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체가 말하는 영원회귀와 초인

Posted 2011. 2. 22. 10: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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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체
흔히 니체의 철학은 체계가 없다는 오해를 받곤 한다.  더욱이 그의 저서들은 아포리즘으로 이루어진 경우가 많다보니 그 전체가 잘 보이지 않는 특징이 있으며 그렇다보니 자연스럽게 체계가 없는 사상으로 여겨지는 것이다.  하지만 니체의 철학에도 초기 저작부터 일관되게 인간의 삶의 창조적 측면에 대한 맥락을 확인할 수 있으며 이러한 니체의 핵심적 사고관은 현대 철학 대부분의 사조에게 큰 영향을 끼치게 된다.  니체가 이야기하는 핵심적 주제는 규범과 도덕으로 대변되는 가치 체계에 대한 의문이다.  이러한 의문은 ‘신의 죽음’이라는 유명한 문구를 통해서도 확인이 되는데 도덕, 규범, 종교 따위로 대변되는 일련의 가치 체계는 인간의 삶을 억압하게 되며 그로 인해 인간은 스스로 창조적인 삶을 살아가기보다는 되려 규범에 맞춰 살아가는 수동적인 면모를 보인다고 말한다.  일정한 사회를 지배하는 가치 체계는 그 사회가 위치한 역사적 맥락 속에서 해석된 무엇에 다름이 없다.  따라서 니체는 스스로 가치를 창조하고 긍정의 존재 양식으로서의 삶을 영유하는 위번멘쉬의 삶을 주장하게 된다.


비극의 탄생
니체의 초기 저서인 비극의 탄생은 그의 철학의 일정한 방향을 보여주는 저서로서 굉장히 중요한 위치를 점하게 된다.  이 저서에서 니체는 그리스 비극에 대해서 관심을 보이며 비극에 대해서 논하게 된다.  비극의 탄생은 다음과 같은 서두로서 이야기를 시작한다.  “예술의 발전은 아폴론적인 것과 디오니소스적인 것의 이중성과 결부되어 있다 ”  여기에서 도출되는 아폴론적인 것과 디오니소스적인 것의 개념은 각 신들의 성격에서 찾아볼 수 있다.  아폴론은 그리스 12신의 하나로서 태양과 지혜, 이성 등을 관장하는 역할을 한다.  상당히 많은 분야를 다양한 이름의 신으로 불리지만 한가지 확실한 정초점은 이성과 합리성이라는 점이다.  즉 감정에 휘둘리지 않는 이성 위주의 신으로서 조화와 균형의 미, 주관보다는 객관의 중시, 조각, 회화 건축 등의 조형예술을 표현한다.  결국 아폴론은 이성, 절도, 질서, 균형, 법률, 도덕, 미 따위로 상징되는 특징을 보여주는 것이다.  반면 디오니소스는 널리 알려진 로마의 바쿠스 신의 원형으로 술과 황홀경의 신으로 불리며 소아시아에서 그리스로 전파된 신이다.  소아시아에서 이루어진 디오니소스 숭배는 카니발의 원형적 모습을 보여준다.  야간 집회의 형태로 숭배 제의가 이루어지면 술에 취한채 짐승이나 사람을 먹고 난교를 행하는 등의 양상을 드러낸다.  이러한 집회는 신과의 일치 그리고 인간과 짐승을 산채로 먹음으로써 그 생명의 힘을 얻는다는 사고관에서 비롯한다.  따라서 디오니소스는 어둠과 심연, 무질서, 근원적 생명력, 술, 혼연일체로서의 도취 및 황홀경 등으로 상징된다.

