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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옥의 묵시록(1979), 전쟁 그 환상적 기표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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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옥의 묵시록(Apocalypse Now)
프란시스 포드 코폴라 감독의 8번째 작품이다. 전작인 컨버세이션이 칸에서 황금 종려상을 받게 되었는데 5년뒤에 내놓는 이 작품도 연달아 칸에서 황금 종려상을 받게 된다. 어디 그뿐인가? 그는 대부부터 4작품 연속으로 최고의 찬사를 받게 되는 작품들만 내놓게 되니 이보다 더 화려한 필모그래피를 가진 감독이 어디 흔하겠는가? 72년도 대부부터 시작하여 아마 코폴라 인생에서 가장 화려한 10년이 아닐까? 코폴라 감독의 필모를 유심히 살펴보면 스콜세지 감독과의 차이점이 확 드러나게 되는데 스콜세지 감독이 이민자의 문제와 현대인의 양상을 뉴욕이라는 도시와 갱스터를 통해 그려냈다면 코폴라는 전쟁과 군인이라는 것을 자주 활용하는 모습을 보여주게 된다. 이 작품은 그런 양상의 첫번째 작품이라고 볼 수 있다.
월남전이 배경인데 조셉 콘라드의 암흑의 핵심을 변용하여 각색한 작품이 바로 지옥의 묵시록이다. 79년도에 칸트에서 첫 공개된 이후 최근에는 리덕스판이라는게 나오기도 하는 등 상당히 오랫기간 사랑받고 또 평자들의 중심에 서있게 되는 작품이다. 전쟁을 대상으로 한 영화중 이정도의 완성도를 보여주는 작품도 흔친 않으니 말이다. 그래서인걸까? 최근 이라크 전쟁을 가지고 또 이런 저런 작품들이 나오기 시작하는바 서로 이라크전의 묵시록 자리를 꿰차기 위해 벌이는 경쟁적 양상이 흥미롭다. 과연 누가 승리할련지. 뭐가됐든 아직까지 뭔가 획기적인 영화는 보지 못했다는 점이다.
호기심에 해외논문들을 찾아보니 이 작품은 특히 커츠대령을 놓고 많은 이야기들이 오고가는걸 알 수 있었다. 한마디로 이 작품에 대해 호평을 하던 혹평을 하던 양쪽다 커츠대령의 장면들에 대해서는 혹평으로 일관하게 되는바 커츠대령 시퀀스로 인해 영화 전체의 통일성이 상실되었다들 한다. 영화를 보신분들이라면 커츠대령을 놓고 왜 많은 말들이 오가는지 충분히 이해하시리라 믿는다. 영화의 마지막에 이르러 등장하여서는 뭔가 신비로운듯한 느낌을 풍겨내는 그의 이미지는 이제껏 영화의 전반과 중반에서 보여준 전쟁과 광기라는 양상과 크게 벗어나기 때문이다. 하지만 잘 생각해보면 크게 이해가 안될 것도 없는 부분이다. 어떤 의미에서 그럴까? 그건 바로 강이라는 측면에서 발생한다. 영화는 지속적으로 강을 거슬러 올라가게 되고 그 끝에서 커츠대령을 만나게 되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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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 그 환상적 기표
언어라고 하는 것이 상당히 재미있는 측면이 있다. 예를 들어 의자라는 단어를 생각했을때 당신의 머리속에 떠오른 의자와 나의 머리속에 떠오른 의자는 분명히 다를 것이다. 이 사실이 의미하는 것은 의자라는 단어가 특정한 지시대상을 가르키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수만명에게 의자라는 단어를 떠오르게 하면 그사람의 머리속에 떠오르는 의자는 그 생김새가 다 다를테니깐. 결국 의자라는 단어가 가리키는 것은 실재 존재하는 어떤 특정한 의자가 아닌 개념이라는 것이 된다. 의자라는 개념은 다음과 같이 정의된다. "사람이 걸터앉는 데 쓰는 기구"
