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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존큐(2002), 변화는 어디에서 시작되는가?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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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존큐(2002), 변화는 어디에서 시작되는가?

유쾌한 인문학 2012. 9. 18. 12: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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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큐

어느날 갑자기 찾아온 지옥같은 상황.  아들이 쓰러지고 심장을 이식을 받아야 하며 이를 위해선 현금 25만달러 한화로 대략 2억 8천만원 정도의 치료비를 마련해야 한다.  당장 이식수술이 시급한 상황이지만 이식 수술 대기자 명단에 올리는 것만으로 7만달라를 선불로 내야한다.  이제껏 내어온 보험비는 어디론가 사라졌는지 파트타임이라는 이유로 2만달러밖에 못준다고 하고 각종 기금에 간절히 도움을 요청해 보지만 존큐는 일자리를 가지고 있는 차상위 빈곤계층이기에 역시 도움을 줄 수 없다고 한다.  언론사를 찾아가봤자 당신같은 사람들 한둘이 아니라고 하며 외면하며 열심히 돈을 모아보지만 결국 병원비를 내지 못하니 병원에선 퇴원시키려고 한다.  심장 이식 수술을 할 수 있는 의사가 연간 벌어들이는 돈은 어마어마하다.  매년 300건의 수술을 시행하고 각각 25만달러의 돈을 벌어들이니 한화로 연간 80억에 가까운 돈이지만 이들은 결국 존의 아들을 외면한다.  아들이 퇴원을 당하는 상황에 이르게 되자 존은 병원을 납치하게 되고 그때서야 언론사들의 관심을 받게 된다.  간신히 아들을 대기명단에 올리지만 아들의 심장은 더이상 버티지 못하고 이에 존큐는 자신의 심장을 아들에게 주기로 결심하고 자살을 결행하려고 한다.  그리고 바로 그때 기적과 같이 아들에게 맞는 심장이 나타나게 된다. 



사회의 불합리

존 큐는 닉 카사베츠 감독의 세번째 영화이다.  아버지 존 카사베츠의 영향인지 이 감독도 사회 비판적인 주제의 영화를 만드는 경우가 많다.  그중에서 특히 주안점으로 놓이는 것은 바로 가족이다.  가족이라는 대주제를 가지고 여러가지 소주제를 갖다 붙이는 형식이다.  단순히 사랑이야기를 늘어놓는 노트북 같은 작품도 있지만 존큐나 알파독 같이 미국 사회가 가지는 병리적 현상을 소주제로 가져오는 작품도 있고 마이 시스터즈 키퍼와 같이 맞춤 아기라는 것을 끌어다오기도 하지만 결국 핵심은 가족과 사랑이다.  법(法)이라는 글자 앞에는 물이라는 글자가 붙어있다.  이것의 의미는 법은 물처럼 순리대로 움직여야한다는 뜻이다.  이를 반대로 생각해보면 결국 법이라는게 순리대로 움직이지 않기에 물을 앞에다 붙인게 아닐까?  사실 법이라는 것이 어느 정도의 한계를 가지게 된다.  모든 사안을 예측하여 완벽하게 법을 재정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그러다보니 법은 어느정도 열린형태로 제정되고 그 열린 공간을 매꿔주는것이 각종 부속령이나 학설로 대표되는 해석의 부분이다.  결국 법으로 대표되는 제도라는 것은 어느정도의 공간을 가지게 되고 이러한 공간을 인간은 적절히 활용을 하게 되는바 그 활용의 방향은 결코 긍정적이지 않다.  영화적 상황에서는 결국 돈이 문제가 된다.  돈이라는 가치가 끼어들어가게 되면 해석의 다양성이라는 이름하에 특정집단에 이득이 되는 해석을 하게 된다.  영화에서는 HMO 보험에 대해서 이야기가 나오는데 그 보험은 비용을 아끼기 위해 정기검진시 의사들에게 돈을 주고 검사를 행하지 말라고 종용한다고 말한다.  이것이 허용되는 이유는 제도 즉 법의 빈 공간을 자신들에게 이득이 되도록 해석을 하였기 때문이다.  법의 적용이라는 측면에서도 이런 문제가 생기는데 하물며 제도의 창출이라는 측면에서는 문제는 더욱 심각해진다.  매년 만들어지는 각종 법들의 수는 실로 어마어마하다.  하지만 어떤 법이 어떻게 만들어지고 어떻게 사라지는지에 대해서 일반국민들은 알수가 없다.  그러니 여기에도 돈의 논리라는 일정한 형태의 왜곡된 제도가 창출될 가능성이 다분하다.  사실 어떤 제도가 만들어지고 그것이 어떻게 시행되며 언제 사라지는지에 대해서 일반인이 일일이 관심을 가지는건 절대 무리다.  이런 점을 보완하기 위해 언론이나 각종 시민단체가 존재하게 된다.  그리고 이들이 외치는 가장 중요한 단하나의 대명제는 바로 알권리이다.  하지만 이 알권리라는 것도 결국 자본의 힘에 의해서 결정되는 경우가 많다.  영화에서 존큐는 아들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언론을 이용하려 들지만 돈이 안되기에 거절당하게 된다.  아이러니 한 것은 존큐가 병원을 납치한 이후인데 이때부터는 이 사건 자체가 돈이 되기에 언론의 지대한 관심을 받게 된다.  유명한 아나운서는 존큐가 아들과 통화하는 장면을 해킹해서 방송에 내보내며 너무 감동적이라고 말하면서 자신의 성공을 자신하기도 한다.  결국 문제는 돈이다.  돈이라는 가치가 끼어들어가게 되면 알권리라는 것도 사실상 유명무실해진다.  이러한 관점 하에서 우리는 자연스럽게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질 수 있게 된다.  정의란 무엇인가?