아폴론과 디오니소스는 꿈에 대한 충동과 도취에 대한 충동으로 대비되기도 한다.  우리는 흔히 꿈 속에서 완전한 나의 모습을 확인하곤 한다.  굉장히 아름다우면서 완벽에 가까운 신의 형상을 확인 할 수 있으며 이는 균형과 조화 그리고 형식과 도덕적인 양상을 보여주게 된다.  그렇기에 꿈속에서 확인하는 그것은 가상이지만 아름다운 가상으로 이러한 꿈은 큰 즐거움과 쾌감을 던져주게 되며 이것이 바로 꿈에 대한 충동이다.  반면 도취에의 충동은 아폴론적인 것에서 확인된 아름답고 균형잡힌 개별화를 완전히 무너뜨린채 황홀경과 도취, 어둠과 심연에 빠진채 근원적 동일성으로 돌아가려는 양상을 의미한다.  이는 영화 매트릭스2의 한장면을 연상케 한다.  시온의 건재함을 외치면서 지하 동굴속에서 원시적인 타악기만을 이용해 만들어내는 강한 비트와 반복되는 리듬 속에 놓여진 군중들은 동시에 황홀경에 빠지게 된다.  그리고 그들은 완전한 자기 망각으로 빠져들게 되고 이때의 인간은 개별성이 철저히 무너진채 완전히 하나가 되는 무아지경에 빠지게 된다.  시온의 모든 사람들과 자신들을 둘러싼 모든 만물과 하나되는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디오니소스적 충동이라는 것은 굉장히 잔인하고 난교를 일삼는 등 광폭한 측면이 다분하며, 이러한 광폭한 측면으로 인해 문화가 형성해온 가치들이 철저하게 무너지는 문제점 역시 발생하기 마련이다.  하지만 그리스인들은 이러한 디오니소스적 충동을 적절히 제어하는데 성공하게 되는바 니체는 그 원인을 아폴론적인 것에서 찾게 된다.  즉 디오니소스적 충동을 아폴론적인 이성과 형식을 통해서 제한하는 것이다.  이에 그리스인들이 행했던 디오니소스 축제는 소아시아의 제의와 다른 성격을 가지게 된다.  즉 광란과 황홀경에 빠지는 춤과 음악 대신 3대 비극 작가들을 통한 합창이나 공연을 통해 그 광기를 제한하게 된다.  이러한 측면에서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아포론적인 것과 디오니소스 적인 것은 대립되고 적대적인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결국 이 둘은 삶의 양 축으로써 조화가 중요해지며 이러한 조화적 결합을 극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예술이 바로 그리스 비극인 것이다.  결국 비극은 아폴론적인 것과 디오니소스적인 것, 즉 형식적 표현을 창조하는 힘과 그 내용을 창조하는 힘으로 구성되며 아폴론적인 것은 서사나 연기 등으로 디오니소스적인 것은 음악 특히 합창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이러한 그리스의 위대한 비극은 몰락의 길을 걷게 되는데 니체는 이를 에우리피데스와 소크라테스, 소포클레스를 통해서 확인한다.  먼저 에우리피데스의 경우는 합리성과 아이러니 그리고 사실성의 강조를 통해 비극의 형식 전반을 크게 변화시키게 되며 특히 데우스 엑스 마키나를 사용하는 극적인 방법론을 통해 비극 자체의 역동성을 이끌어내게 된다.  하지만 이러한 방법론은 디오니소스적 충동과 결별을 하게 되는 한계를 보여주게 된다.  더욱이 소크라테스는 철학적 변증론을 통해 예술 전반을 논리적으로 재구성해나가게 되어 그리스 비극은 점차 합리성과 도덕적 판단아래에 놓이게 된다.  이러한 양상은 소포클레스에 의해 극적으로 전개되는데 소포클레스는 비극의 핵심적 요소인 합창을 기존과는 다르게 의미적으로 축소시켜 합창이 가지는 디오니소스적 측면을 약화시키게 된다.  결국 그리스 비극은 디오니소스적 측면이 약화되고 비판적 이성의 측면이 강화되어 인물에 대한 묘사, 극적 전개 방식 따위가 발전하게 되며, 예술은 철저하게 철학적이고 논리적인 방법론을 통해 보편성을 획득해야하는 무엇이 되어 버린다.

