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응형
Notice
Recent Posts
Recent Comments
관리 메뉴

★ image or real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2001), 새로운 나를 찾아서.. 본문

영 화/애니메이션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2001), 새로운 나를 찾아서..

유쾌한 인문학 2010. 6. 7. 06:29
반응형





통과의례
통과의례는 일종의 성(聖)과 속(俗)의 구분으로 삶의 새로운 순간, 관문의 통과 따위에서 맞이하게 되는 의례를 말한다.  통과의례는 인간의 삶 속에서 다양한 형태로 나타나게 되는데 대표적으로 성인식, 혼례식, 환갑잔치 그리고 상례를 들 수 있다.  제의에 직면한 사람은 새로운 세계로 나아감에 대한 흥분과 긴장 그리고 두려움 더불어 기존의 세계에 안착하고 싶은 욕망 등 다양한 감정에 휩쌓이게 된다.  즉 과도기적 상태에 놓이게 되는 것인데 이러한 과도기적 상황을 안정적으로 풀어나가기 위해 통과의례라는 제의를 행하게 된다.

통과의례는 과거의 속에서 성으로의 나아감으로 바라볼 수 있다. 좀 더 자세히 설명해보자면 공간과 시간은 균질하지가 않으며 비균질적인 성격을 가지게 된다.  첫째로 공간의 비균질성은 예컨대 금줄같은걸로 확인할 수 있다.  아이가 태어난 집에선 금줄을 치게 된다.  그 이전까지만 하더라도 그 집은 평범한 여느집과 다를바 없는 공간적 특징을 가지게 되지만 금줄이 쳐지는 순간 성의 공간과 그밖의 속으로 완전히 다르게 나뉘게 된다.  이를 두고 비균질성이라 칭하게 된다.  둘째로 시간의 비균질성이 잘표현되는 것이 바로 통과의례이다.  의례를 통해 과거의 자신은 속의 영역으로 미래의 자신은 성의 영역으로 바뀌게 되는 것이다.  한 인간의 삶이 가지는 시간의 연속성은 얼핏보기엔 균질하게 보일지라도 하나의 의례를 통해 그 전과 그 후가 달라지게 되고 이것을 두고 비균질적이라고 표현하게 된다.  기실 인간의 주체성은 고정되어있는 형태로 지속되지 않는다.  주체는 끊임없이 재형성되어야 하는 무엇이며 이는 작게는 타자와의 만남을 통해 크게는 통과의례를 통해서 이루어지게 된다.


통과의례의 과정
오늘날에는 과거와 같은 형식적인 통과의례를 형식적이라고 비판하면서 거부하는 움직임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더욱이 현대사회는 기술의 발전과 산업화로 인하여 많은 부분이 전문화되어있는 형태를 띄게 되어 더이상 신화적 측면은 설 곳이 없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대인은 가슴 속 깊은 곳에 불안을 항상 내포하고 있으며 더욱이 차갑게 변해버린 현대의 사회구조는 더욱 더 그 불안을 목 조아오는 형태를 보여준다.  이에 현대인은 여전히 다양한 형태의 신비주의적 요소에 대한 열망을 가지게 되며 이는 변형된 형태의 통과의례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즉 아무리 전문화되고 고도로 기술이 발달한 세계이더라도 인간은 종교적 성향을 가진 존재로서 근원에의 회귀나 어떤 절대를 향한 욕망이 지속적으로 남게 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측면은 오늘날 정신분석을 통해서 쉽게 확인할 수 있다.  치료를 받는 과정에서 행해지는 무의식으로의 여행은 자신이 기억하지 못하는 과거와 더 멀리는 원형적 신화를 만나게 되는 과정이며 이러한 회귀는 자연스럽게 제의적 죽음을 불러와 새로운 나의 창조를 가져오게 된다.  통과의례는 어떤 면에서 보면 인간이 자신을 둘러싼 껍질을 깨고자하는 끊임없는 욕망에 다름이 없다.  새롭게 변화된 나에 대한 열망.  좀 더 나은 나에 대한 열망.  이러한 인간의 욕망은 우리의 삶 속에서 흔하게 찾아볼 수 있는 것으로 존재론적인 위치 변화에 대한 열망으로 바라볼 수 있다.