사람이 걸터앉는데 쓰는 기구라. 그럼 우리는 여기서 또 한가지 생각이 가지게 된다. 사람은 뭔가? 사람이라는 단어를 통해서 우리는 머리속에 다양한 종류의 사람들을 떠올리게 될 것이고 이들은 결코 하나의 인간형태로 일치되지 않는다. 그렇기에 사람이라는 단어 역시 특정한 실체를 가리킨다기 보다는 "생각을 하고 언어를 사용하며, 도구를 만들어 쓰고 사회를 이루어 사는 동물"이라는 개념을 가리키게 된다. 여기서 다시 또 언어와 도구, 사회, 동물은 무엇인가?로 나아갈 수 있다. 혹자는 이를 두고 어린아이들이 흔히 하는 말장난이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이 말장난은 정말 위대한 말장난이다.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라는 것은 저런식으로 항상 개념어를 지시하게 되고 그 개념어는 끊임없이 연쇄사슬로 연결되게 된다. 그리고 각각의 단어들이 지시하는 개념어는 계열축과 통합축으로 이루어진다. 예를 들어 의자라는 단어가 지시하는 "사람이 걸터앉는데 쓰는 기구" 라는 개념을 보았을때 핵심이 되는 것은 사람, 앉는다, 기구 요렇게 총 세가지라고 볼 수 있다. 여기서 통합축이라는 것은 이 사람과 앉는다 그리고 기구라는 것의 조합을 의미하게 되고 계열축이라는 것은 사람을 인간으로 바꾸어도 말이 된다는 측면을 의미하게 된다.
통합축을 좀 더 말해보자면 "사람이 걸터앉는 기구"라고 했을때 이 조합을 약간 바꾸어 "걸터앉는 사람 기구" 로 바꾸어버리면 이것은 의미를 가져오지 않는다. 이러한 측면이 통합축이 가지는 문법의 기능이다. 결합축은 어떠한가? "사람이 걸터앉는 기구" 라고 했을때 여기서 사람과 기구를 다른 단어로 대체해보자. "인간이 걸터앉는데 쓰는 물체"라고 정의하여도 의자라는 단어의 개념을 만들어내는데는 큰 지장이 없는바 바로 이러한 단어의 대체를 바로 계열축이라고 하는 것이다.
결국 중요한건 저러한 가로세로축으로 인해 단어들 즉 기표는 끊임없이 다른 기표들로 의해 구성되게 되고 이는 끝없이 밀고나아가는 전체적인 그물망과 같은 형태라는 점이다. 그리고 그 기표들 아래에 있는 기의 즉 그 단어가 가지는 의미들은 끊임없이 미끄러지고 간극을 만들게 된다. 뭐 간단히 말해서 인간은 저러한 언어가 가지고 있는 그물망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의미이고 인간은 저 언어의 그물망속에서 살아가게 된다.
영화로 돌아가 모든 전쟁 영화들이 반드시 내보이는 하나의 특징이 있는바 그것은 전쟁을 경험하는 사람들과 그 가족들이 본국에서 생각하는 것과의 괴리감이다. 지옥의 묵시록에서도 그런 측면은 등장하게 되는바 본국에 있는 가족들이나 연인이 군인들에게 보낸 편지따위들에서 여실히들어나게 되는바 총알이 빗발치는 전쟁터 한 복판에서 느끼는 군인들의 감정과 그 편지가 대단히 모순된다고나 할까? 심지어 극중에 어떤 부모는 비디오 테잎을 보내기도 한다. 그들은 베트남에서 그 비디오 테잎을 언제든지 볼 수 있을꺼라 생각한 것일까?
이것의 의미하는 것은 전쟁이라고 하는 기표가 가지는 기의가 각기 다르게 다가온다는 것이다. 군인들이 느끼는 전쟁이라는 단어가 함축하는 기의와 본국에서 가족들이 바라보는 전쟁이라는 기표가 의미하는 기의는 철저하게 분리된다. 본국에서 있는 사람들은 절대로 참전 용사들이 받아들인 전쟁이라는 단어가 가지는 의미를 이해할 수 없다. 그렇기에 수많은 참전용사들이 본국으로 돌아갔을때 그곳에서 적응하지 못하는 현상이 발생하는 것이다. 이는 극중 주인공 역시 마찬가지이다. 그는 전쟁터에 있을때는 항상 집에 돌아가길 원했지만 집으로 돌아가서는 다시 전쟁터를 그리워하게 된다. 즉 어느곳에도 속하지 못한다고나 할까? 그렇기에 그는 자신의 부인과 말한마디 하지 않은채 이혼하고 홀로 폐인처럼 지내며 새로운 임무만을 기다리는 것이다.
