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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바타(2009), 가이아와 이성에 관해서 본문

영 화/00's 영화

아바타(2009), 가이아와 이성에 관해서

유쾌한 인문학 2012. 9. 9. 1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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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바타

제임스 카메론의 2009년도 작품이다. 당시 혁적인 기술적 진일보인 3D 영화를 가져와 엄청난 흥행에 성공하게 된다.  일단 제임스 카메론 감독의 작품이니 기술의 획기적 진일보는 당연한 것이고 스토리 역시 재미가 있다.  영화의 배경은 먼 미래이다.  언옵타늄이라는 자원이 인류에게 있어 굉장히 중요한 자원으로 등극하게 되고 우주기술이 발달하게 되면서 그 자원을 채취하기 위해 다른 행성으로 진출하게 된다.  극중에서 판도라 행성으로 간 이유 역시 그 자원때문이다.  그 자원은 1킬로에 이천만달라하는 어마어마한 가치를 가지고 있는 광물이다.  영화속에서 현재 지구의 상황에 대해서는 그 어떤 얘기도 나오진 않지만 아마도 화석연료는 고갈된 상태일 것이고 그로 인해 자원 전쟁이 심각한 상황으로 판단된다.  그렇다보니 그러한 전쟁을 통한 다양한 경험을 가진 용병들이 속출하게 되고 경험 많은 용병들을 기업이 고용하여 판도라 행성으로 데리고 가는 것이다.  이 판도라 행성에는 이미 다른 종족이 주인으로서 살아가고 있다.  그리고 그 종족은 자연을 굉장히 중요시 여기는 종족으로 그들이 숭배하는 거대한 나무를 신격화하여 모시게 된다.  문제는 지구인이 캐려고하는 그 광물이 나비 종족이 숭배하는 주된 나무들 밑에 존재한다는 점이다.  이에 지구인들은 나비종족을 이주시키려하지만 그들은 자신들이 신성시여기는 그 땅을 떠나려하지 않는다.  이러한 상황에서 제이크라는 인물이 그들 사이에 뛰어들게 된다.  

이 작품은 기본적으로 원주민과 백인이라는 도식적 관계를 그대로 유지한다.  원주민이 이미 살아가고 있는 터전에 외부인이 침입해 들어오고 서로 처음 보는 그들은 나름의 개념짓기에 들어가게 된다.  레비 스트로스의 슬픈 열대에 흥미로운 문구가 등장하는데 내용은 다음과 같다.  양 민족 모두 낯선 타자와 마주치게 되었을때 생전 처음보는 그 타자는 해석되어야 하는 무엇이된다.  이때 서로 바라보는 태도는 너무나도 다르게 다가오는데 인디언들은 백인을 불사의 신으로 생각하여 그들을 잡아 물속에 집어 넣고 그들도 과연 죽는지? 그리고 썩는지를 관찰하게 된다.  반면 백인은 인디언들을 영혼을 가지지 못한 사람처럼 생긴 동물로 생각하게 된다  양집단 모두 서로가 서로에게 무지하여 각각의 주체적 입장에서 해석하지만 그 태도는 너무나도 다르게 다가온다.  그리고 설사 양쪽 모두 무지했을지언정 인디언들이 태도가 훨씬 인간적으로 다가오는 것도 사실이다.  이러한 인디어들이 보여주는 태도는 아바타 내에서도 그대로 유지된다.  

