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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먼자들의 도시(2008), 윤리적 이기주의와 그 문제점 본문
눈먼자들의 도시
어느날 갑자기 한 사람의 눈이 멀게 된다. 처음엔 단순한 이해할 수 없는 실명으로 생각되었지만 이는 마치 전염병처럼 주변사람들에게 옮겨가기 시작한다. 운전을 하다 갑자기 눈이 멀고 비행기 조종사가 갑자기 눈이 멀어 버리는 등 상황이 걷잡을 수 없게 진행되자 정부는 이들을 격리수용하기 시작한다. 격리 수용된 한무리의 사람들 중 이 병의 최초 발견자인 의사가 포함되어 있다. 그의 부인은 단 한사람의 눈뜬 자로서 남편을 위해 수용소로 같이 들어가게 된다. 눈먼자들이 지속적으로 늘어가자 수용소는 포화상태에 이르게 되고 어느순간 온 세상이 눈먼자들의 세상이 되버린채 의사 부인은 여전히 홀로 눈뜬 자이다. 사실 이러한 이야기는 누구나 한번쯤은 살아오면서 막연하게 상상해봤을 이야기로 단순히 모든 사람이 눈이 먼다는걸 넘어서 나혼자 투명인간이 되고 싶다는 생각 역시 같은 맥락의 이야기이다. 모든 사람이 눈이 멀었다는 것은 우리가 가지고 있는 많은 것들을 잃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투명인간이 되고 싶다는 것 역시 내가 가질 수 없는 많은 것을 가지고 싶다는 의미이고 이를 역으로 보면 투명인간 앞에서 눈먼자가 되어버린 자들은 많은 것을 잃게될 가능성 위에 서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결국 모든 사람이 눈이 멀었다는 것 또는 투명인간이 된다는 상상을 통해 우리는 소유에 대한 생각을 읽을 수 있다. 즉 우리는 얼마나 많은 물질적 가치를 소유하고 있는가? 라는 사실을 통해 자신과 자신의 사회적 지위를 확인하고 싶어하는 양상을 보여주게 되는데 이러한 모습을 통해 소유를 위한 투쟁을 엿볼 수 있다. 어느날 갑자기 눈이 멀었다는 것은 모든 물질적 가치가 의미를 상실하게 된다는 것을 잘 보여주게 되며, 자신을 증명해준다고 생각해 왔던 물질적 가치들을 잃었을때 인간이 어떠한 모습을 보여주는지 소설은 잘 표현하게 된다. 결국 자본의 논리에 입각한 나에 대한 생각과 사회적 지위는 허구적인 것이며 그것을 잃었을때 인간은 얼마나 추해질 수 있는지를 사라마구는 잘보여주고 있으며, 더 나아가 인간의 기본적 욕구에서 기반하여 발전하는 자본적 욕망이라는 것들이 눈이 먼다는 설정을 통해 제거되었을때 진정한 의미에서 인간성을 회복할 가능성을 제시한다.
심리 이기주의
이 작품 전반을 흐르는 하나의 주안점은 소유에 대한 투쟁이다. 즉 눈이 멀어버리면서 모든 것이 가치를 상실하는 시대를 맞이하여 개인들이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기 위해 지극히 이기적인 입장에서 소유에 대한 투쟁을 벌이게 되는 것이다. 보통 이기주의라고 하면 크게봐서 두가지 형태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첫째는 심리 이기주의이며 둘째는 윤리 이기주의이다. 비슷한듯 하지만 상당히 다른 양상을 보여주는데 핵심은 행위에 놓이게 된다. 심리 이기주의는 각 개인은 자신에게 이익이라 판단되는 행위를 우선시하여 행하여야 한다는 입장으로 자신의 이익을 증진시키거나 자신의 쾌락이나 행복을 극대화 하는 것 외에는 그 어떤 것도 행위의 동기를 줄 수 없다고 본다. 이는 인간 행위에 대해 왜 그렇게 행동하는가? 라는 질문을 던진채 행위의 사실적인 측면에 중점을 놓고 인간 행위 이면에 존재하는 동기를 일반화한 것이다. 즉 인간 행위의 모든 동기는 이기적인 면에 기반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이기적인 행위의 핵심은 어느 누구나 자기가 하고 싶은 행위를 한다는 것에 주안점이 놓인다. 따라서 겉보기에 이타적으로 보이는 행위 역시 근본적으로 나를 위해서 내가 하고 싶어서 한 것이라면 이기적인 행위가 된다. 링컨의 예재를 살펴보자면 물에 빠져 죽기 직전의 동물이 있다고 해보자. 냅두면 죽기에 A가 그 동물을 구했다고 하자. 이는 흔하게 보는 전형적인 이타적인 행동이다. 하지만 이 역시 심리 이기주의의 입장에서는 이기적인 행동에 불과하다. 즉 동물을 위해서 구조 행위를 했다기 보다는 그것을 지나친 경우 후에 내 마음이 심란하기에 구조 행위를 했다는 것이고 결국 내 마음의 안정이라는 이기심의 동기가 존재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이기심은 궁극적으로 나에게 만족을 준다는 측면을 가지게 되고 이러한 만족은 목적으로서의 성격을 가지게 된다. 이러한 만족은 이기심이 가지는 동기의 첫번째 요소이다.
