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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나 카레니나, 메리 울스턴크래프트의 여권의 옹호 본문
안나 카레니나, 메리 울스턴크래프트의 여권의 옹호
“모든 행복한 가정은 서로가 엇비슷하지만, 불해한 가정은 제각기 나름대로의 불행을 안고 있다.”[1] 안나 카레니나의 첫문장으로 쓰여진 이 문구는 문학사에서 가장 멋지고 아름다운 표현중 하나로 손꼽히고 있다. 이보다 인간의 삶을 더 잘표현하는 문장이 또 있을까 싶을 정도로 인간 삶에 대한 깊은 통찰력이 느껴지는 대문장이다. 안나 카레니나[2]는 단순하게 보면 안나라는 여성의 사랑과 비극적 삶에 대한 이야기이다. 하지만 이 작품은 단순히 안나의 사랑에 대한 이야기로 보기는 힘들고, 1874년 제정러시아 당시 교육받은 귀족 여성이 가지고 있는 내면적 불안과 자신에게 요구되는 책임 사이에서 방황하는 양상을 잘 드러낸다.
대혁명의 시기 유럽 각지에서 싹튼 이성의 발전, 자유주의의 만개, 계몽주의의 적극적 전개라는 일련의 과정은 선구적 여성 운동가들에게도 큰 영향을 끼치게 된다. 앞장에서 살펴보았듯 대혁명 당시 여성들은 나름대로 적극적인 행동들을 표출하였으며 심지어 국회에 몰려가 방청석에 앉아 뜨개질을 하며 적극적인 의사표명을 행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시 남성위주로 흘러간 계몽 사상은 이성적인 것과 이성의 담지자인 남성만을 공적인 영역으로의 끌어들이게 되고, 여성은 비이성적인 존재이자 비합리적인 존재로서 사적이고 개인적인 영역에 남도록 부추긴다. 당시 프랑스의 “인간과 시민의 권리선언”이나 미국의 “독립선언서”에서 만인의 천부인권에 대해서 이야기하지만 이는 백인 남성만을 지칭하는 것이다. 지역에 따라 정도의 차이가 있지만 여성에 대한 편견은 상당한 수준이었다. 여성은 돈을 받고 일하지 못한다거나 전문직 예컨대 법학, 의학, 신학에의 진출이 금지된다거나 대학교육도 막혀있는 곳이 존재했었다.
이에 선구적인 여성 운동가들은 적극적으로 여성운동을 펼치기 시작하며 이때의 페미니즘 운동을 자유주의 페미니즘 또는 계몽주의 페미니즘이라 칭한다. 19세기의 자유주의 페미니스트들 역시 시대의 영향에서 자유로울 순 없었다. 그들 역시 계몽의 시대를 살아가는 자였기에 이성에 대한 맹신이 싹트고 있는 사회 철학적 분위기에 편승하게 된다. 따라서 초기 페미니스트들은 이성을 강조하게 되고 여성으로 하여금 이성을 발전시키기를 주장하게 된다. 다양한 자유주의 페미니스트들이 존재하지만 그들의 논의는 크게 보아 5가지로 요약이 가능하다.[3] 첫째 이성과 합리성에 대한 신뢰이다. 둘째 남성과 여성의 이성적 능력은 동일하다. 여성 역시 남성과 동일한 인간으로서 이성을 가지고 있으며 이를 발전시켜 남성과 동등하게 설 수 있다. 셋째 여성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바로 교육이다. 교육을 통해 여성의 삶 전반을 변화시키고 발전시킬 수 있다. 넷째 여성은 남성에게 매여있는 존재가 아닌 독립적인 존재로서 스스로의 이성을 통해 독립하여 진리를 추구하고 독립된 개인임을 밝힌다. 다섯째 천부인권을 긍정한다. 하지만 남성위주의 사회구조는 여성에게 불합리하므로 여성에게도 남성과 동일한 정치적 권리 예컨대 선거권을 요구하게 된다.
