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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2007), 우연의 삶과 초월적 가치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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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2007), 우연의 삶과 초월적 가치

유쾌한 인문학 2014. 6. 25. 18: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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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 우연의 삶과 초월적 가치

전직 용접공이자 배트남 참전용사인 모스(조쉬 브롤린 분)는 사막한 가운데서 사냥을 하며 살아가고 있다.  여느때처럼 사냥을 하던 어느날 우연히 마약 거래 도중 총격적인 벌어진 현장을 발견하게 된다.  목이 말라 애타게 죽어가는 한사람을 제외한 모든 사람들이 죽어버린 현장에서 그는 한무더기의 마약과 이백만달러를 발견한다.  모스는 돈을 들고 집으로 돌아오지만 목이 말라 죽어가던 사람이 생각나 다시 그를 찾아간다.  하지만 그때 도리어 마약갱단에게 자신의 정체를 드러내어 쫓기는 신세가 되버린다.  이에 모스는 자신의 부인을 친정으로 피신시킨 이후 돈을 들고 도망치려 한다.  한편 마약 갱단은 미친 살인마 안톤 쉬거(하비에르 바르뎀 분)을 고용하여 모스를 추적하려 들지만, 쉬거는 자신을 고용한 사람들을 살해한채 단독으로 모스를 쫓는다.  늙은 보안관 벨(토미 리 존스 분) 역시 사건 현장을 보게 되고 모스가 어떤 살인마에게 쫓기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이에 벨은 싸이코 킬러와 모스를 뒤쫓는다.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는 우연의 삶과 초월적 가치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작품으로, 예이츠의 비잔티움으로의 항해[1]는 이 작품을 이해하는데 중요한 모티브를 제시한다.  “That is no country for old man.”이라는 문장으로 시작하는 이 시는 유한한 세계에서 벗어나 초월적인 세계로 나아가고자 하는 소망을 잘보여준다.  예이츠는 젊은이의 나라로 대변되는 현실세계가 지나치게 관능적인 쾌락에 빠져버렸다고 생각한다.  저 죽어가는 세대들은 자신들이 곧 죽을 운명이라는 것을 알지 못한채 관능적인 음악만을 쫓으며 살아가고 있다.  비단 젊은이 뿐만 아니라 물고기, 짐승, 새들 또한 풍요로운 여름이 영원할 것처럼 찬미하며 쾌락만을 바라본다.  하지만 이들은 영원한 지성의 기념비에 대해선 알지 못한채 서서히 죽음의 세계를 향해 나아갈뿐이다.  더이상 타락한 현실에 적응하기 힘들어진 노인들은 물질적이고 감각적인 것에 사로잡힌 젊은이의 나라에서 탈출하여 비잔티움으로 향한다.  비잔티움은 영원한 조화가 존재하는 세계로서 욕망과 죽음 그리고 절망이 존재하지 않는 곳이다.

노인은 보잘 것 없는 존재이자 누더기 옷을 걸친 허수아비에 불과하다.  이에 노인은 육신의 옷이 갈갈이 찢기는 것을 기뻐하며 영적이고 초월적인 존재로 새롭게 태어나야 한다.  하지만 영혼의 장엄한 기념비를 모른채 노래부르는 것은 관능적인 음악에 불과하기에, 노인은 비잔티움에서 영혼의 장엄한 기념비를 배우고자 한다.  비잔티움에 도착한 노인은 성현들에게 자신을 영원한 세공품으로 만들어 구원해달라 애원한다.  병든 육신과 심장을 소멸시켜 욕망에서 벗어나 영원한 세공품이 되길 원하는 것이다.  노인이 원하는건 육체에 담긴 모든 욕망에서 벗어나 영원한 생명을 가진 영적 존재로 다시 태어나는 것이다.  결국 노인은 그 어떤 갈등도 존재하지 않는 조화롭고 황홀한 황금의 세공품이 되어 영원 세계를 노래한다.  이것은 육체적인 것에서 벗어난 늙지 않는 지성의 기념비와 같은 초월적 가치라고 할 수 있다.

