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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이 분다(2013), 악의 평범성과 채워질 수 없는 욕망의 끝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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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이 분다(2013), 악의 평범성과 채워질 수 없는 욕망의 끝

유쾌한 인문학 2013. 9. 8. 21: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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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이 분다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의 오랜만의 신작이다.  내 기억으론 이양반 최근엔 작품낼때마다 은퇴선언 했던 것 같은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 돌아온다.  이번에도 은퇴선언했지만 알게 뭔가.   돌아오지 않을까?   개봉 전부터 말이 많았던 작품이다.  일본 제로 전투기의 설계자를 주인공으로 내세웠기 때문이다.   일단은 실존인물에 대해선 생략한채 작품에만 집중해보겠다.



악의 평범성

이 작품은  일본의 정치 구조 그 자체를 언급하진 않는다.  마치 그것들은 호리코시 지로를 위한 풍경같은 느낌이다.  영화 초반에 하울의 움직이는 성에 나오는 괴물 마법사같은 폭탄을 드러내긴 하지만 이러한 비판 역시 풍경에 불과하다.  즉 철저하게 호리코시 지로의 개인적 일대기에 집중한 작품인 것이다.  우리는 흔히 이런 생각을 가지곤한다.  "나는 한민족이다.  따라서 국가가 위기에 처하면 들불처럼 일어나 모두가 저항할 것이다."  하지만 정말 그럴까?  우리는 흔히 피라미드와 같은 권력 체계에 사로잡힌채 최고점에 있는 권력에 모두가 복종하는 그런 모습을 상상하곤 한다.  하지만 요즘은 이런식의 권력체계론을 받아들이진 않는다.  흔히 권력은 한점에 집중되어 그 집중된 권력이 피억압자를 억압하는 것으로 생각하지만 도리어 권력은 한점에 집중되어 있다기보다는 사회전체의 그물망속에 분유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즉 개개인은 권력에 의해 억압받는 자이자 권력을 적극적으로 행사하는 자라는 것이다.

미야자키 하야오는 기본적으로 이러한 생각을 전제로 한채 이 작품을 만든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이러한 관점의 장점은 각 개인의 삶을 왜곡없이 바라볼 수 있다는 것이다.  피라미드식의 권력관계를 생각한다면 지로는 철저하게 일왕에게 충성을 맹세한채 비행기 제작에 몰두했을거라 생각하겠지만 사실 이는 굉장히 독단적인 생각이다.  인간의 마음이 그토록 순수한 정치적 목적에 사로잡힐 수도 없거니와 오히려 인간은 지독할 정도로 이기적인 존재로서 그 상황속에서 그 상황에 맞게끔 행동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문제는 극중 지로가 스스로 말하듯 자신 역시 근대인이라는 점이다.  그는 근대 일본에서 자신의 꿈만을 위해 살아온 인물이다.  그가 꿈을 이루기 위해서는 학교에 가야하고 졸업도 해야 하며 심지어 미쯔비시에 취직도 해야만 한다.  미쯔비시가 어떤 기업인지 그 기업이 자신들의 이윤을 위해서 어떠한 짓을 했는지 극중 지로는 전혀 알지 못하고 관심도 가지지 않는다.  어떤면에서 보면 자신의 역할에 충실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는 비행기를 꿈꿨고 최선을 다해 열심히 일했으며 결국 성취했다.  