메리 울스턴크래프트의 여권의 옹호
메리 울스턴크래프트(1759~1797)는 올랭프 드 구즈(Olympe de Gouges)[4]와 함께 근대 페미니즘 운동의 선구자적인 인물로서, 그녀의 혁신적인 주장과 더불어 두번의 자살시도, 출산 후유증 사망, 불행한 사랑 등 그녀의 사적인 삶의 궤적에도 흥미로운 요소가 많다. 그녀는 18세기 프랑스 혁명기를 관통하며 살아온 상류층 여성으로서 당대를 지배한 이성에 대한 믿음과 계몽에 대한 사상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지만, 자신이 신봉하는 이성과 계몽사상이 여성을 배제하는 현실 속에서 큰 좌절을 느끼게 된다. 이에 그녀는 인권의 옹호와 여권의 옹호라는 양대 저서를 통해 당대 여성이 어떠한 삶을 살아가고 있으며 어떠한 삶을 살아 주체성을 되찾아야하는지에 대해 말한다.
인권의 옹호[5]는 당시 에드먼드 버크의 프랑스 대혁명에 대한 성찰[6]의 반론으로 나온 책이다. 버크는 보수주의의 근거를 마련한 사람으로 평해진다. 버크는 본 저술을 통해 프랑스 혁명이 가지고 있는 폭력성으로 인해 무정부 상태에 가까운 사회적 혼란이 야기될 것이며 이는 필연적으로 군권에 기댄 독재자를 불러올 것이라고 예견하게 된다. 물론 버크의 이러한 예견은 정확히 일치하게 된다. 실제 프랑스 제1공화국은 혼란 그 자체였으며 그로 인해 나폴레옹을 등장하여 제1제정으로 나아가게 된다. 본 저서에서 버크의 주장은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자유와 권리는 자연권이 아니며 인민은 과거부터 내려온 유산으로서의 자유와 권리만을 가진다고 말하며 기존의 제도와 재산권에 대한 존중을 주장한다. 이에 울스턴크래프트는 모든 억압과 그것에의 복종에 저항하는 자연권으로서의 인권을 주장한다. 버크는 아일랜드계 영국 정치인으로서 자신의 신분적 한계 때문인지 몰라도 굉장히 보수적인 주장을 행한다. 당대 영국의 법제는 죄와 벌의 균형이 맞지 않아 상당히 불합리했었다. 이를 두고 울스턴크래프트는 사람보다 사슴을 더 중히 여기는 법제라고 비난한다. 그녀는 인권의 옹호에서 이성에 대한 강한 믿음과 감성에 대한 엄청난 불신감을 드러낸다. 인간은 이성에 의해서 좌우되어야 하며 이성이 아닌 감성 따위에 의해 정신이 형성되면 다양한 문제점이 발생한다고 본다.
여권의 옹호[7]는 인권의 옹호가 나온지 열달 뒤에 발표된다. 이성과 계몽에 대한 열혈한 지지자였던 울스턴크래프트는 본 저작에서도 이성의 담지자로서의 여성에 대해 말한다. 그녀의 주장은 간단하다. 인간은 이성적 존재이며 남성과 여성은 평등한 인간이다. 따라서 여성 또한 이성적 인간으로서 남성과 동등하게 바라보아야 한다. 여권의 옹호는 루소에 대한 비판으로 쓰여진 책이며 실제 저서 내에서 루소에 대한 강한 비판을 읽어낼 수 있다. 루소는 에밀에서 남성에게는 이성, 자유, 합리성을 강조하고 여성에게는 순종, 아름다움을 강조한다. 루소의 주장 중 가장 인상 깊은 부분은 여성은 남성을 즐겁게 하기 위해 태어난 존재라는 것이다. 이러한 루소의 생각은 당대 계몽주의자들의 한계이기도 하다. “모든 인간은 이성을 가진 존재로서 자유롭다”고 하였지만 여기서 인간은 남자만을 의미하는 것이다. 울스턴크래프트는 이러한 가부장적 이원론을 굉장히 싫어했었다. 그렇다고 여성의 주된 특징으로 여겨지던 사랑, 감성 따위의 것들을 높게 평가한 것도 아니었다. 그녀는 당대 여성들에 대해 평하길 미신에 집착하고 감상적이며 사랑에만 몰두하는 경향이 있다고 평하게 되는바 이를 통해서도 비이성적인것들에 대해서 얼마나 부정적인 생각을 가졌는지를 알 수 있다.
