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 영화를 만나다.

Posted 2015.06.22 21:10



문학, 영화를 만나다.


1. 문학과 영화

과학 기술이 20세기의 창조적 에너지를 표출할 수 있는 형태라면, 기계와 광학, 필름의 총아인 영화는 현대의 가장 중요한 예술의 하나일 것이다. 19세기 후반부터 기술의 위력은 상당한 중요성을 띄게 되며, 영화는 기계 시대를 위한 기계 예술의 하나로 자리매김한다. 아놀드 하우저는 현대를 영화 시대라고 지칭하고, “영화는 기술에서 진화한 예술이다. 기계는 영화의 근원이자 그것의 적절한 주제이다.”라고 하였다. 실로 영화가 기계와 전기, 현대적 마케팅 전략에 의존한다는 것은 명백한 사실이다. 흥미로운 것은 영화는 그 자체가 기계예술이면서 기계적 삶에 대한 고도의 비판자로 발전하였다는 것이다. 영화는 무생물을 움직이게 하고, 기계를 배우로 만들고, 사람과 기계의 싸움을 극화하는데 매우 효과적이었다. 대표적인 작품으로는 페르낭 레제의 기계적 발레와 찰리 채플린의 작품을 들 수 있다. 그리고 이들 작품에선 대게 인간이 기계를 정복하는 방향으로 끝맺는다. 영화란 가장 낙관적이면서 인간적인 표현수단이기 때문이다. 

기존의 예술가들은 인간성에 대한 환멸감에 빠지게 된다. 틈만나면 전쟁을 하고 인간을 학살하는 모습을 바라보며 더이상 인간을 묘사하기 보다는, 전쟁으로 인한 폐허를 그리거나 그 모습을 겨냥한 조각따위를 남긴다. 하지만 영화는 다른 예술보다는 훨씬 더 인간의 이미지에 충실히 몰두하였으며 더욱이 인간의 존엄성과 통합을 주장하기에 가장 적합한 예술로 발전한다. 그 이유는 영화가 가지고 있는 물질적 기술적 복잡성에서 찾을 수 있다.  영화는 다양한 분야의 협동에 의해서 만들어지는 종합 예술 작품이다. 이러한 사실은 영화야 말로 통합적 경향에 가장 근접한 예술 분야라는 점을 잘보여준다. 따라서 기계 시대에 태어난 예술이, 기계 시대에 위협받는 인간의 존엄성을 주장하기에 가장 합당한 예술이 된 것이다.

영화와 문학을 연결시키려는 시도는 초기 영화시대부터 시작된 것이다. 에이젠슈타은 영화가 자립적이고 자족적이며 독립된 예술이라는 생각을 완전히 비웃는다. 영화의 근원은 기술과 더불어 거대한 문화적 전통에 근간을 두고 있다. 과거 모든 문학이 각자의 시대에서 위대한 영화 예술을 낳는데 공헌한 것이다. 우리는 흔히 문학에 고유한 성격을 부유하는 것은 글자와 말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영화는 기껏해야 회화적 어휘와 구문 역할을 하는 몽타주 때문에 문학과 비슷하다고 느끼는데 그친다. 하지만 관점을 바꾸어 문학을 독자의 마음에 이미지와 소리를 창조하는 데 집중하는 서사 예술로 본다면, 영화 역시 명백히 문학성을 띠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영화와 문학이 사용하는 매개체와 수단이 다르다는 것을 인정하더라도 둘사이에는 상당한 공통점이 존재하는 것이다. 오늘날 영화가 창조하고 확대하는 시각적 문학성은 그리스 시대 이래로 문학과 문화에 연관되었던 언어적 문학성의 확장이라고 말할 수 있다. 

하버트 리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좋은 글의 특징을 내게 말하라고 한다면 나는 한마디로 말 할 수 있다. 시각적인 것, 문학을 기본적인 요소로 축소시키게 되면 결국 한가지 목적, 즉 말로써 이미지를 전달하는 것에 귀결된다. 단지 이미지를 전달하는 것. 마음으로 보게 하는 것. 뇌 속에 있는 스크린에다 움직이는 사물과 사건을 투사하는 것. 그것이 호메로스와 셰익스피어로부터 제임스 조이스와 어니스트 헤밍웨이에 이르기까지 적용되는 훌륭한 문학의 정의이다. 그리고 이것은 훌륭한 영화의 정의이기도 하다.”

