가지의 섹슈얼리티[3]만이 있는 것처럼 규제하는 것은 폭력에 다름이 아니다.  이는 근대에 이르러 나타난 현상으로 성적 지향성에 의해서 나의 정체성이 규정되기 시작했을때 섹스의 범주가 만들어진 것이다. 

근대에 이르러 하나의 주체안에 동성애(호모섹슈얼리티)와 이성애(헤테로섹슈얼리티)라는 두개의 섹슈얼리티가 존재한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해진다.  도리어 이성애를 정상으로 바라보는 젠더 정체성이 관행적으로 반복 수행되며서 섹스와 섹슈얼리티는 이원적으로 규정된다.  섹스와 젠더는 이러한 관행을 통해 이성애라는 이름으로 일치된다.  만약 섹스와 젠더가 일치하지 않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이성애 중심으로 돌아가는 지배적 권력에 반하는 것이 된다.  따라서 지배적 권력은 이성애 이외의 섹슈얼리티는 마치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배제하여 버린다.  이러한 과정이 지속적으로 반복되면서 오직 이성애만이 존재하고 그 이성애를 효율적으로 설명하기 위해 두가지 섹스만이 존재하는 것처럼 만들어진다.  이것이 바로 근대에 들어 만들어진 강제적 이성애이다.  이를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젠더는 지배적 이데올로기가 만들어낸 성 역할에 불과하며 섹스는 규율적 젠더에 의해 만들어진 것으로 젠더의 성역할을 정당화하는데 사용될 뿐이다.  따라서 젠더 정체성 역시 규율권력이자 지배담론에 불과해진다.  이렇게 주디스 버틀러는 푸코의 논의를 빌려와 절대적 본질과 같이 규정되어 있는 섹스를 해체하는데 성공한다.  섹스는 마치 불변의 본질처럼 여겨지는 경우가 많았지만 이 역시 규정되고 만들어진 것에 불과하였다.  그런데 어느 순간 섹스가 마치 젠더의 원인인 것처럼 주객이 전도되어 버렸으며, 주객이 전도된 섹스는 하나의 자연적인 본질로서 상정되어 젠더를 규정짓는 것처럼 보이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논의 하에서 주체는 젠더에 선행하는 것이 아니라 젠더의 반복 수행에 의해서 만들어지는 것이 된다.  젠더에 선행하는 주체는 가능하지 않다.  버틀러는 젠더를 수행성으로 설명하여 이것은 존재하는 것(being)이 아니라 행하는 것(doing)이라고 말한다.

동성애 금기와 동일시

그렇다면 남성성과 여성성이라는 젠더는 어떻게 만들어진 것일까?  프로이트는 자아와 이드[4]에서 남아는 어머니를 욕망하지만 근친상간 금지에 따른 거세 공포에 의해 아버지와 동일시를 이루며, 여아 역시 어머니를 욕망하지만 동성애 금지로 인해 아버지를 욕망하게 되고 이는 다시 근친상간 금지로 인해 어머니의 동일시로 나아간다고 말한다.  그런데 왜 아이들은 항상 이성 부모에게만 리비도 집중을 일으키는 것일까?  프로이트는 이에 대해 선천적인 성적 지향성때문이라고 말한다.  즉 선천적인 성적 지향성에 의해서 동일시가 일어난다는 것이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이성애는 정상적인 자연적 질서라는 것이다.  이에 프로이트는 먼저 이성애를 전제한 이후 이를 따르는 것은 너무나도 자연스러운 자연적 질서라고 말하는 것이다.  결국 프로이트의 논의는 다시금 본질론으로 퇴보해버리며 이것이 프로이트의 논의가 가진 근본적인 한계이다.[5]  

버틀러는 이러한 프로이트의 이론을 전복시켜 선천적인 성적 지향성때문에 동일시가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동일시 때문에 성적 지향성이 드러난다고 말한다.  먼저 버틀러는 동성애 금지와 근친상간 금지를 중심에 놓은채 동성애 금지를 우선하는 것으로 바라본다.[6]  남아는 동성애 금지와 거세공포 때문에 동성인 아버지에 대한 욕망을 포기하고 동일시를 행하게 된다.  이 동일시의 과정을 통해 남아는 남성성을 획득하게 되고 그 이후 근친상간 금지를 통해 어머니가 아닌 다른 여성을 욕망하게 된다.  여아 역시 마찬가지로 어머니에 대한 동일시를 통해 여성성을 획득하고 근친상간 금지를 통해 아버지가 아닌 다른 남성을 욕망하게 된다.  이 매커니즘에서 중요한 것은 동성애 금지와 근친상간 금지라는 두가지 요소가 오랜기간 지속적으로 반복 수행되면서 금지가 내면화되다는 것이며 이를 통해 남자다움과 여자다움이라는 젠더가 만들어져 이성애가 강제된다는 점이다.  이성애라는 것은 프로이트의 말처럼 선천적인 것이 아니라 두가지 금지를 지속적으로 반복 수행하는 과정에서 생겨난 것이다.