영화로 돌아가 이 영화의 핵심은 의사부인의 시선에 존재한다. 유일한 눈뜬자로서 작금의 상황을 덤덤히 바라보는 그 시선을 관객의 시선으로 가져온다면 꽤나 유의미한 방법이 될 것이다. 의사부인은 눈이 보임에도 불구하고 남편이 수용소로 갈때 따라가서 돌봐주게 된다. 비단 남편뿐만 아니라 그 방에 있는 사람들 전반을 대체적으로 돌봐주는 행위도 하게 된다. 이러한 의사부인의 행위는 어떤식으로 바라볼 수 있을까? 보통의 사람이라면 이타적인 행위로 보겠지만 심리 이기주의자의 입장에서는 이 또한 이기적인 행동에 불과하다. 남편을 홀로 수용소에 보낸 이후 집에 혼자 남은 의사부인의 마음이 과연 편할까? 너무나도 고통스러울 것이 뻔하기에 자신의 마음의 안식을 위해 따라갔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남편 이외의 사람들을 도와주는 행위 역시 그냥 냅두기엔 마음이 조금 불편하기에 자신의 마음의 평안이라는 동기를 위해서 도와주었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이러한 측면은 약간의 문제를 가지게 된다. 그 강한 욕구의 동기라는 것이 상당히 애매하다는 것이다. 의사부인이 만약 눈뜬자로서 최소한의 질서의 유지를 위해 저런일을 행하였고 사실 그 행위를 통해서 아무 것도 바라는게 없다면 어떻게 되는 것일까? 사실 저 상황에서 의사부인이 눈뜬자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없다. 몇몇 눈치 빠른 사람만이 대략적으로 짐작만 하고 있을뿐이다. 더욱이 영화속에서 의사 부인은 행위를 함에 있어 어떤 사회적 호평을 기대하지도 않으며 본인 스스로 강한 자부심을 느끼면서 행위한다고 볼 수도 없다. 만약 그렇다면 자신의 그런 행위를 지속적으로 밝히면서 했을테니 말이다. 이런 경우에 심리적 이기주의자는 그래도 강한 동기만을 주장하게 된다. 의사부인이 의무감에서 저런 행위를 행하였다 하더라도 그보다 더 강한 동기가 있다고 주장하는 식이다. 그에 대한 그 어떤 증거도 제시하지 못한다. 오로지 강한 동기가 있다는 독단적인 주장만이 있을 뿐이다. 이러한 주장이 성립하기 위해서는 모든 사람은 언제나 아주 최고로 욕망하는 행위만을 한다는 전제가 필요하게 된다. 하지만 이는 동어반복일 뿐이다. 인간의 행위는 강한 이기심이라는 동기에서 비롯하면서 그 증거로서 내놓는 것이 인간은 언제나 강하게 욕망하는 행위만을 한다고 한다면 결론을 전제로 가져가 같은 말을 반복하는 것일 뿐이다. 이를 두고 선결문제 요구의 오류라 칭하게 된다.
