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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중문화 몰락의 길을 걷는가?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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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중문화 몰락의 길을 걷는가?

유쾌한 인문학 2011. 3. 4. 06: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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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중문화.  굉장히 모호한 말처럼 들리지만 의외로 단순하게 이해될 수 있다.  대중문화라는 것이 생겨나기 이전의 문화적 토대를 살펴보면 쉽게 이해가 되는데 그 이전에는 민중 중심의 민속 문화와 귀족이나 양반 중심의 고급 문화로 정확히 양분된다.  우리나라의 예를 보더라도 궁중 음악이나 무용 이런 부분들은 철저하게 고급문화로서 자리매김하여 특정한 교육을 받아 이를 이해할 수 있는 특정한 계층에 의해서 향유된다.  이러한 상황에서 사회 전반의 교육수준의 향상 그리고 새롭게 등장한 매체의 발달 등은 문화의 수용범위를 확장시키게 되고 그로서 기존의 민속 문화와는 약간 다른 형태의 민중 문화가 발생하게 되는바 이것이 대중문화의 실체이다.

이는 하나의 뚜렷한 실체라기보다는 전반적인 현상으로 보아야 한다.  그렇기에 이 현상을 놓고 다양한 견해들이 등장하게 된다.  이러한 대중 문화론과 관련하여 고전의 지위에 속하는 학자들이 크게 두부류가 존재하는데 첫째는 독일의 프랑크 푸르트 학파의 초기 견해이고 둘째는 벤야민의 견해이다.  특히 1930넌도의 프랑크 푸르트 학파의 대중문화론은 대중문화 연구의 맹아와 같은 위치를 점하게 된다.  이러한 초기의 연구는 아도르노의 문화 산업론으로 설명이 되는데 대중문화 자체를 부정적으로 바라보는 특징이 있다.  즉 대중 조작의 수단으로서 바라보게 되는데 이와 반대로 벤야민은 대중문화와 관련하여 예술의 정치화 개념을 만들어 대단히 긍정적으로 바라보게 된다.  본 글에서는 프랑크 푸르트 학파의 문화 산업론에 대해서 간단하게 설명을 해보겠다.  벤야민에 대해서는 아래의 링크를 통해서 확인하시면 좋겠다. - 원래는 전면 비교 형식이 좋겠지만 블로그라는 매체의 특성상 너무 길어지고 아무도 안본다는 문제점이 있기에 둘로 나눌 수 밖에 없다. -


문화산업론
현대 사회는 합리성의 지배를 받고 있다.  합리적이라는 것은 이성 중심적 가치관을 말한다.  이러한 합리성의 지배를 받고 있는 사회에서 예술 특히 대중문화의 역할이 중요해진다.  인간에게는 기본적으로 자기보존 욕구가 있다.  근대에 들어와서 인간은 이를 안정시키기 위해서 자연의 지배를 꿈꾸게 된다.  이러한 자연과 싸우고 이를 지배하기 위해서는 사회 또는 국가가 체계성을 함유하는 방향으로 발전해야 한다.  단결된 인간의 힘은 자연을 효율적으로 제어할 수 있는 수준에 이르게 된다.  하지만 못지 않은 부작용도 발생하는데 자연에 저항 하기 위해 사회조직을 발전시키면서 이는 자연스럽게 인간에 대한 지배로 나아가게 된다. 

즉 인간은 외적 자연의 지배자이자 내적 자연의 지배자가 된다.  외적 자연은 말 그대로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대자연을 의미하고 내적 자연은 인간의 감정, 욕망 이러한 것을 인간의 내적 자연이라 부르고 인간에 대한 지배라 함은 이러한 내적 자연의 지배를 의미한다.  이러한 내적 자연의 지배는 초기에는 이전과 비교하여 새로운 형태의 억압으로 다가오지만 어느시점을 넘어서면 당연한 것이 되어버린다.  즉 억압 자체가 내면화 되어버린 것이다.  이를 두고 억압의 지배를 받는 자이자 억압의 지배를 행하는 자라고 표현하는 것이다.  이는 결국 극심한 인간소외를 불러오게 된다.  이때 발생하는 인간소외의 가장 큰 특징은 지배 하는 자나 지배 받는 자나 똑같이 발생한다는 점이다.  이와 관련하여 호메로스의 오뒷세이아에 등장하는 세이렌 신화를 얘기해보겠다.  오디세우스는 세이렌의 노래가 너무 나도 듣고 싶었지만 그걸 듣고 죽을수는 없었기에 부하들은 귀를 막고 노만 젓게 하고 자신은 돗대에 꽁꽁 묶어놓은채 그 노래를 듣는 것이다.  이 이야기를 통해 우리는 피지배계층 즉 노 젓는 부하들의 인간소외는 어려빚 않게 이해할 수 있다.  지배계층인 오디세우스의 인간소외는 어떠할까?  그는 자기 나름대로는 세이렌의 음악을 들었다고 하겠지만 결국 이는 자기 자신의 통제에 기반한 향유에 불과한 것이다.  이것이 바로 세이렌의 신화가 가지고 있는 넌센스이다.