울스턴크래프트는 당대 여성들이 저렇게 비이성적이고 나약한 존재가 되버린 이유를 교육에서 찾는다. 즉 교육을 통한 여성의 억압이 주된 이유라는 것이다. 당대의 지배적 관념이나 심지어 계몽주의 남성들은 여성은 남성을 즐겁게 해주는 존재라고 생각하여 여성에게 이성은 필요가 없으며 오로지 감성만을 갈고 닦아 남성을 언제든지 즐겁게 할 수 있도록 교육시키게 된다. 결국 울스턴크래프트가 보았을때 당대 여성의 문제는 여성이 애초에 비이성적으로 태어난 것이 아니라 그렇게 교육받았기 때문이며, 이를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여성은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진다는 것이다. 당대 여성은 오직 사랑만을 교육받고 강요받기에, 결혼 후에도 오직 남성의 사랑만을 갈구하며 사랑이 식게 되면 또 다른 사랑을 찾아다니는 양상을 보여준다. 그 안에서 자신의 주체성이나 삶의 능동적 방향 따위는 찾아볼 수 없다. 오로지 남성에게 얽매인 삶만이 존재할 뿐이다. 이에 울스턴크래프트는 여성들도 스스로 주체성을 확립하고 성숙한 인격을 양성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울스턴크래프트는 이를 위해 여성에 대한 교육을 강조한다. 사랑에 집착하는 삶의 태도를 벗어던지고 스스로 삶을 결정할 수 있는 능동성을 교육을 통해 키워야 한다는 것이 그녀의 주된 주장이다. 즉 옳바른 교육을 통해 여성의 이성을 계발하고 더이상 남성에게 사랑을 갈구하는 것이 아닌 남성과 대등한 위치에서 우정을 누려야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여성에 대한 옳바른 교육은 가정과 시민 더 나아가 국가를 위해 필수적인 일이다. 여성은 자녀를 교육시킴에 있어서도 사랑보다는 아이의 이성을 발전시키는게 주안점을 두어야 한다. 불명확하고 비합리적인 사랑이라는 미명아래 아이를 교육시키고 부모에게 무조건적으로 복종할 것을 요구해서는 안된다. 부모가 행해야할 가장 중요한 부분은 아이가 가지는 개별적 주체성을 존중하고 동등한 개체로서 대우해주는 것이다.
근대 시민계급의 가정과 안나의 분열
교육받은 귀족 여성인 안나의 삶은 무엇하나 부족한 것이 없어보인다. 부유한 가정과 고귀한 남편, 착한 아들에 이르기까지. 완벽한 삶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그것은 바로 안나의 삶이 아닐까? 하지만 그녀의 삶은 무언가 불완전하며 불안함에 휩쌓여있다. 그녀의 마음속 깊은 곳에 있는 열정이 그녀의 삶을 옭매어가는 것이다. 아름답고 매력적이면서 강한 정열을 품고 있지만 귀족으로서의 교양이 넘치는 그녀의 삶은 꽤나 많은 분열을 경험하게 된다. 그녀에게는 가정에 대한 막중한 책임이 부여되어 있다. 그녀의 안락한 삶은 이 책임에서 비롯되는 것이며 이 책임을 회피하거나 도외시한다면 귀족들의 삶에서 추방당하게 된다. 이러한 교양넘치는 귀족 여성의 삶은 다분히 폐쇄적이고 억압된 측면이 강하다. 즉 전형적인 여성의 삶이 도식적으로 규정되어있다는 것이다.
근대 시민사회의 발전은 가족의 구조에도 큰 영향을 끼치게 된다. 그것은 바로 사적인 영역과 공적인 영역의 뚜렷한 구분이다. 전근대에서는 가내수공업을 통해 여성도 생산적인 일에 참여하였지만 근대 자본주의의 발전은 생산의 영역을 공적인 부분으로 한정시키고 여성들은 가정에만 머물도록 강요하게 된다. 공적인 영역에서 베재된 여성들은 가정내에서 아이들의 양육과 사랑만을 위해서 살아가는 존재가 된 것이다. 이는 극중의 여성들을 통해서 어렵지 않게 확인할 수 있다. 안나 카레니나의 모든 여성들은 오로지 사랑과 자녀만을 갈구한다. 그녀들은 자신의 삶을 스스로 능동적으로 결정하려하지 않는다. 남성의 사랑만을 갈구하고 사랑만이 유일한 의미가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러한 폐쇄적인 여성의 모습은 근대 시민계급의 가족의 변화에서 기인하는 것이다. 사적인 영역으로 한정된 여성의 삶은 가족 이데올로기[8]에 의해 더욱 강화된다. 가정은 완벽한 가장과 완벽한 부인 그리고 아이들이 뛰어노는 성스러운 공간으로 규정되며 여성의 역할은 이러한 가정을 더욱 더 완벽하고 성스러운 공간으로 만들어나가는 것에 주안점이 놓인다. 따라서 당대 여성은 자신의 신분에 맞는 생활 방식을 고수해야할 필요가 있으며 특히 남편의 경제력과 사회적 지위를 적극적으로 알리는데 주안점이 놓이게 된다. 이에 당대 남성들은 더욱 더 보수적이고 권위적으로 바뀌어 나가며 공적인 영역에서 얻어내는 성공은 이러한 가부장제를 강화시켜나가는데 큰 역할을 하게 된다. 부인들은 남편의 성공을 내조하고 그를 통해 완벽한 가정의 모습을 과시하는데 많은 시간을 소모하게 된다. 이에 그녀들은 자주 상류층 파티에 나가며 그 파티에서 어떤 옷을 입을지 어떻게 자신의 삶을 과시할지 따위에만 집중하게 된다. 이러한 비이성적인 여성의 삶이 바로 울스턴크래프트가 비판한 주된 모습이다.
