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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선희, 내가 누구인지 말할 수 있는 자는 누구인가? 본문

영 화/한국 영화

우리 선희, 내가 누구인지 말할 수 있는 자는 누구인가?

유쾌한 인문학 2014. 2. 5. 17: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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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선희, 내가 누구인지 말할 수 있는 자는 누구인가?

우리는 가끔 뜬금없이 거짓말을 할때가 있다.  어떤 질문을 받아 당황하여 할때도 있고 그 자리를 회피하기 위해서 그럴때도 있다.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는 내가 거짓말을 하는 이유조차 모른채 그냥하는 경우가 많다.  이성적으로는 설명되지 않은 즉흥적 감정에 의해 나도 모르게 저질러버리는 것이다.  이는 상우(이민우 분)에게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선희(정유미 분)는 최교수(김상중 분)에게서 미국유학 추천서를 받기 위해 오랜만에 들린 학교에서 우연히 선배인 상우를 만난다.  상우는 최교수가 외국출장을 떠났다고 말하며 우리 잠깐 커피나 한잔 마시자고 말한다.  하지만 최교수는 학교 교정에서 햇볕을 쬐고 있던 참이다.  선희는 선배는 왜 거짓말하냐면서 사과하라고 다그친다.  이에 그는 농담이라고 얼머부린채 얼렁뚱땅 그 자리를 뜬다.  아마 상우 스스로도 상당히 당황스러웠을 것이다.  자기 자신조차 왜 거짓말했는지 모를테니 말이다.  사실 이는 선희에 대한 호감, 관심, 대화 나누고 싶음 따위의 즉흥적 감정이 어떨결에 거짓말이라는 형태로 어긋나게 표현된 것이다.  다만 즉흥적 감정은 이성적 표현으로 옮겨지기 힘들기에 그는 당황한 것이다.  이렇듯 이 작품은 시작부터 말의 어긋남을 드러낸다.

우리는 수많은 말의 흐름 속에서 살아간다.  그 말을 통해 나를 알리고 다른 사람을 알고 싶어 한다.  나의 생각과 감정을 말한다는 것은. 내가 어떤 사람인지 끊임없이 다른 이에게 내보이는 것을 의미한다.  하지만 나의 말들은 언제나 다른 사람에게 닿지 못한채, 상처받고 상처주며 살아간다.  이에 어떤 이는 다른 사람과의 소통을 거부한채 자신만의 세계 안에 갇혀 살아가기도 한다.  비록 그것이 지독한 외로움만을 선사해줄지라도 말이다.  하지만 인간은 홀로 살아갈 수 없는 존재이다.  어쩔 수 없이 전달될 수 없는 말을 하면서 살아가야만 한다.  그렇다면 왜 우리의 말들은 다른이에게 닿지 못한채 항상 미끄러질 수 밖에 없는 것일까?

선희는 공부를 좀 더 해보려한다면서 최교수에게 추천서를 써달라고 요구한다.  그러자 최교수는 괜히 학교 같은데 가기보다는 직접 부딪히면서 끝까지 가보는게 더 낫지 않냐고 반문한다.  괜히 학교 같은데 가면 또 시간을 벌었다는 핑계거리가 생긴다고 말이다.  하지만 선희는 이미 포기하기에는 늦은 것 같다고 말하자 최교수는 딱 아는 만큼만 추천서를 써주겠다고한다.  최교수와 헤어진 선희는 홀로 술을 마시다 우연히 문수(이선균 분)를 만난다.  최근에 영화 감독으로 데뷔한 문수는 반가운 마음에 선희를 만나지만, 그녀는 그에게 너무 변했다고 어깨에 힘이 들어간다고 말한다.  선희는 문수에게 훈계 같은 것을 늘어놓는다.  너무 변화들하려고 해 사람들.  자기 자신은 하나도 모르면서 변화는 무슨 변화야? ... 자꾸 핑계대지 말고 그냥 한우물만 파.  어 그게 학교 다니는거건, 어디 도망가는거건 그거다 핑계야 핑계.  끝까지 한번 부딪혀봐. 끝까지 부딪혀봐야 자기 한계를 알고 자기가 누군지 아는거지.”