통과의례는 크게 보아 세가지 과정을 가지게 된다.  분리 – 시련 – 재창조의 과정이다.  첫번째로 분리는 주로 성년식 따위에서 확인할 수 있는 것으로 기존의 세계와의 단절을 의미하게 된다.  두번째는 시련으로 제의는 그 수행자로 하여금 다양한 형태의 시련을 부과하여 스스로 극복하여 나갈 것을 요구하게 된다.  세번째는 재창조로 시련을 극복한 수행자는 과거의 자신을 상징적 죽음으로 보낸 이후 새로운 세계로 나아갈 수 있는 부활의 의미를 가지게 된다.  이러한 세가지의 과정을 거쳤을때 통과의례는 완성이 되고 이때 수행자는 과도기적 상황에서 벗어나 새로운 주체로서 재형성된다.  그리고 이러한 새로운 주체와 과거의 주체는 성과 속이라는 형태로서 확인할 수 있게 된다.  즉 俗 과거의 나 → 통과의례 → 聖 새로운 나의 재탄생의 과정인 것이다.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은 이웃집 토토로와 마녀 배달부 키키의 연장선상에서 바라봐야하는 작품으로 많은 부분에 있어서 구조적 도식이 동일한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첫번째는 영화의 시작에 등장하는 이사 장면이다.  이사라고 하는 것은 필연적으로 공간의 변화를 수반하게 된다.  평소에 살아오던 공간에서 완전히 새로운 공간으로 나아간다는 것은 상당히 큰 불안의 감정을 가져올 수 밖에 없다.  세 작품의 이사 장면에서 찾아볼 수 있는 독특한 점은 토토로와 키키에서는 이사를 통한 불안이 느껴지지 않는 반면 센에서의 상당히 큰 불안을 내포한다는 점이다.  토토로에서의 이사는 굉장히 즐겁고 적극적인 양상을 드러내고 있으며 키키가 행하는 자립의 길로의 떠남 역시 불안보다는 즐거움과 흥분이 더 크게 다가오게 된다.  반면 센에서의 이사는 불안과 불만족을 온몸으로 드러내는 양상을 보여준다.  이는 극의 배경에 놓인 사회적 환경에서 비롯되는 것으로 과거에는 아이들이 자립심과 자아정체성이 뚜렷하고 주변의 어른들로부터 상당한 도움을 얻어 능동적으로 살아가는 양상을 보여주지만 현대에 와서는 그러한 측면이 심각하게 훼손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즉 오늘날의 아이들에게서는 더이상 토토로에서 등장하는 아이들이나 키키와 같은 모습을 찾아볼 수 없으며 치히로와 같은 아이들만이 넘쳐난다는 것이다.  이는 고도로 발전한 현대문명이 가지고 있는 하나의 어두운 측면으로 사회의 기반이 되는 아이들의 변화를 잘 보여주게 된다.  

 두번째는 부모의 부재이다.  토토로에서는 엄마가 병으로 인해 부재하고 있는 상황이며 마녀배달부 키키에서는 키키가 부모를 떠나게 되며, 센에서는 부모가 돼지로 변해버린 상황이다.  세 작품 모두 부모의 부재 상황에서 일련의 시련을 경험하게 된다.  토토로에서는 메이의 실종을 통해서 키키에서는 마법의 상실을 통해서 끝으로 센과 치히로에서는 자신의 이름의 상실을 통해서 시련이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  보통 부모의 부재는 아이들의 주체형성과정에 큰 영향을 끼치게 된다.  부모는 아이들의 거울역할을 하는 존재로서 어머니라는 거울상을 통해 자아를 형성하고 아버지의 존재를 통해 사회적 주체로서 거듭나게 된다.  하지만 이러한 부모가 부재하는 상황에서 아이들은 일련의 제의를 경험하게 되고 그 과정에서 주변 사람들의 도움과 보살핌을 통해 제의적 시련을 통과하여 사회적 주체로서 자리매김하게 된다. 