안나(키이라 나이틀리 분)는 자신의 오빠가 행한 부정한 행동으로 인해 틀려져버린 올케언니와의 사이를 회복시키기 위해 모스크바로 향한다. 오빠의 가정을 지켜주기 위해 떠난 그 길에서 안나는 브론스키(애런 존슨 분)를 만나게 되고 그에게서 겉잡을 수 없는 충동을 느끼게 된다. 키티(알리시아 비칸데르 분)를 위한 파티에서 그녀는 브론스키를 향한 강한 충동을 느끼게 되고 이에 도망치듯 집으로 돌아가지만 브론스키 역시 뒤따라오게 된다. 브론스키는 안나에게 자신의 사랑을 지속적으로 내보이지만 안나는 이를 쉽게 받아들일 수 없다. 그녀 스스로도 브론스키에게 끌림을 느끼지만 그녀의 가슴속에 각인된 도덕률이 그것을 거부하라고 말하기 때문이다. 안나에게는 정숙하고 교양 넘치는 여성으로서의 의무가 존재한다. 즉 남편인 카레닌(주드 로 분)의 명예를 지켜야 할 의무가 있으며 아이를 완벽하게 키워야할 의무도 존재한다. 이러한 측면은 극중에서 지속적으로 확인할 수 있다. 카레닌은 국가를 위해 헌신하는 성자이며 그의 명예는 지켜져야 한다고 말이다. 주변인들이 안나에게 카레닌의 명예를 지켜야 한다고 말하는 이유는 안나의 흔들림을 느꼈기 때문일 것이다. 카레닌 역시 안나에게 성스러운 가정을 지키라는 경고를 행한다.
근대 가정이 만들어낸 또 다른 한가지는 성행위에 대한 금기이다. 성행위는 성스러운 것으로서 부부간에서만 이루어져야 하며 그외 모든 혼외관계나 혼전 관계를 더럽게 추악한 것으로 규정된다. 설사 부부간의 성행위라 하더라도 이는 육체적 쾌락이 목적이 아닌 성스러운 가정을 위한 행위로 규정된다. 따라서 교양 넘치는 여성은 성적인 것을 입에 담아서는 안되며 만약 이러한 것을 입에 담거나 성적 쾌락을 추구한다면 더럽고 추악한 여성으로 낙인직히게 된다. 브론스키의 구애를 받아들인 안나는 걷잡을 수 없는 충동에 빠져들고 급기야 브론스키와의 혼외관계를 맺기에 이른다. 햇살 좋은 날 풀숲으로 소풍을 나간 안나와 브론스키는 그 자리에서 자신을 사랑하느냐고 그리고 행복하냐고 확인을 한다. 서로 대답은 그렇다고 말하지만 이 장면은 묘한 불안감이 동시에 상존한다. 당장의 사랑의 열망에서 오는 기쁨과 부정한 여자로 낙인찍힌채 살아가야할 미래의 모습이 동시에 다가오기 때문이다. 경마 장면에서 브론스키가 낙마하자 안나는 오열한다. 이러한 그녀의 행동에 주변의 시선은 차갑고 냉정할 뿐이다. 성스러운 가정을 내팽겨친 여자에게 그 어떤 명예가 존재한다고 할 수 있을까?