내가 누구인지 알아야 한다는 저 말.  참 멋있고 너무나도 당연한 말처럼 들린다.  그런데 도대체 내가 누구인지 안다는 게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우리는 오랜만에 친구를 만났을때 으레 요새 뭐하냐고 묻곤 한다.  알려진 일을 하는 사람이면 당당하게 말할 수 있지만 뭔가 말로하기 설명하기 애매할땐 우물쭈물하며 대답이 흐려지곤 한다.  사실 대답이 흐려지는 이유는 나의 말이 상대방에게 닿지 못하기 때문이다.  어차피 말해봐야 상대방이 제대로 이해할 수 없음을 알기에, 말해봐야 뭔 소용일까 하고 고민이 되는 것이다.  이는 선희 역시 마찬가지이다.  최교수를 만났을때 2년동안 잠수탔잖아?”라는 질문에 이것 저것 많이 했어요,  저도 나름 열심히 살았구요.”라고 대답한다.  우물쭈물하는 그 대답과 곧 이어지는 그냥 공부 더 해보려고 유학갈꺼라는 말들에는 분명한 목적이 나와있지 않다.  목적이 뚜렷하지 않은 말들은 상대방에게 완전히 전달되지 못하기에, 다른 사람들은 나를 정리해주려 시도한다.  이런 저런 간섭과 오지랖 같은 것들 말이다. 

예전에 한번 친한 누나의 남편을 만난적이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뭐하냐는 질문 앞에서 이런 저런 이야기를 했었지만 그는 내 말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즉 말이 닿지 못한 것이다.  내가 말하는 나의 모습이 전달되지 않자 그는 나를 정의하려고 시도하였다.  그러지 말고 그 좋은 머리로 그냥 7급 공무원 하시죠?”  악의가 없어보이는 간섭은 나에게도 역시 전달될 수 없는 말이다.  난 별로 머리가 좋지도 않으며 관심도 없는 것을 가지고 나를 정의하려고 시도하기 때문이다.  결국 내가 누구이냐는 것은 타인과의 말의 흐름 속에서 형성된다.  말이 상대방에게 온전히 전달될 수 있다면 그 말대로 내가 누구인지 드러날 것이고, 만약 온전히 전달될 수 없다면 남들은 나를 집에서 자빠져 노는 놈으로 오해하고 왜곡된채 드러나는 경우가 많을것이다. 

젊은 시절의 비트겐슈타인은 논리-철학 논고(이하 논고)에서 말할 수 있는 것과 말할 수 없는 것을 구분하고자 하였다.  여기서 말할 수 있는 것이란 상대방에게 전달 될 수 있는 말을 의미한다.  그에 의하면 언어는 마치 현실을 보여주는 그림같은 것으로서, 외부 사실들과 사실들과의 관계를 그림처럼 명확히 지시할 수 있을때 상대방에게 오해없이 닿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여기에서 벗어나는 것들은 말할 수 없는 것들로서, 다른 사람에게 이해될 수도 없고 말해봤자 오해만 사기 싶상인 것들이다.

문수는 선희와 헤어진 이후 선배 재학(정재영 분)을 찾아간다.  파도 파도 아무것도 나오지 않는 쉰내나는 방안에서 홀로 지내는 재학은 문수의 등장이 반갑지만은 않다.  둘은 술을 마시면서 이야기를 나눈다.  과거의 연인이었던 선희가 자신을 다시 찾아왔다고 말하며 일말의 희망을 찾으려는 문수에게 재학은 그냥 냅두라고 무리하지 말라고 말한다.  하지만 문수는 무리를 해봐야 끝까지 파봐야 뭔지 아는거 아니냐고 되묻는다.  끝까지 파봐야 아는거 아니냐는 문수의 말들은 선희가 문수에게 해준 말과 다를 것이 없다.  흥미로운 점은 도대체 선희가 언제 문수를 찾아왔던가라는 것이다.  선희는 문수를 찾은 적이 없다.  그냥 아주 기막힌 우연으로 만났을 뿐이다.  그런데 문수의 말은 진실과는 다르게 어긋나게 표현된다.  더 재미있는건 뒤에 선희가 재학을 우연히 만났을때 그녀는 내가 누군지 알고 싶다고 묻기까지 한다.  이에 재학은 끝까지 파고 들어서 니가 누구인지 알아야 한다고 대답한다.  결국 내가 누구인지 알아야 한다는 말들은 선희를 중심으로 이곳에서 저곳으로 흘러다니는 중인 것이다.