권력관계는 피라미드식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실제로 극점으로서의 권력을 지칭한다면 지로를 체포하기 위해 비밀수사국에서 사람들이 나올 이유도 없다.  그는 최선을 다해 비행기를 만들고 있으니 말이다.  중요한 것은 그물망 속에 분유된 것이 권력관계이다.  개개인은 한편으론 억압받는자이지만 다른 한편으론 적극적으로 권력을 행사하는 자가 된다.  우리는 여기서 후자에 집중해볼 필요가 있다.  극점으로서의 권력이 없다한다들 거대한 권력의 흐름은 분명히 확인할 수 있다.  제국주의라는 거대한 흐름 속에서 각각의 부품들은 자신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한다.  강한 정치성을 드러내지 않았다 한들 그리고 겉으로 전쟁이 파멸로 나아갈 것이라 생각했다 한들 각자는 역할에 충실했고 결과는 대학살이다.  이를 두고 한나 아렌트는 악의 평범성(라울 힐베르크의 저서에서는 악의 일상성이라 말한다)이라고 말한다.  즉 평범한 사람들이 자신의 꿈을 쫓는 과정에서 일어날 수 있는 문제인 것이다.  지로는 아이히만 같은 사람일지도 모르겠다.  그냥 보면 평범한 사랑하는 여인이 있고 이루고 싶은 꿈이 있던 한 남자에 불과하지만 결론은 대전쟁에 기여한 것이 되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하여 그에게 면죄부를 던질 수는 없다.  그는 자신의 욕망에 충실한채 일을 한 그 모든 것들은  역시 하나의 권력관계이며 더욱이 그는 자신이 만드는 물건이 무엇에 쓰이는지 정확히 안채 만들었으니 말이다.  지로는 스스로 파멸할 수 밖에 없는 운명을 너무 잘알고 있다.  이는 극중 어느 독일인과의 대화에서도 지속적으로 확인되는 바이다.  따라서 그는 용서받을 수 없는 개인이다.  사실 지로와 같은 인간상은 현대에서도 흔하게 찾아볼 수 있다.  어느 비리를 저지른 정치인, 살인을 저지른 사람, 도둑질을 한 사람   이 모두는 그 악에서 살짝 빗겨나본다면 그냥 평범한 사람들이다.  강간을 행하는 사람은 평범한 누군가의 아버지였고 친절한 이웃이었다.  그렇다고 그를 평범하다하여 용서할 수 있겠는가?   극중 미쓰비시 회사 역시 미쓰비시라는 이름만 없다면 그냥 비행기에 대한 열정으로 똘똘뭉친 평범한 회사에 불과하다.  하지만 그 평범한 악이 뭉쳤을때 어떠한 현상이 벌어지는지는 우리는 너무나도 잘 알고 있다.



채워질 수 없는 욕망의 끝

지로는 자신의 행위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잘 알고 있지만 평범성을 덮어쓴채 끝까지 행한다.  지로는 자신의 꿈 속에서 이탈리아 설계사를 만난다.  그와의 대화 속에서 자신이 꿈꾸는 비행기에 대해서 이야기하지만 그 비행기는 모호하다.  그냥 아름다운 비행기를 꿈꾼다면서 두리뭉실하게 넘어가는 것이다.  그럼 그가 꿈꾸는 아름다운 비행기는 무엇일까?   보통 우리는 일상속에서 행복한 삶을 꿈꾸는데 그 행복한 삶이란 도대체 무엇일까?  무엇을 많이 가지면 행복한 삶이 나타나는 것일까?  뭔지 알 수 없지만 추상적인 가치를 쫓기만 하면 행복해지는 것일까?  아니 근본적으로 그게 가능이나 한 것일까?  지로에게 있어 아름다움이라는 단어는 전투기와 동일시되는 것일까?  그의 꿈은 꿈 속에서 끊없이 추락한다.  비행을 통해 궁극적 가치를 강조해왔던 하야오의 과거 작품과 비교해본다면 충격적일 정도의 추락이다.  지로는 추락할 것을 알지만 추상적으로 표현되는 아름다운 꿈이라는 미명아래에 자신을 정당화한채 그길을 끝없이 나아간다.  구체성을 띄지 않는 추상적인 말들의 향연은 자신을 정당화시켜주는 첫번째 요소이다.

지로의 정당성을 충족시켜주는 두번째 요소는 그의 연인인 나호코이다.  극의 후반에 이르면 영화 초중반에 지속적으로 나왔던 풍경같은 전쟁장면은 거의 사라진채 나호코와의 로맨스에 집중하게 된다.  젊은 시절의 지로를 그려낼때는 전쟁에 대한 최소한의 인식을 꿈속의 추락과 풍경을 통해서 드러내지만 전투기 설계 팀장이 된 이후에는 오직 나호코와의 사랑 그리고 아름다운 녹색의 풍경만이 펄쳐진다.  이는 지로가 나호코에게 도망치면서 만들어낸 하나의 정당화이자 애써 외면해버린 왜곡되고 포장된 양심이다.  나호코는 자신이 사랑하는 남자가 무엇을 하는 사람인지 알고 있지만 일하는 모습이 아름답고 말하며 지로에게 정당성을 부여한다.  나호코가 산에서 내려와 죽음을 무릎쓰고 지로와 신혼생활을 하는 것을 통해 결코 채워질 수 없는 욕망과 그 끝에서 기다리는 파멸을 확인할 수 있다.  결국 제로 전투기가 하늘 높이 날아오르는 그 순간 나호코는 죽게 된다.  자신이 가장 사랑하는 연인에게 최고의 정당성을 부여한채 추락한 것이다.  지로는 자신이 원했던 최고의 욕망이 충족되는 순간 또 다른 추락을 통해 결핍을 안게 된다.  그의 욕망은 영원히 채워질 수 없는 공허한 것에 불과하다.  하지만 그 결과는 대학살이다.