나비 종족은 지구인을 하늘 사람이라고 부르게 된다.  특별한 이유가 있다기 보다는 하늘에서 내려왔기에 하늘 사람으로 부르는 것으로 판단되는데 이러한 하늘사람이라는 용어에서 확인할 수 있듯 아마도 인디언과 마찬가지로 백인을 짐승이 아닌 경외의 태도로서 접근했을 가능성이 다분하다.  그렇기에 그들과 소통하려하고 가깝게 지내려는 시도도 있었을 것이며 백인들도 마찬가지로 그들에게 새로운 기술을 가르치려 했을 것이다.  하지만 결국 지구인은 나비종족을 자신의 지배와 관리하에 두어야 하는 무엇으로 개념짓게 된다.  이는 결국 지구인을 지배하고 있는 기술숭배와 자본이라는 것에 종속된 주체적 관점에서 아바타 행성이 품고 있는 언옵타늄이라는 자원과 그곳에서 살아가는 나비종족을 양화가능한 무엇으로 판단하여 경제적인 측면에서 수치화했을 것이다.  수치화 한 이후 내려지는 결론은 언옵타늄의 월등한 우월적 가치이다.  결국 지구인의 입장에서 나비종족은 가치가 낮은 자원물과 마찬가지로 취급되면서 언옵타늄의 채굴을 위해 옆으로 치워줘야할 쓸모 없는 종족으로 개념짓게 된다.  물론 모든 지구인이 이런 태도를 보여주는 것은 아니지만 결국 그들도 언옵타늄의 채굴을 위해 건너온 회사의 일원이라는 근본적 한계를 가지게 된다.  그렇기에 끊임없이 원주민과 소통하려하지만 지속적으로 실패하게 된다.  애시당초에 지구인은 오직 광물만이 목적이기에 평행선을 달리 수 밖에 없다.  




아바타와 주체의 문제
아바타에는 굉장히 진일보한 미래의 기술이 등장하는데 그중 눈에 띄이는 기술은 크게 두가지이다.  첫번째는 조금 원시적인 형태로서 기계적 로봇을 직접 탑승하여 조종하는 방식이다.  사실 이 로봇은 매트릭스3에서 나오는 로봇과 비슷한 느낌을 자아낸다.  두번째 기술이 이 영화의 핵심인데 이른바 인간과 아바타의 링크이다.  인간의 몸은 안전한 곳에 존재한채 정신만 아바타라는 인형속으로 주입시키는 방식이다.  물론 아바타는 단순한 인형이 아니라 생물학적 완전성을 가진 신체이다.  다만 생각하는 자아만 없을 뿐이며 자아는 링크를 통해서 연결하게 된다.  인간의 정신을 이쪽에서 저쪽으로 옮길 수 있는 기술을 통해서 과연 인간의 정신이라는 것이 무엇인가에 대해 한번 생각해보게 된다.  모든 문명권에서는 인간의 정신이라는 것 즉 생각할 수 있는 능력을 설명하기 위해 영혼이라는 개념을 만들어내고 육신이 죽으면 영혼은 어디론가 간다는 식의 사고를 전개하게 된다.  그리고 그 어딘가를 설명하기 위해 신이라는 허구적 존재를 만들어내게 된다.  하지만 사실 영혼이라는 것은 증명이 안되는 것으로 철저하게 종교적인 관점에서 만들어진 무엇에 다름이 아니다.  더욱이 과학이 발전하면 할수록 알게 되는 사실은 뇌라는 것이 일종의 컴퓨터와 같은 정보처리 기관이라는 점이다.  우리의 정신은 크게 두가지 요소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첫째는 외부사실의 인식을 위한 처리과정이며 둘째는 그것을 종합적으로 사고할 수 있는 사유적 측면이다.  외부사물을 인식하기 위한 다양한 형태의 시각, 촉각, 청각, 미각, 후각의 인식기관을 거치고 다시 뇌라는 정보처리기관을 지나 외부 사물을 인식하게 된다.  그리고 그렇게 인식된 외부사물을 종합하고 그외에 다양한 형태의 추상적인 생각이나 개념들을 처리하기 위해 사유하는 뇌의 작용이 적극적으로 작용하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아바타 기술은 인식기관과 그 출력기관으로서의 몸을 다른 것으로 대체한 것에 다름 아니다.  문제는 뇌의 정보처리 시스템을 얼마나 빠르게 이해하고 적극적으로 제어할 수 있느냐? 에 다름 아닌 것이다.  