이러한 안나와 브론스키 커플은 키치와 레빈 커플과 극명하게 비교된다. 키치를 사랑하던 레빈은 그녀의 사랑을 얻을 수 없기에 절망하지만 먼길을 돌아 키치와 레빈은 혼인하게 된다. 레빈은 키치에게 헌신하며 키치 역시 레빈에게 헌신한다. 이 부부에게 가정이란 성스러움 그 자체이며 이들의 사랑은 충동적이지 않고 서서히 서로에게 헌신하며 성숙되고 발전하는 양상을 보여준다. 이는 두 커플이 서있는 공간의 측면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키치와 레빈 커플이 삶을 이루어가는 곳은 시골이다. 그들은 소박하고 노동이 있는 전원생활을 통해 서로에게 충실한 양상을 보여준다. 반면 안나와 브론스키 커플의 삶은 철저히 대도시에서 이루어진다. 온갖 교양과 귀품 넘치는 예절로 가득찬 그곳의 삶은 도리어 위선만이 가득한 공간일 뿐이다. 이에 안나는 분열한다. 사랑의 열정에 내포된 불안이 그녀를 극한으로 밀어붙이는 것이다. 이를 두고 안나는 내안에 존재하는 악마성이라고 표현한다. 자신을 스스로 창녀로 여기며 브론스키가 자신을 버리지 않을까? 그리고 혼외관계로 인해 자신의 아들을 영원히 보지 못하게 되는건 아닐까? 이러한 불안들에서는 그 어떤 형태의 주체성과 능동성도 확인할 수 없다.
안나는 분명 나름 진일보한 여성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자신의 감정과 정열에 충실하여당 대 결혼관과 근대 가정 이데올로기에 극적으로 반기를 든 인물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러한 시도는 실패하게 된다. 안나의 열정은 사랑의 열정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그녀가 가지고 있는 교양은 카레닌을 사랑하고 그의 명예를 지켜주고 성스러운 가정을 지키는 것이 옳다고 말한다. 하지만 이러한 교양 속에서는 그 어떤 주체적 여성관도 확인할 수 없다. 철저하게 수동적이고 남성에 얽매인 삶의 모습만이 있을뿐이다. 반면 정열에 빠진채 브론스키에게 매달리는 안나 역시 주체적 여성으로 바라보긴 힘들다. 어느쪽이 되었건 안나에게서 확인할 수 있는건 오직 사랑뿐이기 때문이다. 그녀는 카레닌과 쉽게 이혼하지 못한채 브론스키와 도망치듯 여행을 떠나게 된다. 이혼은 모든 사회적 지위와 사랑하는 아들의 상실을 의미하기에 이혼을 지속적으로 회피하며 도망치는 것이다. 하지만 브론스키와의 사랑도 포기할 수 없었던 안나는 결국 자살을 선택한다.
그녀의 자살은 어떤 의미를 가질까? 위선적인 귀족사회가 그녀를 죽음으로 몰아간 것일까? 아니면 옳바르지 못한 삶을 선택한 벌인 것일까? 사실 안나의 죽음은 그녀 스스로 자신의 주체성을 정립하지 못하였기 때문이라 볼 수 있다. 그녀의 내면적 갈등은 오로지 외부의 평판과 남자를 향한 사랑에서 비롯한다. 울스턴크래프트의 관점에서 바라본다면 남자의 사랑에 집착하는 안나의 모습은 예쁜 옷을 입고 무도회에 참석해 남편의 경제력과 사회적 지위를 과시하려는 여성들과 딱히 다를 것이 없다. 어느쪽이든 남성에게 얽매인채 사랑만을 유일한 가치로 삼기 때문이다. 영화는 안나의 자살씬 이후 곧바로 레빈의 삶의 모습을 보여준다. 스스로 농장으로 내려가 소작인들과함께 노동하며 살아가는 삶을 선택한 레빈의 삶은 자살로서 마감한 안나의 삶과 극명하게 대비된다. 비단 여성의 삶이 아니더라도 결국 이성의 담지자로서의 규정되지 않은 삶의 선택과 거기에서 비롯되는 진정한 의미에서의 주체관을 안나와 레빈의 삶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는 것이다.
[8] 이상적이고 완벽한 가정의 모습을 강요하는 사회적 구조를 말한다. 오늘날에는 정상가족 이데올로기라는 용어가 보편화되는데 이는 아빠, 엄마, 아이로 이루어진 3~4인 가족을 지극히 정상으로 규정한채 그외 편모가정, 편부 가정, 동성 부부가정 따위는 비정상으로 규정하는 이데올로기를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