이 영화에서 벌어지는 모든 사건들은 우연이라는 말로서 정리가 가능하다.  우연히 획득한 수백만 달러의 돈을 가지고 끝까지 도망가는 모스, 그 돈을 추적하는 쉬거를 운없이 만나 죽어나간 수많은 사람들, 쉬거를 죽이기 위해 마약딜러에게 고용된 칼슨(우디 해럴슨 분)은 모두가 우연이라는 하나의 원칙에 사로잡혀있다.  돈의 획득과 수많은 죽음의 원인에는 우연이라는 말 이외에 그 어떤 이유도 제시할 수 없다.  심지어 안톤 쉬거는 동전의 양면에 타인의 목숨을 걸어버리기도 한다.  앞면이냐?  뒷면이냐?  50프로의 확률게임에 타인을 끌어들여 자신의 목숨을 결정짓게 하는 것이다.  동전을 던지는 주유소 사장은 자신이 무엇을 내기로 걸었는지도 알지 못한채 동전을 던진다.  이 작품의 이해하기 힘든 부조리는 바로 이지점에서 발생한다.  누군가를 죽이는 것에는 이유가 있기 마련인데 안톤에게선 그것을 찾을 수 없다.  모든 가치들은 도박같은 우연의 지배력 앞에서 의미를 상실하였으며, 오직 피와 폭력이 난무하는 부조리와 혼돈만이 가득하다.

사실 우연이라는 말 앞에는 왜곡된 믿음의 문제가 선존한다.  주유소 사장은 앞선 수많은 사건들의 연쇄에 의해 안톤을 우연히 만나게 된다.  만약 그가 그의 부인과 결혼을 하지 않았다면 주유소 사장이 될리도 없었을테고 안톤을 만날 일도 없었을 것이다.  자신의 생사를 결정짓는 동전 역시 수많은 손을 거쳐 거기까지 오게 되었다.  두명의 사람과 하나의 동전이 한자리에 모인 우연은 안톤에게 그렇게 될 수 밖에 없는 믿음의 당위를 제시해준다.  즉 그렇게 될 수 밖에 없기에 너는 나를 만난 것이고 따라서 너는 죽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마치 하나의 도박과 같은 것이다.  이러한 왜곡된 우연은 쉬거가 수많은 살인을 하는데 중요한 당위를 제시해준다. 

모스는 급기야 국경을 넘어 멕시코로 도망을 가게 되지만 쉬거는 그곳까지 따라와 모스의 부인을 놓고 협박을 가한다.  돈을 내놓으면 부인을 살려줄 것이지만 돈을 내놓지 않으면 둘다 죽는다.  이에 모스도 쉬거를 잡기 위해 다음날 어느 모텔로 향하지만 어처구니 없게도 그곳에서 이름 모를 갱들에게 우연한 죽임을 당한다.  결국 모스도 쉬거도 어느 누구도 돈을 가지지 못하게 된다.  이렇듯 이 작품은 도대체 이해할 수 없는 혼돈과 부조리만을 제시한다.  도대체 왜 저렇게까지 하는 것인지 결코 이성적으로 설명할 수 없다.  모든 등장인물들은 자기 자신의 존재 의미가 무엇인지 알지 못한다.  단지 남아있는 것은 마치 영원한 여름을 살 것처럼 착각하고 있는 젊은이들의 나라 속에 담긴 존재의 비참함이다.  마치 우리의 삶이 그러하듯 말이다.

벨은 자신의 부관과 함께 쉬거를 추적해나간다.  아직 미숙한 부관은 벨의 놀라운 통찰력 앞에서 혀를 내두를뿐이다.  비록 몸은 노쇠했을지언정 벨의 연륜에서 나오는 통찰력은 마치 자신의 눈앞에서 모든걸 보듯 꿰뚫어낸다.  하지만 거기까지이다.  벨의 통찰력은 쉬거를 잡지도 못하였고 모스를 구해내지도 못하였다.  모스와 쉬거가 서로 죽이기 위해 피의 혈투를 벌일때에도 그는 사건의 언저리를 헤매고 있을뿐이다.  노인은 놀라운 통찰력을 통해 물질적이고 감각적인 것의 허무함을 깨닫지만 힘없는 노인이기에 세상을 변화시키지 못한다.  노인을 지배하는 것은 오직 무력함뿐이다.  아무것도 변화시킬 수 없는 무력함은 사람이 태어나고 죽는 반복 속에서 조금도 바뀌지 않는다.  즉 물질적인 것의 허무함을 깨달은 지성의 소유자인 노인이 설 나라는 없다는 것이다. 