금기의 생산과 동성애 우울증

현대의 꽤나 많은 문명국가들은 동성애를 비정상적으로 치부하는 경우가 많다.  이성애를 중심으로 형성된 가부장제 사회는 지속적으로 자신의 지배적 권력을 이용하여 정상과 비정상을 나누고 비정상적인 것들을 배제한다.  가부장적 사회는 스스로가 만들어지고 구성된 것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한채 원래부터 그랬던 것처럼 마치 그것이 아니면 안되는 것처럼 자신을 표현한다.  오늘날 한국사회를 보더라도 이런 현상은 어렵지 않게 확인된다.  우리가 행하는 수많은 가부장적 관습들은 그 기원이 그렇게 오래된 것이 아니다.  하지만 그것들은 마치 오천년전부터 그래왔던 것처럼 너무나도 당연한 본질처럼 여겨진채 지속적으로 반복수행된다.  이러한 관습에서 도출되는 단어중 가장 인상 깊은 것은 바로 우리이다.  우리라는 말은 민족, 국가, 순수혈통, 가족, 고향, 학벌 등 다양한 범주와 만나 그 폐쇄성을 유지한다.  중요한 것은 우리라는 단어에서 배제되는 것들이다.  동성애자, 가난한 자, 장애인 등 배제되는 것들은 마치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치부되지만 다른 한편으론 이것들은 정상적인 것들을 위해서 반드시 생산되고 존재해야 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것이 바로 법 즉 지배적 권력이 보여주는 폭력성이다. 

금지된 동성애는 절대로 드러나서는 안되기에 내면화되어 동성애 우울증을 구성한다.  이는 프로이트의 애도와 우울증[7]에서 그 모티브를 찾을 수 있다.  인간은 사랑하는 대상을 상실하였을때 그에게 부여되었던 리비도를 회수하여야 한다.  그 과정을 통해서 그 슬픔을 극복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슬픔을 이겨낸다고 하여 자아가 이전의 상태와 동일한 것은 아니며 변화하게 된다.  중요한 것은 이러한 슬픔의 극복 과정이 모두에게 동일한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예컨대 사랑하는 사랑이 죽었다고 해보자.  이때 대상의 죽음을 슬퍼하고 애도할 수 있는 자격이 주어지는 것은 오직 이성애자뿐이다.  이성애자가 아닌 자들은 애도 그 자체가 허용되지 않는다.  애도는 대상의 상실을 슬픔을 통해 천천히 극복하여 치유를 하는 과정이지만 비이성애자들은 그것이 허용되지 않기에 자아는 우울증으로 그 성격이 전환된다.  우울증 역시 분명히 상실한 대상에 대해 슬픔을 표현하는 것이지만 슬픔의 대상이 드러나서는 안되기에 애도가 이루어질 수 없다.  이에 자아는 급격히 빈곤해지며 상실을 경험하기 전의 자아와 상실을 경험한 후의 자아로 분열된다.  이때 빈곤해진 자아는 자기 자신에 대해 분노와 공격성, 자기 비난 따위를 드러내게 된다.

우울증은 프로이트의 자아와 이드에서 동일시의 과정을 통해 더욱 정교해진다.  자아는 사랑하는 대상을 상실하였을때 그것을 포기하려들지 않고 도리어 자기안에 가두어 상실한 대상에게 향했던 리비도를 자기동일시로 회수하게 된다.  따라서 자아는 상실한 사랑의 대상이 자신의 내면에 침전된 것이 된다.  동성애 우울증 역시 이와 마찬가지의 과정을 거친다.  모든 아동은 동성 부모에 대한 욕망을 거두어야 한다.  동성애 금지라는 규정에 복종하면서 금지된 대상인 동성 부모를 자아의 일부로 삼아 자아로 회수하면서 우울증적 동일시를 이룬다.  이러한 동일시를 통해 남아는 남자가 되고 여아는 여자가 된다.  동성부모와의 동일시의 과정은 동성애에 대한 금지와 욕망을 동시에 포함할 수 밖에 없다.  이성애는 동성애를 철저하게 타자화 함으로서 이루어지며 이때 동성애에 대한 욕망은 우울증이 되어 내 안으로 회수된다.  따라서 정상으로 치부되는 이성애는 억압된 동성애에서 기인하는 것이 된다.  즉 이성애는 금지되는 동성애를 우울증의 형태로 내안에 회수함으로써 가능한 형태라는 것이다.

