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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부2(1974), 서사적 기법과 이민사회의 모순적 양상 본문

영 화/70's 영화

대부2(1974), 서사적 기법과 이민사회의 모순적 양상

유쾌한 인문학 2010. 11. 2. 17: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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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부2(Godfather Part 2)
프란시스 포드 코폴라 감독의 6번째 작품이다.  전작인 대부의 대성공에 이어 2탄을 기획하게 되는데 속편치고 이정도의 완성도와 성공을 거둔 작품이 또 존재할까?  이영화에서는 알파치노가 전작에 이어 마이클 꼴리오네를 연기하게 되고 비토 꼴리오네의 젊은 시절은 로버트 드니로가 맡게 된다.  이 작품에 출연할 수 있었던 주된 원인은 로버트 드니로가 앞서 출연했었던 마틴 스콜세지 감독의 택시드라이버와 비열한 거리에서의 성공에 힘입어 스콜세지의 추천이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고 한다.  결국 로버트 드니로는 현대 갱스터 영화 대표 3개 작품인 대부와 좋은 친구들과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아메리카 전부다 출연하게 되는 배우가 된다.  

[영 화/프란시스 포드 코폴라] - 대부(1972), 감동의 근원과 변화적 양상

영화의 독특한 서사기법
대부2는 전작과 내용적으로 이어지는 작품인데 재미있는건 아버지인 비토 꼴리오네의 삶을 동시에 보여준다는 것이다.  즉 마이클 꼴리오네의 이야기는 대부1과 이어지게 되고 그와 동시에 아버지 비토 꼴리오네의 대부로서의 성공을 교차하여 보여주는 방법이다. 
이부분이 상당히 재미있다.  이런 기법은 세르지오 레오네 감독의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아메리카에서도 등장하게 되는데 세르지오의 작품에서는 시공간을 뛰어남는 그 순간에 감정이 이어지는 독특한 연출을 보여주게 된다.  하지만 대부2는 그것보다 더 기막힌 연출력을 보여주는바 아버지 비토와 아들 마이클 사이에 시공간을 뛰어넘는 그 순간 감정이나 어떤 사건들이 연속되거나 대비되는 측면을 보여준다는 것이다.  상당히 뛰어난 연출력이다. 

또 한가지 더 눈여겨 볼부분은 비토와 마이클의 이야기가 가지는 서사적 일치성이다.  이 영화를 놓고 많은 사람들이 인간적인 비토와 냉혹한 마이클 사이의 차이점에 대해서 말하곤 하는데 글쎄..  과연 비토가 정말 인간적인 대부였을까?  이부분에 대해서 한번 곰곰히 생각해봐야 한다.  즉 비토와 마이클의 서사는 분리되어있으되 서사적 일치성을 가지는 이야기다.  쉽게 말해 비토와 마이클의 이야기는 분리되어있지만 하나로 연결되는 이야기라는 것으로 결국 비토가 마이클이고 마이클이 바로 비토인 것이다.  그렇기에 극의 마지막에 배신한 패밀리들에 향한 마이클의 복수는 비토가 행한것과 다를바가 없다.


대부와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아메리카와 좋은 친구들의 관계
이 세작품의 관계를 바라보는 측면이 대단히 재미있다.  대부라는 작품은 마피아 갱스터 영화로서 스콜세지의 택시 드라이버와 1년 차이로 나오는 영화이다.  대부에서의 주된 특징이라면 마피아가 몰락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되려 코폴라가 내세운 마피아들은 그렇게까지 비도덕적이지도 않고 어떤면에선 필요불가피한 존재인것 같은 느낌마저 받게 되는데 이는 코폴라가 평소 내세우던 생각과 정확히 일치하게 된다.  즉 마피아와 미국 둘다 스스로를 선의의 단체로 여기고 있으며 두 단체는 모두 자신의 영역과 이익을 지키기 위해 자기 손에 피를 묻히게 된다는 점 따라서 오늘날의 미국은 법치와 범죄라는 두가지 요소에 의해 함께 만들어진 국가라는 것이다.