새로운 임무를 받아 다시금 베트남으로 돌아간 그에게 주어진 임무는 커츠 대령이라는 요주의 인물을 살해하라는 임무이다. 겨우 그곳으로 돌아간 그에게 돌아온 명령이 아군 장교를 죽이라는 명령이라니. 그런데 그 커츠 대령이라는 인물이 보여주는 양상이 너무나도 흥미롭다. 완벽한 군인인 그는 어느날 갑자기 캄보디아로 들어가 그곳에서 자신만의 작은 왕국 비슷한것을 만들어 살고 있는데 그의 휘하에 있던 수많은 군인들이 전부 그곳에 남아버렸다는 것이다. 심지어 극중 주인공보다 먼저 커츠대령을 살해하라는 명령을 하달받고 떠난 사람도 그곳에서 그냥 머물러 버리게 된다. 이에 주인공은 커츠 대령에 대한 호기심을 품은채 강을 거슬러 올라가게 된다.
이 영화에서 공간의 문제는 철저하게 강위에서 이루어진다. 강을 처음부터 거슬러 올라가 캄보디아까지가게 되는 식이다. 그리고 그는 그 강을 거슬러 올라가면서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게 되고, 그로 인해 전쟁이라는 단어가 가지는 기의가 점점 변하게 되는 것을 확인하게 된다. 처음엔 서핑에 미친 군 지휘관을 만나게 되고 조금 더 거슬러 올라가서는 포르노 배우들이 위문공연을 하러 다니는 현장을 보기도 한다. 더 올라가다 멀쩡한 베트남 민간인들을 죽이는 사건을 벌이기도 하고 오랜시간 그곳에서 살아 베트남을 고향처럼 여기는 프랑스인을 만나기도 한다.
즉 강을 거슬러 올라가면서 시간도 마치 거슬러올라간다는 느낌이랄까? 중요한건 그 강을 거슬로 올라가면서 만나게 되는 사람들이 전쟁이라는 단어 밑에 흘러가는 의미를 각기 다르게 받아들인다는 점이다. 그리고 그들이 보여주는 하나의 공통점은 강을 거슬러 올라가면 올라갈수록 전쟁에 대한 허무적 성향이 점점 깊어지는 양상을 보여주게 된다. 즉 강의 상류에 사는 사람들일수록 전쟁의 허무성을 더욱 깊게 느낀다고나 할까? 결국 극중 주인공은 그 강을 거슬러 올라가면서 전쟁이라는 단어가 가지는 다양한 의미와 그 허무성을 뼈져리게 느끼게 된다.
정리하자면 전쟁이라는 단어는 결코 하나의 지시대상 또는 하나의 개념어를 가르키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전쟁은 대단히 허구적인 기표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전쟁을 통해서 많은 것을 해결 할 수 있을것 처럼 생각하여 미국인들은 수만명의 미군을 베트남에 쏟아부었지만 돌아온건 수백만의 사상자와 미국의 패퇴. 그리고 수많은 상처들뿐이다. 그리고 이 모든 것들이 의미하는 것은 전쟁이 가지고 있는 환상적 기표로서의 성격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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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의 파편화와 그 속의 순수
강을 끝없이 거슬러 올라다가 결국 강의 끝에서 주인공은 커츠 대령을 만나게 된다. 대단히 독특한 인물로서 거의 그곳에선 신과 같은 양상으로 존재하는 인물이다. 그는 여러가지 이야기를 하는데 자신이 직면했던 공포라는 것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기도 하고 자신의 경험에 대해서 이야기하기도 한다. 예방접종을 맞으러 간 아이들의 팔을 잘라 통속에 보관하는 어느사람의 이야기나 자신의 이빨을 전부다 뽑아내고 싶었다는 경험들 말이다. 그러다 그는 깨달았다고 한다. 그속에 담겨져있는 어떤 순수한 힘을 보았다고 말이다.