그렇다면 저러한 형태의 인간소외가 가능하게 된 근본적인 원인은 어디에서 나오는가??  결국 이는 인간의 효율적 지배를 위해 인간을 계량화 하는 것에서 시작한다.  계량화된 인간은 결국 인간 개개의 차이점을 무시하게 된다.  계량화된 인간은 사유할 수 있는 능력을 잃어버리게 되고 인간의 이성은 수단에 대한 비판보다는 수단 그 자체의 효율성에만 집중하게 된다.  이것을 두고 도구적 이성이라 부른다.  결국 데카르트 이후의 인간을 중심에 세운 합리성의 세계는 철저한 자기통제의 시스템으로 전락하게 된 것이다.  이러한 도구적 이성은 대중문화를 인간 지배의 수단으로 만들게 된다.  보통의 관념은  대중문화가 우리가 원했기에 우리에게 제공된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는 엄밀히 잘못된 생각이다.  대중문화는 지배계층에 의해 표준화되어 우리에게 제시되고 우리는 그것을 소비하는 것이다.  이러한 표준화된 대중문화를 소비하다보니 우리 스스로가 이것에 종속되어버렸고 결국 우리는 이런 것을 다시 요구하는 현상을 불러오게 된다.  이렇게 말을 하면 마치 대중문화가 어떠한 의지를 가진채 일정한 방향으로 대중을 이끌어나간다고 생각 할 수도 있는데 이 역시 엄밀히 잘못된 생각이다.

예컨대 방송에는 드라마도 있고 다큐도 있고 시사프로그램도 있고 음악방송도 있고 이런 저런 아주 다양한 형태의 방송들이 존재한다.  여기에서 왜 자본은 쓸데 없이 저런 다큐나 시사프로그램을 처음부터 만들어서 제시했을까?  단순히 공익성때문이라면 현재 저것들이 점점 사라져가는 현상을 설명할 수가 없다.  결국 원인은 간단한다.  그걸 원하는 사람이 있었기 때문이다.  방송 자본의 목적은 특정한 방향으로의 이끔보다는 모든 대중을 방송의 틀안에 가두는 것에 존재한다.  즉 쉽게 말해서 토요일 오후 6시 30분에  MBC가 반드시 무한도전이라는 예능을 방송해야할 당위는 존재하지 않는다.  대중이 그 시간에 100분 토론을 보길 원하다면 자본은 그냥 100분 토론을 방송하면 그뿐이다.  방송 자본의 궁극적 목적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티비앞에 대중을 앉혀 놓는 것 그 자체에 존재한다.  앉혀놓을 수만 있다면 방송되는 컨텐츠의 내용은 중요하지 않다.  이게 바로 저런 공익성을 가진 프로그램들이 생산되는 이유이다. 

그렇다면 이런 것들이 사라지는 이유도 뚜렷하게 나타나는데 대중들이 저런 공익성을 가지고 있는 프로그램을 외면하는 때문이다.  자본의 억압이 시작되는 지점은 바로 대중이 외면이 심화되는 지점에서 발생한다.  수요가 확실하다면 자본은 그 수요에 충실하게 맞추겠지만 지금처럼 그 수요가 극히 줄어든다면 자본의 입장에서 굳이 그걸 만들어서 제공하는 것 보다 대중을 다른쪽으로 유도하여 관심을 더 떨어트리게 하는게 낫다.  대중문화산업자본이 대중문화를 대중의 지배수단으로서 활용하게 되는 지점이 바로 여기이다.  결국 이러한 태도로서 바라보는 대중문화는 대단히 부정적인 면을 가질 수 밖에 없다.  자본우위라는 자본주의 큐브 시스템속에서 만들어지고 살아가는 존재이기에 대중문화는 문화로서의 측면을 상실하고 거대한 산업의 측면을 가지게 되며 이는 대단히 수동적인 면모를 부각하게 된다.


마무리
오늘날 이 논의를 가지고 대중문화를 설명하기에는 약간 무리가 따른다고 할 수 있겠다.  더 많은 발전된 학의가 존재하며 바라보는 시각 자체도 다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 논의 자체가 무의미한 것은 아니다.  이논의를 바탕으로 하여 전개가 더 치밀해졌기 때문이다.  특히 대중문화에 대한 부정적인 시각은 차지하고서라도 문화산업의 본질에 대한 설명은 지금도 상당히 유의미 하지 않은가 판단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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