치히로 이름을 뺏기다
우연히 들어온 신화의 세계에서 남의 음식을 함부로 먹던 부모님은 돼지가 되어버리고 치히로는 홀로 남게 된다.  도대체 알 수 없는 세계에서 당황해하는 그녀를 하쿠가 단번에 알아보고는 도와주게 된다.  하쿠는 치히로를 어디서 만났는지는 정확히 기억은 못하지만 어릴때 만났다는 사실만을 가진채 치히로를 알아보는 것이다.  하쿠의 도움을 받아 치히로는 유바바의 온천장에서 일을 하게 된다.  이때 주목할 부분은 치히로가 이름을 빼앗기는 부분이다.  마녀 유바바는 치히로의 이름 중 몇자를 뺏어가게 되고 센이라는 새로운 이름을 부여하게 된다.  이것이 치히로의 통과의례의 첫단계이다.  이름을 빼앗긴다는 것은 기존의 자신에 대한 부정에 다름이 없다.  결국 유바바가 이름을 빼앗는 것은 일단 자신을 버리는 것으로 분리의 과정에 상응한다.  사실 통과의례라는 것은 타인이나 사회적 관습에 의해 강요되는 측면이 강하기에 극중에서 이름을 뺏기는 것도 같은 측면에서 바라볼 수 있다.  그리고 유바바에게 이름을 뺏긴 사람은 자신의 이름을 기억하지 못해 영원히 유바바의 노예로 살아가게 된다.  이것의 의미는 통과의례의 실패를 말한다.  통과의례라는건 과거의 자신의 단절과 재창조를 핵심으로 가지게 된다.  이름을 빼앗긴다는 것이 단절을 의미하는 반면 다시 이름을 되찾는다는 것은 시련을 통과하여 자신을 재창조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이름을 기억하지 못한다는 것은 재창조의 실패를 보여주는 것이다.  그러니 하쿠같은 존재는 자신이 누구인지도 모른채 계속 중간영역에서 살아갈 수 밖에 없다.  이를 통해 확인할 수 있는 것은 통과의례의 실패는 정체성의 상실로 나아갈 수 있다는 점이다.


오물신을 만나다
치히로는 유바바와 계약 후 센이 된다.  그런데 딱히 온천장 동료들이 센을 좋아하지는 않는다.  도리어 일도 제대로 못하는대다 악취까지 풍기는 인간 아이를 귀찮아한다.  그러던 어느날 오물신이 등장한다.  정말 엄청나게 더러운 신으로 유바바는 이 오물신의 시중을 센에게 맡기게 된다.  오물신의 등장은 센에게 있어 첫번째 다가온 시련의 상황으로 지하에서 일하는 가마우지 할아범와 린 그리고 얼굴없는 요괴의 도움으로 그 상황을 극복하게 된다.  특히 센은 오물신의 몸에서 자전거를 발견하게 되어그걸 잡아당겨보니 엄청난 양의 쓰레기가 나오게 된다.  사실 오물신은 오물신이 아니라 유명한 강의 신이었고 인간들이 강에 버린 쓰레기 때문에 강의 신의 몸이 온통 쓰레기 덩어리가 되버린 것이다.  사실 이 작품은 대놓고 도구적 이성의 폐해로 인한 자연파괴를 비판하는 작품은 아니지만 이러한 장면을 집어넣으면서 그 비판정신을 놓지는 않게 된다.  이러한 정신은 얼굴없는 요괴의 폭주에서 한번 더 확인할 수 있다.  아무튼 강의 신은 센에게 경단을 하나 준다.  그것이 뭐에 쓰는건지는 가르쳐주지도 않은채 그냥 떠나버리게 된다.  이렇게 엄청난 위기를 잘 돌파하면서 센의 통과의례는 점점 발전해나가게 된다.