정의란 무엇인가?

오늘날 정의란 한국 사회의 최대의 화두가 될 정도로 큰 관심을 일으키는 주제중 하나이다.  이러한 정의에 대한 논의는 미국의 존 롤스에게서 기반한다.  존 롤스는 그의 인생 전반을 놓고 정의라는 문제에 천착하게 되는데 그 중심에 서는 저작물이 바로 1971년에 발표된 정의론이다.  근현대에 들어 윤리학에서 공리주의는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하게 된다.  기실 다양한 형태로 나타나는 사회의 모순과 대립을 해결하기에 공리주의는 꽤나 괜찮은 방법론을 제시하기 때문이다.  더욱이 공리주의의 논리는 사회 전체의 부를 향상시키는 것에도 굉장히 효율적인 모습을 보여주게 된다.  이는 우리 사회에서 흔히 논의되는 파이 이론에서도 확인이 가능하다.  즉 노동자들이 희생을 감내하여 최대한의 경제발전을 이룩하고 나면 파이가 커지기 때문에 나중에 모두에게 돌아갈 몫이 많아진다는 논리이다.  이러한 논리는 공리주의에서는 지극히 타당하고 옳바른 것으로 보인다.  적은수의 노동자가 희생하여 한 국가의 전체가 더 큰 부를 이룰 수 있으니 말이다.  그리고 이러한 측면은 미국 사회는 절정으로 해내게 된다.  세계 최고의 부국이자 초 강대국으로서 미국이 가지고 있는 부의 총량은 감히 상상할 수도 없을 만큼 큰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파이 이론은 다양한 형태의 문제점을 가져오게 된다.  가장 큰 문제는 사회 통합의 문제에 대한 심각한 도전이다.  이 문제는 우리 사회에서 양극화라는 말로서 제시되고 하는데 똑같은 국가와 사회의 구성원으로 살아가면서 왜 누군가는 처음부터 희생을 감내해야 하며 또 다른 누군가는 부를 쌓아올린채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의문이 들 수 밖에 없다.  이를 위해서 국가는 적절한 선에서 부를 분배를 해야할 필요성이 필수적으로 대두된다.  재화를 분배하여 사회 통합을 도모하지 않는다면 사회불만이 커지면서 사회전체가 불안해지고 사회적 계급이 고착화되어 불평등이 심화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영화속의 존큐의 사례를 보더라도 이러한 계급의 고착화 문제를 쉽게 확인할 수 있다.  부의 총량은 어마어마하지만 적절하게 분배가 이루어지지 않으니 급기야 사회 구성원의 건강과 생명까지 위협하는 상황을 가져 온다.  이렇듯 공리주의는 필연적으로 사회불안을 야기할 수 있는 문제를 가지게 된다.  전체의 부의 증가가 정의로운 분배를 통해  정의롭지 못한 결과를 가져온다는 것이다.  이에 존 롤스는 사회 전반에 만연한 공리주의적 분위기를 대신할 수 있는 이론으로서 “정의론”을 주장하여 공리주의와 대결한다.  


