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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포칼립토(2006), 상대주의와 그 문제점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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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포칼립토(2006), 상대주의와 그 문제점

유쾌한 인문학 2012. 7. 26. 0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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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포칼립토

멜 깁슨 감독의 4번째 작품이다.  더 페이스, 브레이브하트,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를 거쳐 아포칼립토에 이르는 여정을 보자면 정말 재능이 넘치는 감독이 아닐까 생각된다.  재미있는건 이사람 전 작품들이 보면 뭐랄까.  신체훼손이라는 모티브가 자주 등장한다는 점이다.  사람을 일그러뜨리고 칼로 베고 자르며, 못 박힌 고통을 그대로 전달하는가 하면 본작에서는 살아 있는 사람의 심장을 꺼내는 극단적인 묘사도 그대로 재현해낸다.  흥미로운 방법론인데 너무 사실적으로 다가오는 신체훼손과 그 고통의 감정이입은 그 이면에 담겨있는 주제의식에 더욱 또렷하게 다가가게 해주는 장점이 있는듯하다.  


아포칼립토는 마야 문명에 대한 마야 문명에 대한 극사실적 묘사이다.  그 문명을 어떻게 영화로 그려낼 것인가?  어떠한 측면을 부각시킬 것인가?  접근 방법은 여러가지가 있겠지만 멜 깁슨은 주저 없이 모든 문헌과 자료를 총 동원하여 고대로 묘사해버린다.  그리고 마지막엔 마야 문명의 멸망의 시작 즉 스페인 사람들의 도착까지 그려내게 된다.  영화 자체가 이런식으로 그려지다보니 자연스럽게 호불호가 확 갈리게 된다.  어떤 이는 걸작이라 칭찬하지만 또 다른 이는 기독교적 종교관 세계관에 입각한 편협한 영화라고 치부하기도 한다.  


주된 이유는 영화 속 두장면에 존재하는데 영화의 처음에 나오는 윌 듀란트의 그 유명한 말 "위대한 문명은 외부의 침입에 의해 정복당하기 전에 내부로부터 먼저 붕괴된다"  이 말과 마지막에 나오는 스페인 침략자에 대한 표현에서 기반한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이 두장면이 없었다면 이 작품은 그냥 마야 문명에 대한 자세한 묘사.  그정도로 그쳤을거라 보여진다.  하지만 멜 깁슨은 이 두장면을 집어 넣게 되고 따라서 자연스럽게 이러한 해석론이 도출된다.  마야문명은 분명 위대한 문명이다.  하지만 그들이 가지고 있던 잔인성과 비이성적인 비합리적인 인식에 의해 스페인 침략자들에 의해 멸망하기 전에 이미 멸망의 씨앗을 가지고 있었다.  이부분이 문제가 되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이미 알고 있듯이 마야문명의 멸망은 내부적 요인이라기 보다는 한줌도 안되는 스페인 침략자의 총도 칼도 아닌 그들이 옮겨온 병원균이 가장 큰 문제였다.  


아무튼 참 모호한 부분인데 대부분 수많은 영화속에서 던져지는 모호한 문제 하지만 쉽게 무시하기는 어려운 그런 문제는 윤리의 문제로 귀결되곤 한다.  즉 윤리와 논리의 문제이다.  뚜렷한 정답도 없고 여기에도 호불호가 확 갈리는 게다가 논리학과 땔래야 땔 수 없는 밀접한 관계를 가지는 윤리의 문제.  그 시작점은 어디일까?



