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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브레이커블(2000), 두가지 자아와 페르조나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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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브레이커블(2000), 두가지 자아와 페르조나

유쾌한 인문학 2010. 6. 22. 2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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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브레이커블

샤말란 감독의 3번째 작품이자 식스 센스 그 다음 작품이다.  식스 센스에서 이미 너무 많은 것을 보여줘버린 그이기에 이 영화는 엄청난 악평에 시달리게 된다.  뭐 쉽게 말해 전작보다 못하다는 것인데 그 못하다는 주된 이유는 반전이 약하다는 것이다.  이 영화도 나름 반전을 가지고 있긴 하지만 사실 식스센스가 보여줬던 충격적 결말과 비교해서는 사실 반전이라고 하기에도 부끄러운게 사실이다. 

그런데 영화를 무슨 반전으로만 평가하는거 웃기지 않나?  많은 사람들은 흔히 영상예술을 가지고 평을 할때 오직 서사와 연기력만 가지고 평하는 경우가 많다.  서사가 담고 있는 철학이나 영상예술의 가장 핵심적인 요소인 각장면의 이미지는 관심도 없는 것이 조금 안타까울 따름이다.  아무튼 이영화는 포스터만 놓고 보면 마치 두 주인공이 선악으로 대립하여 싸우는 액션물 같지만 전혀 그런 영화는 아니고 정확히 말하자면 아주 정적인 히어로 영화라고 할 수 있다.  즉 브루스 윌리스가 숨겨진 만화속의 히어로였고 그것을 사무엘 잭슨이 찾아내고 이를 설득시켜 히어로로서 활동하게 만드는것이 영화의 주된 골자이다.


Copyright (c) Buena Vista. All rights reserved.


두가지 자아와 페르소나
이 작품이 대단히 흥미로운 것은 히어로물임에도 불구하고 너무 정적이다는 점이다.  액션?  없다.  히어로 특유의 초능력의 발현?  역시 없다.  그냥 평범하게 살아가던 소시민이 자신의 능력을 우연히 알게 되고 그 능력을 딱 한번 이용하여 누군가에게 도움을 줄뿐이다.  그뒤로도 계속 영웅노릇을 했는지는 알 수 없다.

이 영화가 이렇게 정적으로 흘러가는 이유는 소시민의 일상적인 삶과 소시민이 가지고 있는 재능적 측면을 부각시키기 위함이다.  꼭 히어로로서의 초능력이 아니더라도 이 세상의 수많은 사람들은 자신이 뭘 잘할 수 있는지 어떤 재능이 있는지도 알지 못한채 그냥 그렇게 살아가고 있는게 현실이다.  극중의 브루스 윌리스는 어떠한가?  무기력의 극치이다.  과거에는 잘나가던 미식축구 선수였지만 지금은 별볼일 없는 경비에 불과하다.  가족내에서도 삶이 불안하고 부인과의 관계 역시 무기력하기 그지 없다.  더 재미있는건 브루스 윌리스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진정한 히어로서의 능력을 아예 몰랐던건 아니라는 점이다.  이미 여러번의 경험을 통해 자신이 특별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으나 그냥 이런 저런 이유로 억누르게 된다.

바로 이지점에서 두가지 자아가 나타나게 된다.  이른바 표층적 자아와 심층적 자아라는 부분이다.  흔히 표층적 자아를 두고 보여주기 위한 자아라는 측면으로 접근을 하곤 하지만 사실 현대사회에서는 표층적 자아는 인위적인 보여주기 위한 측면보다는 강제적으로 형성된 것인 경우가 많다.  이른바 자아의 강제적 형성이라고 할 수 있겠다.  인간에게 이러한 것을 강제하게 되는 주된 원인은 그 사회를 지배하고 있는 이데올로기나 지배적 담론의 역할이 크다.  사회 전체적으로 흐르는 어떠한 권력관계의 흐름이 그 시대가 규정한 담론에 따라서 다양한 것들을 계층화 시키게 되고 이러한 계층화에 자기 자신을 집어 넣게 된다.  물런 사회 자체도 그걸 요구하게 되는것은 말할것도 없다.  사실 학교 교육이라는 것도 따지고 보면 사회를 지배하고 있는 이데올로기나 지배적 담론의 확대재상산을 위한 주요 통로가 되는게 현실이다. 