 문제의 핵심은 공리주의가 가져오는 불평등의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에 놓인다.  이를 위해 롤스는 정의 원칙을 확립하고자 한다.  정의원칙을 확립함에 있어 가장 중요한 요소는 그것이 보편성을 가져야한다는 점일 것이다.  어느누구에도 거부하지 않은채 이성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원칙이어야 하며 이것을 위해서는 특별한 사고 실험이 필요하게 된다.  사고 실험이란 일종의 가상의 상황을 상정한채 정의 원칙을 찾아보겠다는 것이다.  사실 사회 구성원 모두가 보편적으로 받아들이는 정의 원칙을 실제 현실의 삶속에서 확립한다는 것은 굉장히 어려운 일이다.  이미 현실의 삶은 불공정과 부정의가 확립된 곳이기 때문이다.  이에 정의 원칙을 수립하기 위해 요청되는 것은 공정한 상황과 공정한 절차이며 이것을 가능하게 하기 위해 사고 실험을 수행하게 된다.  이는 데카르트의 방법적 회의와 비슷한 것으로 오로지 이성을 통해 그러한 공정한 상황을 임의적으로 상상해보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사고 실험은 이미 다른 학자들을 통해서 지속적으로 행해지게 되는데 그것이 바로 사회계약론이다.  사회계약은 원초적 계약으로서 특정한 사회나 국가 또는 정부의 형태를 수립하는 것이라기 보다는 사회의 기본 구조에 대한 원초적 합의로서 성격을 가지게 된다.  이러한 사회계약이 이루어지는 최초의 상황 예컨대 자연 상태 따위를 원초적 입장이라고 부르게 된다.  이러한 원초적 입장은 원시와 같은 상태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순수한 가상적 상황으로 이해된다.  따라서 모든 개인은 자신의 사회적 지위나 계급을 알지 못하고 자신의 천부적 재능, 지능, 운동능력 따위를 알지 못하며 심지어 각 개인이 가지고 있는 가치관이나 심리적 성향 예컨대 내성적인지 외향적인지 보수적인지 진보적인지 따위의 정보도 알지 못한다.  이를 두고 원초적 입장에서의 사람은 무지의 베일(veil of ignorance)에 가려져 있다고 말하게 된다.  무지의 베일에 가려진 원초적 입장은 사회 구성원들이 어디에도 치우치지 않는 공점함을 보여주게 된다.  이러한 공정한 상황 위에서 공정한 절차를 통해 정의 원칙을 이끌어내게 되며 이러한 정의를 바로 ‘공정으로서의 정의’라 칭하게 된다.


 원초적 입장은 여러가지 특징을 가지게 된다.  첫째는 원초적 입장의 인간은 합리성을 가지고 있으며 서로에게 상호 무관심한(mutually disinterested) 인간이다.  합리성을 가지고 있기에 자신에게 이익이 되는 행위나 도덕적인 행위에 대해서 판단을 내릴 수 있는 인간이지만 상호 무관심하기에 타인의 이해관계에는 관심을 두지 않는다.  특정 목적에 대한 지식을 베일에 의해 제한당하고 있는 상황이지만 그렇다고 하여 모든 지식을 제한 당한 것도 아니다.  사회 전반에 대한 사실을 알고 있으며 다양한 대안들의 우열을 가리기에 충분한 지식도 가지고 있다.  이러한 상호 무관심한 합리성은 이기심 또는 시기심에 좌우되지도 않는다.  즉 타인에게 손해를 입힐 수만 있다면 나의 손해도 감수한다는 태도를 보이지 않으며 서로간에 손해나 이익을 주려고 애쓰지도 않으며 사랑이나 증오의 마음을 가지지도 않는다.  다만 충분한 지식을 통해 생산적이고 효율적인 원칙을 받아들이게 된다는 것이다.  사실 아무리 정의로운 세상이라도 비생산적인 사회라면 의미를 가지기 어렵다.  일단 부의 총량이 늘어난 상황에서 정의를 논해야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원초적 입장의 인간은 사회 전반에 대한 사실과 지식을 가지게 된다.  둘째로 원초적 입장의 인간은 정의감(sense of justice)을 행사할 능력이 있으며 이는 서로간에 공공연한 사실이다.  이러한 정의감은 각 개인이 가지는 특정한 형태의 가치를 보여주는 정의관이 아니다.  이는 원초적 입장에서 합의된 원칙에 대하여 서로를 믿고 따른다는 정의감이다.  


