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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동경비구역 JSA(2000), 경계선과 공간의 아이러니 본문

영 화/한국 영화

공동경비구역 JSA(2000), 경계선과 공간의 아이러니

유쾌한 인문학 2010. 6. 24. 06: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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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동경비구역  JSA
박찬욱 감독의 출세작이라고 볼 수 있는 작품으로 단편 포함하여 그의 4번째 작풍이며 세번째 장편영화이다.  박찬욱 감독의 초기 작품들은 현재로선 마땅히 구할 방법이 없는 상태이다.  영상 자료원에나 가야 볼 수 있지 않을까 생각된다.  영화라고 하는 매체가 활자와는 많이 달라서 어느정도의 시간이 지나면 증발해버리는 현상을 자주 보인다.  특히 우리나라는 그런 현상이 더한데 과거의 작품들 중 많은 필름들이 유실되어버리는 현상들이 나타는바 실로 안타까운 부분이라 할 수 있겠다. 




경계선 위에서
분단상황에서 휴전선에서 보초를 서는 군인들의 이야기다보니 자연스럽게 경계선이라는 측면이 들어가지 않을 수가 없다.  경계선이라는 것은 하나의 위에 선을 그어 이쪽과 저쪽을 나누는 기능을 한다.  그리고 이쪽과 저쪽이 어떻게 지내든 일단 다른 공간에 속해있고 너와 나는 타자라는 인식 그 자체를 발생시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이는 굳이 남북간에 세워진 경계선이 아니더라도 국가와 국가 사이에 세워진 경계선, 사회속의 작은 단체와 단체 사이 그리고 개인과 개인 사이에 세워진 경계선까지 실로 다양한 양태로 나타나게 된다. 

사실 이 경계선이라는 것은 대단히 허구적이라고 볼 수 있다.  균질성 위에 선을 그어 비균질성을 유도하는 것이니 말이다.  선이 그어지고 억지로 비균질성을 유도하는 세월이 길어지면 정말로 두공간이 비균질하게 되버리기도 하지만 그 시작을 생각해본다면 처음은 균질하지 않았겠는가?  이는 우리가 직면한 분단 상황이라는 것을 보아도 간단하게 답이 나오는 문제이다.  한반도라고 하는 같은 공간을 이루고 살아가던 사람들 사이에 어느날 경계선이 세워졌다.  이 경계선은 전세계 어느곳에서도 볼 수 없는 아주 지독한 경계선이라 철저하게 같은 공간을 둘로 나누게 된다.  하지만 아직 분단이 길지 않았기에 양자는 동일한 균질성을 가지게 된다.  이 기간이 길어지면 비균질성을 가지게 되겠지만.

그렇다면 우리네 현실에서 저 경계선이 생겨나게 된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이데올로기이다.  이데올로기란 인간이 의문을 가질 수 있는 대상 즉 인간 자연 사회 등 다양한 양상들에 대해 사람들이 가지게 되는 일종의 의식형태라고 볼 수 있다.  이것들은 엄밀한 학적체계를 갖춘채 제시되게 되고 이것들이 사회정치조직에 의해서 공유되는 순간 사회적 이데올로긱 성립하게 되며 이것이 개인들에게 내면화되면 개인적 이데올로기로 발전하게 된다.

그렇다면 우리네 분단현실은 어떠할까?  우리에게 휴전선이라는 경계선이 세워진 이유는 양쪽의 사회정치조직이 선택한 사회적 이데올로기의 차이점에서 비롯되는 것이고 그로 인해 세워진 경계선으로 인해 전쟁이라는 상황까지 발생하게 된다.  초반 즉 전쟁 이전에 경계선이 세워졌을때는 이데올로기 자체가 아직 내면화되지 못한 상황이므로 아마 특별한 의구심을 품진 않았을 것이다.  정치조직들이 끊임없이 빨갱이니 미제의 앞잡이니 해대지만 분단초반에는 왕래도 가능했었고 항상 그렇게 살아왔기에 경계선에 큰 의미를 부여하긴 힘들었을 것이다.

하지만 전쟁이 터지게 되면서 양상은 크게 달라진다.  이데올로기의 내용이 뭔지도 모르겠고 내면화시키지도 않았지만 일단 양자가 서로 총부를 겨눈채 살상을 하게 되니 자연스럽게 분노가 생겨나게 되고 이 분노가 비균질성의 확대를 가져오게 된다.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 전쟁 경험세대와 비경험 세대간에 생겨나는 극심한 견해차이는 바로 이 분노의 경험유무에서 비롯된다고 보아도 무방하겠다.  결국 저 분노의 유무에 의해 우리 사회내부에서 또 하나의 경계선이 세워졌다고나 할까? 