그럼 그 이후에 나오는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아메리카는 어떠한가?  이 작품 역시 이태리 마피아 갱스터 영화로서 이 영화는 마피아의 몰락을 그려내되 아메리칸 드림의 허상과 뒷골목에서 생겨난 마피아들의 우정에 대한 통렬한 일침에 주안점을 두게 된다.  즉 공황이 닥쳤을때 사회는 철저하게 사회 구성원을 이분화 심지어 삼분화 사분화까지 시도하여 계급을 결정짓고 그에 따라서 차별이 생겨나게 되는바, 이는 지배적 이데올로기 그리고 지배적 담론의 생산 유포자가 누구인가를 생각해본다면 당연한 결론인 것이고 결국 아메리칸 드림은 그 자체가 구조적으로 분열적 모순을 내포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좋은 친구들은 기본적으로 원스 어폰 어 타임과 궤를 같이하는 영화라고 볼 수 있다.  하지만 그의 작품이 세르지오의 그것과 다른점이라면 너무나도 극사실적이라는 점이다.  똑같이 폭력을 내포하지만 스콜세지의 폭력은 아름답지 않다.  너무 사실적이기에 역겹기까지 하다.  있는 그대로의 가감없는 제시가 바로 스콜세지 감독의 주된 특징인 것이다.  사실 스콜세지 감독의 많은 작품들이 기본적으로 내포하는 핵심적 주제는 아메리칸 드림의 허상인 것이고 이를 다양한 시각에서 접근하여 영화를 제시하게 된다.  그렇기에 비열한거리, 택시 드라이버, 분노의 주먹, 좋은 친구들까지 같은 주제를 가지고 있으되 영화가 다르게 다가오는 것이다.

[영 화/마틴 스콜세지] - 좋은 친구들(1990), 마피아의 실체와 혐오적 폭력
[영 화/세르지오 레오네] -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아메리카(1984), 세르지오 감독의 최고 걸작



Copyright (c) Paramount. All rights reserved.


비토 꼴리오네와 이탈리아 이민자
영화는 시작과 동시에 비토의 이야기부터 보여주기 시작한다.  위의 스샷에서 두번째 장면이 아주 인상깊다.  모든 가족들이 시칠리아에서 시칠리아 마피아에게 죽임을 당한 후 홀로 미국으로 건너온 비토는 병으로 인해 잠시 격리되는데 그때 홀로 방안에 앉아 노래를 부르게 된다.  그때 부르는 음악은 시칠리아노라고 불리는 음악으로 이탈리아 시칠리아 섬에서 태동한 무곡이다.  가장 유명한 시칠리아노는 프랑스의 작곡가 포레의 펠리아스와 멜리장드에 수립된 시칠리아노로서 아마 음악을 들으시면 어떤 음악인지 다들 아실 것이다. 

비토가 초반에 보여주는 양상은 미국 초기 이민자의 삶을 그대로 나타나게 된다.  이러한 이민자의 삶에 대한 집중적인 조명은 위의 첫번째 스샷에서 나타나는 자유으 여신상에서 상징적으로 징표된다.  아무래도 코폴라 감독이 이탈리아계이다 보니 그런 이민자로서의 측면이 많이 부각될 수 밖에 없다.  이는 스콜세지 감독과 세르지오 감독에게서도 마찬가지로 나타나는 것이고 말이다.  그러고보면 현대에 있어 가장 중요한 갱스터 3대 영화는 전부 이탈리아계 감독들이 만든것도 아주 흥미로운 부분이다. 

사실 모든 갱스터 영화는 아메리칸 드림과 이민자들의 문제 또는 아메리칸 드림과 공황시대 등에서 자유로울 수 없을 정도로 이와 밀착된 모습을 보여주고 이는 갱스터 장르영화의 확립된 특징중 하나이다.  즉 이것이 들어가야만 갱스터 영화라고 부를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런 갱스터 영화는 공황과 금주법이 시행되던 시대의 이민자들 또는 미국 사회의 빈민들이 겪어야 했던 일련의 과정과 일치하게 된다.  미국이라는 나라는 100년전부터 아메리칸 드림이라는 하나의 가치관을 내세워 수많은 이민자들을 받아 국가적 초석을 다지게 되지만 공황이라는 사건을 통해 그 아메리칸 드림이 허구라는 것이 여실히 드러나게 된다. 

중요한건 이러한 갱스터 영화의 장르적 특징을 코폴라 감독은 아주 교묘하게 바꾼다는 점이다.  먼저 대부1에서 나타난 마피아들의 모습을 생각해보자.  대부1에서의 마피아들은 그렇게까지 비도덕적이지도 않고 어떤면에선 필요불가피한 존재인것 같은 느낌마저 받게 된다.  이는 마피아가 가지고 있는 양면적 성격.  즉 미국은 법치와 범죄라는 두가지 요소에 의해 함께 만들어진 국가라는 점의 어떤 상징적 기표가 되는 것이다.  결국 대부1에서는 마피아라는 존재와 미국이라는 국가 정체성을 교묘하게 엮어내어 법치와 범죄의 양면성을 가감없이 표현한 것이 바로 대부1이다.