이러한 점을 종합해보면 인간의 선택은 간명해진다.  무지의 베일이 벗겨진 이후에 자신의 정보를 알게 되었을 경우 자신이 최소 수혜자 즉 사회의 약자가 될 가능성이 다분하다.  즉 미래가 굉장히 불확실하다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는 최소 수혜자에게 가장 이득이 가는 불평등 분배를 선택하는 것이 합리적이다.  이러한 측면을 정의 원칙으로 정리한 것이 롤스의 정의 1원칙과 2원칙이다.  원초적 입장에서 인간들은 사회의 기본구조를 결정하게 되는데 이때 특징은 완전히 새로운 형태의 체계나 원칙의 창조가 아니라 기존에 존재하는 윤리나 정의론을 놓고 비교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특히 중점에 놓이는 것은 롤스의 정의관과 공리주의의 비교이다



롤스의 정의 원칙

롤스의 정의 원칙은 크게 두가지 대원칙으로 나뉘게 된다.  제1원칙은 평등한 자유의 원칙이다.  이는 자유 우선의 원칙으로 사상의 경제, 사회 정치 모든 영역을 망라하는 기본적인 자유들을 보장하는데에 주안점을 두게 된다.  즉 각자는 최대한의 자유를 동등하게 누려야 한다는 것이 핵심이 된다.  그리고 제1원칙은 제2원칙에 우선하며 이를 자유 우선성이라 칭한다.  자유의 우선성은 사회 경제적 불평등을 해소하기 위해 자유를 침해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설사 제1원칙으로서의 평등한 자유를 침해하여 사회 경제적 불평등을 상당히 많이 해소할 수 있더라도 그것은 허용되지 않는다. 이러한 제1원칙에는 정치적 자유, 언론과 결사의 자유, 양심의 자유와 사상의 자유, 인신의 자유, 체포와 구금으로부터의 자유 등을 들 수 있다.  그중 정치적 자유의 보장은 시민으로서 가지게 되는 정치적 자유를 의미하며 이는 곧 주권자로서의 평등성을 보장받는 자유이다.  또 다른 제1원칙의 특징으로 자본적 시장질서의 자유는 제외된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소유권이나 상속권 따위들이 여기에 속하게 되는데 이는 원초적 입장에서 말하는 무지의 베일에서 기반하게 된다.  즉 자신의 사회적 지위나 경제적 이해관계를 전혀 모르는 상태에서 분배적 정의를 선택해야하는 것이다.  이러한 제1원칙이 중요한 이유는 최소한의 정치적 자유를 확실하게 확보하여 정치의 영역에서 목소리를 낼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만약 그것이 가능하지 않다면 이 또한 공리주의의 입장에서 경제적 효율성을 위해 제한을 가할 가능성이 다분해진다.  따라서 제1원칙이 확고하게 자리매김하지 못한다면 제2원칙은 사실상 의미를 상실하게 된다.