브로크백 마운틴, 강요된 이성애와 젠더의 문제

영화 브로크백 마운틴에서 에니스와 잭은 이해할 수 없고 이해되어서도 안되는 존재이다.  그들은 분명히 존재하지만 존재하는척 해서는 안된다.  생물학적으로 남자와 여자만 존재하고 각각의 성은 이성애만을 해야 한다는 식의 태도는 보수적 기독교 사회에서 두드러진다.  창세기에는 오직 남자와 여자라는 두가지 성과 이 둘의 결합만을 이야기하고 있다.  만약 신에 대한 믿음이 공고하고 성경의 권위에 대해 의심을 가지지 않는다면 이러한 관점은 지극히 당연한 것이 된다.  따라서 에니스와 잭은 신이 부여한 본질에서 벗어난 존재이기에 신의 창조물로서 인정받을 수가 없다.  이러한 사실은 어느 누구도 아닌 에니스와 잭 스스로가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이에 그들은 충동적인 성행위 이후에 어제의 일은 잊어버리자고 말하며 자신의 숨겨진 정체성을 외면하려들지만 외면하려할수록 그것을 향한 충동은 걷잡을 수 없게 되어 그들은 다시금 성행위를 반복하게 된다.  시간은 흘러 브로크백 마운틴에서 떠나야할 시점이 되어 산을 내려간다.  엄청난 남성미를 풍기는 두 남성이 보여준 성행위와 미묘한 감정의 발생은 에니스에게 혼란을 일으킨다.  한편으론 잭과 헤어져 산을 내려가야하는 슬픔과 다른 한편으론 그러한 감정이 싹트는 자신에 대한 혼란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헤어짐의 순간이 다가오고 잭이 먼저 길을 떠나자 에니스는 걷잡을 수 없는 슬픔에 빠져든다.  사랑하는 대상을 영원히 상실한 것은 아니지만 각자의 사생활이 있고 먹고 살기 위해 다양한 일들을 해야만 하기에 언제 다시 만날지는 모르는 상태이다.  에니스는 극도의 슬픔을 느끼지만 그 슬픔을 표현해서는 안된다.  눈물은 흘리지만 왜 눈물 흘리는지 이야기해서도 안되다.  그들의 헤어짐은 어떤 로맨틱 코미디 속의 헤어짐처럼 평범하지 않다.  그 슬픔은 표현되어서는 안되기에 애도가 이루어질 수 없기 때문이다.  그들은 9개월 후에 다시금 만날 수 있을까?라는 막연한 희망만을 남긴채 떠나지만 그 이후 에니스는 자신의 약혼녀와 혼인을 하게 되어 브로크백 마운틴으로 돌아가지 못한다.  잭은 홀로 브로크백 마운틴에 왔다가 돌아간다.  사실 그들이 같이 브로크백 마운틴으로 돌아왔다 한들 일은 주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이미 일을 주는 사람은 그들의 동성애 행각을 눈치챗기 때문이다.  굉장히 보수적이고 남성적인 문화를 가진 미국 남부에서 동성애라는 것은 받아들여지기 힘든 성격의 것이다. 

에니스의 혼인 생활에 큰 문제가 있어보이진 않는다.  동성애자라곤 하지만 이성과의 성행위에도 큰 문제가 없고 아이도 낳았으며 자신의 부인 역시 진심으로 사랑하는 것으로 보인다.  에니스의 삶은 전형적인 아이를 가진 가장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가족들과 함께 불꽃 축제를 보러간 그는 주변의 건달들과 싸움을 일으킨다.  이런 에니스의 모습은 마치 강인한 남성성의 확인을 통해 자신의 동성애를 숨기려고 애쓰는듯하다.  반면 잭은 에니스를 못잊은채 지속적으로 방황한다.  다른 남자에게 술을 한잔 사는 것도 왠지 모를 미묘한 느낌에 의해 거부당한채 지속적으로 오해만 커져간다.  물론 그 오해는 진실이고 말이다.  결국 잭 역시 루린 트위스트(앤 해서웨이 분)와 혼인하게 된다.  하지만 그는 처가집에 완전히 종속된채 무시당하며 살아간다.  미국 남부의 카우보이 문화가 정확히 어떤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그들의 눈에 잭은 남자답지 못하다고 느껴지는듯하다.  그래서일까?  잭 역시 가장 남성적이고 위험한 스포츠인 로데오에 집착한다.  참여할때마다 참가비를 잃지만 그럼에도 마치 자신의 남성성을 확인받으려는듯 계속 참가한다. 