니체는 합리성과 도덕 그리고 기독교를 동일한 범주에 포함시켜 이것을 삶을 부정하려는 의지로 생각하며 디오니소스적 삶의 회복을 강조하게 되며 19세기에 극단적으로 이론화 형식화된 삶을 극복하기 위해 그리스 비극을 재조명하게 되고 삶 자체를 제시하고자 시도한다.  비극의 본질은 디오니소스적인 것이다.  이때의 디오니소스적인 것은 아폴론적인 것을 이미 내포하고 있으며 본질적 삶의 근원은 디오니소스적 힘에서 찾을 수 있는바 이것이 바로 삶의 의지이다.  이론적 • 형식적 인간은 기계의 신 즉 데우스 엑스 마키나(Deus ex machina)에 종속되어 있는 교육 및 체계에 의해 이상을 실현하고자 한다.  따라서 이를 극복하기 위해 이론적 형식적 인간을 부정하고 비극의 본질을 찾게 된다.  이러한 니체의 비극에 대한 생각은 개념화 이전의 것으로서 비극이 담고 있는 음악과 춤은 디오니소스적 측면을 극적으로 강조하면서 그 앞에서 개념과 도덕은 사라진다.  비극은 개념도 삶의 옳바른 목적의 설정도 아닌 인간 삶 그 자체의 긍정적 재창조를 위한 생성의 힘인 것이다.


주인 도덕과 노예 도덕
니체는 도덕의 계보와 선악의 저편을 통해 도덕 관념과 그 가치에 대한 비판을 착수한다.  이른바 모든 가치의 전도라는 작업의 착수인 것이다.  사실 서구의 역사속에서 지속적으로 형성되는 절대적 도덕에 대한 관념은 굉장히 허구적일 수 밖에 없다.  그 첫번째 이유로 절대적 도덕성이라는 것이 과연 가능한가? 에 대한 의문이다.  니체에 의하면 도덕이란 상대주의적 한계를 보일 수 밖에 없다.  즉 절대적 도덕의 상정을 통해 그 사회 구성원의 행위를 제한하여 질서를 유지하려는 일련의 시도는 각 사회마다 조금씩 다르게 나타날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더욱이 특정한 절대적 도덕성의 상정은 자연스럽게 우리의 일상적이고 다변적인 삶 그 자체가 외면당하는 양상을 가져오게 된다.  두번째로는 절대적인 도덕성은 그리스도교와 결합하면서 인간의 본연적 자연성을 왜곡하는 현상을 불러오게 된다.  즉 비극의 탄생에서 살펴보았던 인간의 디오니소스적인 측면이 철저하게 외면당한채 모든 욕망을 거부하는 금욕주의적인 태도를 옳바른 것으로 바라보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측면을 통해 도덕은 굉장히 허구적일 수 밖에 없으며 되려 그것을 지속적으로 강요하는 것은 타인에 대한 폭력에 다름이 없다.  결국 도덕은 사회 구성원을 지배하고 길들이기 위한 수단에 불과하게 된다.

이는 주인 도덕과 노예 도덕이라는 측면을 통해 다시금 확인할 수 있다.  선악의 저편, 고귀함이란 무엇인가? 에서 “인간이라는 유형을 향상시키는 모든 일은 지금까지 귀족적인 사회의 일이었다”라는 문장으로 서두를 연다.  이 장을 통해 확인할 수 있는 것은 귀족적 사회가 가지는 가치이다.  귀족적인 사회는 고귀한 인간이 도덕 즉 나약한 인간들이 형성한 가치 체계를 극복할 것을 끊임없이 요구하며 그러한 극복을 위해 거리의 파토스를 요구하게 된다.  즉 저급한 인간들은 다양한 도덕적 가치 예컨대 민주주의, 기독교 따위의 가치 체계를 통해 차이를 줄이려고 애쓰지만 고귀한 인간은 되려 거리의 파토스를 통해 차이를 확대하려 한다.  고귀한 인간은 오로지 자신만을 긍정할 뿐이다.  자신을 지배할 수 있고 자신에 대해 준엄하고 엄격하며 저급한 인간이 만들어낸 관습이나 규범에 상관없이 스스로 가치를 결정하는 자이다.  고귀한 인간은 스스로를 긍정하고 스스로를 이끌어나갈 가치를 창조하는 자로서 끊임 없는 스스로의 긍정을 통해 지속적으로 거리의 파토스를 늘려나가게 된다.