영화는 상당히 많은 각색 작업을 통해 만들어진다. 수많은 희곡과 소설, 심지어 시까지도 영화로 만들어졌고, 많은 비평적 관심이 연극과 영화, 소설과 영화의 연관성에 대해 기울어졌다. 하지만 이러한 연관성은 번역이라고 불리는 연관성 정도에 지나지 않는다. 소설이 영화로 번역되는 과정에서는 반드시 필연적으로 무언가를 상실하게 된다. 희곡을 영화로 번역할 수 있지만 그렇다고 희곡과 영화가 근본적으로 같지는 않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된다. 



2. 영화에서 문학의 이용

영화는 19세기 후반의 소설에 광범위한 뿌리를 두고 있다. 에이젠슈타인은 “디킨스가 영화적 시각적 특징, 프레임 구성, 클로즈업, 그리고 특수 렌즈를 통한 강조점의 변화 등을 추구했던 것처럼 데이비드 와크 그리피스도 디킨스적인 날카로움과 명쾌함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하였다. 가령 현대 소설의 서사를 차용해온 영화의 서사는 단순하고 단선적이며, 시간적으로 일관된 서사 진행으로부터 탈피하는 경향을 보여왔다. 영화는 평범한 시간적 진행을 쉽게 잘라서 재배열할 수 있다. 플래시백에 많이 의존하고 동시에 일어나는 많은 사건을 보여 주기를 선호하기 때문에 영화 서사는 시간을 조작할 수 있는 것으로 보는 베르그송의 현대 시간 개념과 매우 유사하다. 하지만 영화만이 가지는 독특한 형식은 영화의 서사적 능력의 발견에서 찾을 수 있다.

뤼미에르 형제가 만든 초기 영화는 움직이는 회화, 행동하는 그림, 움직이는 조각 정도의 의미만을 가졌다. 하지만 영화를 만들기 전 마술사였던 멜리에스는 영화가 환상을 만들 수 있다는 가능성을 발견했다. 그의 작품은 몸이 날아다니고 머리가 커지는 등 속임수 쇼트로 가득차 있었다. 즉 그는 영화를 통해 현실의 기록을 넘어, 자기가 원하는대로 현실을 만들어낼 수도 있음을 알아낸 것이다. 이는 영화를 단순히 수동적 기록을 넘어서 해석과 선택이라는 적극적이고 긍정적인 방법으로 이용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미국의 에드윈 S. 포터가 만든 1903년 대열차강도는 초기 영화의 한계를 넘어선 모습을 보여준다. 포터 이전에는 극장에서 관객이 연극을 보는 것처럼 카메라를 움직이지 않게 고정한 채, 한 장소에서 연속적인 장면을 연출하였다. 하지만 포터는 여러 장소에서 촬영을 한 이후 이야기를 전개시키기 위해 장면들을 편집하여 이어붙이기 시작했다. 이를 위해 그는 필름을 숏 단위로 잘라내기 시작했다. 즉 그는 영화의 기본 언어를 창조해낸 것이다. 숏 하나하나는 마치 단어와 같다. 문학은 단어를 연결시킴으로써 말의 의미와 중요성을 창조한다. 마찬가지로 영화는 숏을 잘라서 붙이고 편집함으로 좀 더 고상한 형태인 몽타주가 만들어진다. 몽타주를 통해 영화에 문법과 구문을 부여하는 것이다.

그리피스는 영화 발전에 큰 영향을 끼친 인물이다. 그는 문학적인 배경을 적극적으로 이용하였고, 단순히 기록하는 영화가 아닌 해석하기 위한 영화를 만들었다. 그가 이용한 원리는 다음과 같다. ① 단일한 장면 내에서 관객과 장면 사이의 다양한 거리를 유지한다. 이는 한 가지 그림의 구도와 프레임 내에서 활용할 수 있는 장면의 차원을 다양하게 만든다. ② 장면의 전체 그림을 섹션, 혹은 숏으로 분리한다. ③ 단일한 장면 내에서 앵글, 시점, 쇼트의 초점을 바꾼다. ④ 몽타주는 전체 장면 다음에 다른 장면이 뒤따라오도록 쇼트를 연결시킬 뿐 아니라, 전체 장면을 작은 프레임으로 나누어 시간대별로 배열한 것처럼 장면의 세부를 연결시켜 보여준다.