하지만 저 분노도 갑자기 나를 죽일려고 함에 생겨나는 분노인 것이지 비균질성의 고착화에서 생겨나는 분노라고 보기는 힘들다.  그렇기에 허구헌날 우리의 소원은 통일이라고 외치는것 아니겠는가?  결국 분단의 반세기라고 해도 경계선 양쪽의 공간의 사람들은 여전히 균질함을 이루고 있다는 것이고 양 공간을 지배하는 이데올로기가 이젠 개인에게 내면화 되어 개인적 이데올로기의 수준으로 발전하였을지언정 오랜 시간 하나의 공간으로 살아온 시간과 경험을 뛰어넘을 수는 없었기에 여전히 통일을 원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바로 이지점을 포착하여 박찬욱은 영화로 제시하게 된다.





공간과 주체의 아이러니
위에서 언급한 한국적 상황을 영화로 만듬에 있어 박찬욱이 선택한 공간이 상당히 재미있다.  휴전선과 판문점.  휴전선은 경계의 최전선이며 그 경계선 위에 선 사람들은 서로를 바로 직면할 수 있는 사람들이다.  이 사람들을 만나게 한다는 영화적 설정은 이미 내면화된 각각의 이데올로기를 넘어선 오랜 역사속에서 만들어진 균질성의 확인이라고 볼 수 있겠다.  막상 만나보니 결국 하나의 공간을 살아가는 사람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그럼 판문점이라는 곳은 어떠한가?  판문점은 상당히 재미있는 공간이다.  그곳은 공간안의 공간이며 경계선 사이에 만들어진 공간이다.  그곳은 진실을 감춰야 하는 곳이고 사건도 흐지부지하게 만들어야 하는 곳이다.  결국 판문점은 흐릿한 경계의 공간이자 경계가 무너지는 공간이면서 경계가 첨예하게 살아나는 공간이라고도 볼 수 있다.  즉 아주 아이러니한 공간이라고 볼 수 있겠는바 모든 것이 뒤틀린 공간이 바로 판문점이다. 

그곳은 흐릿한 경계의 공간이기에 진실과 직면할 수 있는 곳이다.  하지만 그 진실은 절대로 감춰져야만 하는 곳이기도 하다.  경계라고 하는 것은 결국 양공간을 지탱해주는 양상이기에 그것의 유지를 위해 흐릿한 공간을 만들되 그 공간에서 파생되는 진실은 숨겨야만 하는 것이다.  즉 경계라는 것은 서로가 서로에게 있어 억압적 요소이자 자신의 내면의 불편함의 직면이기 때문에 자신의 내면적 불편함을 상대방에게 억압시키게 되고 이를 감추어야만 하는 것이다.

이를 극중 이영애는 파고 들게 되고 과도한 진실 앞에 결국 송강호를 제외한 남측 사건 당사자들은 전부 자살이라는 선택을 하기에 이른다.  자신들은 잘못한 것이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한편으론 자신의 마음속에 내면화된 개인적 이데올로기에서 비롯되는 왠지 모를 죄의식이 충돌하면서 생겨나는 현상이다.  이는 경계선 위에 선자들이기에 나타나는 현상이라고 볼 수 있다.  경계선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서 살아가는 일반사람들은 결코 알 수 없는 경계의 모호함.  그리고 자신들이 살아왔던 공간속에서 구성시킨 이데올로기적 가치관과 경계선 위에서 만난 자들에 의해 생겨난 또 다른 가치관의 충돌.  바로 이지점에서 상징계적 주체 자체가 무너지기 시작한다.  여기에 감당할 수 없는 진실이 던져지니 주체는 완벽하게 붕괴되어 자살하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측면을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이 송강호의 대사중에 나타난다.  '내꿈은 우리 공화국이 더 맛있는 쵸코파이를 만드는 것' 어떻게 보면 웃긴 대사이기도 하지만 결국 저것은 자신이 속해있던 공간과 그 공간에서 자신의 내면에 구성시킨 이데올로기적 측면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사실을 직설적으로 보여주는 대사인 것이다. 




마무리
마지막 전투가 참 인상 깊었다.  김광석의 음악이 흘러나오면서 전투는 벌어지고 총성과 수류탄이 남무하는 각종 화약 소음들의 향연속에서 김광석의 음악과 극단적 대비를 이루게 된다.  음악과 현장음이 보여주는 이 어울리징 않은 아이러니함은 결국 그 공간과 경계선이 가질 수 밖에 없는 아이러니를 표현하는 기막힌 장치가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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