미야자키 하야오는 자연수호의 의지와 제국주의를 경멸하는 작품을 수도없이 내놓았었다.  특히 붉은 돼지와 하울의 움직이는 성은 제국주의 비판의 선두에 서는 작품으로 보아도 무방하다.  이 두 작품의 특징은 그 어떤 국가성 민족성도 드러내지 않는다는 점이다.  붉은 돼지는 배경을 통해 이탈리아 파시즘을 은근히 지칭하기도 하지만 하울 같은 경우는 커다란 두 제국의 전쟁으로만 표현될뿐 실질적인 국가를 가리키진 않는다.  더욱이 돼지에서 하울에 이르기까지 전형적인 아나키스트적인 면모를 보여준다.  즉 인간은 인간일뿐이며 그 어떤 집단으로도 묶어낼 수 없다는 점을 강조한 것이다.  극의 마지막 어쩌면 제로 비행기가 돌아오지 못한채 하늘로 날아오르는 장면은 붉은 돼지에서 포르코 룻소의 꿈과 비슷하다.  그는 지로에게서 프로코 룻소의 모습을 본 것일까?  사실 그런 느낌이 없잖아 있다.  하지만 그렇게 바라보기엔 포르코 룻소와 지로는 너무나도 다르다.  포르코는 파시스트가 싫어 돼지가 되어버린 인물이지만 지로는 꿈이라는 이름아래에 일본 제국주의에 헌신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하야오 작품 세계의 핵심적 주제의식은 이성과 합리성에 대한 지나친 믿음의 경계이다.  이성이 모든 것을 해결해줄 수 없으며 합리적인 것이 우리 모두를 행복하게 만들어주지 않는다.  그는 도리어 비합리적인 것들을 통해서 삶의 복권을 주장하였다.  그것이 잘드러나는 작품이 이웃집 토토로,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 천공의 성 라퓨타 등이다.  라울 힐베르크는  홀로코스트 유럽유대인의 파괴를 통해 파괴기계와 파괴과정이라는 개념을 도출해낸다.  이 개념에서 중요한 것은 파괴 기계안에서 하나의 부품으로 작동하는 평범한 개인들이다.  평범한 개인이 행한 모든 일들은 지극히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일이었다.  근대성은 인간들을 하나의 부품처럼 취급하여 합리성이라는 미명아래에 모든 폭력을 정당화한다.  그리고 각각의 부품들은 평범한 사람이자 우리의 이웃이었다.  이를 두고 힐베르크는 악의 일상성이라 말한다.  하야오는 이러한 현상을 앞선 작품들을 통해 비판했던 것이다.  

하지만 이 작품에도 아쉬운점은 분명히 있다.  쌩뚱맞게 이루어진 지로에 대한 헌정은 사실 대단히 이해하기 힘들다.  아니 뭐 굳이 이해하자면 못할 것도 없지만 피해자의 입장에서 긍정적으로 바라보긴 힘들다.  하지만 그렇다고 하여 갑자기 미야자키 하야오가 그간의 생각을 바꿨다고는 생각치 않는다.  고작 헌사에 대한 그 문구 하나만을 가지고 그의 과거 모든 것을 부정한다는 것은 말도 안되는 일이다.  일본인 특유의 혼네는 말할 필요도 없다.  30년이 넘는 시간동안 수많은 작품으로 말한 그것이야 말로 그의 진정한 목소리이자 진의이며, 이 작품 내에서도 그 정신은 여전히 유지된다.  하지만 어느 꿈에 미친자에 대한 이해와 헌정을 동북아의 피해자에게서도 얻으려고 하였다면 그건 심각한 착각임을 지적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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