그렇다면 여기서 한단계 더 나아가 정보처리기관으로서의 인간의 뇌를 객관적 물질이 아닌 가상현실과 같은 것과 연결시켜 따로 보관할 수도 있을 것이다.  즉 뇌가 가지고 있는 정신이라는 정보 그 자체를 컴퓨터에 저장하는 것도 가능하다.  물론 뇌를 로봇이라는 형태의 출력기관을 만들어 연결시키는 것도 가능할 것이다.  여기에서 확인이 가능한 한가지 질문은 바로 이것이다.  생명과 비생명의 차이가 무엇일까? 중요한 사실은 지금의 생명에 대한 관점 자체는 심각한 도전에 직면하고 무너지게 될 것이라는 점이다.  사실 따지고 보면 인가은 결국 분자구조로 이루어지는 유기체적 물질의 총합을 몸으로 삼은 것에 다름 아니며 우리가 흔히 생명이라고 말하는 것들은 분자구조로 이루어진 유기체 물질의 총합에 불과하다.  결국 기계와 다를 것이 없다는 결론이 내려진다.  기계를 오래사용하다보면 고장이 나고 낡아서 고장난 부분을 새것으로 교체할 수도 있을 것이며 더이상 사용할 수 없을 만큼 낡게 된다면 그냥 폐기처분하듯이 세포구조로 이루어진 인간의 신체 역시 기술의 발전에 의해서 충분히 기계와 같은 취급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이 바로 아바타의 세계가 가지고 있는 기본적인 기술에 대한 관점이다.  기술에 대한 숭배와 기술과 자본이 가지고 있는 ‘의지’가 추구하는 모든 존재자에 대한 지속적인 관리와 지배력의 강화라는 목표는 결국 인간 자체에 대한 완전한 기계 부품화라는 가능성으로 나아가게 되는 것이다.  이는 현대 사회가 보여주는 분업화된 사회 구조에 의한 언제든지 타인으로 교체 가능한 부품적 성격에서 한걸음 더 나아간 무엇으로 볼 수 있다.  



결국 이 영화가 보여주는 아바타라는 기술은 인간이란 무엇이며 인간은 어디로 나아가는가에 대한 시사점을 던져준다.  극중에서 제임스 설리는 바로 이러한 질문의 한복판에 서게 된다.  그는 해병으로 다리부상을 입은 상태이다.  강인한 해병으로서 살아온 제임스의 주체성은 다리부상과 더불어 심각한 절망을 맞이하게 된다.  기술이 굉장히 발달하였기에 이를 치료할 수도 있지만 치료비 문제로 인해 엄두도 못내고 있는 상황이다.  해병으로서 수많은 사람들고 조우하며 살아오면서 끊임없이 자신의 주체를 재형성해온 제임스는 다리 부상과 함께 새로운 타자와의 조우도 기존에 마주쳤던 타자도 자신의 삶에서 하나둘 빠져나가고 있는 형국이다.  어떤 면에서 보면 살아는 있으되 껍데기만 남은 삶으로 어디에도 소속하지 못한채 경계를 서성이는 그런 존재이다.  그러다 우연히 자신의 형이 사망하였다는 소식을 듣게 되고 자신이 형의 유전자와 일치하기에 형을 대신하여 아바타 행성으로 떠나게 된다.  그곳에서 제임스는 아바타라는 새로운 신체를 얻게 되고 우연히 나비족의 한복판에 들어서게 되어 그들의 문화를 익히게 된다.  