그렇다면 대부2는 어떠한가?  대부와 달리 대부2에서의 비토 꼴리오네는 철저하게 밑바닥 이탈리아 이민자들의 삶을 보여준다.  같이 이민와 살아가는 사람들이기에 외딴 땅에서 묘한 동질성을 느낌과 동시에 서로서로 괴롭히면서 살아가는 어떤 모순적 삶의 양상 말이다.  항상 혈족을 논하고 그 혈족이라는 테두리 안에서 공동체적 삶을 강요하지만 그 내면의 실상은 공동체적 삶과는 전혀 거리가 먼 지독하게 이기적인 양상으로 드러나게 된다.  이는 이민자들의 삶 자체가 그렇게 녹녹하지 않았기에 나타날 수 밖에 없는 현상이라고 볼수있다.

결국 이러한 모순점을 바라본 비토(로버트 드니로)는 자신이 해결사가 되어 공동체의 구심점이 되고 그 구심점이 점차 발전하여 거대 조직인 마피아를 만들어내고 대부의 자리에 오르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여기서 유심히 생각해보아야 할 점은 이민자들의 공동체 내에서 나타나는 모순적 행위 양상이다.  즉 공동체라고 하면서 서로서로에게 적이 되는 그런 모순적 행위 양상 말이다.  이러한 모순성은 비토가 만들어낸 패밀리 내에서도 그대로 나타나게 되고 이것은 마이클에 의해서 표현된다. 

정리하자면 비토의 삶은 초기이민자들의 밑바닥 삶을 보여줌과 동시에 그 삶에서 나타나는 모순점을 제시하여 그 모순성을 마이클에게 전달하는 방법이다.  만약 이러한 표현기법을 사용하지 않은채 비토는 비토대로 마이클은 마이클대로 둘다 복수를 해대는 방식으로 연출을 했다면 이 작품은 그저 그런 작품으로 전락하고 말았을 것이다.  하지만 코폴라 감독은 비토의 서사를 보여줄때 패밀리 내부에서의 이러한 모순점을 숨겨버린채 적극적응로 표현하지 않는다.  그러면서 마이클로 하영금 모순점을 폭발적으로 표현하게 하여 두개로 나눠진 서사를 전체적으로 하나의 서사로 이어나가게 하는 것이다. 

이렇게 표현하는 이유는 서사가 가지고 있는 기승전결을 폭발적으로 드러내기 위함이다.  만약 비토로 하여금 이민자들의 삶이 보여주는 모순성을 드러내도록 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복수따위를 행하는 양상을 행하게 하였다면 극의 서사적 구조가 무너지게 된다.  즉 가장 큰 카타르시스를 보여줄 수 있는 복수라는 측면을 극의 초반에 나타낼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비토의 아버지에 대한 복수도 극의 각장 후반부에 나타나게 되고 마이클의 패밀리 내부의 배신자들에 대한 복수도 극의 마지막에 폭발적으로 나타나게 된다.  바로 여기에서 관객은 엄청난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되고 이부분이 이 영화가 보여주는 예술성의 극치인 것이다.  이해하셨으리라 믿는다. 



Copyright (c) Paramount. All rights reserved.


마이클 꼴리오네와 이민사회 내부의 모순적 양상
이 작품에서 핵심은 마이클이 보여주는 변화적 양상이다.  대부1에서 마이클은 자신의 가족들을 그다지 탐탁치 않게 생각했다.  좁은 의미에서의 패밀리인 꼴리오네 일가와 넓은 의미에서의 패밀리인 이탈리아 이민자들에 이르기까지 마이클에게는 이런 폐쇄적인 집단성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왜일까?  그는 교육받은 엘리트로서 미국이라는 국가가 가지는 순수한 가치 그 자체를 신봉했다고 볼 수 있다.  아무래도 학교내에선 그런 이상적인 측면으로 함몰되기 싶상이니 말이다. 

이러한 측면은 이 영화의 가장 마지막 장면에서 확인할 수 있다.  배신자 가족들을 전부다 처단한 이후 그는 홀로 서재에 앉아 과거를 회상하게 된다.  아버지 비토 꼴리오네의 생일날 그는 2차대전에 참전하기로 했다고 선언해버리고 가족보다 미국이라는 국가와 자유가 더 중요하고 말한다.  그리고 그는 심지어 아버지가 집안으로 들어왔을때 전부다 아버지를 맞으로 가지만 그는 이를 무시한채 꿋꿋하게 밥만 먹을뿐이다.  이러한 일련의 장면을 통해 그가 얼마나 미국이라는 국가가 내세우는 가치와 자유에 대해서 믿음이 강했는가를 확인할 수 있다. 