유바바의 아들 보
하쿠가 유바바의 심부름을 갔다가 반폐인이 되어 돌아오게 된다.  유바바는 그런 하쿠를 쓸모 없다고 여겨 그냥 죽이라고 명한다.  센은 하쿠를 구할려고 유바바의 방으로 들어가다 그녀의 아들을 만나게 되는데 유바바의 아들인 보 역시 굉장히 인상깊다.  보는 유바바가 정말 소중히 보호하고 있는 아들로서 병균에 걸린다고 방안에서 나오지도 못하게 한다.  덩치는 엄청나게 크지만 하는 짓은 완전 애기로  자기 마음에 안들면 모든걸 다 부셔버리는 무시무시한 괴력도 가지고 있다.  더 흥미로운건 천하의 유바바도 아들 앞에선 어쩔 줄 몰라하는 모습을 보인다는 것이다.  이런 유바바의 아들 역시 작품 내에서의 작은 통과의례를 보여주는 장치이다.  큰 구조로서의 치히로의 통과의례와 내부에 또하나의 통과의례를 장치한 것이다.  그와 동시에 유바바의 아들은 하나의 상징을 더 가지게 된다.  이른바 덩치만 커다란 정신은 미성숙한 사회에 대한 비판으로서 이러한 보의 모습은 센의 부모님의 모습과도 일치하는 면이 있다.  작품 초기에 센의 부모님은 굉장히 물질적인 것에 함몰된 현대인의 전형을 보여주게 된다.  이른바 돈이면 다된다는 식의 태도로서 이러한 부모님의 모습은 마치 덩치만 큰 미숙한 정신의 보와 다를바가 없는 현대인의 전형적인 모습이다.  


하쿠를 구하다
하쿠를 구하기 위해 노력하는 센.  알고보니 유바바가 하쿠에게 제니바의 도장을 훔쳐오라고 명하게 되고 하쿠는 이 임무를 수행하는 과정에서 유바바의 언니인 제니바의 공격을 받은 것이었다.  그 과정에서 제니바가 종이인형을 통해 나타나게 되고 그녀는 유바바의 아들을 쥐로 만들어버린다.  심각한 부상을 입은 하쿠와 쥐로 변한 유바바의 아들을 데리고 가마우지 할아범의 지하실로 내려오게 된 센은 하쿠에게 경단의 절반을 먹인다.  사실 센은 그 경단을 부모님에게 먹이려고 했었다.  그걸 부모님에게 먹이면 부모님은 돼지가 되어버린 저주에서 풀릴테고 그럼 이 세계에서 탈출 할 수 있을테니 말이다.  하지만 센은 그렇게 하지 않으며 그러한 행동을 함에 있어 그 어떤 고민도 하지 않는다.  하쿠를 좋아하게 된것일까?  아마도 그렇겠지만 결국 센은 타인에 대한 배려심을 깨닫게 되었다는 것이며 이때의 센의 모습은 극 초반에 나오는 치히로의 모습과는 너무나도 다른 양상을 보여주게 된다. 