지구인으로서 제임스는 굉장히 공허한 존재이다.  그리고 아바타라는 껍데기를 덮어쓴채 나비족으로 활동하는 제임스 역시 경계위에 선자로서 모호한 양상을 보여주게 된다.  놀라운 기술에 의해서 나비족의 신체를 얻었지만 이는 인형에 불과한 신체이고 그 속에 깃든 자신의 영혼은 여전히 완전함을 가지지 못한 형국이다.  나비족의 신체를 얻었다 하더라도 그의 정신 자체과 주체성 자체가 여전히 불안하기에 그의 삶은 지구인이었을때와 마찬가지로 어디에도 속하지 못한 경계를 서성이게 된다.  하지만 점점 제임스는 나비족의 일원으로서 그들의 문화를 익히고 그들의 삶의 방식을 익히고 그들의 사고관을 익힘으로써 조금씩 바뀌어 나가게 된다.  나비족이라는 새로운 타자와의 조우는 그의 주체성을 새롭게 재형성해나가게 되는 것이다.  이 지점에서 제임스의 모순이 발생하게 되는데 그의 정신은 점점 나비족과의 조우를 통해 그들과 비슷한 형태의 주체성을 형성하는 중이지만 결국 자신의 정신이 원래 깃든 곳은 병든 몸이라는 현실이다.  더욱이 자신에게 주어진 아바타라는 인형은 막강한 자본이 들어간 인형이기에 버릴 수가 없어 마지못해 그에게 주어진 우연에 불과하다.  자신의 소유도 아니며 자신의 신체의 일부분도 될 수 없다.  더욱이 회사의 한 소속원인 그로서는 회사가 가지는 자본에 대한 추구에 성실히 임해야 하는 임무도 가지게 된다.  이에 제임스는 하나의 정신을 가지고 있는 두개의 주체라는 독특한 양상을 보여주게 된다.  그리고 결국 그의 선택은 영화의 서두에 나오듯 자유롭게 하늘을 날 수 있으며 자유로운 정신과 자유로운 영혼을 추구할 수 있는 나비족으로서의 삶이다.  심지어 회사에서 다리를 준다고 하였음에도 그는 그것을 거부하게 된다.



대지의 여신, 가이아
판도라 행성에는 에이와 라고 불리는 대지의 여신이 존재한다.  극중에서 그레이스 박사(시고니 위버)는 판도라 행성의 식물을 연구하다 재미있는 사실을 알게 된다.  식물들이 서로 전기적 신호를 이용하여 의사소통같은 것을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나비족들이 신성시하는 그 나무가 존재한다. 이 모든 것을 통괄하는 존재는 나비족이 숭배하는 대지의 여신인 에이와이다.  그리고 이 여신은 만물의 균형을 중시하는 특징을 가진다.  균형을 중시한다는 것은 크게 두가지 관점에서 바라볼 수 있다.  첫째는 인간의 관점에서 바라보는 균형론으로 지극히 인간 위주의 생각에서 빚어지는 사고관이다.  이에 따르면 자연을 보호해야 한다는 생각조차도 지극히 인간을 위한 인간 위주의 사고관에 불과하게 된다.  따라서 인간의 생존에 적절하다면 얼마든지 자연에 대해서 다시금 폭력적 양상으로 나아갈 수 있는 한계도 가지게 된다.  


둘째는 인간의 관점에서 벗어나는 균형론으로 대표적으로 가이아론을 들 수 있다.  지구가 살아있는 하나의 유기체라는 사고관 즉 가이아에 대한 생각은 다양한 신화속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다.  가이아라는 명칭 자체도 대지의 신의 이름을 따온 것이며 지구와 대지에 대한 경외의 태도는 현대 사회에서도 어렵지 않게 확인할 수 있는 부분이다.  가이아론의 기본 태도는 이 지구를 살아있는 하나의 유기체로 바라보는 것이다.  그리고 살아있는 지구속에 존재하는 수많은 생물들과 함께 능동적으로 환경을 조성해나간다고 바라보게 된다.  생물은 단순히 지구의 환경에 종속된 수동적인 존재가 아니라 생물 스스로 환경을 적극적으로 구성해나갈 수 있는 전 지구적 입장에서 순환의 일부분을 맡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태도에 의하면 자연스럽게 수많은 지구 생명의 멸절의 위기에서도 끊임없이 멸종하지 않은채 버텨온 이유를 설명할 수 있게 된다.  어떠한 상황이 닥치든 생명 스스로가 지구 순환의 일부분으로 스스로 환경을 적극적으로 구성해나갔을테니 말이다.  


