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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의 마지막 유혹(The Last Temptation of Christ)
마틴 스콜세지 감독의 12번째 장편영화로서 그의 작품중 가장 문제작이 아닐까 생각된다.  이미 제작당시부터 엄청난 어려움 특히 미국내 극보수 기독교인들의 반대에 직면하여 제작 자체가 대단히 불투명한 그런 작품이었다.  상황이 아주 안좋게 돌아갔기에 어쩔수 없이 스콜세지 감독은 이 영화 이전에 특근과 컬러 오브 머니라는 작품을 내놓게 되기도 하니 말이다.  이 작품은 그리스인 조르바로 유명한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동명의 소설을 영화한 작품이다.  카잔차키스는 니체의 철학과 베르그손의 철학에 많은 영향을 받은 인물로서 뒤이어 실존주의, 불교, 코뮤니즘까지 아주 다양한 사상들의 향연을 기가막힌 문장과 이야기로서 풀어내는 20세기가 낳은 가장 위대한 작가중 한명이고 개인적으로 정말 좋아하는 작가중 한명이다.

하지만 그의 책들은 기독교와 많은 부분에 있어서 대립되는 측면이 생기게 되는바 많은 책들이 바티칸에 의해 금서로 지정되고 그중에서도 극심한 대립점은 최후의 유혹이라는 작품에서 생겨난다.  이 책으로 인해 카잔차키스는 그리스 정교에서는 파문당하기에 이르니 말이다.  한마디로 그는 모든 기독교 종파에서 배척당하게 되는 것이다.  모르긴 몰라도 이슬람에서도 그는 심각하게 배척당했을 것이다.  이는 아무래도 니체의 초인사상이 카잔차키스 작품세계의 핵심을 이루다보니 그런 현상이 생기는 것이라 볼 수 있다.  이영화는 1988년도에 만들어진 영화인데 우리나라에는 2002년에서야 개봉이 이루어지게 된다.  이유는 동일하다.

여담으로 한가지 언급해보자면 넓은 의미에서의 기독교는 좁은 의미에서의 카톨릭, 그리스 정교, 이슬람, 개신교를 모두 포함하는 단어이다.  그리스 정교는 로마의 동서로의 분리에서 시작되고 이슬람은 마호메트의 성자의 인정유무에서 그 종파가 갈라지게 된다.  개신교는 알다시피 종교개혁에서 갈라지게 되고 말이다.  무엇이 되었든 저것들이 넓은 의미에서의 기독교로 묶여지는 단 하나의 이유는 유일신의 긍정과 예수라는 인물에 대한 신성시에 존재하게 된다.

영화 내용은 간단하다.  예수의 행적속에서 묻어나는 인간 예수로서의 고뇌이다.  어떤면에서 보면 사기꾼처럼 보일정도로 다양한 인간적인 측면을 보여주게 되는데 극의 마지막에 가서는 예수에게 최후의 유혹이 다가오게 된다.  온갖 유혹을 다 이겨낸채 십자가에 못박히던 그 순간 그는 엄청난 유혹에 직면하게 된다.  보통의 인간으로서의 삶을 보여준 마지막 유혹 그 유혹을 이겨냈을때 예수는 완성된다.  결국 이부분이 문제가 되는 것이다.  신을 놓고 인간이 가지는 욕망과 고뇌따위를 부여해버리니 기독교 입장에서 어찌 마음에 들겠는가?  충분히 이해하는 바이다.  물런 여기서의 나의 이해는 적극적 이해가 아닌 소극적 이해에 불과하지만.




