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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선가 나를 찾는 전화벨이 울리고, 죽음과 균열 그리고 소통과 회복 본문

인 문/문 학

어디선가 나를 찾는 전화벨이 울리고, 죽음과 균열 그리고 소통과 회복

유쾌한 인문학 2010. 10. 6. 00: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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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형의 존재에서부터 실존하는 나라는 것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에는 균열의 순간이 존재한다.  균열은 흔히 단절을 의미하게 되지만 또 한편으로 동질성을 의미하기도 한다.  균열의 순간 등장하게 되는 이쪽과 저쪽은 미시적으로 바라본다면 완전히 다른 무엇인가를 의미하겠지만 조금 더 크게 본다면 이것들을 둘러싸고 있는 하나의 흐름이 보이게 된다.  물론 이 흐름에도 균열은 존재하게 되고 그 균열들의 모음을 우리는 역사라고 부르게 된다.  역사라는 것은 그 외연을 둘러싸고 있는 껍데기에서 비롯되는 하나의 흐름에서 비롯되는 수많은 균열들의 연속으로 나타나게 된다.  이 균열은 그 사회 내부에 존재하는 개인에게 각기 다르게 다가가게 되고 그 균열로 인해 각 개인은 또 다른 균열의 연속으로 나아가게 된다. 

사실 인간 아니 좀 더 정확하게 한 사회의 구성원은 그 사회의 외연에서 결코 자유로울 수가 없다.  그것을 두고 흔히 분위기라고 말하기도 하며 현대 철학에서는 구조라고 말하기도 하지만 그 외연을 표현하기에 가장 적합한 말은 우물안 개구리가 아닐련지.  즉 우물이라는 것을 다양한 측면으로 바라볼 수 있으되 개구리는 결코 우물에서 벗어날 수 없기에 우물이 가지고 있는 다양한 측면으로부터 영향을 주고 받게 된다.  그리고 그 영향이 극대화 되는 시점은 균열의 순간이 될 것이며 우물에 나타난 하나의 균열은 그 내부의 수많은 개구리들에게 각기 다르게 다가가 수천만개의 균열을 만들어내게 되다.  이건 마치 똑같은 파란색이라도 그 짙음에 따라 하얀색에서 검은색으로 극단으로 나뉘며 그 사이에 수많은 색상이 존재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사실 인간에게 있어 균열의 순간이란 지속적으로 생멸하는 자아의 확인과 동일하다.  나를 둘러싸고 있는 사회적 맥락에서의 외연에 균열이 생겼을때 그것이 나에게 어떠한 균열을 가져올지는 사람마다 각기 다르겠지만 신경숙 소설속 사람들에게는 대단히 크고 중대한 문제로 다가오게 된다.  그의 작품세계 전반에 흐르는 불안과 내존재에 대한 불확실성.  여기에서 비롯되는 전체적인 우울함과 그것을 표현해내는 문체와 은유.  이 모든 것이 만나는 지점에서 신경숙 특유의 미학이 만들어지게 된다.  이번 신작인 '어디선가 나를 찾는 전화벨이 울리고'에서도 역시 신경숙 특유의 분위기와 무게를 느낄 수 있다. 

이 작품의 특징이라면 4명의 인물에게 나타나는 균열의 원인이 다각적으로 등장한다는 점이다.  소설속에서 핵심을 차지하게 되는 4명의 청춘들 모두에게서 어떤 균열의 순간을 확인할 수 있다.  이러한 균열은 외연이 가지고 있는 다양한 측면으로 표현된다.  사회적 사건에서 가족, 친구에 이르기까지 다양하게 등장한다.  어떠한 외부적 요인에 의하여 충격적으로 다가오게 되는 균열은 그 개인의 자아를 분열시키게 된다.  인간이 가장 안정감을 느끼는 순간은 존재의 확실성이 담보되는 순간이다.  사회 전반이 불안하다는 것은 그 구성원들이 존재의 확실성을 담보 받지 못하기 때문에 생겨나는 현상이고 말이다. 

인간은 수많은 균열의 경험을 통해 지속적으로 생멸하는 자아를 경험하게 된다.  즉 자아는 한번 완성되면 영원히 지속되는 성격의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균열은 자아를 붕괴시키고 상처를 만들게 되고 그 상처의 틈새를 매꾸어냈을때 자아는 새롭게 만들어진다.  그리고 인간은 전생애에 걸쳐 이 과정을 지속적으로 반복한다.  중요한건 최초의 순간이다.  작은 상처가 아닌 내 모든 것을 뒤흔들어놓는 최초의 거대 균열의 경험.  이것은 개인이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외연을 인식하고 그것의 무게와 피할 수 없음을 확인 할 수 있을때 가장 큰 균열이 다가오게 된다.  이때 다가오는 균열은 죽음과 관련이 되는 경우가 많다.  신경숙 작품 전반에서 확인할 수 있는 죽음 말이다.