홍상수의 씨네21과의 서면 인터뷰를 보면 다음과 같은 내용이 나온다.  말로 뭔가 좋은 일, 중요한 일을 하려면 정확해야 하는데, 그게 여러 이유로 굉장히 힘든 것 같습니다.  말이 파악했다고 주장하는 그 핵심이란 것, 본질이란 것도 실제로 살면서 보면 별로 핵심도 본질도 아닌 거 같고요.  우린 그냥 그 단순 명료한 말이 좋아서 믿고 싶어 하고, 밀고 나가는 꼴입니다.  그런걸 아예 찾으려 하지 않고 사는 게 좋은 길인 거 같습니다.  저한테는.” 

인간은 끊임없이 타인을 알고 싶어하고 가지고 싶어한다.  혹자는 이영화를 두고 선희를 어떻게(?) 해보기 위한 남자들의 발악질이라고 말하는데 이 또한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실제로 선희를 둘러싼 세명의 남자들은 모두 뭔가 수상한 꿍꿍이를 가진듯하다.  하지만 그것 또한 타인을 알기 위한 수단 중 하나이다.  방법이 무엇이 되었건 이해하고, 알고, 가지고 싶은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잘 이루어지지 않을때 상대를 정리하는 말들이 튀어나오며 너를 파악했다고 믿고 싶어한다.  단순 명료한 말들을 믿고 싶어한채 밀고 나가는 것이다.

그렇기에 이 영화에서 우리라는 단어는 상당히 각별하다.  흔히 사람들은 어떤 사람과 친하다는 것을 과시하기 위해 우리라는 말을 사용하곤 한다.  유명한 배우 이선균과 친하다는 것을 과시하기에 가장 좋은 방법은 아 우리 선균이?” 하고 말하는 것이다.  선희는 전 남자친구이자, 학생이며, 후배이다.  이 세가지 선희를 놓고 세명의 남자는 자신과 선희를 우리라는 단어 안으로 묶어넣은채, 자신은 선희와 아주 각별한 사이라는 것을 과시하기 위해 사용된다.  하지만 정작 선희는 그들의 관심과 애정을 적당히 이용한채 빠져나갈뿐이다.  어차피 그녀가 돌아온 이유는 추천서때문이었지 남자를 사귀기 위해서가 아니다.  그럼에도 선희는 한가지씩의 여지는 남겨둔다.  민수에게는 과거에 대한 미련을, 최교수에게는 안김을, 재학에게는 키스를 남긴다.  이것은 내가 너보다 더 선희를 잘 알고 있어!!”라고 말할 수 있는 숨겨진 자랑거리이다. 

세 남자들은 각자의 비밀을 간진한채 우리 선희? 걔는 내가 잘 알지.” 라는듯 선희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녀는 내성적이고 또라이 같지만, 똑똑하고 안목도 뛰어나며, 솔직하고 용감한 여성이다.  그렇다면 이 말들은 정말로 말해질 수 있는 말이라고 볼 수 있을까?  사실 그림이론이라는 것은 현실 속에서 큰 힘을 발휘하지 못한다.  말할 수 있는 언어란 나와 타인 모두가 이해할 수 있는 획일적 언어이어야 하는데, 실제로 각자는 비슷한 말을 하되 묘하게 다른 말들을 하며 살아가기 때문이다.  실제로 선희를 놓고 똑똑하니 안목있니 또라이니 내성적이니 온갖 말들이 나오고 있지만 정작 관객인 우리는 그런 모습을 전혀 확인할 수 없다.  선희의 실체와 그녀를 향한 말들이 전혀 부합하는 것 같지가 않다.  이렇듯 선희를 둘러싼 수많은 말들 역시 선희와는 큰 상관이 없이 빗겨가는 말들에 불과하다.  세 남자들은 모두 각자 선희에 대해서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하면서 선희에 대해 평가하고, 자기 자신이 되라고 말하지만, 어느 누구도 선희가 누구인지는 알지 못하는 것이다.