롤즈의 제2원칙은 두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는데 하나는 기회 균등의 원칙이며 두번째는 차등의 원칙이다.  기실 현실 사회에서 인간은 모두 각기 다른 재능과 역할을 맡게 된다.  모든 사람이 똑같다는 것은 가상적 상황에서나 가능한 것에 불과하다.  이에 어느 정도의 불평등은 발생할 수 밖에 없는 것이 필연이고 절대적 평등이라는 것은 현실적으로 가능하지가 않다.  따라서 제2원칙은 불평등이 정당하게 인정될 수 있는 조건이자 이러한 불평등을 최소화 시키는 것이 주된 목적이 된다.  제2원칙의 첫번째인 기회균등의 원칙은 모든 사람들에게 기회의 균등을 제공하는 것으로서 비단 직업 선택의 기회의 균등을 넘어 안정된 삶을 누릴 수 있는 기회의 평등을 의미하게 된다.  두번째로 차등의 원칙은 사회경제적 불평등이 사회 모든 구성원들에게 이로운 결과를 가져온다면 허용된다는 것이다.  이에 따르면 최소수혜자에게 이득이 가장 많이 가는 방향으로 불평등을 조정하게 된다.  예를 들어 절대적 평등 분배를 따랐을 경우 각자 50만원씩 일당이 떨어진다고 가정해보자.  이때 불평등한 분배를 행하게 되면 최소 수혜자 즉 제일 돈을 적게 받는 사람에게 51만원이 떨어지게 된다면 불평등한 분배를 했을지언정 최수 수혜자가 더 큰 이득을 얻었기에 이는 허용이 되는 것이다.  이러한 차등원칙에 입각한 대표적인 제도로는 최저임금의 보장을 들 수 있다.   그리고 제2원칙에서는 기회 균등의 원칙이 차등의 원칙보다 우선하게 된다. 



존이 던지는 Q

누군가가 고통받고 있을때 무관심하지 않고 그 손을 잡아주었다면 영화와 같은 상황은 벌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신자유주의라는 이름이 던져주는 그 달콤한 성장의 유혹 앞에서 그리고 언젠가는 그 과실이 나에게 떨어지겠지라는 희망 속에서 이러한 일들이 벌어지는 것이다.  이것이 성장 위주의 공리주의가 가져온 비극이다.  존큐는 평범한 가장이었다.  열심히 일하고 가난하지만 보험료도 꼬박꼬박 내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날 자신의 아이가 심장이식을 받아야 하는 상황이 되었고 미국 사회의 제도는 그를 외면한다.  무슨 수를 써도 안되자 결국 병원을 납치하여 인질극을 벌이게 된다.  인질극이 벌어지니 그제서야 언론의 관심을 받으며 뉴스를 본 시민들은 병원 앞으로 뛰쳐나와 존큐를 응원하기에 이른다.  시민들이 바라보고 있으니 존큐를 쉽사리 죽이지도 못한다.  죽이려는 시도를 했지만 실패하고 그 이후의 비난여론은 더욱 거세진다.  이 영화의 상황은 현재 한국의 상황과 많은 연관성을 가지게 된다.  존큐가 아들을 살리지 못하는 이유는 비정규직인 자신의 사회적 지위때문이다.  그가 만약 정규직이었다면 더 좋은 보험을 받았을테고 이에 치료비는 물론 애초에 정기 검진을 통해서 그 병을 미리 발견했을 가능성이 더 높다.  영화의 결과는 아름답게 끝이나 존큐는 아들도 살리고 자신의 형도 아주 낮게 받는 정도에서 해결이 되지만 그 이면에 있는 수천만명의 사람들 영화 바깥에 존재하는 실존하는 사람들은 어찌되는 것일까?  결국 중요한 것은 제도의 변화이다.  바로 수천만 일반 서민이 인간답게 살 수 있는 제도의 확립이다.  물론 롤스의 견해대로 제도를 바꾼다면 그것은 최소수혜자에게 혜택이 최대한 많이 돌아갈 수 있는 방향의 제도 변화일 것이다.  이를 위해 필요한 것이 바로 절대적으로 보장되어야할 정의의 제1원칙인 평등한 자유의 원칙이다.  특히 정치적 자유의 원칙이 중요해진다.  자유의 원칙의 보장은 개인의 자발성을 끌어내어 전체의 사회적 부를 성장시키는 원동력도 있지만 공리주의적 경제의 관점에 의해 정치적 자유를 제한 받지 않을 것을 보장하는 측면도 있다.  따라서 이러한 원칙의 보장은 현대 민주주의 사회에서 각자가 스스로 자신에게 유리한 분배 원칙을 선택할 수 있는 주권자로서의 역할을 맡게 한다.  하지만 영화속 미국 사회는 굉장히 부정의한 분배원칙을 따르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최소한의 생명조차 담보가 되지 않는 상황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회의 모습은 자연스럽게 저항과 혼란을 야기할 수 밖에 없으며 더 크게는 공리적인 경제 성장에도 이득이 되지 않는다.  사회 전체의 입장에서 봤을때 진정한 이득은 최소수혜자에게 최소한을 보장하는 분배 바로 그것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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