이러한 현실 속에서 자연스럽게 형성되는 것이 표층적 자아라면 그 속에 스스로 억압시켜 숨겨놓은 심층적 자아는 진정한 실체라고 할 수 있다.  언제 폭발할지 모르는 가능성 그 자체라고 할 수 있고 극중의 브루스 윌리스에게 있어 히어로서의 자질은 이러한 심층적 자아라고 할 수 있다.  브루스를 자세히 살펴보면 그는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하고자 하는 인간으로서의 궁극적 목표를 이루기 위해 사회가 요구하는 틀속으로 자신을 집어 넣기 시작한다.  그 시점이 바로 자신이 풋볼을 그만두게 된 원인이 된 교통사고이다.  그 교통사고가 났을때 이미 자신이 멀쩡하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자동차 문을 괴력으로 뜯어내었던 사실을 분명히 알고 있었지만 그 사실을 감춘채 부상이라 칭하여 풋볼을 관두게 되고 지속적으로 자신에게 자신은 부상을 입었다고 자가주입하게 된다.  즉 스스로 자신을 가두고 억압시킨 것이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은 자기 스스로를 고립시키는 행위로 바라볼 수 있다.  스스로를 고립시켰기에 소통 불가능성이 발생하고 그렇기에 가족내에서의 삶에 약간의 문제가 생기게 되고 사회 생활이라는 측면에서도 무기력한 삶이 이어지게 된다.  결국 이 작품이 우리에게 던져주는 한가지의 주제는 바로 고립과 소통 불가능성과 단절에 존재한다고 볼 수 있다.  


Copyright (c) Buena Vista. All rights reserved.


대칭점
위에서 언급한 두 자아가 보여주는 대칭점은 브루스 윌리스와 사무엘 잭슨의 관계와 밀접한 연관성을 가지게 된다.  위의 스샷에서 볼 수 있듯 왼편의 장면과 오른편의 만화는 정확히 일치하게 되는 장면이다.  즉 만화에서 보여지는 악당의 신체적 불완전함은 사무엘 잭슨이 가지는 신체적 불완전함과 일치시킬 수 있으며 브루스 윌리스 역시 그 반대로서 일치시킬 수 있는 부분이다.  이러한 대칭적 측면은 보통의 히어로물에서 보여지듯 서로가 서로를 필요로 하는 측면을 잘 보여주게 된다.  

사실 심층적 자아가 가지고 있는 욕망이라는 것은 결국 자신의 존재의 확인이라고 볼 수 있다.  나의 존재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에 대한 해답은 심층적 자아가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을 브루스 윌리스는 스스로 억압시켰기에 자신의 삶이 무의미하고 무기력하게 되는 것이다.  존재이유를 모르니깐.  사무엘 잭슨은 이러한 무의미성을 정확히 알고 있기에 스스로가 악당이 되어 이를 끄집어 내려고 노력하게 된다.  그리고 그속에서 자신의 존재이유를 찾으려고 한다.  결국 이 둘이 보여주는 대칭점은 서로가 서로를 향해 보여주는 존재성의 확인이라고 할 수 있다.  사실 이지점까지 오게 되면 앞선 작품인 식스센스와 크게 다를게 없는 작품이라는 것을 알 수 있게 된다.


Copyright (c) Buena Vista. All rights reserved.


인상깊은 장면
브루스가 자신의 능력을 스스로 인정하고 처음으로 히어로로서의 일을 행하게 되는 장면이 위의 스샷이다.  그리고 이 장면이 상당히 재미있다.  커튼의 뒤에서 여자를 구하기 위해 브루스가 방안으로 들어오는 장면이 보인다.  커튼은 불안정하게 흔들리고 있는 상태이다.  이러한 시선처리를 통해 대단히 높은 불안감과 긴장감을 선사하게 되는바 이러한 장면은 이미 식스센스에서 나온바 있다.  앞에 어떤 물체를 두고 그 뒤에서 몰래 바라보는듯한 시선을 유지하여 긴장감을 높이는 방식이다.   


Copyright (c) Buena Vista. All rights reserved.

위의 장면도 대단히 인상깊다.  왼편의 스샷은 극의 초반에 브루스의 아들이 거꾸로 누은채 티비를 보는 장면이다.  티비속의 여자들은 서로 자신들이 대단히 우아하고 아름답다고 외치고 있는상태이다.  오른편의 스샷은 사무앨 잭슨의 어린시절의 모습으로 자신이 자꾸 다치기만 하니 스스로 방안에 쳐박혀 버리게 되고 그런 그를 어머니가 설득하고있는 중이다.  이러한 장면을 티비속에 비치게 표현한 것이다.  이런식으로 티비라는 사각의 프레임속에 비치게 만드는 이미지는 이 영화가 가지고 있는 사고관과 정확히 일치하는 부분이라 판단된다. 


마무리
이상으로 이 영화와 관련된 이것 저것을 살펴보았다.  이 영화 역시 상당히 괜찮은 영화라고 판단되고 샤말란 감독이라는 사람에 대해서 여러가지로 생각해보게 된다.  한감독의 작품을 작정하고 전작으로 보다보면 하나의 흐름이 보이게 되는바 이 감독이 보여주는 주제의식도 뚜렷하게 느껴지는 측면이 많고 이 작품에서 보여지는 주제의식은 그다음 작품인 사인으로 그대로 이어지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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