하지만 저급한 인간들은 수동적으로 가치체계에 종속되는 인간이다.  자신의 삶의 방향을 결정할 수 있고 스스로를 이끌어나갈 가치를 창조할 수도 없는 자이다.  이에 그들은 끊임 없이 도덕 체계가 옳바르고 선하다고 여기는 가치들 예컨대 겸손, 인내, 성실 따위를 체화하지만 이는 결국 또 다른 폭력에 다름이 아니다.  즉 그들이 내세우는 도덕적 가치 체계를 통해 거리의 파토스가 없는 차이를 줄인 평등한 세계를 완성한다 하더라도 그 과정속에서 타인에게 가치 체계를 강요할테니 말이다.  저급한 인간들이 만든 가치체계는 자신을 체계 뒤에 숨긴채 저급한 자신보존에 집착하고 스스로 삶을 정초하고 창조할 수 없는 나약한 인간들의 노예의 도덕일 뿐이다.  더욱이 이러한 도덕 체계의 강요는 고귀한 인간에게 질투와 원한에 다름이 없다.  저급한 인간이 가지고 있는 무능함은 자신들이 내세운 도덕체계의 관점하에서 끊임 없이 고귀한 인간들을 비판하고 탄압하려 든다.  이는 그들이 내세운 이원론적 관점에 입각하여 도덕 체계내의 행위는 선이고 그 밖에 서있는 고귀한 인간들은 악으로 개념지은 이후 고귀한 인간들에 대항하여 자신들의 선함을 강조한다.  저급한 인간은 지나친 평등을 강조하기도 한다.  하지만 니체에 의하면 이 또한 부당한 권리의 주장일 뿐이다.  즉 평등이라는 것은 하나의 보편적 법칙을 통해서 각각에게 주어진 권리의 측면을 가지는데 니체는 이러한 관점은 잘못된 것이며 되려 권리는 각각의 인간이 스스로 정초한 존재방식에 의해서 규정되기에 저런식의 평등한 권리라는 개념은 저급한 인간들이 주장하는 저열한 인간상에 불과한 것이 된다.


허무주의
흔히 니힐리즘이라고 불리는 허무주의는 기존의 가치 체계와 거기에서 비롯한 진리의 상실을 의미하며 니체는 이런 허무주의가 19세기에 만연하고 있다고 파악한다.  그렇다면 이러한 허무주의의 원인은 무엇이 있을까?  그것은 기존의 최고 가치 체계의 붕괴와 상실에서 비롯된다.  “최고가치의 탈가치”라고 볼 수 있는 이 현상은 니체에 의해 시도되었던 최고 가치라 여겨진 도덕 체계에 대한 가치 전복적 폭로 즉 오랫시간 동안 진리라고 생각해왔던 것들이 알고보니 착각에 불과했다는 폭로에서 시작된다.  그렇다면 기존의 최고 가치들이란 무엇일까?  여러가지를 들 수 있겠지만 핵심은 도덕과 기독교 체계라고 볼 수 있다.  도덕이란 위에서 살펴보았듯 저급한 인간이 만들어낸 자기보존의 가치 체계이다.  그리고 저급한 인간은 이러한 가치 체계에 종속된채 도덕적이라 칭해지는 다양한 개념 예컨대 선, 정의, 공평 따위를 가슴에 간진한채 거기에서 또 다른 실천성을 이끌어내게 된다.  결국 저급한 인간이 말하는 도덕적 삶이란 허구적 가치를 최고 가치로 내세운채 거기에서 실천성을 이끌어낸 수동적 삶에 불과한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최고가치로서의 도덕이 무너지고 그 진리성이 의심받기 시작하면 최고가치를 기반으로 한 다른 가치들이 무너지기 시작한다.  이는 거대한 상실이자 끝없는 무의미함의 시작이 되는 것이고 이러한 측면이 허무주의의 한 요소가 된다.  