상대주의

윤리에 있어 상대주의와 절대주의의 대립양상은 그 역사가 꽤나 오래된 논의 중 하나이다.  오늘날에는 문화상대주의라는 이름으로 널리 알려져있기도 한 상대주의는 그 안에서도 내가 아는것만 대략 3가지 정도의 분류가 있을 정도로 그 양상은 그리 간단치가 않다.  일단 상대주의가 발전하게 된 이유는 대단히 간단하다.  데카르트의 생각하는 나에서 시작된 인간 중심의 주체성 철학은 독일 관념론을 통해 완성이 되고 그렇게 중심에 선 인간 정확히는 서양인은 합리성과 이성이라는 미명하에 굉장히 주관적인 입장에서 객체들을 향해 나름의 정의를 내리게 된다.  자연스럽게 흑인이나 이교도인들은 인간 취급을 안하는 문제가 발생하고 그들의 문화도 그리스도교도 아닌데다 지나치게 원시적이다 판단하여 계몽의 대상으로 취급하게 된다.  이때 형성되는 주된 개념이 바로 자민족중심주의로서 모든 문명을 자신의 문화적 태도와 신념에 따라서 해석하고 그것만이 옳다고 여기는 태도이다.  그를 통해 발생하게 된 폭력에 대한 반성이 바로 상대주의의 핵심이다.  즉 자민족 중심 또는 자문화 중심적 태도가 가져온 특정 문화 또는 사회에 대한 혼란에 대한 반성인 것이다.  오늘날에는 이러한 상대적 관점이 널리 퍼져 대단히 당연하게 여겨지기도 한다.  이러한 상대적 관점은 크게 봐서 두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주관적 윤리 상대성과 규범적 윤리 상대성이다.  



주관적 윤리 상대성

이는 아주 극단적인 견해인데 윤리란 가치나 문화의 문제가 아닌 지극히 개인적인 문제라고 보는 견해이다.  간단히 말해 내가 좋다고 느끼면 그건 윤리적인 것이고 내가 안좋다고 느끼면 그건 비윤리적인 것이다.  즉 도덕원리는 개인이 수용 한 것에 의해 정당화된다는 식이다.  이런식의 논리로 나아가면 연쇄 살인마 같은 사람도 도덕적인 사람으로 간주될 가능성이 있다.  즉 자신의 행동에 대해 확신과 나름의 논리성을 가진채 행하였기 때문에 도덕적으로 파악되는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측면은 논리적 일관성을 유지하기가 굉장히 어려울 수 밖에 없는데 예컨대 살인마가 자신을 사형시키려는 판결에 대해서 항소를 하는 행위를 한다면 그 즉시 자신의 논리는 무너질 수 밖에 없다.  즉 반대로 보아 사형을 시키려는 의지도 주관적으로 봤을땐 도덕적인 것이 되니 말이다.  이렇듯 윤리의 문제는 논리의 문제로 귀결된다.  


이러한 논리라면 도덕은 취향의 문제가 되고 마는데 이러한 주관적 상대성은 많은 경우에 있어 논리 일관성을 유지한다는 것이 굉장히 어려운 일이다.  더 간단한 예로 시험을 들어보자면 어떤 학생이 주관적 상대성을 신봉한다고 답안지를 썼다고 해보자.  그럼 채점을 하는 입장에선 주관적 상대성의 입장에서 아무리 그 답안이 훌륭하더라도 0점을 주면 그뿐이다.  그럼 그 학생은 그걸 받아들이는게 논리적으로 맞는 것인데 그런 경우가 얼마나 될까?  결국 이러한 입장은 지독한 유아론에 입각한 견해로서 논리적 일관성을 유지하기도 힘들다는 문제점이 있다.



관례적 윤리 상대성

주관주의가 가지는 이러한 문제점은 자연스럽게 상대성 안에 어느 정도의 규범성을 추구하게 되고 이것이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상대주의의 원형이다.  이는 간단히 말해 "도덕 원리는 특정 사회의 문화적 수용에 의해 정당화 된다"는 식이다.  즉 보편적으로 타당한 도덕원리는 존재치 않으며 문화에 따라서 상대적인 특성을 가진다고 보게 된다.  이러한 태도는 근대의 이성적 합리성과 계몽주의에 대한 반발에서 비롯된 것이며 타 문화에 대한 관용적 태도도 가지게 된다.  


이러한 규범적 상대성은 크게 두가지 논리를 가지게 되는데 첫째는 다양성 둘째는 의존성이다.  다양성 논리는 도덕적으로 옳고 그름은 사회와 문화에 따라서 다르기에 시대불문 모든 사회와 문화에 적용되는 보편적 도덕성을 정초할 수 있는 기준을 찾을 수 없다는 논제이며, 의존성 논리는 모든 도덕적 판단은 그 문화의 수용여부에 의해 타당성이 도출된다는 논제이다.  결국 이 두 논리를 따른다면 우리는 문화적으로 결정되어진 존재이면서 그러한 결정되어진 존재는 문화의 수 만큼 다양할 수 있을 것이다.  더욱이 이 논리는 같은 문화 또는 사회 내에서도 차이점을 드러낼 수 있다.  예컨대 같은 시대와 사회를 살아가는 공간 안에서도 지배층과 노동층, 지식층과 비식자층, 기술자와 예술가 등등이 같은 것을 볼 수는 없을 테니 말이다.  그리고 같은 사회라도 시간적 흐름에 따라서 그 문화가 수용한 규범성이 약간씩 바뀌기도 한다.  예를 들자면 노예제를 바라보는 태도, 여성을 바라보는 태도, 이혼을 바라보는 태도 등등에서 확인이 가능 할 것이다.  