그리피스는 영화를 연극과 구별시키는 작업을 한 것이다. 초기 영화는 연극처럼 고정된 자리에 있는 관객에게 고정된 공간에서 펼쳐지는 그림을 보여주었다. 하지만 그는 카메라에 운동성을 부여했고 이를 통해 영화답다고 말할 수 있는 형식을 만들어낸다. 이제 영화는 다양한 각도와 거리에서 찍은 많은 숏으로 이루어지게 된다. 그리고 숏을 연결시켜 만든 시퀀스가 영화를 창조하는 논리 혹은 연속성을 띄게 된다.

이렇듯 그리피스가 영화에 끼친 영향은 절대적이었다. 따라서 그리피스의 문학적 지식과 관심이 그의 영화에 어떻게 표현되었는지를 알아보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일이다. 그의 어릴적 꿈은 작가가 되는 것이었지만 점차 그 꿈을 포기할 수 밖에 없었다. 그는 에드가 엘런 포의 작품에 매료되었다. 포의 소설들은 가속의 원리에 의해 쓰여졌다. 이야기를 처음에는 천천히 시작하여 점점 속도를 올리고 초점은 좁혀지면서 가속이 붙다가 클라이맥스에서 갑자기 멈춘다. 그리피스는 이런 포의 소설을 통해 느린 편집(격렬하고 빠른 움직임으로 찍었을 지라도 스크린에 장시간 머무르는 숏)이 속도를 느끼고 빠른 편집(정적인 장면이더라도 숏을 짧게 잡아 여러개를 나열하는 것)이 영화의 리듬을 가속한다는 것을 발견했다.

존 리빙스턴 로가 쓴 ‘제나두로 가는 길’은 시의 창조적 과정을 분석한 유명한 책이다. 이 책에는 다음과 같은 문구가 있다. “뛰어난 창조적 행위의 상상적 강렬함을 통해 모든 이미지가 변질되듯이 모든 단어가 변형되었다. 음악가의 유추적 기적에 대해 앱틀 보글러는 ‘잘생각해 보라고’고 말한다. 잘생각해보라. 우리 음계의 모든 음은 사실 아무것도 아니다. 그것은 세상 어디에나 있다. 크고, 부드럽고, 그리고 모두 말해진다. 옛이야기에서 하나의 생생한 단어만 콜리지(시인)에게 주면 그는 그것을 자기 생각 속의 두개와 섞는다. 그러면 세 개의 음으로부터 그는 네번째 음이 아니라 별을 만들어 낼 것이다.”

에이젠슈타인은 위의 글을 통해 자신의 몽타주[각주:1] 이론을 창안했다고 말하였다. 즉 몽타주 아이디어가 시인의 창조 과정에 근원을 두고 있는 것으로 생각한 것이다. 즉 영화감독은 상상적 과정에 깊이 의존하고 있는 존재라는 것이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몽타주의 중요 개념은 “어떤 종류의 필름이라도 두개를 연결시켜 놓으면 그 병치로부터 새로운 개념, 새로운 성질이 나온다는 사실”이다. 그는 두 사물의 병치가 두개의 합이 아니라 새로운 실체를 만들어낸다는 것을 보여주려고 한 것이다. 

예컨대 소녀를 기다리고 있는 젊은이를 묘사한 모파상의 글을 보자. “그는 11시경에 외출하여 잠시 배회하다가 택시를 타고 해양부 옆의 콩코드 광장으로 갔다. 가끔 그는 성냥을 그어 시계를 보았다. 자정이 가까워 오자 그의 초조함은 한층 격렬해졌다. 그는 쉬지 않고 고개를 창 밖으로 빼어 내다보았다. 멀리서 시계가 12시를 쳤다 그리고 다른 시계가 가까이에서 쳤고, 둘이 함께 치더니, 아주 멀리서 마지막으로 또 다른 시계 소리가 들렸따. 마지막 시계가 소리를 그치자 그는 생각했다. ‘이제 끝났어, 시래야. 그녀는 오지 않을 거야.’”


