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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크 시티(1998), 이데올로기와 우리안의 환상 본문

영 화/90's 영화

다크 시티(1998), 이데올로기와 우리안의 환상

유쾌한 인문학 2010. 4. 14. 06: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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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크 시티(Dark City)
알렉스 프로야스 감독의 두번째 작품이다.  첫번째 작품은 그 유명한 크로우이다.  그래도 모르겠다면 아이로봇의 감독이라면 아실려나?  난 이영화를 티비에서 제일 처음 보았었다.  제일 처음 보았던건 고등학교 시절이었던걸로 기억된다.  SF 영화인줄 알고 보았는데 그건 아니었고 아주 독특한 영화로 기억된다.  그렇게 지겹지도 않았고 말이다.  그뒤 몇년뒤에 한번 더 보게 되었는데 머리가 좀 커서그런지 정말 대단하고 위대한 영화라는걸 알게 되었다.  상당히 재능있는 감독이 아닌가 생각된다. 

영화 내용은 아주 간단하다.  어느 외계인이 세상을 지배하고 있는데 그들은 밤12시만 되면 튜닝이라는 것을 행한다.  모든 것을 멈춘채 모든 건물들과 사람의 기억마저도 조작시켜 항상 새롭게 인간들을 만들어버리는 것이다.  즉 어제의 형사가 튜닝이후에는 범죄자가 될 수 있는 그런 상황말이다.  그러던 어느날 극중 주인공인 머독이 그 중간에 깨어나게 된다.  깨어나보니 왠호텔에 자신이 홀로 있으며 옆에 왠 여자가 죽어있다.  그런데 자신에게는 아무런 기억이 나지 않는다.  설상 가상으로 이상한 인간들이 자신을 쫓고 있는데 그들은 인간처럼 보이지도 않는다.  거기에 살인의 누명을 쓰고 형사들에게도 쫓기는 신세이다.  그러다 점차 진실이 밝혀지게 되고 마지막에 놀라운 사실이 발견된다.


Copyright (c) New Line Cinema. All rights reserved.


이데올로기와 우리안의 환상
영화가 시작하면 가장 먼저 나타나는 인상 깊은 씬이 하나 있다.  위의 스샷에서 첫번째 두번째 장면인데 호텔에서 깨어난 머독이 실수로 금붕어 어항을 깨트리는 장면이다.  깨진 어항에서 나온 금붕어를 머독은 다시 어항속으로 넣어둔채 탈출을 하게 된다.  이 장면에서 영화의 모든 주제가 다 드러나게 된다.  깨진 어항의 금붕어는 바로 머독 그 자신을 의미하게 되고 다시금 어항으로 돌아가는 금붕어는 이 영화의 놀라운 결말을 의미하게 된다. 

튜닝을 통해 세상을 조정한다는 영화적 관점은 크게보아서 이데올로기의 측면으로 접근이 가능하다.  외계인들이 튜닝을 하는 주된 이유는 인간이 가지는 본질적 성향을 알아내기 위함이다.  즉 인간성의 핵심을 알아내기위해 튜닝을 가하게 되고 그로 인해 인간들을 조작하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조작은 이데올로기적 통제성을 의미하게 된다.  사실 하나의 사회를 지배하고 있는 이데올로기는 하나의 상징적 권위로서 그속에 살아가는 인간을 훈육하여 어떠한 의미를 제공하여 그 방법으로 통제를 가하게 된다.  결국 극중 외계인들은 이러한 이데올로기를 조절하고 사람들을 통제하는 상징적 권위의 자리에 위치하게 된다. 

근본적인 질문을 던져보자 이 영화에서는 밑도 끝도 없이 외계인이 왔다는 식이며 그 이전에는 무엇이 존재했는지 아무도 알지 못한다.  극중에서느 외계인에게 협력하는 모든 진실을 알고 있는 단 한명의 인간이 존재하지만 그 조차도 이전에는 무엇이 존재했는지 알지 못하는 상황이다.  즉 외계인이 오기 이전의 세상에 대한 이해는 완벽하게 차단되어 있다.  왜 그런 것일까?  이를 이해하기 쉬운 방법으로 지층을 생각해보는 방법이 있다.  수천년간 쌓여온 여러개의 지층들 그 각각이 그 시대를 대변하던 이데올로기라고 생각해본다면 그 개별의 지층에 살아가는 인간은 과거에 존재했었던 지층에 대한 이해가 없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분명 존재했으되 그것에 대한 이해의 완벽한 차단은 이데올로기라는 상징적 구조의 핵심을 이루게 된다.  이는 당장 우리가 사회주의 국가에서의 삶에 대해서 생각해보면 막연함 이외에 그 어떤 이해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명확해지는 부분이다.  과거에 대한 완벽한 차단을 행하는 이유는 현 이데올로기에 완벽하게 포섭되어 통제되기를 이데올로기 스스로가 원하기 때문이다.  이는 이데올로기가 가지는 자기목적성이다.  만약 그 내부의 인간들이 과거의 상황을 정확히 이해할 수 있다면 그 과거에서 현재로 이르기에 일정한 변화를 겪었다는 사실을 인지하게 될테고 그것으로 인해 새로운 대안을 제시할 수도 있다는 것을 의미하게 된다. 