각자의 가정을 가지게 된 에니스와 잭은 어느날 다시금 만나게 된다.  잭이 에니스를 만나기 위해 직접 찾아온 것이다.  다시 만난 둘은 걷잡을 수 없는 감정에 휩쌓여 애정표현을 하게 되는데 이때 에니스의 부인인 알마(미쉘 윌리엄스 분)에게 들켜버린다.  참 미묘한 장면이라고 볼 수 있을 것 같다.  각각 다른 가정을 가지곤 있지만 옛 사랑을 못잊은채 다시 만나 키스하는 장면은 로맨틱 코미디의 흔한 단골 장면에 불과하다.  다만 이들은 이성애가 아닌 동성애라는 점에서 문제가 되는 것이다.  그들은 브로크백 마운틴으로 낚시를 가 둘만의 밀애를 행한다.  이 작품이 흥미로운점은 이들의 사랑이 주변인들에게도 나름의 고통을 준다는 점이다.  특히 에니스의 부인인 알마가 그 중심에 서게 된다.  배우자의 외도를 알게 된다는 것은 상당히 큰 고통일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그 외도의 대상이 자신과 같은 여자가 아닌 남자라는 점이다.  그렇다고 에니스가 적극적으로 알마에게 자신의 사랑을 표현하는 것은 아니다.  어떻게 보면 에니스는 참 표현이 서툰 남자일지도 모르겠다.  이에 잭에 대한 사랑은 거리를 두려하고 알마에 대한 사랑은 표현이 잘 안된다.  이에 그의 삶의 중심은 아이들을 위주로 형성된다.  그럼 잭은 어떨까?  잭 역시 자신의 부인과 사랑하는 사이임은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다만 둘 사이에는 지속적인 성관계가 있는것처럼 보이진 않는다.  잭이 로린과 결혼한 것은 마치 가장무도회에서 다른 가면을 쓴 것과 같아보인다.  모든 사람들이 옳다고 여기는 그 방향으로 삶을 고정시키기 위해 자신의 정체성을 숨기고 또 다른 가면을 쓴채 그렇게 연기를 하는 것이다. 

잭은 에니스에게 같이 고향으로 돌아가 목장을 운영하자고 제안하지만 에니스는 자신의 과거 경험을 이야기하며 거절한다.  자신의 마을에 목장을 같이 운영하던 두명의 남성이 있었는데 동성애 관계가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소문이 퍼지게 되어 한명이 잔인하게 살해당한 것이다.  이에 에니스는 이렇게 가끔씩 몰래 만나자고 제안한다.  현실을 바꿀 수 없다면 받아들어야 한다고 말이다.  에니스는 잭을 너무나도 사랑하기에 그 사랑을 의도적으로 거부한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스스로를 보호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에 에니스가 행할 수 있는 최대치는 가끔씩 만나는 것이다.  그들은 만날때마다 헤어져야하지만 그 헤어짐의 슬픔은 애도될 수 없다.  그렇기에 잭과 에니스는 심각한 자아의 우울증으로 빠져든다.  그래서일까?  잭과 에니스는 각자 자신의 가장으로서의 역할에 더욱 집착하게 된다.  에니스는 아이를 낳음으로 인해 자신의 남성성을 확인하려들고 잭은 추수감사절에 자신을 무시하는 장인어른과 대립하여 자신의 가장으로서의 지위를 확인받는다.  이들의 삶은 혼란과 모순 그 자체이다.  사랑하는 사람과 살 수 없기에 잠시만 만났다 헤어지는 슬픔을 가슴 속 깊이 끌어안은채 살아간다.  반복되는 슬픔으로 그들의 자아는 극도로 빈곤해지며 이에 생겨난 결핍을 매꾸기 위해 또 다른 이성애에 기반한 관습에 의존하는 것이다. 