다시 제일 처음 링컨의 예재로 돌아가서 A에게 '당신의 행동은 당신의 마음의 평화라는 목적과 만족을 위해 행한 것에 불과한 이기적 행동이다' 라고 한다면 A는 나는 그런 목적과 동기를 의식하지 않은채 행동했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런 주장에 대한 이기주의자에 해명은 다음과 같다. 인간 행위는 반드시 의식적인 것은 아니라고 주장하게 된다. 이를 통해 알 수 있는 이기심의 두번째 요소는 동기가 가지는 무의식적 성질로서 이를 심층 심리 이기주의라고 칭한다. 인간이 일상적으로 행하는 행위들이 과연 하고 싶은 일을 한다고 쉽게 단언하기는 어려운 측면이 많다. 예컨대 부부가 있는데 남편이 항상 술을 먹고 늦게 귀가하는 모습을 보인다고 해보자. 심지어 어떤때는 폭력을 행사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녀는 그것을 알면서도 결혼을 하였고 이에 고통을 받게 된다. 언듯 보기에는 이 상황에서 그 어떤 동기도 확인하기가 힘들 것 같지만 심층 심리 이기주의에 따르면 무의식을 통해서 동기를 발견하게 된다. 즉 부인은 굉장히 고통스러운 삶을 살아가고 있지만 강한 모성애를 요구하는 남편을 보살피면서 무의식적으로 모성애의 만족을 얻으며 이에 이는 이기적인 동기가 존재한다고 보는 것이다. 결국 영화속에서 의사 부인의 행위는 많은 사람들을 보살피는 행위이고 겉으로 보기에는 그 어떤 호평이나 자부심도 느끼지 못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녀의 내면 깊숙한 곳에서 무의식적 동기에 의해 욕망의 충족을 느끼고 있으며 그것이 바로 무의식적 동기가 된다. 하지만 이러한 무의식적 동기라는 관점에는 비판점이 존재한다. 의식적이고 자발적이지 않은 행위를 윤리학의 대상으로 삼는다는 것은 굉장히 무리가 있다는 것이다. 더욱이 무의식적 동기라는 것은 그것이 실제로 이기적인 성질을 가지는지 이타적인 성질을 가지는지 설명을 정확히 해내지 못하는 문제도 존재한다.
이기주의자는 쾌락주의를 주장하기도 하며 이를 심리 쾌락주의라 칭한다. 지속적인 자기 이익의 추구와 성공은 쾌락을 가져오게 된다. 그리고 인간 행위의 목적은 쾌락이므로 인간의 모든 행위들은 쾌락의 동기가 있다고 보게 된다. 하지만 이러한 자기만족 논증은 쾌락주의의 역설를 통해서도 한계를 드러낼 수 있다. 링컨 예재로 돌아가 A가 동물을 구하여 만족을 느꼈다하여 그 만족 즉 쾌락을 목적으로 삼는다고 결론내린다면 이는 행위 결과와 행위의 목적을 혼동한 것에 다름 아니다. 쾌락은 그 이전 행위의 결과로서 주어지는 것이다. A의 동기는 동물을 구한다는 목표에 있는 것이지 그것의 성공으로 인한 결과로서 주어지는 어떠한 형태의 쾌락에 있는 것이 아니다. 다른 예로 엄청나게 배고픈 사람이 있다고 해보자. 그럼 그는 음식을 욕망하게 될 텐데 그는 음식을 욕망하는 것이지 음식에서 주어지는 쾌락을 욕망한다고 보기는 어렵다. 맛이 있던 없던 그에게 음식은 생존의 문제이기에 음식 그 자체를 욕망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먹음으로 인해 얻어지는 쾌락은 행위의 결과로서 주어지는 것에 다름이 없다. 다른 예를 더 들어보자면 우리가 길을 가다 어떤 사람이 쓰러져있는 것을 발견하여 그를 구하게 되었다. 사람을 구하는 행위를 함에 있어 목표는 그 사람을 구하는 것에 있지 그 사람을 구한 다음에 주어지는 쾌락을 목표로 삼지는 않는다. 더욱이 그를 구한다는 행위를 한다고 해서 쾌락이 주어진다는 보장도 없다. 결국 자기 이익과 자기 만족에 대한 지속적인 추구가 궁극적으로 행복을 가져다주진 않는다. 되려 행복이라는 것은 그 자체를 목적으로 삼을때에는 잡히지 않는 성격이 있다. 평생 파랑새를 찾아 해매지만 파랑새를 찾는 순간 날라가버리듯이 말이다.
이러한 쾌락주의 논의는 영화속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눈먼자들이 점점 늘어나게 되자 그들을 수용소에 가두게 된다. 초기에는 식량배급이 이루어지지만 사회전체가 눈먼자들의 세상이 되버리면서 식량배급도 사라지게 되고 어느 순간 수용소내에서 식량을 차지한채 재물을 요구하는 이들이 발생한다. 식량을 얻기 위해 이런저런 귀금속이나 돈을 그들에게 주지만 사실상 눈먼자들의 세상에서 그러한 재물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다이아몬드를 가진다한들 그것이 진짜인지 가짜인지도 구분이 안되는 상황에서 재물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지독한 이기심에서 재물을 탐하며 자기이익을 추구하지만 되려 공허한 고통만 가져다줄뿐이며 그 재물 역시 수용소라는 제한된 공간 안에서 순식간에 의미를 상실해 간다. 결국 수용소 내에서 우월한 지위를 확보하여 나름의 사회적 지위 즉 왜곡된 형태의 권위와 힘을 획득하려고 시도하게 되지만 아무런 의미가 없는 공허한 행동에 불과하다. 더욱이 그러한 권위와 힘의 추구는 쾌락을 가져오지도 못한다. 이에 급기야 그들은 여성에게 성을 바치라고 요구하게 된다. 당장의 성적 쾌락을 얻을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그 과정속에서 한 여성이 사망했다는 사실을 알게된 원래부터 맹인이었던 사람은 약간 당황하는듯한 모습을 보여주기도 하며 결국 그들은 불에 타 싸그리 죽게 된다. 겉보기엔 쾌락의 추구처럼 보이는 행위는 결국 쾌락을 가져오지도 못하며 저급한 형태의 자기만족의 추구는 되려 고통만 가져올뿐이다.