모스의 죽음 이후 쉬거는 돈을 찾고자 그가 묵었던 모텔에 들리게 되고 벨은 알수 없는 예감에 그곳을 홀로 찾아간다.  문을 사이에 둔채 대치한 둘은 묘한 긴장감을 자아내다 쉬거가 몰래 도망쳐 맞딱드리지는 못한다.  벨은 쉬거를 놓친 이후 마을의 노인이자 전 보안관인 엘리스(베리 코빈 분)를 찾아간다.  벨은 엘리스에게 이제 힘이 달려서 은퇴를 하겠다고 말한다.  나이가 먹어서 힘이 달려 일을 하기 힘들어서 은퇴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만이 전부는 아닐 것이다.  나이든 육체는 더이상 어떻게 할 수 없는 무기력 앞에서 무너질 수 밖에 없다.  더이상 어떻게 할 수 없는 자괴감에서 그는 은퇴를 결심한 것이다.

: 예전엔 나이를 먹으면 하나님께서 살펴주시겠지 싶었어요. 헛된 바램였죠. 원망은 안해요. 저라도 저같은 놈 살펴줄 생각 없으니깐요.”  중략  엘리스 : 그 맘고생 너만 겪는거 아냐. 녹록찮은 세상이잖아. 오는 변화를 막을 수 있나? 어디 다 내 맘 같아야지. 접을건 접어.”  벨의 허망한 말에 대한 엘리스의 대답은 이미 이런 일은 항상 반복되어 온 일이고 이러한 사실을 깨닫고 있는 노인은 더이상 어찌 할 수 없다는 체념적인 말이다. 

실제로 쉬거를 만난 모든 사람들은 그에게 친절하게 대하였다.  쉬거가 곤란에 처하면 언제든지 자신의 것을 내어주어 호의를 베풀었다.  하지만 쉬거는 이 모든 호의를 죽음으로 되갚는다.  심지어 쉬거는 모스의 부인을 기어코 찾아가 죽이려든다.  모스에겐 널 살릴 기회가 있었지만 그 기회를 차버렸기에 넌 죽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에 그럴 필요가 있느냐는 그녀의 말 앞에서 쉬거는 동전 던지기라는 선심을 베풀어준다.  쉬거에 의해 만들어진 수많은 죽음은 수많은 우연의 연속이 만들어낸 것이기에 그렇게 죽는 것 또한 큰 이유는 없다.  결국 예이츠가 말하는 젊은이들의 나라와 관능적인 음악이란 단순한 가치 상실을 넘어 존재의 의미와 이유조차 묻지 않는 도박과 같은 우연의 지배 그 자체라 볼 수 있을 것이다. 