우리는 흔히 이 문제를 논할때 개고기라던지 이런 식의 식문화를 가지고 이야기를 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이런 부분 보다는 현재 지구촌사회에서 보편적 도덕이라고 여겨지는 문제에 다다르면 그리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예를 들어 여성 할례와 관련된 문제를 보자면 상대성을 주장하면서도 이문제에는 야만적이라고 비난하는 사람들을 자주 보곤 한다.  하지만 상대성을 그대로 유지하자면 거기에 대한 어떠한 비난도 가해져서는 안된다.  규범적 상대성은 상대적 관용에 기반하고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어떤 인류학자들은 그것에 대한 비난을 상대주의적 관점에서 비난을 행해서는 안된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히틀러의 유태인 학살은 어떠한가?  이 또한 그 당시의 독일 사회가 문화적으로 수용하였다면 정당한 행위로 귀결된다.  결국 지나친 상대성은 핵심적 가치를 훼손한다는 비판에 직면하게 된다.  결국 뭔가 문제가 있어보이는 행위도 한사람이 하면 야만이지만 사회 전체가 꽤나 긴 시간을 행한다면 그건 문화가 되고 옹호를 받게 되는 것이다.


영화속으로 들어가보자.  영화의 내용은 아주 간단하다.  마야인들의 종교관에 입각한 배고픈 신이라는 관점하에서 일식때가 되면 산 사람의 심장을 꺼내 바치게 된다.  그리고 그 상황은 그들의 문화이면서 카니발의 성격을 강하게 띄게 된다.  하지만 자기 사람들을 죽이진 않을터 자연스럽게 소수부족민들을 잡아와서 신에게 바치게 된다.  이러한 마야인들의 행위 즉 소수부족을 잡아다 그들의 신념과 문화에 따라 산재물로 바치는 행위를 상대적 관점에서 옹호하게 된다면 그 논리 그대로 스페인의 행위 역시 옹호되지 못할 이유가 없다.  이 부분이 규범적 윤리 상대성이 가지는 가장 큰 모순이며 비판점에 해당하게 된다.  멀리 볼 것 없이 서구 기독교가 보여준 폭력 행위 예컨대 마녀 화형 같은 것을 보자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비난을 행하곤 하지만 이 또한 문화상대성의 입장에선 옹호되어져야 마땅한 것이다.  서구 기독교의 야만은 비난받아야 하며 남미 문명의 야만은 옹호받아야 한다면 모순일 수 밖에 없다.  


또 다른 비판점으로는 문화나 사회라고 하는 것의 개념정의가 굉장히 불분명하다는 점이다.  오늘날과 같은 다원적 사회에서는 이는 더욱 모호해진다.  하다못해 같은 유교문화권이라 하더라도 한국과 중국과 일본은 분명히 다르지 않는가?   같은 한국 사회 안에서도 각기 다른 종교에 의해 다른 작은 문화가 형성될 수도 있다.  한 인간은 여기에 속하기도 하면서 저기에 속하기도 함으로써 작은 문화들 안에서 충돌이 발생할 수도 있다.  이는 영화속에서도 어렵지 않게 발견되는데 외부인의 관점에서 본다면 결국 남미 그리고 그다지 멀지 않은 곳에서 살고 있는 마야인과 표범발 부족은 같은 문화권 즉 같은 신화적 배경 아래에 놓여있다고 볼 수 있겠지만 이들이 무작정 같다고 보기엔 애매한 측면도 있다.  예를 들면 표범발 부족이 끌려갈때 강을 건너는 장면이 있는데 한 여성이 신에게 기도를 하게 되고 그때 나오는 신의 이름은 이슈첼이다.  이슈첼은 마야 문명에서 달의 여신을 칭한다.  동료가 죽을때는 '좋은 여행이 되길 바란다'는 말을 해주는데 이는 표범발 부족이나 마야인이나 똑같은 모습을 보여준다.  하지만 표범발 부족이 자신들의 죽음을 단순하게 받아들이는가?  결국 같은 신화적 문화권 아래에서도 부족이라는 측면에서 또 다른 차이점을 드러내게 되고 큰 사회가 적용하고자 하는 상대적 도덕은 작은 사회의 입장에서는 폭력에 불과한 것이다.  더욱이 이런식이라면 더 작은 집단을 만들어 어떤 행위에 대한 도덕적 타당성을 주장하는 것도 가능할 것이며 결국 이는 주관주의로 흐르게 될 위험성을 가지게 된다.  더 재미있는 것은 상대성이 가지고 있는 관용이라는 생각조차도 불분명한 측면이 있다.  즉 어떤 사회가 관용을 수용하지 않는다면 그 사회는 타 문화가 가지고 있는 상대성에 대해 관용을 할 필요가 없다.  그 또한 상대적이니 말이다.  