19세기 허무주의의 만연
흔히 니힐리즘이라고 불리는 허무주의는 니체의 시작점에 선다고 볼 수 있는 사고관이다.  허무주의란 무엇일까?  밑도 끝도 없이 허무하다?  그런건 아니고 허무주의는 전통적 가치체계와 진리의 유효성의 상실을 의미하며 니체는 이런 허무주의가 19세기에 만연하고 있다고 파악한다.  허무주의의 원인은 무엇이 있을까?  일단 기존의 최고 가치가 가지는 유효성의 상실에서 비롯된다.  최고가치의 탈가치 현상이라고 볼 수 있는 이 현상은 니체에 의해 시도되었던 기존의 최고 가치에 대한 폭로 즉 오랫시간 동안 진리라고 생각해왔던 것들이 알고보니 착각에 불과했다는 폭로에서 시작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기존의 최고 가치들이란 무엇일까?  그것은 그리스도교 도덕이라고 볼 수 있다.  도덕이란 다양한 가치체계가 존재하게 해주는 최고 가치로서 여기서의 도덕은 절대주의적 도덕관이다.  이러한 절대적 도덕관에서부터 다른 가치체계들의 해석이 이루어지고 그 가치평가에서 우리의 실천평가가 도출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최고가치로서의 도덕이 무너지고 그 진리성이 의심받기 시작하면 최고가치를 기반으로 한 다른 가치들이 무너지기 시작한다.  이는 거대한 상실이자 끝없는 무의미함의 시작이 되는 것이고 이러한 측면이 허무주의의 한 요소가 되며, 이러한 최고가치로서의 도덕의 상실이 19세기 전반에 만연해있다고 판단하는 것이다.

한편으론 그리스도교의 몰락도 허무주의의 중요한 원인이 된다.  그리스도교의 몰락은 최고가치로서의 도덕의 몰락과 동전의 양면을 이루게 된다.  사실 그리스도교라는 것은 대중을 위한 플라톤주의라고 불릴만큼 형이상학적 이분법의 종교관이다.  그런데 여기에서 니체가 선언한 신의 죽음은 형이상학적 세계관의 붕괴와 이를 원인으로 한 이분법적 세계관의 붕괴를 의미하게 된다.  이는 데카르트적 주체에서 시작된 근대성의 필연적 결과로서 이것이 19세기에 이르러 폭발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그리스도교의 몰락은 그 자체에서 이미 내포하고 있는 발아에서 비롯되는 현상으로, 예수가 가르친 진정한 의미의 가르침이 왜곡되면서 필연적으로 다가올 수 밖에 없는 허무적 상황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예수의 가르침의 핵심은 무엇일까?  첫째 신과 인간을 구별짓는 죄라는 개념의 폐기이다.  예수는 죄의 개념을 통해 인간을 구원하려고 하지 않고 평화와 사랑 그리고 인간을 차별하지 않는 것을 핵심적 요소로 삼게 된다.  그리고 이러한 예수에 의해 제시된 구원은 평화와 사랑의 지속적인 실천에서 이루어지며 이러한 실천에 의해 형이상학적 이분법에 의해 제시된 천국이 아닌 현실 세계에서 이미 천국이 이루어진다는 사고관이다.  결국 누구든 사랑을 실천한다면 신의 자식이 되는 것이다.  하지만 기독교는 예수의 죽음 이후 유대주의, 플라톤주의, 신비주의, 금욕주의라는 네가지 요소가 결합하여 심각하게 왜곡되어 버린다.  그렇기에 니체는 기독교는 공격하되 예수는 공격하지 않는 모습을 보여주게 된다.  즉 니체에 의하면 예수야 말로 자기극복적 초인의 전형이자 최초의 그리스도교 교인이자 최후의 그리스도교 교인이 되는 것이다.     

이러한 그리스도교의 몰락은 19세기 당시의 유럽철학이 보여주는 현상 즉 철학적 진리성에 대한 의심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이는 형이상학적 편견에 기초한 철학이 절대적 도덕성을 불러오게 되지만 이러한 철학관념은 인간의 실재적 삶과 매우 적대적인 양상을 보이게 되고 실재적 삶의 적대적인 가치를 최고 가치로 인정하게 된다.  그렇기에 절대적 도덕관이 형성되는 것이다.  이러한 삶에 적대적인 기존의 철학관은 형이상학적 철학관의 발전 즉 플라톤의 각주에 불과한 것이고 그렇기에 철학 그 자체에서 허무성이 내포되게 된다. 