에이젠슈타인이 여기서 눈여겨본 부분은 자정의 정서적 분위기를 하나가 아닌 여러개의 시계소리로 독자에게 환기시키는 방법이다. 단지 “시계가 자정을 쳤다”라고 했다면 효과는 상당히 단순했을 것이다. 하지만 여러개의 시계를 병치시킴으로써 자정의 분위기를 더욱 깊게 만들어 새로운 성질을 만들어낸다. 에이젠슈타인은 몽타주 원칙이 이미 르네상스기에도 존재함을 밝혀낸다.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노아의 대홍수 그림을 기획했지만 완성하지 못한다. 이때 다빈치는 그림을 묘사한 글을 남기게 된다.


“어둡고 침울한 공기는 우박이 섞인 멈출 줄 모르는 비를 동반한 바람에 의해 갈라진다. 바람은 수많은 나뭇잎과 부러진 나무갓지들이 얽히고설킨 무더기를 이리저리 몰아간다.

난폭한 바람에 의해 뿌리뽑히고 산산조각난 고목들이 사방에 널려있다.

포효하는 급류에 의해 이미 발가벗겨진 산의 조각들이 급류를 따라 치달으며 계곡을 삼키고, 마침내 물이 차오른 강이 홍수로 변하여 넓은 평야와 주민들을 덮친다.

산꼭대기에는 겁에 질려 꼼짝 못하는 갖가지 종류의 동물들이 아이들과 함께 산으로 도망간 사람들과 함께 웅크리고 있는 모습이 보인다.
물로 뒤덮인 들판을 파도가 덮고, 그 위에는 사람들이 죽음이 두려워 테이블, 침대, 보트 등을 가지고 임시방편으로 만든 뗏목이 뒤덮고 있다.

그 위에 남녀노소가 한꺼번에 몸을 묶은 채 타고 있고, 그들은 광포한 바람이 연거푸 시체가 휩쓸리는 파도를 거대한 허리케인과 함께 몰고 오자 겁에 질려 온갖 비명과 탄식을 지른다.”


에이젠슈타인은 다빈치의 글을 두고 전체 시퀀스가 하늘로부터 시작하여 끝에 다시 하늘로 돌아가도록(인용문에는 생략) 구성되어 있다고 지적한다. 이 프레임 내에서 인간이 중심에 있으며 자세한 세부와 배경, 클로즈업과 롱 쇼트가 서로 대비되도록 신경써서 설명되고 있다. 하지만 그는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 에이젠슈타인은 특별한 효과를 얻기 위해 어떻게 특별한 세부를 선택하고 위치시키는지를 보여주기 위해 푸쉬킨의 시구를 인용한다.


“그러나 그녀가 어떻게 혹은 언제 

사라졌는지 아무도 모른다. 그날 밤

외로운 어부가 다그닥거리는 말발굽 소리와

코사크 말투와 여인의 속삭임을 들었다.”


여기서 푸쉬킨은 여자가 사라졌다는 정보를 제시한 후, 세개의 소리로 여자가 사라졌다는 사실을 감정적으로 깨닫도록 종용하고 있다. 이렇듯 에이젠슈타인은 문학의 테크닉을 자세히 공부하는 것이 영화제작자에게 필요한 준비라는 것을 분명히 주장하고 있다. 에이젠슈타인 이후의 영화는 영화에 대한 문학의 영향력이 점점 더 깊어지고 확대되는 것을 보여준다. 감독들이 시각적 숏을 사용하는데 익숙해진 것처럼 음향적 숏을 사용하는 법을 배우면서 유성영화가 발전하게 된다. 



  1. 몽타주는 조립하는 것을 의미하는 프랑스어이다. 영화는 촬영(撮影)되는 것이 아니라 조립되는 것, 다시 말해서 원래 따로따로 촬영된 필름의 단편(斷片)을 창조적으로 접합(接合)해서 현실과는 다른 영화적 시간과 영화적 공간을 만들어 거기에 새로운 현실을 구축하여 시각적 리듬과 심리적 감동을 자아내게 하는 데서 영화의 예술성이 성립된다고 보고 그 방법을 명확하게 하려는 이론이 몽타주이론이다. 프랑스의 무성영화(無聲映畵) 이론과 미국의 그리피스 등의 실험작품들을 세밀히 연구해서 이론을 체계화 시킨 것은 러시아의 S.M.에이젠슈테인, 푸도프킨 등이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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