가이아론의 입장에서 인간이 자연을 파괴하는 것은 사실 어쩔 수 없는 측면이라고 한다.  즉 모든 생물은 어떠한 형태로든 폐기물을 내보낼 수 밖에 없으니 말이다.  지구의 입장에서 보면 인간 역시 하나의 생명일뿐이고 따라서 인간이 지구 환경을 파괴하면 지구는 그에 맞게 적절한 반응을 보이게 되고 그 과정에서의 환경의 변화로 인간이 멸종할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환경을 보호하자는 그런게 아니라 지구는 하나의 거대한 유기체로서 거대한 사이버네틱스 시스템으로서 인간은 그 시스템내의 일원일뿐이라는 점이다.  결국 가이아 입장에선 인간이 행하는 행위에 대한 피드백을 준 것에 불과하다.  극중의 대지의 여신이라는 것도 가이아와 비슷하게 보인다.  이와 관련하여 가장크게 다가오는 부분은 식물들이 서로 전기신호를 통해 소통한다는점 아닐련지.  결국 나비족이 지속적으로 극중 남자주인공인 제이크 설리에게 가르치려고 하는 것은 자연을 보호하라 그런 사고방식이라기보다는 판도라라는 거대한 행성 그 자체가 가지는 자기조절능력으로서의 시스템에 대한 이해라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자기조절시스템에 대한 이해를 통해 생존하고자 하는 나비족은 필연히 대지와 소통하는 방법을 알게 되고 그런 방향으로 진화가 이루어진 것으로 보인다.  바로 그것이 머리카락 끝을 이용하여 각종 동물이나 식물과 소통하는 것이다.  결국 이 영화에서 말하는 에이와란 거대한 순환 시스템 그 자체라고 볼 수 있다.  하지만 결국 이러한 나비족의 태도는 지구인에 의해 철저하게 짓밟히며 나비족과 지구인이라는 전쟁으로 나아가게 된다. 


 


도구적 이성과 나비족
나비족의 학살이라는 것은 사실 인간의 도구적 이성이 보여주는 다양한 양상중 한가지에 불과하다.  영화속에서 지구인이 보여주는 철저한 인간중심적 사고관은 남의 행성에 쫓아가 자신들이 필요한 광물을 캐는데 주안점을 두게 되고 그 목적 이외의 것은 오직 부차적일뿐이다.  그러니 인간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 하나의 도구에 불과한 나비족은 인간이 부여한 두가지 선택지 즉 인간의 권유를 받고 이주를 하던지 아니면 죽던지 둘중 하나이다.  여기서 나비족이 제시하는 것은 제3의 선택지는 중요치 않다.  도구가 제시하는 선택지가 뭐가 중요할까.  이러한 이성관이 보여주는 인간 이외의 것의 도구화에서 자연도 피해갈 수 없다.  자연 역시 따지고 보면 도구에 불과하니 말이다.  결국 지구를 극단적으로 황폐화시킨 이후 판도라 행성까지 황폐화시킬려고 오게 된 것이다.  사실 인간이 자연과 타 원주민만 도구화 시켰던가? 국가와 사회 그리고 현대에 와서는 기업이라는 것을 중심에 세우면서 같은 사회의 구성원도 경우에 따라선 도구화시키기 마련이다.  따지고보면 극중 주인공인 제이크 설리 역시 거대 기업이 이용하는 하나의 도구에 불과하고 제이크 설리 뿐만 아니라 그레이스 박사 역시 고용된 하나의 도구로서 그녀가 꿈꾸는 공존과 화해의 삶이란 사실상 그 어떤 힘도 발휘하게 힘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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