하지만 이데올로기는 변화를 원하지 않는다.  그 스스로가 그 이전의 과거에서 새로운 가능성으로 제시된 것일지언정 그 자신이 다시 새로운 무언가에 의해 폐기되는 것은 원치 않는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이데올로기 이면에 존재하는 대타자는 모든 의미의 기초를 제공하게 되고 그와 동시에 과거와의 차단을 위해 과거를 재해석하여 유의미한 세상을 강화시켜나가게 된다.  과거를 재해석한다는 말은 그 과거의 언어를 버린채 현 이데올로기적 언어로서 과거를 바라본다는 것이다.  그럼 의미의 기초를 제공한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  어떤 새로운 하나의 의미가 시작한다는 것은 변화를 의미하게 되고 그 변화가 과거의 것과의 단절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대타자가 가지는 권위는 이러한 과거의 것을 철저하게 말소시키게 된다.  이러한 측면을 영화에서는 튜닝이라는 것으로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 

즉 튜닝을 통해 인간의 기억을 조작하는 행위는 과거와의 단절을 의미하자 과거의 재해석을 의미하게 된다.  과거의 재해석은 재해석된 모호한 과거와 현재와의 연속성을 가져오게 되고 그로 인해 내부 구성원들은 그들의 정체성을 지속적으로 유지해나갈 수 있게 된다.  그리고 이러한 정체성의 지속은 주체로 하여금 그 이데올로기가 실체적인 것이라 믿게 한다.  그 믿음은 그것을 더욱 지속적으로 강화시켜 나가게 됨은 말할 것도 없다.  결국 이 영화는 튜닝이라는 것을 통해 이데올로기가 어떻게 인간을 통제하고 강화시켜나갈 수 있는지에 대한 확실한 고찰을 제시해준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어느날 머독은 자신의 조작된 기억의 진실을 알게 된다.  이게 어떤 의미일까?  이데올로기에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현재가 아닌 과거이다.  과거를 단절시킨채 과거를 재해석한다면 그 모호화된 과거와 현재의 연속성이 발생하게 되고 이 연속성에서 인간은 안정감을 느끼게 된다.  따라서 이데올로기의 강화가 가능하게 된다는 점이다.  그런데 단절된 과거를 주체가 정확하게 인식하게 된다면 이데올로기가 제시하는 재해석된 과거와 현재의 연속성이 무너지게 되고, 이러한 무너짐은 새로운 미래의 재창조의 가능성을 제시하게 된다. 

그것이 바로 극중 주인공인 머독인 것이다.  머독은 재해석된 과거가 아닌 자신의 과거의 실체를 보게된 인물이다.  이말은 과거와 현재의 연속성이 무너졌다는 말이다.  영화에서 튜닝으로 만들어지는 거짓된 과거라는 것은 지속적으로 재해석된 기억으로서 그 기억이 인간에게 주입되고 그 주입된 과거의 기억과 조작된 현실이 만나면서 자신의 주체성이 유지가 된다.  이러한 주체성은 어디까지나 이데올로기가 만든 상징계적 주체성에 불과하다.  하지만 머독은 진실을 보게 되고 바로 거기에서 상징적 주체성을 넘어선 인간성안의 인간성을 발견하게 된다.  즉 '조작된 기억에 의해 존재하는 자신'이 아닌 '실존하는 인간 정신의 발견'이다.  그렇기에 그는 이데올로기의 안에서 살아가기보다는 새로운 미래를 재창조하는 것이 가능해지게 된다.