또 한편으론 그리스도교의 몰락도 허무주의의 중요한 원인이 된다.  그리스도교의 몰락은 최고가치로서의 도덕의 몰락과 동전의 양면을 이루게 된다.  니체는 기독교를 “대중을 위한 플라톤주의”라고 부를만큼 기독교는 형이상학적 이분법에 입각한 종교으로 니체가 선언한 신의 죽음은 형이상학적 세계관의 붕괴와 이를 원인으로 한 이분법적 세계관의 붕괴를 의미한다.  이러한 기독교의 몰락은 그 자체적으로 이미 내포한 발아에서 비롯되는 현상으로, 예수가 말한 진정한 의미의 가르침이 왜곡되면서 필연적으로 다가올 수 밖에 없는 허무적 상황이다.  그렇다면 예수의 가르침의 핵심은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사랑을 통한 구원으로 이는 유대교적인 원한과 비교했을때 극명하게 다가온다.  유대교가 가지는 원시적 응보의 개념은 종교가 점차 발전하면서 세련된 형태의 도덕 체계 내의 죄의식의 형태로 나아가게 된다.  이러한 죄의식은 기독교 종교의 이원론적 세계관 하에서 현세상의 고통을 합리화하는데 사용된다.  즉 현세의 고통은 기독교적 도덕이 말하는 그 체계에 따르지 않음에서 오는 현상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현세의 고통을 보상받는 방법은 신이 말하는 도덕 체계를 충실히 따르는 것이며 그로 인해 내세 즉 천국의 삶은 보장된다.  

하지만 예수는 이러한 죄의 개념을 통해 인간을 구원하려고 하지 않고 평화와 사랑 그리고 인간을 차별하지 않는 것을 통해 구원을 말하게 된다.  그리고 이러한 예수에 의해 제시된 구원은 사랑과 평화의 지속적인 실천에서 이루어지며 이러한 실천에 의해 천국이 아닌 현실 세계에서 이미 천국이 이루어진다는 사고관이다.  결국 누구든 사랑을 실천한다면 신의 자식이 되는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기독교는 예수의 죽음 이후 유대주의, 플라톤주의, 신비주의, 금욕주의라는 네가지 요소가 결합하여 심각하게 왜곡되어 버린다.  이에 점차 예수의 가르침의 핵심인 사랑과 평화 그리고 그것의 실천을 통한 즉각적인 천국의 경험은 사라진채 왜곡된 형태의 기독교 도덕 체계만이 그 자리를 대신하게 된다.  이러한 기독교의 몰락은 19세기 당시의 유럽철학이 보여주는 현상 즉 철학적 진리성에 대한 의심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즉 저급한 노예의 인간이 형성한 형이상학적 편견에 기초한 철학으로부터 절대적 기독교적 도덕성을 불러오게 되지만 이러한 도덕 체계는 고귀한 인간의 실재적 삶과 매우 적대적인 양상을 보이게 된다. 

 허무주의는 크게보아 불완전한 허무주의와 완전한 허무주의로 나누어 볼 수 있다.  불완전한 허무주의는 “최고 가치의 탈가치” 현상으로 인한 것으로 가치 전복의 상태에서 새로운 가치로 전환을 할 수 없는 상태를 말한다.  이러한 불완전한 허무주의는 다시 능동적 허무주의와 수동적 허무주의로 나뉘게 된다.  능동적 허무주의는 “상승된 정신력의 징후”이다.  즉 새로운 가치에 대한 창조와 구성의 힘이 상승하는 정신력의 모습인 것이다.  하지만 상승하는 정신력은 기존 가치에서 벗어나는데는 성공하게 하지만 새로운 가치의 창조로 나아가지는 못하는 한계를 보여준다.  수동적 허무주의는 “정신력의 하강과 퇴행”으로서의 허무주의로서 기존에 존재하던 도덕적 가치 체계에 대해 실망하고 믿음을 잃게 되지만 거기에서 머문채 새로운 가치를 창조할 수 없는 정신력의 하강이자 퇴행적 상태를 말한다.  따라서 불완전한 허무주의는 새로운 가치를 설정하지 못하는 한계를 보여준다.  

반면 완전한 허무주의는 새로운 가치를 설정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는 허무주의이다.  이때 허무주의에서는 절대적 퇴행의 가능성과 새로운 가치 설정을 통한 허무주의의 극복의 가능성이 동시에 제시된다.  즉 니체는 허무주의를 끝까지 밀어붙여 완전한 허무주의적 상황 속에서 인간은 실존적 결단을 통해 완전히 몰락하던지 아니면 허무주의를 극복하던지 양자 택일의 상황을 제시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허무주의를 극복할 수 있는 인간, 스스로 의식을 변화시켜 스스로 가치를 설정할 수 있는 자를 두고 위버멘쉬라고 칭하게 된다.