본 작품에서도 죽음은 대단히 중요한 요소이다.  핵심적 인물들이 가지는 혼란상의 원인은 죽음 그 자체에 존재한다.  다양한 인과를 제시하지만 그 끝에는 죽음이 기다리고 있다.  그 죽음의 경험은 존재의 상실로 나아가게 되고 여기에서 존재가 무너지기 시작한다.  어떻게 여기에서 벗어날 수 있으며 어떻게 해야 이것을 극복하여 멸 이후의 새로운 생으로서의 자아를 확립할 것인가?  이는 일괄적으로 하나의 정답을 말할 수 있는 문제의 것이 아니다.  신경숙 소설 전반에 등장하는 죽음과 그 극복 방법 역시도 다양하게 제시되니 말이다. 

본작에 한정하여 본다면 죽음의 극복 가능성은 바로 제목 "어디선가 나를 찾는 전화벨이 울리고"에서 도출된다.  즉 나 스스로가 한편으론 아이에 불과하지만 또 한편으론 세상의 전체이며 이 세상의 창조자이라는 생각에서 비롯되는 전체로서의 수많은 개인과의 소통 가능성.  바로 여기에서 극복가능성이 제시된다.  그러니 전화벨이 울리는것 아니겠는가?  
극중의 윤미루를 보자.  그녀가 선택한 방식은 옳은 방안이 아니다.  그녀는 자신의 상처를 극복하기 위해 타자를 내면화 하려는 시도를 하게 된다.  그것의 상징이 바로 음식과 치마이다. 

언니에 대한 죄책감에서 시작된 거식증은 훗날 언니의 죽음이 시작되던 그날밤의 음식과 이어지게 된다.  먹음과 그것의 기록으로 나를 확인하고 먹으면 그것에서 벗어날 수 있을것 같지만 삼키지 못하고 토해낸다.  언니는 결국 죽게 되고 그 죄책감으로 치마를 두른채 언니를 내면화한다.  그 치마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은 자신의 상처를 단순히 덮어두는 것에 불과하다.  하지만 윤미루에게서 치마에서 벗어날 수 있는 극복가능성이 잠시 도출되었는데 그 힘은 바로 정윤과의 소통에서 비롯되었다.  창조적인 전체로서의 개인과 소통할때 그녀는 음식을 삼킬 수 있었으니 말이다.  정윤 역시 마찬가지로 자신의 마음을 둘러싸고 있던 검은 도화지를 벗겨냄에 있어서 윤미루와의 소통이 큰 역할을 하게 된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보자.  인간은 자신을 둘러싼 외연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사회가 혼란하다면 그 혼란상속에서 살아야하는 것이고 외연이 어떠한 것을 요구한다면 그것에서 벗어나기가 힘들다.  이것은 마치 너무 어두워 깊이가 보이지 않는 거대한 강과 같다.  우리는 이 강에서 벗어날 수 없다.  외연이 나를 억누른다고 생각하겠지만 그 외연을 밟고 서있는 것도 우리이다.  외연이 나를 만들고 나 역시 외연을 만들게 된다.  외연이란 오랜시절 구성원들의 행위와 생각에 의해서 만들어진 거대한 괴물같은 것이니 말이다.

중요한건 외연에 균열이 생기고 그 균열의 스크래치가 나에게 상처를 입힐때 그 외연의 균열속으로 빠지면 안된다는 점이다.  그 균열의 깊이는 헤아릴 수가 없고 무에 가까운 허무이다.  그곳에 빠져들면 반복되는 생멸하는 자아는 사라지게 되고 의미없는 죽음만이 기다릴뿐이다.  외연의 스크래치가 나를 상처입히더라도 우리가 서있는 공간은 빡빡한 무언가로 꼭 차있는 것이란 것을 직시해야 한다.  그 무언가는 바로 당신이고 당신의 존재의 무게만큼 그 공간을 더욱 크게 채워나가게 된다.  이 모든 존재들과 관계하고 외연의 균열로 발생하는 스크래치를 직시한다면 존재가 향할 수 밖에 없는 죽음과 그것에서 도출되는 공허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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