그들이 숨을 쉴 수 있는 곳은 가끔씩 만나는 그 순간뿐이다.  그 순간만큼은 살아있음을 느끼고 진정한 인간으로서의 존엄성도 느끼게 된다.  한 인간이 자신이 사랑하는 또 다른 사람과 함께 할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위대한 축복인지를 알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 축복은 오로지 브로크백 마운틴만이 줄 수 있는 선물이다.  산은 편견을 가지고 있지 않다.  산은 그 구성원을 어떤 규범으로 바라보지 않는다.  산은 그 안에 품고 있는 모든 존재자를 그냥 있는 그대로 봐줄 수 있는 유일한 존재이다.  하지만 그 산에서 20년이 넘는 세월을 같이 지내더라도 여전히 사회와 문화는 바뀌지 않는다.  결국 잭은 그가 동성애자라는 사실이 걷잡을 수 없이 널리 알려져 죽임을 당하게 된다.  잔인하게 얼굴이 뭉개진채 성기가 뽑혀 죽은 것이다.  로린은 에니스에게 잭이 마치 사고로 죽은 것처럼 전하지만 그녀 역시 잭이 동성애자라는 점은 이미 알고 있을 것이다.  그래서일까?  그녀의 표정은 매우 무표정하며 덤덤하면서 미묘한 슬픔도 느껴진다.  내가 사랑하던 내 아이의 아버지의 진짜 사랑이 이 남자라니.  로린은 에니스에게 최대한의 선의를 베풀어 그가 묻힌 곳과 그가 묻히길 원했던 곳을 말해준다.  브로크백 마운틴.  잭이 꿈꿔왔던 상상의 낙원인 그곳이야 말로 어느 누구의 눈치도 볼 필요 없이 마음껏 사랑할 수 있는 유일한 공간이다. 

불확실한 삶 - 모든 차별에의 저항

젠더 정체성은 철저하게 법의 금지에 의해서 형성되며, 주체는 법 또는 지배적 권력에 앞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법이 정상으로 규정한 젠더의 반복 수행의 과정 속에서 형성되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이때 젠더의 이전에 존재하는 주체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주체는 오직 젠더의 반복 수행을 통해서 구성될 뿐이다.  흔히 이성애자들은 동성애 욕망을 끊임없이 부정하여 자신이 동성애 금기를 받아들였음을 지속적으로 표명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하여 자신의 또 다른 정체성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주체의 내부에 억압된채 무의식에 흔적을 남기게 된다.  물론 이는 의식화되어서는 안된다.  강제된 이성애의 사회에서 이것을 함부로 의식화하면 그 사람은 비정상 또는 치료받아야할 무엇으로 전락해버리기 때문이다.  하지만 인간은 특정한 섹슈얼리티로서 그 정체성을 단순하게 환원시킬 수 없다.  본질로서의 여성과 남성은 존재하지 않으며 오직 다양한 범주로 만들어진 다양한 인간만이 존재할뿐이다. 

버틀러는 동성애에 대한 논의를 다양한 차별받는 사람들로 확대한다.  가부장적 사회가 비정상으로 치부해버리는 것은 동성애만 있는 것이 아니다.  동성애 이외의 다양한 성적 소수자들을 비롯하여 이민자, 혼혈인. 3세계의 여성들 등 다양한 형태의 억압받는 자들이 존재하며 이들 역시 동성애와 마찬가지의 고통을 갖고 있다.  버틀러는 이에 대한 논의를 불확실한 삶[8]을 통해서 전개한다.  앞서 본바와 같이 슬픔과 고통은 애도의 과정을 거치게 된다.  그런데 애도 역시 국가와 법에 의해 허용되는 것이 있으며 허용되지 않는 것이 있다.  이는 미국의 9•11테러로 인한 보복 과정에서 쉽게 드러난다.  9•11테러 이후  미국은 폭력에 맞서고 폭력을 제어하기 위해 더 큰 폭력을 내세워 문제를 해결하고자 한다.  국가는 자신들의 폭력을 정당화하기 위해서 새로운 규범을 제시한다.  자신들이 당한 고통에 대해선 그들은 정의의 이름으로 애도를 행하지만 복수의 과정에서 자신들이 행한 폭력에 대해선 그 어떤 애도도 행하지 않는 것이다.  자신들의 죽음은 슬픈 것이지만 저 멀리 중동에 있는 어떤 사람의 죽음은 애도의 대상이 될 수가 없다.  애도의 대상이 될 수 있는 죽음은 정치적으로 명분을 줄 수 있는 죽음뿐이다.  이를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고통과 애도라는 것도 다분히 정치적인 성격을 띈다는 점이다.