커츠 대령은 가장 완벽한 군인이다. 그의 커리어는 너무나도 화려해 눈이 부실정도이다. 그러면서 대단히 인간적인 면모를 보이는 아주 완벽한 군인인 그는 다양한 전쟁 경험을 통해 인간 내면의 어떤 순수한 무언가를 보게 된다. 그게 무엇일까? 그 순수함은 평범한 상태에서는 결코 발견할 수 없는 성격의 것인바 그것을 발견하기 위해서는 인간의 정신이 파편화되어야 한다. 이러한 인간 정신의 파편화는 그 파편화된 개개의 것에 공격성을 나타나게 되고 그 공격성은 아주 순수한 형태의 공격성을 띄게 된다. 이는 인간이 주체성과 주체성 확립 그 이전에 생겨나는 나르시즘적 자아의 발생 그 이전에 존재하는 파편화된 신체에 대한 기억과 그것에서 발생하는 공격본능을 의미하는 것이다.
즉 쉽게 말해 이는 거울단계 이전에 존재하는 파편화된 자신에 대한 공격본능이다. 거울단계는 1세 전후의 어린아이에게서 발생하는 현상으로 거울을 보면서 아이는 자신이 하나의 전체로서의 완전한 형태를 띄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하지만 아이는 아직 1세 전후이므로 자신의 몸을 완벽하게 통제하지 못하는 경험을 가지고 있다. 즉 자신의 신체를 완전하게 통제하지 못하는 개인적 경험과 거울속의 완벽한 이미지는 서로 상충하게 된다. 이때 자신의 신체에 대한 불완전한 통제의 경험은 파편화된 신체에 대한 경험으로 다가오게 되고 그렇기에 이것에 대한 공격본능이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 이 공격본능은 거울단계에 진입했을때 등장하게 되는바 거울에 비친 완전한 자신의 이미지에 대비하여 나타나는 자신의 경험이 말해주는 파편화된 신체에 대한 공격본능인 것이다.
결국 커츠대령이 발견한 것은 자신의 정신의 파편화를 통해 그속에 숨어있던 그 순수한 공격본능인 것이다. 이 공격본능을 이끌어낼 수만 있다면 그가 못이룰 것이 무엇일까? 정상적인 삶을 영위하면서도 저 순수한 본능을 이끌어낼 수 있다면 그것이야 말로 가장 완벽한 군인인 것이다. 이러한 커츠 대령의 생각을 극중 주인공은 너무나도 잘 이해하게 된다. 그 역시 전쟁터에서 정신이 완벽하게 파편화되고 박살나버린 인물이기 때문이다. 아무튼 그는 결국 커츠 대령을 마지막에 죽이게 된다. 그리고 그때 주인공이 보여주는 그 죽임의 행위는 너무나도 순수하게 다가오는바 극의 마지막에서 주인공은 가장 순수한 공격본능을 발휘하여 커츠 대령을 살해하는 것이다. 그런 그를 본 수많은 커츠대령의 추종자들은 커츠 대령을 죽인 그를 가만히 바라만 보게 된다. 그에게서 커츠대령의 무언가를 느꼈던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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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무리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보자. 많은 비평가들이 커츠대령을 놓고 일관성이 없다고 혹평하였다는 것을 서두에서 언급하였다. 하지만 그들은 영화를 심각하게 곡해했다고 밖에 생각할 수 없다. 그 이유는 위의 설명을 통해 충분히 이해하셨으리라 믿는다. 이 작품은 전쟁영화치고는 대단히 정적인 영화이고 가장 유명한 바그너씬 말고는 그렇게 흥미로운 장면도 등장하지 않는다. 하지만 이 작품만큼 전쟁이라는 양샹을 잘 표현한 작품도 없으며 앞으로도 없을 것이다.
강을 거슬러 올라간다는 설정과 그 끝에서 만나는 원시적 본능의 발견이라는 측면이 얼마나 놀라운가? 이건 쉽게 나올 수 있는 양상이 아니다. 대단히 천재적이라고 할까? 많은 사람들이 코폴라 감독하면 대부만을 떠올리지만 사실 코폴라 감독의 필모에서 대부는 아무것도 아니라고 할 정도로 지옥의 묵시록이 보여주는 완성도는 정말 엄청나다 못해 아름다울 지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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