윤리적 객관주의

http://nermic.tistory.com/1073



마무리

윤리의 문제는 이렇듯 애매하다.  그렇기에 논리의 문제로 귀결된다.  나의 생각엔 저것이 옳다 라고 여기더라도 막상 나의 행동을 보면 논리적 일관성이 무너지는 경우가 꽤나 많다.  영화로 돌아가보자면 정말 논쟁적일 수 밖에 없는 마지막 스페인 침략자들 시퀀스와 주인공 표범발이 다른 살 곳을 찾아 숲으로 들어가며 말했던 새로운 시작에 관한 대사는 어떻게 보면 자연으로 돌아가서 살겠다는 의미로 볼 수도 있겠지만, 다른 한편으론 스페인 사람들이 저 원수 마야인들을 말살 시켜줄 것이라는 즉 표범발의 입장에서는 구원자처럼 보여질 여지도 분명히 존재한다.  그리고 개인적인 입장에선 후자가 더 크게 다가오는게 사실이다.  


일단은 마야문명이 저러한 측면때문에 이미 내부적으로 망할 수 밖에 없었다는 논리는 결단코 동의할 수 없다.  앞서 말했지만 그들의 멸망은 병원균이 가장 큰 문제였고 마야 문명은 그 저항도 상당했었다.  즉 저들의 멸망과 그 문화에 대한 논의는 그 범주가 다르다.  하지만 문화라는 측면만을 놓고 보더라도 오직 상대성이라는 이름하에 옹호하기에도 불편한 감이 있다.  그 문화에 의한 피해자는 말할 것도 없고 더하여 그 논리대로라면 스페인의 침략과 그들의 문화 전파에 대한 폭력성도 옹호가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또 그렇다고 너무 단순하게 보편적 관점을 들이대 저들의 행위가 잘못됐다고 말하기도 어려운 것이 그들의 인식론 하에서는 뭐라 하기가 애매하다.  이는 자연과학에 대한 낙후된 지식에 기반하는 것이고 그들은 그것을 진실로 믿었으니 뭐라고 할 수 있을까?  그들이 가지는 신에 대한 믿음이나 기독교 세계가 가지는 신에 대한 믿음은 그 무게가 동일하다.  카니발 기간내에 도륙한 인간의 수는 대략 8만 정도라 기록이 되어있는데 동물로 대체하면 안되느냐?  라는 질문이 던져질 수도 있는데 그 지역의 특수성 즉 가축 숫자의 부족에서 기반한 것이라는 인류학적 연구도 존재한다.


결국 과거의 저러한 문화를 놓고 이야기를 하자면 사실 상당히 애매한지라 사람에 따라 다르게 받아들일 수 밖에 없을 것 같다.   하지만 한가지 확실한건 과거가 아닌 오늘날의 현실에서 지나친 상대주의의 주장은 분명히 문제점을 가져올 수 밖에 없다는 점이다.  과거가 아닌 현재를 보자면 예컨대 탈레반의 이해할 수 없는 여성 억압적인 정책을 상대주의라는 미명하에 인정할 수 없는 것은 명약관화이다.  결론적으로 굉장히 교과서적인 해결방법은 보편적 근본규범과 상대적 파생규범으로 나누어 이해하는 방식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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