이러한 머독은 1년뒤 매트릭스에서 네오라는 인물로 다시금 재탄생하게 된다.  사실 다크시티나 매트릭스는 많은 부분에 있어서 비슷한 주제의식을 가지게 된다.  물론 매트릭스가 좀더 진일보한 형태의 것이긴 하지만 말이다.  머독이나 네오의 존재는 이데올로기가 가지는 불완전성을 대변하게 된다.  이는 언제든지 이데올로기의 실체를 바라보는 사람이 생겨날 수 있다는 가능성의 제시이다.  사실 이데올로기를 직접적으로 비판하는 영화들은 수도 없이 많이 만들어져왔다.  이러한 사회비판 영화는 크게 두가지로 양분된다.  바로 머독과 네오의 존재유무에 따라서 말이다.

외계인들이 튜닝을 행하는 목적 역시 흥미롭다.  외계인들은 상당한 고등생물인데 특이점이라면 집단 정신을 가진다는 것이다.  즉 그들은 각각의 개별체로서 존재하지만 정신은 하나라는 것이다.  - 이러한 집단 정신은 매트릭스에서는 단일화된 기계라는 것으로 제시된다 -  아마 그들도 초창기엔 인간과 같았으나 고도로 진화하는 과정에서 생겨난 텔레파시나 그외 정신을 이용하여 물건을 움직이고 변형시키는 능력으로의 진화로 인해 정신이 하나로 합쳐진것이 아닐까 생각된다.  이러한 집단 정신은 외계인들로 하여금 종족 존재에 심각한 위협을 꾀하게 된다.  하나의 단일성은 발전가능성 즉 진화적 측면에서 매우 이상한 형태의 것이니 말이다. 

그렇기에 그들은 각기 개별적 주체성을 이루어 살아가는 인간이라는 존재가 아주 중요해진다.  무엇이 인간 개개인을 다르게 규정하는가? 에 대한 실험을 행하는 것이 바로 튜닝 과정인 것이다.  즉 기억을 실험하여 인간 존재의 핵심을 알고자 한다.  그런데 머독은 갑자기 스스로 깨어나버렸다.  그렇기에 외계인들의 입장에선 머독이 아주 중요해진다.  왜 그런것인지 이유를 알아야 하고 그 이유에서 바로 인간 기억의 중추 즉 존재의 중추가 발견되기 때문이다.  기억이 수도 없이 조작되어도 저렇게 살아갈 수 있는 힘의 원천말이다. 

그렇기에 그들은 머독을 잡아 자신들의 집단 기억을 공유하여 머독을 집단 기억 내부로 끌어들인 이후 머독이 가졌다고 판단되는 존재의 중추를 공유하여 종족 전체를 개별화시키려고 시도하게 된다.  결국 외계인이 가지고자 하는 것은 머독 그 자체라고 할 수 있으며 머독이라는 인물이 이데올로기적 측면에서 가지는 깨달은 자로서의 지위를 욕망한다고 확장시켜볼 수 있게 된다.  외계인이 이데올로기 내에서 상징적 권위의 위치를 차지한다면 결국 이러한 양상은 외계인이 복종과 저항에의 욕망 양자를 동시에 가지고 있다는 것이 된다.  그리고 바로 이러한 모순된 이중양상에서 바로 머독이라는 인물이 탄생할 수 있게 된다.  즉 이데올로기는 닫힌 것이 아니라 균열된 것이고 그 균열에서 수많은 머독과 네오가 탄생할 수 있다는 점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데올로기라는 거대한 구조는 그것에 함몰되어 살아가는 사람들의 도움이 필요하게 된다.  즉 그 내부에 살아가는 인간이 그 구조의 확대 재생산에 스스로 기여하게 된다는 것이며 이러한 측면을 놓고 흔히 권력관계라는 표현을 사용하게 된다.  즉 권력은 하나의 점에서 강압되는 것이 아니라 파편화되어 모든 개인들이 자신의 주변을 이루는 인간관계의 그물망속에서 스스로 행사하고 스스로 강압받는다는 점이다.  이는 어렵지 않게 확인할 수 있는 부분이다.  여러분들이 평소에 타인을 향해서 행동양상을 규정하는 행위를 통해서 말이다.  예컨데 여자는 이래야지.  남자는 이래야지 등등 따위 말이다.

그럼 우리가 이데올로기를 확대 재생산하는데 기여하게 되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건 바로 우리안의 환상이다.  예를 들어 우리 사회를 보았을때 우리 사회를 지배하는 자본주의라는 이데올로기는 누구나 노력하면 성공할 수 있다는 환상을 심어준다.  이러한 환상이 극대화된 형태가 바로 아메리칸 드림이다.  아메리칸 드림이야 말로 이데올로기가 어디까지 환상을 심어줄 수 있는가에 대한 하나의 고찰점이 되는 것이다.  이러한 환상으로 인해서 아무리 세상이 힘들더라도 그냥 그 이데올로기를 강화시켜주면서 그렇게 살아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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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무리
영화의 마지막이 참 인상깊다.  그래도 일단 기본적으로 지구에 존재하는지 알았는데 그들은 지구에 존재하는자들이 아닌 우주를 떠다니는 거대한 우주선과 같은 도시에서 갇힌채 살아가는 존재라는 점이다.  그렇기에 영화 첫장면의 금붕어 씬에서 금붕어를 다시 어항으로 돌려보내는 것이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절대로 벗어날 수 없는 틀 또는 구조라는 측면이다.  내용이 무엇이 되었든 외피에서는 벗어날 수 없다. 