이러한 허무주의는 위에서 언급한 부분 외에도 정치의 영역, 경제의 영역, 역사, 문화예술 등 모든 영역에서 폭발적으로 나타나게 되며 모든 부분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형이상학적 사고관이 가져오는 모순에서 비롯된다.  그것이 바로 19세기의 핵심적 요소가 되는 것이며, 이러한 측면으로 인해 니체는 실존주의적 사고관의 선구자가 됨과 동시에 니체의 형이상학의 극복 여부에 대한 문제가 아주 격렬한 논쟁의 대상이 된다.


영원회귀와 초인 그리고 종말인
기존의 절대적 가치관에 대한 본질적 통찰을 통해 발생하는 허무주의적 성향은 영원회귀하는 특징을 가지게 된다.  모든 기존 가치의 부정에서 발생하는 허무의 상태에서 또 다른 가치가 탄생한다고 한들 그 가치는 결국 그 필연적 귀결에 의해 다시금 반복될 수 밖에 없다고나 할까?  이를 쉽게 이해할 수 있는건 펄스 즉 진동현상을 상상해보는 것이다.  이러한 영원회귀적 허무주의는 크게 두가지 양상으로 우리에게 다가올 수 있다.  첫째는 극단적인 허무주의 즉 이런식의 허무의 반복에서 우리는 벗어날 수도 없고 도망갈 수도 없는 결코 멈추지 않는 무의미의 연속이라는 측면이다.  하지만 이는 영원회귀의 최악의 국면만 생각한 것이다.  펄스를 생각해보라.  항상 아래에만 머무는건 아니지 않는가?  그렇다면 반대로 역으로 생각해본다면 절대적 절망이 아닌 절대적 긍정의 상태도 우리는 상정할 수 있는바 바로 여기에서 허무주의 극복 가능성이 제시된다. 

영원회귀의 사유 즉 모든 것은 반복된다는 이러한 사고관은 인간으로 하여금 실존적 결단을 불러오게 된다.  즉 이러한 허무의 중심에서 어떻게 살아갈것인지를 스스로 결단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때의 결단은 크게 두가지 양상으로 나뉘어 바라볼 수 있다.  첫째는 절대적 무의미성 안에서 스스로 몰락의 길을 걷는 방법이다.  이러한 결단의 양상을 선택하는 자들에게 있어 영원회귀는 영원한 저주이며 스스로를 영원한 약자로 만든 총체적 허무적 존재로의 몰락이다. 

이러한 자들을 두고 니체는 종말인이라고 부르게 된다.  종말인의 특징으로는 자기 자신을 사랑하고 내면으로 들어가는 것을 두려워하는 인물로서 항상 다른 사람의 동정과 관용을 요구하는 인간상이다.  그리고 그들은 지속적인 자기극복이 아닌 자기 보존을 욕망하는 자이면서 노동을 즐거운 일로 여기되 자기보존의 한도내에서만 즐거운 일로 여길뿐이며, 이러한 자기보존에서 지속적인 쾌락을 추구하게 된다.  그와 동시에 종말인은 무조건적인 평등을 요구한다.  하지만 인간은 본질적으로 불평등한바 지속적으로 자기극복이 가능한 초인과 그것이 불가한 종말인이 같다고 보기는 힘든 것이다.    

이러한 종말인과는 반대로 영원회귀의 상황을 놓고 자신의 삶에 최대의 의미를 부여하여 스스로 최고 긍정의 길을 걸을수도 있다.  스스로 자의식을 변화시켜 스스로를 가치 설정자로서 변화시키는 즉 힘에의 의지에 대응하여 자기 자신을 지속적으로 극복해나가는 초월적 인간으로의 변화이다.  그리고 이러한 방식으로 허무주의를 극복한 자를 초인(위버멘쉬)이라 부르게 된다.  이러한 초인의 특징은 자기극복적 삶을 영위하는 인간이자 힘에의 의지를 기본으로 하여 상황을 스스로 구성하는 존재이다.  그리고 초인은 형이상학적 또는 종교적 이분법과 최고가치로서의 절대 도덕관에서 자유로운 인물이기도 하면서 자기 극복에만 관심을 가지는 매우 이기적인 존재이기도 하다. 