얼굴없는 요괴, 가오나시
이 시점에서 얼굴 없는 요괴 가오나시가 폭주를 해버린다.  가오나시가 원하는건 오직 센이다.  이 얼굴 없는 요괴는 끝도 없이 먹어치운다.  급기야 사람도 무려 세명이나 먹어치우게 된다.  가오나시의 탐욕에는 끝이 없다.  한마디로 돈이면 다된다는 식이다.  돈줄테니 먹을거 내놔라.  돈줄테니 센을 내놔라.  매사가 이런식으로 얼굴 없는 요괴의 상징은 위에서 본 강의 신 그리고 센의 부모님과 동일하다.  탐욕스러운 현대문명에 대한 비판인 것이다.  우리는 도대체 얼마나 돈을 많이 벌어야 만족을 할까?  얼마나 많이 먹어야 만족을 할 수 있을까?  그 과정에서 사람을 세명이나 먹어치우게 된다.  극중에선 세명이지만 현실에선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하나의 도구로서 그렇게 비참하게 인생을 마감해야 했을까?  결국 센은 나머지 남은 경단도 아무론 고민도 없이 얼굴없는 요괴에게 먹이게 된다.  그리고 그때부터 얼굴 없는 요괴는 모든걸 다 토해내게 된다.  우리는 얼굴 없는 요괴의 참모습을 잘 알고 있다.  가오나시는 조용하고 착한 센을 도와주던 그런 존재였는데 어느 순간 탐욕스러운 괴물이 되어버린 것이다.  이는 인간문명의 본질을 잘 보여주는 상징이다.  이른바 인간 문명의 양면성으로 이를 잘 활용하면 친절한 문명씨가 될지도 모르지만 잘못 활용하면 탐욕스러운 괴물이 될뿐인 것이다.  


제니바를 만나다
얼굴 없는 요괴의 폭주를 막아낸 센은 쥐로 변한 유바바의 아들도 데리고 하쿠를 위해 제니바의 집으로 떠나간다.  그곳은 갈 수는 있으되 돌아올 수는 없는 곳이다.  하지만 센은 하쿠를 구하기 위해 아무런 고민도 없이 그 길을 떠난다.  그런데 막상가보니 제니바는 그 엄청난 악명과는 달리 정말 친절한 할머니에 불과하다.  제니바는 유바바와 달리 욕심이 없다.  자신의 마법을 이용하여 사람들을 부려서 큰 부를 누릴 생각은 전혀 가지지 않으며 그냥 자신의 마법을 자신이 살아갈만큼만 활용하는 사람이다.  유바바와 제니바의 대립은 인간문명에 대한 또다른 비판점을 제시해준다.  마법은 인간의 기술문명으로 치환이 가능하다.  기술문명을 극한으로 이용해 자연을 파괴하고 인간의 이름을 빼앗아 도구로 삼아 유바바처럼 탐욕스럽게 살아갈것인가?  아니면 기술문명을 적절히 이용하여 제니바처럼 적당히 살아갈 것인가?  하야오의 앞선 작품인 원령공주는 타타라 마을 사람들을 통해 인간기술문명의 어쩔 수 없는 측면을 부각시킨채 그 어떤 결론도 내리지 않고 끝내버리는 작품이으로 원령공주 이후 또다시 10여년의 세월이 흐른 이후 하야오는 이 작품을 통해 또다른 해답을 주는 것이다.  즉 제니바로서의 삶 그리고 제니바와 같은 기술문명의 활용.  적절히 이용하되 탐욕스럽지 않은 것.  바로 그것이다.  이러한 제니바의 모습은 바람직한 부모의 모습이라는 측면에서도 굉장히 의미가 깊다.  치히로나 유바바의 아들 보는 현대의 아이들의 전형으로서 외동아이들에게 주어지는 과보호 그리고 부모와의 유대감의 상실, 대화의 부족으로 잘 표현되는바 제니바는 이렇게 아이들을 잘못이끌어나가는 부모에 대한 하나의 롤모델이 되는 것이다.


통과의례의 완성
제니바를 만나는 지점이 센의 통과의례의 핵심이다.  돌아올 수 없는 길.  자기 자신만을 믿은채 걸어야하는 무거운 발걸음.  그 길을 그렇게 걸어감으로써 센의 통과의례는 완성이 된다.  그리고 극중 작은 통과의례인 유바바 아들의 통과의례 역시 완성된다.  이제 온천장으로 돌아간 센은 자신의 진정한 이름을 되찾게 된다.  이때의 치히로는 과거의 치히로와는 완전히 다른 존재이다.  과거의 치히로와 센의 경험이 결합된 새로운 치히로로 재탄생한 것이다.




반응형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