이는 홍상수와 이동진의 대담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저는 우리가 하는 말에 대해서 느끼게 하고 싶었어요.  세 사람 다 똑같은 얘기를 하고 있지만 관객도 선희라는 사람을 조금이나마 보게 되잖아요.  세 남자 앞에서 하는 행동의 차이도 있고요.  그게 우리한테 어떤 느낌을 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만약 세 사람이 선희에 대해서 각자 다르게 얘기한(), 누구 얘기가 맞는지 생각하거나, 그들의 얘기를 적당히 섞겠죠.  그게 아니라 선희에 대한 말과 선희의 대립을 보여주려 했어요.”

이렇듯 말은 상대방을 그림과 같이 정확하게 묘사하지 못하며 이것은 비트겐슈타인의 후기 이론의 핵심주제가 된다.  비트겐슈타인은 논고를 완성한 이후 케임브리지 대학을 떠나 오스트리아의 한 시골 마을에서 초등학교 교사로 살아간다.  그런데 그곳에서 그는 지역 주민들과 교육문제로 인해 심각한 갈등을 겪게 된다.  자신이 쓴 논고에서의 원칙을 내세우다가 갈등이 발생한 것이다.  이는 필연적으로 생길 수 밖에 없는 갈등이다.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나 최고 명문대에서 살아온 그의 언어와 정제되지 않은 거친 삶이 그대로 들어나는 시골 사람들의 언어는 너무나도 다를 수 밖에 없다.  세련된 고급스러운 비트겐슈타인의 언어와 투박하고 거친 시골 사람들의 언어는 달라도 너무나도 달랐던 것이다.  그렇다고 시골 사람들의 언어를 말할 수 없는 것이라고 치부할 수도 없었다.  그들은 나름의 완전한 언어생활을 영위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언젠가 서울에서 만난 사람들이 나에게 이런 질문을 한적이 있다.  응답하라 1994에서 나오는 문디 가시나. 대가리 확 뿌사뿔라.”라는 말을 정말로 사용하느냐고 말이다.  나로서는 자주 사용하는 말이기에 그렇다고 말했더니 그들은 이것을 이해하지 못했다.  자기가 저런말을 듣는다면 당장 헤어지겠다고 말이다.  사실 이말은 부산에선 상황과 늬앙스에 따라서 긍정적인 의미를 가지지만 다른 공간을 살아가던 사람들에겐 이해될 수 없는, 말해질 수 없는 말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만약 서울 사람들이 자신의 언어를 이용하여 타지역 사람들을 억지로 굴복시켜려 든다면 당연히 갈등이 생길 수 밖에 없을 것이다.  나는 평생을 아무 문제 없이 사용한 말들을 말해질 수 없는 말로 치부한다면 불쾌할 수 밖에 없다.  결국 비트겐슈타인은 자신이 확신했던 말할 수 있는 것들만 말한다는 원칙이 전혀 통용되지 않았던 거친 시골 마을에서 논고의 한계를 깨달아 케임브리지로 돌아간다.

후기의 비트겐슈타인은 우리의 언어가 획일화된 것이 아니라 상이한 맥락 속에서 다양하게 사용되고 있음을 밝힌다.  예를 들어 공장에서 사용하는 언어와 대학에서 사용하는 언어는 같은 한국어라 할지라도 분명히 다르다.  이는 각 공간이 가지고 있는 생활 방식과 공기의 무게가 다르기에 나타나는 현상으로, 각자가 살아가는 삶의 모습에 따라서 언어의 규칙은 다르게 나타난다.  심지어 같은 사람이라 할지라도 삶의 맥락이 달라지면 언어 역시 조금씩 다르게 나타난다.  예를 들어 책벌레라는 단어를 본다면 이는 한편으론 쫌생이 같은 사람이라는 맥락을 가질 수도 있고 다른 한편으론 진지하게 파고 들어가는 성격을 가진자라는 맥락을 가질 수도 있다.  동일한 단어이라도 어떤 이와 만나고 어떤 공간에서 사용되느냐에 따라서 그 의미는 완전히 달라질 수 있는 것이다.