예수와 초인
기존의 소설을 영화화 하는 경우에 발생하는 문제점은 그 소설의 완전한 표현이 불가능하다는 점이다.  이는 모든 원작소설을 가지고 있는 영화의 어쩔 수 없는 측면이다.  그렇기에 이 영화가 그렇게 좋은 영화라고 보기는 힘들지 않을까 생각된다.  예수의 인간적 고뇌라는 것이 그렇게 크게 다가오진 않았으니 말이다.  아무튼 예수라는 인물은 정말 흥미로운 사람이다.  한명의 인간이 과연 어디까지 스스로를 극복하고 초월할 수 있는지를 잘보여주는 전형적인 사례라고나 할까. 

굳이 기독교인이 아니더라도 예수의 복음은 실로 너무나도 아름답다.  신과 인간을 가르는 죄라고 하는 복수적(復讐的) 감정에서 벗어나 사랑이라는 삶과 그를 통한 자유 그리고 이의 실천.  예수는 절대 칼을 들지 않는다.  그에게 있어 복수라는 감정은 무의미할뿐이다.  특정인들의 집단만을 구원해야한다는 편협한 메시아도 그는 부정한다.  그는 왼뺨을 맞으면 오른뺨을 내주는 자신을 방어하지 않으며 모든 사람들을 존중하며 가장 낮은 곳에서 스스로 실천하는 오직 사랑과 평화를 이야기할 뿐이다. 

하지만 예수는 한편으론 인간이기에 스스로 고뇌하게 된다.  이러한 고뇌는 자기 자신에 대한 경멸로 나타나게 된다.  자신을 경멸한다는 것은 스스로를 회의한다는 것이고 스스로를 회의한다는 것은 스스로 극복할 수 있다는 가능성의 표현인 것이다.  스스로를 경멸할 수 없는 인간은 절대 초월할 수 없다.  그렇기에 예수의 인간적 고뇌의 부각은 너무나도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영화를 보면 예수와 그외 인간들의 대립이 아주 인상깊다.  예수를 따르는 추종자들이나 유대인들은 그에게서 무엇을 기대하였던가?  예루살렘으로 들어가 로마인을 물리치고 새로운 왕국을 만들어 유대인을 구원하기를 꿈꾼다. 

이러한 소망은 사실상 스스로를 보전하는게 급급한 종말인으로서의 양상을 잘 보여주게 된다.  그들에게 중요한건 스스로의 초월을 통한 현세에서의 천국의 도래가 아닌 자신들의 안위와 부의 유지에만 집착하는 양상인 것이다.  그들이 노동하는 이유는 스스로를 보존하기 위함이고 그들이 신에게 기도하는 이유 역시 스스로를 보존함에 주된 이유이다.  그렇기에 그들은 쾌락을 탐하면서 한편으론 막달리아에게 창녀라는 이유로 돌을 던지게 된다. 

예수는 이러한 그들의 종말인으로서의 면모를 꿰뚫어본다.  오직 자신의 보존을 위해 신을 찾는 그들은 스스로 죄를 범하면서 남에게 죄를 묻는 모순적인 인물 양상들을 바라보며 그는 그들에게 말한다.  사랑하라고 말이다.  극중에서 예수와 유다의 대화가 참 인상깊다.  유다는 로마를 물리쳐 육체의 자유를 얻은 이후에 영혼의 자유를 꿈꿔야 한다고 예수에게 말한다.  하지만 예수는 그러한 복수는 영원회귀할뿐이며 무의미하다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사랑과 평화를 통한 용서와 자신이 가지는 영혼의 자유라고 말한다. 