영원회귀와 위버멘쉬
기존의 절대적 가치관에 대한 본질적 통찰을 통해 발생하는 허무주의적 성향은 영원회귀하는 특징을 가지게 된다.  모든 기존 가치의 부정에서 발생하는 허무의 상태에서 또 다른 가치가 탄생한다고 한들 그 가치는 결국 그 필연적 귀결에 의해 다시금 반복될 수 밖에 없다.  이러한 영원회귀적 허무주의는 크게 두가지 양상으로 우리에게 다가올 수 있다.  첫째는 극단적인 허무주의로서 영원회귀하는 허무의 반복에서 우리는 벗어날 수도 없고 도망갈 수도 없는 결코 멈추지 않는 무의미의 연속이라는 측면이다.  이는 영원회귀의 최악의 국면만 생각한 것이다.  하지만 반대로 생각해본다면 절대적 절망이 아닌 절대적 긍정의 상태도 우리는 상정할 수 있는바 바로 여기에서 허무주의 극복 가능성이 제시된다.  즉 허무의 중심에서 어떻게 살아갈 것인지를 스스로 실존적으로 결단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때의 결단은 크게 두가지 양상으로 나뉘어 바라볼 수 있다.  

첫째는 절대적 무의미성 안에서 스스로 몰락의 길을 걷는 방법이다.  새로운 가치를 정초하지도 못한채 영원회귀되는 삶 속에서 스스로 몰락하는 결단을 행하는 사람들에게 영원회귀는 영원한 저주일 수 밖에 없다.  무한히 반복되는 양상 속에서 스스로를 영원히 약자로 만든 허무적 존재로의 몰락이다.  이러한 자들을 두고 니체는 종말인이라고 부르게 된다.  종말인은 저급한 인간의 전형으로 도덕체계를 깊이 받아들여 타인으로 하여금 자신에게 관용을 베풀고 도덕 체계가 요구하는 선한 행위를 자신에게 행해주기를 바란다.  또한 종말인은 지속적인 자기극복이 아닌 자기 보존을 욕망하는 자이면서 도덕이 추구하는 평등한 삶을 욕망하는 자이기도 하다.  

둘째로 이러한 종말인과는 반대로 영원회귀의 상황을 놓고 자신의 삶에 최대의 의미를 부여하여 스스로 최고 긍정의 길을 걸을 수도 있다.  스스로를 가치 설정자로서 변화시켜 영원회귀 하는 상황 속에서도 가치와 의미를 충만하게 하여 그 상황이 저주가 아닌 축복으로 거듭나게 하는 것이다.  이러한 방식으로 허무주의를 극복한 자를 위버멘쉬(초인)라 부르게 된다.  위버멘쉬는 자기극복적 삶을 영위하는 인간이자 힘에의 의지를 기본으로 하여 상황을 스스로 구성하는 존재이다.  노예 도덕으로서의 기독교 도덕을 부인하고 끊임 없이 창조하며 결단하는 의지를 통해 삶을 결단하는 존재이기도 하다.  결국 위버멘쉬는 고귀한 인간으로 스스로에게 명령하는 자이자 디오니소스적인 측면을 향유하는 자이면서 주인 도덕의 지배자이다.  이러한 위버멘시는 어떤 궁극적인 목표로서 설정되지는 않는다.  오로지 지속적인 가치 설정을 통한 최고 긍정으로서 과정으로서의 측면을 가지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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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생각하는 돼지

    | 2011.02.27 07:00 신고 | PERMALINK | EDIT | REPLY |

    니체는 서양에서도 제대로 평가를 받지 못한다라고 하더군요...
    오늘도 좋은 글 잘 읽고 갑니다~
    즐거운 하루 되세요~~~

  2. 안용태의 유쾌한 인문학

    | 2011.03.01 01:16 신고 | PERMALINK | EDIT |

    에이 그렇진 않아요.