선희에 대한 여러가지 이야기는 남자들이 선희에 대한 단편적인 생각들을 주고 받는 과정 속에서 퍼져나간 말이다.  즉 남자들의 시선 속에 존재하는 선희에 대한 말들이 흘러가며 하나로 합쳐진 것이다.  하지만 같은 말들이 내뱉어지더라도 그 말이 감싸고 있는 공기의 무게는 완전히 다르다.  이는 세남자가 각기 다른 사람들이기 때문이며, 선희 역시 그들 앞에서 다른 행동들을 내보이기 때문이다.  영화의 마지막 창경궁에서 세남자가 말하는 선희에 대한 이야기는 서로간에 주고 받고 동의하며 흘러간다.  하지만 이는 각자가 가지고 있는 선희에 대한 내밀한 비밀과 함께 각기 다른 형태로 드러난다.  세남자의 삶의 방식이 다르기에, 같은 말이라 할지라도 그 맥락은 달라지는 것이다.  그래서일까?  자신의 목적을 이루었기에 곧 잠수 탈 것으로 예상되는 선희를 두고 이들은 자기 편한대로 사는 거지.” 식으로 정리해버린다.  마치 함 창경궁에 있지만 뭔가 어색하고 불편해보이는 세남자의 모습처럼 말이다. 

내가 누구인지 안다는 것은 어떤 것일까?  사실 나로서도 잘 모르겠지만, 한가지 분명한 사실은 어느 누구에게나 완벽하게 받아들여질 수 있는 나에 대한 말은 사실상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도리어 획일화된 나라는 말 속에 갇혀버린다면 다양한 언어들 속에서 제대로된 삶을 살아갈 수 없다.  내가 대학을 나온 나름 지성인이라 하여 지성인의 언어에 갇혀버린 나만을 주장한다면 농부나 노동자 등 다양한 사람들이 사용하는 언어 속에서 제대로된 삶을 살아갈 수 없을 것이다.  농촌에 가서 복잡한 철학적 용어를 남발하며 대화하는 것처럼 멍청한 짓이 어디에 있을까?  우리는 가끔 외국에서 유학을 다녀온 사람들이 쓸데없이 과하게 영어를 사용하는 것을 보고 눈쌀을 찌푸리곤 한다.  이는 새롭게 바뀐 환경에서 통용되는 삶의 규칙을 제대로 받아들이지 못하였기에 생겨나는 현상이다.  그러니 그들은 자연스럽게 따돌림을 당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이것이 바로 비트겐슈타인이 오스트리아에서 겪은 일이다.

이에 비트겐슈타인은 그냥 사람들이 사용하는 언어를 생각하지 말고 그냥 보라고 말한다.  삶 속에서 자연스럽게 드러나는 다양한 언어 활동들을 그냥 보고 거기에 자연스럽게 흡수되어버린다면 어느 곳에서 무난히 어울리는 삶을 영위할 수 있을 것이다.  이는 홍상수의 대담과도 일치하는 내용이다.  알고 싶은 욕망 때문에 자꾸 말로 정리를 하는데, 그때 파열 같은 게 일어나요.  현실적으로는 사람에 대한 판단을 내릴 수 밖에 없지만, 다 안다고 확신하는 건 얼마든지 조절할 수 있다고 봐요.  말로 단정하지 않고 이런 면이 있네 하면서 흡수하고 넘어가고 흡수하고 넘어가면서 접촉면을 살려놓는게 좋은 것 같아요.”  어쩌면 나를 안다는 것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을지도 모르겠다.  도리어 다양한 누군가와의 만남 속에서 어우러지는 나를 발견하는 것이야 말로 더 중요한 일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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