하지만 그는 인간이기에 한편으론 끊임없이 평범한 인간으로서의 삶을 욕망하게 된다.  사랑하는 여인과 결혼을 하고 육체를 뒤섞어 쾌락을 맛보고 아이를 낳아 기르는 평범한 삶을 말이다.  그렇기에 예수는 끊임없이 신에게 질문한다.  "왜 저를 선택하셨나이까?"  하지만 그와 동시에 그러한 스스로를 끊임없이 다잡아가며 신이 자신에게 명령한 사랑과 평화를 끊임없이 실천한다.  그 실천을 통해 그는 지속적으로 자기 극복하게 되니 바로 이지점에서 예수의 초인성이 발견된다. 

이 영화에서 가장 인상 깊은건 마지막 30분에서 나타난다.  예수는 자신의 사랑을 실천하기 위해 예루살렘에 도착한 이후 혁명과 폭력을 조장하기 보다는 유다에게 이르러 자신을 로마에게 고발하라고 명하게 되고 스스로 로마에게 잡혀 십자가에 못박히는 선택을 하게 된다.  이것이야 말로 그가 내세운 사랑과 평화라는 신념과 그 실천의 극대화인 것이다.  가장 큰 원수를 용서할 수 있는 행위야 말로 진정한 승리가 아니겠는가? 

하지만 바로 그순간 예수에게 최후의 유혹이 나타나게 된다.  사탄은 달콤한 목소리로 그에게 신은 너에게 더이상 고통을 인내하지 않아도 된다고 허락하셨다면서 그를 유혹하게 된다.  그리고 그는 그 유혹에 빠져 일상적인 인간으로서의 삶을 맛보게 된다.  막달리아와 혼인하고 아이를 낳고 하는 일련의 과정을 통해서 말이다.  하지만 그는 마지막에 스스로가 아주 무서운 유혹에 빠졌음을 알게 되고 바로 그 순간 그는 그 유혹을 극복한채 스스로를 다시금 초월하게 된다.  그리고 그 순간 예수는 진정한 메시아이자 인류의 구원자로서 완성된다. 


마무리
개인적으로 권하고 싶은건 영화와 카잔차키스의 책 둘다 보라고 권하고 싶다.  아주 좋은 작품이고 인간이 보여줄 수 있는 자기극복이 한계가 어디까지인지.  그리고 내 스스로의 삶이 과연 초인과 얼마나 근접한지에 대해서 생각해볼 수도 있고 말이다.  그와 동시에 니체에 대해서 한번 생각해보는 시간을 가져보는 것도 나쁘진 않을 것 같다.

[영 화/마틴 스콜세지] - 거장 마틴 스콜세지의 작품세계
[영 화/마틴 스콜세지] - 셔터 아일랜드(2009), 두가지 결말의 철학적 고찰
[영 화/마틴 스콜세지] - 디파티드(2006), 이민자와 경찰 그리고 미국
[영 화/마틴 스콜세지] - 에비에이터(2004), 어머니를 향한 욕망과 강박증 그리고 그 벗어남
[영 화/마틴 스콜세지] - 갱스 오브 뉴욕(2002), 이민자의 가치관 투쟁과 국가의 욕망
[영 화/마틴 스콜세지] - 비상근무(1999), 천재적 연출과 뉴욕의 광기
[영 화/마틴 스콜세지] - 쿤둔(1997), 사회주의제국과 비폭력저항의 아이러니
[영 화/마틴 스콜세지] - 카지노(1995), 라스베가스의 상징과 이민자 문제
[영 화/마틴 스콜세지] - 순수의 시대(1993), 아비투스와 19세기 뉴욕의 상류사회
[영 화/마틴 스콜세지] - 케이프 피어(1991), 추상표현주의와 미국 중산층의 무의식적 억압
[영 화/마틴 스콜세지] - 좋은 친구들(1990), 마피아의 실체와 혐오적 폭력
[영 화/마틴 스콜세지] - 예수의 마지막 유혹(1988), 니체의 초인과 예수의 인간적 면모
[영 화/마틴 스콜세지] - 컬러 오브 머니(1986), 당구공과 그 속에 담긴 삶
[영 화/마틴 스콜세지] - 특근(1985), 정상속의 비정상성의 만남
[영 화/마틴 스콜세지] - 코미디의 왕(1983), 마지막 장면과 노이즈 컬러의 이미지 해석
[영 화/마틴 스콜세지] - 분노의 주먹(1980), 흐릿한 사각위에 선 남자
[영 화/마틴 스콜세지] - 뉴욕 뉴욕(1977), 1940년대 미국과 재즈
[영 화/마틴 스콜세지] - 택시 드라이버(1976), 미국이 가지는 허구성과 본질
[영 화/마틴 스콜세지] - 비열한 거리(1973), 뒷골목 이태리 이민자들의 삶
[영 화/마틴 스콜세지] - 누가 내 문을 두드리는가?(1968), 성과 속을 가로지르는 문의 경계적 성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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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 아로마 ♡