한번 우리의 삶을 생각해보자.  우리 사회를 지배하고 있는 자본주의라는 이데올로기에 대해서 말이다.  우리는 이 이데올로기에 의해서 완벽하게 구성된 삶을 살아가게 된다.  이데올로기가 원하는 것을 욕망하게 되고 그것을 꿈꾸며 살아간다.  그리고 우리는 다른 이데올로기적 삶  즉 간단하게는 사회주의에서부터 과거 왕조시대까지 저러한 사회가 가지는 삶의 양상에 대해서는 절대로 이해할 수 없다.  왜냐하면 현재의 언어로 재해석하여 우리에게 제시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러한 이데올로기적 통제는 매우 수동적인 양상을 보여주게 하는 것은 말할것도 없다. 

수많은 사람들이 대기업에 가려는 이유는 자신의 욕망이라기보다는 이데올로기가 우리에게 강요한 욕망이라는 것이다.  그 욕망을 우리는 내면화하여 그것이 마치 우리의 진정한 주체성인마냥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사실 이는 어려울거 하나 없는 부분이다.  하나의 이데올로기 속에서도 얼마나 많은 욕망들이 변해가던가?  어떤시점에서는 대기업에 가는 것이 최고가 되고 어떤 시점에서는 공무원이 되는 것이 최고가 된다.  불과 몇십년전 과거 공무원이 어떤 취급을 받았는지를 생각해본다면 현재의 양상은 이데올로기적 재해석이 되는 것이고 이 재해석에 의해서 주체의 위치는 다시금 규정된다.  다시 규정된 위치에 선 사람들은 공무원이 최고야 하면서 달려들게 되는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건 이데올로기 즉 구조라는것은 본문에서 이미 언급했듯이 닫힌 것이 아니라 균열된 것이다.  한편으론 법을 강요하면서 그 강요로 인해 또 한편으론 이탈을 꿈꾸게 된다.  이는 우리네 삶을 돌아봐도 자명한 것이다.  도덕과 법을 지켜야 하기에 그것에서부터 이탈을 향한 욕망이 생겨나게 된다.  이데올로기 역시 마찬가지의 성향을 가진다면 균열이 생겨나게 되고 그렇기에 머독같은 자들이 생겨나게 된다.  따라서 이데올로기는 자연스럽게 내부구성원의 적극적 행위가 필요하게 된다.  즉 그 이데올로기 자체가 실체적인것이라 믿고 믿고 따르려는 성향 말이다.  그것이 본문에서 언급한 권력관계라는 것이다. 

예컨데 현재 우리사회에서 가장 이상적이고 최고의 삶이라고 칭해지는 것을 만약 거부하는 사람이 있다고 해보자.  뭐 서울대 갈 성적 되는 학생이 전문대를 간다거나 의사 때려치우고 꿈을 위해 음악을 하겠다고 한다면 주변에선 난리가 날 것이다.  주된 이유는 이데올로기가 최상위로 치는 것을 포기했기때문이다.  그리고 이러한 현상이 바로 개인이 보여주는 권력관계라는 것이다.  분명한건 어떤 숨겨진 최상위 권력점이 서울대를 안가려는 학생에게 의사를 때려치우려는 사람에게 분노하는 것이 아니다.  분노하는건 바로 주변의 개인이라는 점이다.  결국 주변의 개인들과의 관계속에서 저러한 것들이 지속적으로 유지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내부구성원이 그것을 믿고 따르며 자신의 주변을 둘러싼 관계망속에서 권력관계를 행사하여 이데올로기를 강화시키는 것의 가장 중요한 원인은 이데올로기가 제시하는 환상이라는 것이다.  이것이 영화에서는 쉘비치라는 것으로 등장하게 된다.  끊임없이 그곳을 생각하지만 절대로 갈 수 없는 존재하지도 않는 그곳 셀비치 말이다.  우리네 삶을 돌아보더라도 이러한 환상은 엄청나게 많이 존재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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