하지만 그는 아버지의 어처구니 없는 피습사건을 통해서 미국이라는 사회가 가지고 있는 본질적 모순을 깨닫게 된다.  즉 아메리칸 드림이라는 하나의 가치관과 지속적으로 강조하던 하나로서의 애국심이라는 것이 얼마나 모순되고 허망한 것인지 말이다.  이러한 마이클의 깨달음은 위에서 말했던 이민자들의 삶 내부에서 드러나는 모순성과 마피아들 내부에서 나타나는 모순성과 정확히 일치하는 측면이다.  겉으로는 항상 상징적 선을 강요하면서 그 내부에 필연적으로 포함될 수 밖에 없는 상징적 악에 대해서 말이다.  아무튼 그러한 경험을 통해 마이클은 점차 변해간다.  그가 그렇게 경멸해하던 패밀리라고 하는 것의 결속력을 그는 더욱 중요시 여기고 아주 철저하게 다져나가게 된다.  이는 자신의 불안한 입지도 어느정도 작용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극중에서는 아직 대부가 된지 얼마 안된 그에게 위협이 지속적으로 다가오게 된다.  그에게 반발하는 패밀리들도 생기게 되고 급기야 자신을 팔아넘긴 배신자까지 발생하게 된다.  재미있는건 그 배신자가 자신의 혈육인 형이라는 점이다.  이와 동시에 또 한가지 재미있는 사건이 있는데 자신의 부인과 관련된 장면이다.  그는 자신의 패밀리들에게는 아주 각별하게 대한다.  그런데 유산한줄 알았던 자신의 부인이 알고보니 낙태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그의 분노는 폭발하여 부인을 패밀리에서 내쫓게 된다.  이러한 장면들은 무엇을 의미할까?

그는 아버지 비토 꼴리오네의 그것을 이어받아 패밀리에 대한 애정과 중요성을 매우 강조하게 된다.  이러한 측면에서 비토와 마이클은 연결되는 인물이자 하나의 인물이라고 볼 수 있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배신을 행한자들에 대해서는 단한치의 용서도 존재하지 않는다.  아주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도 그의 복수는 철저하게 이루어지니 말이다.  가장 중요하고 소중한 패밀리와 그와 동시에 진행되는 잔인한 숙청.  이러한 모순점은 위에서 지속적으로 언급한 미국이라는 사회가 가지고 있는 모순점과 이민자들의 삶속에서 나타나는 모순점을 정확히 드러내게 된다. 


그리고 한가지 더 짚어보자면 이러한 모순적 측면과 별개로 마이클이 보여주는 변화적 양상 그자체에서 어떤 코드를 읽어낼 수도 있다.  즉 순진했던 마이클이 점차 고독한 남성으로 변해가는 일련의 양상들을 통해서 현대인은 자신의 삶속에서 드러나는 동일한 코드를 읽어낼 수 있다는 것이다.  즉 마이클과 자신의 동일시 현상이다.  그를 통해서 많은 성인들이 자신들이 가지고 있던 외로움이나 고통을 이해 받는듯한 감정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그렇기에 이 영화는 아이들이 보면 지겹다고 하지만 성인들이 보면 최고라고 극찬하게 되는 것이다.


마무리
이 작품은 세세한 미술들은 봐줄만 하지만 솔직히 뛰어난 영상미를 보여주는 작품은 아니다.  온갖 상징들로 점철된 작품도 아니다.  표현기법이 아주 독특한 것도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가 위대한 작품의 반열에 오른 이유는 서사적 기법이 가지고 있는 그 예술성 그 자체에 존재한다.  스토리텔링을 해야 하는 예술은 서사가 각장 중요하다.  이러한 서사를 어떤식으로 배치하느냐 따라서 이런 천재적인 작품이 나오기도 하는 것이다. 

그런데 국내의 많은 감독들은 이런 서사기법을 완벽하게 무시하는 양상을 자주 보여준다.  특히 그중에서도 시트콤 분야에서 이런 측면은 더욱 두드러진다.  그들에게 하고 싶은말은 단 하나이다.  코폴라 감독의 대부2를 보고 공부좀 하라고 말이다.  기본이 안된 감독들과 그런 기본도 안된 작품들에게 환호를 보내는 질낮은 관객들 덕분에 한국의 영상 발전은 정말 더디고 더디니 어찌 안타깝다 하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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