    | 2010.03.26 07:08 신고 | PERMALINK | EDIT | REPLY |

    음음음...
    책과 영화를 다 보라구용? ^^;
    갑자기 머리에 쥐가 ㅡㅡ;

  3. 안용태의 유쾌한 인문학

    | 2010.03.26 15:10 신고 | PERMALINK | EDIT |

    우리모두 책만 보아보아요..ㄷㄷㄷㄷㄷ

  4. 바람나그네

    | 2010.03.26 07:13 신고 | PERMALINK | EDIT | REPLY |

    점점 볼 게 너무 많아진다는 ㅎㅎ
    멋지고 행복한 하루되세요 ^^

  5. 안용태의 유쾌한 인문학

    | 2010.03.26 15:11 신고 | PERMALINK | EDIT |

    좋은하루되세용... ㅎㅎㅎ

  6. | 2010.03.26 07:20 | PERMALINK | EDIT | REPLY |

    비밀댓글입니다

  7. 안용태의 유쾌한 인문학

    | 2010.03.26 15:12 신고 | PERMALINK | EDIT |

    헐 명품백이 어때서.. 편견을 버리삼..ㅋㅋㅋ
    난 비싼옷에 엄청 집착하는데...ㄷㄷㄷ

    내가 어제 적어준건 책이름이 아니라 학자들 이름이에요. 사봤자 못읽으니까 사진마요. 선행학습이 필요함..ㄷㄷㄷ

  8. 표고아빠

    | 2010.03.26 07:21 | PERMALINK | EDIT | REPLY |

    으윽 이놈의 게으름은 이렇게 정리해 주는거 보기도
    힘겨워 한다능...
    늘 멋진 소개들 감사 감사요~~

  9. 안용태의 유쾌한 인문학

    | 2010.03.26 15:13 신고 | PERMALINK | EDIT |

    아니에요. 세상에서 젤 부지런하시면서..
    ㅎㅎㅎㅎ

    귀찮아서 대는대로 휘걀겨 쓴 제가 게으른넘이에요.ㅠㅠ

  10. 꼬기뉨

    | 2010.03.26 07:22 신고 | PERMALINK | EDIT | REPLY |

    원수를 용서하기란 쉽지가 않죠..
    그래서 예수님인가 봅니다. ㅎㅎ

    십자가 못 박히는 장면 끔찍할거 같아요~

  11. 안용태의 유쾌한 인문학

    | 2010.03.26 15:13 신고 | PERMALINK | EDIT |

    음... 손대고... 위에 나무대고..

    그담에 망치 대고... 퉁퉁퉁...ㄷㄷㄷㄷ

  12. 트레이너강

    | 2010.03.26 07:26 | PERMALINK | EDIT | REPLY |

    멋진 글 잘보고 갑니다. 용짱님!! 즐거운 하루^^

  13. 안용태의 유쾌한 인문학

    | 2010.03.26 15:21 신고 | PERMALINK | EDIT |

    즐거운 하루!!!