마지막으로 살펴볼 부분은 이기심의 충돌이다. 이는 의사부인 남편의 주장에서 확인할 수 있다. 그의 말인즉슨 부인은 절대 눈뜬자임을 들키면 안된다. 왜냐면 그 사실이 알려진다면 그 수용소 모두를 위해 일을 해야 하는 최악의 상황이 벌어질 수 있다는 것이다. 이 말에는 저러한 진의도 포함되어 있겠지만 다른 한편으론 자신에게 집중해주길 바라는 생각도 상당히 많이 차지한다고 볼 수 있는데 이때 남편이 보여주는 이기심은 의사부인이 가지는 이기심과 충돌을 일으키게 된다. 이에 대해선 윤리적 이기주의에서 살펴보겠다.
윤리적 이기주의 - 홉스
윤리적 이기주의는 규범적인 측면에 중점을 놓은 것으로 심리적 이기주의에서 파생된다. 즉 ‘각 개인은 자신의 이익을 절대적으로 추구해야 한다’는 것을 규범으로 정하고 이를 준수하여 모든 인간이 자신의 이익만을 추구할 때, 사회적인 이익이 커진다는 것을 기본 전제로 한다. 심리적 이기주의자이면서 윤리적 이기주의자가 아닐 수는 없다. 인간의 행위는 이기적인 동기에 의해 행해지므로 어떤 사태에 주어진 다양한 행위 선택지에서 비이기적인 요소를 사용하여 행위할 수는 없으며 이기적인 동기 이외의 원리를 통해 규범적인 기능을 발휘할 수도 없다.
이러한 윤리적 이기주의는 홉스의 견해를 통해서 확인할 수 있다. 자연상태의 인간은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의 상태로서 그 어떤 법적제도도 없는 상태이며 도덕 규칙 자체가 없기에 어길 수 있는 도덕이라는 것 자체가 가능하지 않다. 이런 자연 상태에서는 오직 좋다, 나쁘다만 가능하며 이는 각자에게 선악의 기준으로 작용한다. 사실 선악이라는 것도 어떤 규범적 기능을 가진다기보다는 오로지 지극히 개인적인 입장에서 자신에게 이익이 되는 행위가 선이 되고 손해가 되는 것은 악이되는 형태이다. 자신의 이익을 추구함에 있어 타인에게 부정의한 행동이라는 것도 가능하지 않다. 자연상태는 도덕규칙 자체가 없기에 부정의라는 말이 성립하지 않는다. 나름의 자연법이 있다고 주장하기도 하지만 이 또한 도덕규칙이라기 보다는 오로지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기 위한 규칙에 불과하고 타인에 대해서 생각할 필요는 전혀 없다. 법이 형성되고 시민사회가 완성된 이후에도 크게 달라지는 것은 없다. 일단 사회의 구성원이 되면 법률에 복종해야할 의무가 발생하게 되는데 이때의 의무도 타인을 위한 이타적인 측면이 아니라 오직 자기중심적 의무에 불과하다. 법은 오직 타인이 자신에게 해할지도 모르는 해악으로부터의 보호와 안전에 기인하며 이러한 법에의 복종의무는 자기이익에 근거한다. 법에 복종하는 이유 역시 의무나 공동체의 이익을 위해서라기 보다는 오직 처벌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며, 모든 이가 복종할때에만 구속력을 가지게 된다. 이러한 홉스의 견해는 자연상태 및 시민사회에서 윤리적 이기주의가 궁극적 기반이 됨을 잘 설명해주고 있다.