  3. | 2011.02.27 07:04 | PERMALINK | EDIT | REPLY |

    비밀댓글입니다

  4. 안용태의 유쾌한 인문학

    | 2011.03.01 01:16 신고 | PERMALINK | EDIT |

    니체의 가장 포인트 되는 부분만 아주 요약해서..ㅎㅎㅎ

  5. | 2011.02.27 09:24 | PERMALINK | EDIT | REPLY |

    비밀댓글입니다

  6. 안용태의 유쾌한 인문학

    | 2011.03.01 01:16 신고 | PERMALINK | EDIT |

    제가 가끔 붙이는걸 까먹어요.ㅋㅋㅋㅋ

  7. | 2011.02.27 14:56 | PERMALINK | EDIT | REPLY |

    비밀댓글입니다

  8. 안용태의 유쾌한 인문학

    | 2011.03.01 01:16 신고 | PERMALINK | EDIT |

    저도 비ㅏ와서 방콕했어요.ㅎㅎㅎ

  9. 주리니

    | 2011.02.27 18:15 | PERMALINK | EDIT | REPLY |

    음...
    한참을 심각하게 생각하며 읽었습니다.
    이리는 생각을 못해봤기에
    한참을 더듬거리며 생각한 듯 합니다.

  10. 안용태의 유쾌한 인문학

    | 2011.03.01 01:17 신고 | PERMALINK | EDIT |

    이건 그냥 니체 사상의 정수를 요약해놓은것이랍니다

  11. 최종림

    | 2011.02.28 02:27 | PERMALINK | EDIT | REPLY |

    오래만에 좋은 글 잘 앍고 갑니다.
    철학도..감사.

  12. 안용태의 유쾌한 인문학

    | 2011.03.01 01:17 신고 | PERMALINK | EDIT |

    네네

  13. 길빛

    | 2011.03.04 16:56 | PERMALINK | EDIT | REPLY |

    전 니체를 가까이 하는 것이
    시간이 좀 느릿하게 걸려요..
    마음도 아프고 아주 천천히 읽게
    만들고 화도 나게하고 그래요.
    이런 사람 첨이네요.

  14. 귀차니즘

    | 2011.05.09 19:15 | PERMALINK | EDIT | REPLY |

    글쎄요.. 차라투스트라에 보면 '말종인간'을 별개로 제시해놓고 몰락하는 자를 오히려 초인이라고 보지 않았나요? 기존의 체계를 버리고 스스로 몰락하는 자를 허무를 극복한 것이라고 보는 것이지요. 맨 처음에 줄타기 광대이야기에서 말입니다.

  15. 한수임

    | 2011.06.18 09:07 | PERMALINK | EDIT | REPLY |

    니체의사상은처음접해봅니다만..
    현대에와서는기독교적인절대적사상말고도또다른가치들이나타남에따라
    허무주의는단지기독교적사상의로부터의허무가아닌
    다른많은것들로부터의허무주의로다시나타나고있을수도있다는생각이듭니다.말씀하신초인과종말인부분은공감을했습니다.문제는현대사회에서는개개인의가치가절대적인가치를넘어서고있고 개개인의가치에서허무주의가나타났을때는그혼란속에서오히려반대로절대적인가치를찾게될수도있다고생각합니다.다양한가치를아루를수있는절대적가치를요.
    그게뭐가될수있을까요?..
    흥미로은노트 감사합니다.

  16. | 2013.05.09 22:08 | PERMALINK | EDIT |

    니체에의하면 행복이나 가치는 스스로 찾아야 한다고 했습니다..

    스스로 가려는 길이 맞는지 틀리는 지 그 길에게 물어보라고..

    니체는 철저하게 관점주의를 주장했지만.. 이것이 단지.. 내 생각만 옳다라는 측면보다는... 관점주의이기 때문에.. 다른 사람 생각이 나와 다를 수도 있다는 것을 먼저 인정하고 들어가는 측면이 강합니다.

    그럼으로써.. 보다 더 많은 관점/현상을 설명할 수 있는 적합한 그리고 포괄적인 관점을 가지도록 노력하는 것.. 그것이 좋은 것이라고 생각했지요..

    즉.. 자기 정체성을 잃지 않으면서... 다른 사람들의 관점을 이해하고 포용하고.. 점점 자신의 역량을 넓혀가는 것..

    이것이 니체가 생각한 바람직한 인간상이라고 이해하고 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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