  14. | 2010.03.26 07:31 | PERMALINK | EDIT | REPLY |

    비밀댓글입니다

  15. 안용태의 유쾌한 인문학

    | 2010.03.26 15:21 신고 | PERMALINK | EDIT |

    넹 오늘도 홧티ㅜㅇ

  16. 달려라꼴찌

    | 2010.03.26 08:07 | PERMALINK | EDIT | REPLY |

    오캐짱님의 글들을 모아서
    조만간 책으로도 출간을 해보자구요 ^^
    아자~!!

  17. 안용태의 유쾌한 인문학

    | 2010.03.26 15:21 신고 | PERMALINK | EDIT |

    후후후 전 오픈캐스트의 왕..ㅋㅋㅋㅋㅋ

  18. killerich

    | 2010.03.26 09:01 신고 | PERMALINK | EDIT | REPLY |

    용짱님~ 오늘도 행복한 하루 되세요^^/

  19. 안용태의 유쾌한 인문학

    | 2010.03.26 15:22 신고 | PERMALINK | EDIT |

    넹 즐거운 하루!!!

  20. 투유♥

    | 2010.03.26 13:45 신고 | PERMALINK | EDIT | REPLY |

    와 몰랐어요. 이 영화와 니체의 초인과 맞닿아 있었군요. 전 유혹을 받고 그냥 예수가 넘어갔다고만 들었는데 아니었군요. 역시 선무당이 사람잡았던 것이군요. 어쩌면 자신의 토대없는 신앙이 흔들리는 게 두려웠는지도 모르지요 아참 용짱님 제가 이번에블로그를 이사하게 됐어요^^ 그 때도 놀러오실거죠^^

  21. 안용태의 유쾌한 인문학

    | 2010.03.26 15:22 신고 | PERMALINK | EDIT |

    예수야말로 초인의 어떤 전형이라고나 할까요..

    그래서 니체는 기독교는 공격해도 예수는 공격안했어요.

    근데 어디로 이사를?? 이사의 흔적은 안보이던데!!

  22. ㅇㅅㅇ??

    | 2010.03.26 14:52 | PERMALINK | EDIT | REPLY |

    잘 봣습니다.^^ 전 기독교(개신교)인데요 어떤 책인지는 모르겟지만 전 교단에서 부정될 정도의 파급력이 있는 책이였다면 아마 예수님의 신성을 부정한 문장이나 그런 부분이 있었지 않나 싶네요 ㅎ 지금도 예수님의 신성을 부정하는 경우엔 개신교를 정면으로 반박하는 것이기 때문에 문제가 되죠. 그런 일련의 교단은 사이비, 또는 이단이라 지칭되기도 하고 이슬람같이 별개의 타 종교가 되기도 한답니다.(이슬람도 예수님의 인성은 받아들이지만 신성은 없다고 주장하죠^^)
    아니면 현재에 비해서 과거의 교단은 꽤나 그런부분에 매우 보수적인 경향도 컸었기 때문에 꼭 신성을 부정한 것 까진 아니라도 그럴수도 있었을 거라 보여지네요 ㅎ 지금의 개신교에서 가르치는 예수님은 신성과 인성 둘다 함께 가지고 있으신 분이신데요. 그래서 최근(은 아닌가?) 패션오브크라이스트 영화에서는 그런 예수님의 인성을 강조해서 만들어진 작품이기도 하죠 ㅎㅎ 제가 철학은 공부를 하지 않아서 잘 모르지만 아마 과거 허무주의라는 것도 아직 성경을 잘 이해하지 못한 상태에서의 극단적인 종교적 가르침이 사회에 만연되어지면서 발생한게 아닐까 싶네요^^;

  23. 안용태의 유쾌한 인문학

    | 2010.03.26 15:31 신고 | PERMALINK | EDIT |

    음... 니체 모르시나요?

    음...