이러한 윤리적 이기주의 역시 다양한 문제점을 자지게 된다. 첫째로는 내적 모순성이다. 지극히 개인적인 입장에서의 자기만족에의 추구는 필연적으로 다른 타인과 충돌을 일으킬 수 밖에 없다. 누군가가 추구하는 이익은 필연적으로 누군가의 이익에의 추구를 제한할 수 밖에 없게 된다. 결국 한편으론 자기만족에의 추구를 종용하면서 그러한 행동은 타인으로 하여금 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도 함축하게 되는 것이다. 비슷한 관점에서 공지라는 문제점도 가지게 된다. 이기주의가 하나의 도덕적 원리로서 통용되기 위해서는 만인에게 공지가 되어야 한다. 하지만 이것을 공지하는 것 자체가 이기주의자의 행동에 모순적이게 된다. 이기주의자의 입장에선 나만 이기주의자이면서 타인은 이타주의자인 것이 가장 이상적인 결과일테니 말이다. 둘째는 이기주의의 역설이다. 예컨대 이기주의자가 사랑을 한다는 것이 가능할까? 겉보기에 이타적인 행위라도 그 이면에 반드시 나에게 이득이 되어야만 이기주의자의 행동은 타당해진다. 하지만 사랑이라는 감정이 보여주는 양태는 결코 단순하지가 않다. 결국 사랑을 하는 인간은 이기주의의 목적에 도달하기 위해선 이기주의를 어느 정도까진 포기해야 한다는 결론이 내려진다.
영화속에서의 폐쇄된 수용소나 완전히 눈먼자들로 꽉차버린 사회전반은 홉스가 상정한 자연상태의 모습과 크게 다를 것이 없다. 좀 더 정확하게 보자면 형성된 시민 사회안에서 형성된 법은 이기주의의 관점에서는 모두가 지킬때 의미가 있는 것인데 수용소 안의 상황은 이미 그 법이 무너진 상황이다. 그렇기에 자연상태의 모습으로 회귀하게 된다. 이러한 상황에서 각 개인은 다양한 행동양상을 보여주게 되는데 크게 두부류로 나눠볼 수 있다. 한 부류는 의사부인이 있는 집단으로 기본적인 도덕규칙을 유지하고 가능한한의 호혜성을 보여주고 다른 부류는 음식물을 점령한 집단으로 극한의 이기적인 태도를 보여준다. 이기주의자의 관점에서는 기본적으로 두 집단 모두 이기적인 행동 양상을 보여준다고 볼 수 있다. 의사부인 집단 역시 겉보기엔 도덕이 유지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 이면에는 그렇게 하는 것이 생존에 더 유리하다는 판단이 있기에 그렇게 했다고 볼 수 있다. 이때 나타나는 것이 바로 두 집단의 충돌 양상이다. 두 집단 모두에게 이기성을 요구하기에는 내적 모순이 발생한다. 이러한 측면이 바로 이기주의가 가지는 본질적 한계이다.
소설 속에서 인상깊은 구절이 하나 있다. "우리는 처음부터 눈이 멀었고 지금도 눈이 멀었다고 생각해요..... 볼수는 있지만 보지 않는 눈먼 사람들이라는 거죠" 이와 비슷한 문장으로 안나 카레니나의 첫번째 문장을 들수 있을듯 하다. "행복한 가정은 모두 엇비슷하고 불행한 가정은 불행한 이유가 제각기 다르다" 이 문장과 영화 속에서 확인할 수 있는 것은 근대 자본주의의 발전 이후 나타나는 물신화 현상, 무조건적인 경쟁논리, 약자에 배려가 너무나도 부족한 현실, 무엇을 위해서 경쟁하는지조차 모르는 철학의 빈곤 등 이미 잘 알고 있지만 스스로의 부와 명예를 유지하기 위해 볼 수 있음에도 애써 보지 않으려 하는 현실이다. 결국 눈먼자들의 도시는 눈뜬자들의 도시와 실상 다를바가 하나 없는 세상이다. 소유라고 하는 하나의 목적을 위해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상태가 바로 현대사회인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작품이 우리에게 던져주는 메세지는 굉장히 긍정적이다. 극단적이 상황속에서 극한의 이기주의를 통해 최악의 상황들이 연출되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화 말미에 보여주는 그들의 사랑과 이타성 그리고 인간 존엄에 대한 태도는 이기주의의 역설을 잘 보여주게 된다. 이러한 측면이 가장 잘 드러나는 장면으로 여자 세명이 비를 맞으며 목욕하는 장면을 들 수 있다. 한명의 눈뜬자와 두명의 눈먼자가 함께 더러워진 몸을 씻어내는 장면은 실로 작가가 진정으로 원하는 인간성의 회복이라 여길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