인간은 타인과의 관계망 속에서 살아간다.  비록 타인은 나에게 고통이자 지옥일지도 모르겠지만 어찌되었건 인간은 그 고통의 관계 속에서 살아가기에 항상 타자에게 의존적일 수 밖에 없는 불확실한 주체성을 가지게 된다.  그 관계 속에서 우리는 수많은 억압된 존재들을 애써 무시하거나 아니면 모른채 살아가거나 아니면 똑같이 폭력을 행사하면서 살아간다.  하지만 정상이라고 치부되는 테두리 안에 살아가는 이들도 결국 불안하고 불확실한 주체성을 가진 존재에 불과하다.  이는 우리에게 또 다른 가능성을 제시해준다.  모두가 가지고 있는 불안과 불확실한 주체성으로 인해 오히려 연대와 새로운 윤리적 규범의 창출에 대한 가능성이 도출된다.  이 가능성은 나 자신도 불확실한 존재라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에서부터 시작되는 것이다.



[1] 섹스와 젠더의 이분법은 심리학자인 로버트 스톨러에 의해서 창안되었다.  스톨러는 그의 저서인 섹스와 젠더(1968)를 통해 트렌스 젠더를 연구하면서 생물학적 성과 심리적 성을 구별하여 젠더 개념을 창안한다.

[2] 주디스 버틀러, 젠더 트러블, 조현준 옮김, 문학동네, p89

[3] 섹슈얼리티는 상당히 많은 종류가 존재한다.  헤테로섹슈얼리티(이성애자), 바이섹슈얼리티(양성애자), 호모 섹슈얼리티(게이와 레즈비언으로 구분.  게이와 레즈비언은 그 안에서 다시 역할로 구분), 트랜스섹슈얼리티(육체적 성과 정신적 성의 불일치), 인터섹슈얼리티(남여 성기를 다가진경우.  발견 즉시 수술해서 하나의 성으로 살아가는 경우가 많음 2000명당 한명꼴)

[4] 프로이트, 정신분석학의 근본개념 – 전집11, 윤희기 옮김, 열린책들

[5] 이러한 태도는 성에 관한 세편의 해석(오현숙 옮김, 을유문화사)에서 수정된다.

[6] 동성애 금지가 근친상간 금지보다 먼저 발동하는 이유에 대해서는 버틀로도 명확하게 이야기 하지 않고 있다. (주디스 버틀러의 철학과 우울, 앨피출판사, p102)

[7] 프로이트, 정신분석학의 근본개념 – 전집11, 윤희기 옮김, 열린책들

[8] 주디스 버틀러, 불확실한 삶, 양효실 옮김, 경성대학교출판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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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 2014.10.08 16:10 | PERMALINK | EDIT | REPLY |

    비밀댓글입니다

  2. nighthawks

    | 2014.10.09 01:23 | PERMALINK | EDIT | REPLY |

    확실히 이해가 잘 됩니다.

  3. | 2014.10.16 17:57 | PERMALINK | EDIT | REPLY |

    비밀댓글입니다

  4. hello

    | 2015.11.22 22:34 | PERMALINK | EDIT | REPLY |

    음...영화에서 둘이 브로크백마운틴에서 처음 만나고 헤어진뒤 이곳저곳으로 여행을 다니는거지 다시 브로크백마운틴으로 돌아간다는 정확한 묘사는 없는걸로 알고 책에서도 그렇게나와요
    그리고 에니스와 아내의 성관계도 에니스가 아내를 엎드리게해서 아마도 아내는 원치않는 항문성교를 하는 묘사도 있고
    에니스가 어릴때 두 노인의 죽음을 목격한것도 두 노인이 동성애자가 아니었다고 표현하지는않았는데.. 확실히 동성애자였다고하지도않긴하지만..
    그리고 잭의 죽음은 영화에서도 책에서도
    사실로 나오는건 잭이 차량용 기구때문에 죽었다는 아내의 말뿐
    누군가에게 맞아서죽었다는건 오직 에니스의 추측이에요 어릴때의 트라우마때문에..?
    뭐 영화 해석은 보는사람마다 다른거지만요.. 영화를 감명깊게봐서 책도읽고 감독인터뷰도 찾아봐서..
    아무튼 잘읽었습니다..!

  5. 소파

    | 2015.12.26 00:16 | PERMALINK | EDIT | REPLY |

    잘봤습니다~!! 어서 돌아오셔서 더 많은 영화평 해주셨으면 좋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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