  24. | 2011.09.04 00:43 | PERMALINK | EDIT |

    비밀댓글입니다

  25. mami5

    | 2010.03.26 20:04 | PERMALINK | EDIT | REPLY |

    그런데 왜
    예수는 유다에게 명령을 하여 유다를 위전자로 만드는지
    참 굼긍해지네요..^^
    용짱님 글 잘 읽고갑니다..^^

  26. 안용태의 유쾌한 인문학

    | 2010.03.26 21:40 신고 | PERMALINK | EDIT |

    왜그랬을까요.. 어차피 그건 픽션이니깐..

    중요한건 아닌것 같아요..ㅎㅎㅎ

  27. sdf

    | 2010.06.22 10:45 | PERMALINK | EDIT | REPLY |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좋은 글 감사합니다.

  28. 지나가던 사람

    | 2010.11.20 20:35 | PERMALINK | EDIT | REPLY |

    아...이거 어렸을 적에 TV에서 잠깐 소개해 줬던 것 같은데 장면만 가물가물하고 제목은 도무지 생각나지 않아서 끙끙댔던 영화군요. 책도 있는지는 몰랐네요ㅎㅎ
    사실 (거의 냉담중인) 가톨릭 신자이긴 하지만 예수님을 '초인'으로 해석한 건 흥미가 가네요. 니체, 철학 같은 건 너무 어려운 느낌만 들고 머리가 아팠는데 역시 사람은 아는 만큼 보이나 봅니다.
    우연히 오픈캐스트를 눌렀다 왔는데 좋은 글 읽고 갑니다. ^^

  29. 김진

    | 2011.04.27 22:59 | PERMALINK | EDIT | REPLY |

    예수님은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여러분 진리는 하나입니다. 예수님은 인간이시기 이전에 하나님의 본체이십니다. 어리석게 변증하거나 적그리스도, 양의 탈을 쓴자들의 속임수에 미혹되지 마시고 그분의 지상 명령인 사랑을 믿음으로 실천하세요. 그러면 가정이 회복되고 의심의 삶이 종지부를 찍을꺼에요 ㅋ

  30. 김진

    | 2011.04.27 23:05 | PERMALINK | EDIT | REPLY |

    신은 죽었다는 니체의 말로를 보세요!! 인생을 사는 동안은 천재적인 철학자로 살았고 지금도 무신론자의 추앙을 받고 있지만 극히 육적인 정욕을 못이겨 누이를 탐한 뒷면이 숨어 있고 하나님을 부정하여 그 하나님을 연구하다 마침내 귀신들려 미쳐 죽었고 죽기전까지도 자신이 가야할 길을 모르고 갈등속에 생을 마감했답니다...참으로 불쌍하쟎아요ㅠ

  31. 김진

    | 2011.04.27 23:08 | PERMALINK | EDIT | REPLY |

    교회 나가시면 얼마나 인간이 나약하고 위선 덩어리인지 알게됩니다. 하지만 인간이 얼마나 귀한 존재인지도 알게 된답니다.ㅋ

  32. 김승한

    | 2014.10.28 17:47 | PERMALINK | EDIT | REPLY |

    고맙습니다. 잘 읽었습니다.
    제 블로그에 링크걸었네요..

    수고하세요

  33. 페르아

    | 2015.08.14 10:23 | PERMALINK | EDIT | REPLY |

    잘 읽었습니다 :) 그나저나 니체의 초인을 논하는 글에 논점 파악도 못하는 댓글들이 몇몇 있네요; 요즘 한창 관심이 생겨서 예수, 유다, 빌라도 관련 책들을 계속 읽고 있고 본문의 영화에 대해서도 알게 되어서 일단 카잔차키스 책부터 읽으려고 사 놨는데 니체 사상과도 연관지을 수 있군요. 이걸 계기로 니체에 대해서도 공부해봐야 할 것 같습니다. 아직 20대 초중반이라 공부할 게 많네요.

  34. 이랑

    | 2016.05.01 13:26 | PERMALINK | EDIT | REPLY |

    예수가 초인이라 ...니체와 카잔차기스는 예수를 이용해먹었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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