벨은 마지막에 자신의 부인과 대화를 나누며 자신이 최근에 꾼 두가지 꿈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첫번째 꿈은 아버지보다 20살정도 더 늙어버린 벨이 마을에서 아버지를 만났는데 그때 돈을 받게 된다.  하지만 아버지가 주신 돈을 잃어버렸다는 것이다.  이 꿈에서 더이상 늙지 않는 아버지는 영원한 지성의 소유자임을 보여주는 반면 늙어가는 벨은 아직 지성의 소유자가 아님을 보여준다.  그리고 돈을 잃어버리는 행위는 물질적 가치에 대한 몰가치성과 초월을 향한 의지를 나타낸다.  결국 첫번째 꿈은 아직 초월적 지성의 소유자가 되지 못한 벨이 원하는 초월을 향한 의지인 것이다.  두번째 꿈은 벨이 춥고 눈쌓인 밤에 산속 좁은 오솔길을 말을 타고서 가고 있는데 갑자기 아버지가 나타나 벨을 앞질러 가는 것이다.  아버지는 담요를 두른채 횃불을 들고 앞으로 나아가 어둡고 추운 곳을 먼저 밝히고 있었다.  마치 나중에 벨이 도착하면 아들을 맞으려는듯이 말이다.  두번째 꿈 또한 첫번째 꿈과 근본적으로 다른바는 없다.  어둡고 추운 눈쌓인 산 속은 젊은이들의 나라에서 살아갈 수 없는 노인의 식어버린 마음을 의미한다.  이때 젊은이들의 나라를 힘겹게 살아가고 있는 벨의 앞으로 아버지가 앞서 나가게 되는데 이는 비록 바꾸기 힘들지라도 지성의 기념비를 상징하는 횃불로서 세상을 끊임없이 밝히고자 하는 의지를 나타내는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그렇다면 벨의 아버지가 횃불을 들고 기다리는 그곳은 예이츠가 꿈꿔왔던 비잔티움같은 곳일까?  사실 노인들은 더이상 젊은이들의 나라에서 살아갈 수가 없다.  그곳은 그 어떤 희망적인 가치도 찾아볼 수 없는 극단적인 혼돈만이 가득한 곳이다.  이는 안톤 쉬거의 마지막 모습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돈을 회수하지 못한 쉬거는 모스의 부인을 죽인 이후 어디론가를 향해 떠나가는데 그때 그는 교통사고를 당해 크게 다치게 된다.  그곳은 어딜봐도 사고가 날만한 장소도 아니었고 쉬거가 제대로 확인을 안한 것도 아니다.  말그대로 우연한 사고인 것이다.  젊은이들의 나라에서 의미를 가진채 이루어지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  우연히 찾아온 행운은 가족을 죽음으로 몰아갔을뿐이며 돈을 찾기 위해 끊임없이 살인을 한 쉬거 역시 아무것도 가지지 못한채 어이없는 사고만을 당할뿐이다.

노인들이 느낀 무력감은 이렇듯 아무것도 예측할 수 없는 삶에서 오는 한계이다.  마치 우리의 삶이 한판의 도박인 것처럼 어떻게 할 수 없는 무력감을 느끼는 것이다.  예이츠는 노년에 이러한 삶의 한계를 느낀채 비잔티움을 바라보며 영원성의 상징이 되기를 바랬다.  자신들의 육체는 늙어버린채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는 그 어떤 힘도 없기에 차라리 그곳을 떠나 절대적 가치를 통해 영원한 삶을 바란 것이다.  하지만 영원한 세공품이 된다는 것만으로 과연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까?  비잔티움으로의 항해의 4연은 초월적 가치를 가진 존재가 되어 황금 가지 위에서 영원히 노래부르겠다고 말한다.  하지만 그가 부르는 노래는 젊은이들의 나라가 존재하기에 부를 수 있는 노래이다.  젊은이들의 나라가 없다면 더이상 부를 노래가 없고 부를 노래가 없어진 그는 존재의미를 상실하게 될 것이다.  결국 절대적 가치의 상징인 황금의 형상은 현실의 세속적 가치와 완벽하게 분리될 수 없는 모순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바라본다면 벨의 두번째 꿈에서 아버지가 그를 기다리는 곳이나 예이츠가 말한 비잔티움은 허상에 불과하다.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지만 노인을 위한 비잔티움 역시 존재하지 않는다.  벨의 아버지는 오직 꿈 속에서 그를 기다릴뿐이다. 

대다수의 헐리웃 영화들은 화해와 소통의 가능성을 말하지만 코엔 형제들은 그러한 가능성 자체를 없애버린다.  어차피 인간의 삶이란 온갖 종류의 모순과 갈등 그리고 이해할 수 없는 인과의 연속이다.  이 영화에 벌어지는 모든 사건들은 도대체 이해하기 힘든 우연들을 보여준다.  어떻게 보면 쾌락에 찌든 삶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꼭 그렇게 보기도 힘들다.  이는 그 어떤 가치도 존재하지 않는듯한 혼돈과 부조리 그 자체이다.  어쩌면 노인은 자신의 지성의 기념비만을 끌어안은채 늙어버린 육신을 한탄하며 비잔티움으로 도망치고 싶어하는 존재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바로 이런 것이 인간의 삶이라면 노인이라는 이유만으로 비잔티움으로 도망치려기보다는 현실의 삶 속에서 이상적 삶을 구가하려는 태도가 요구되는 것이 아닐까?



[1] 비잔티움으로의 항해

저것은 늙은이들의 나라가 아니다.  서로서로

팔짱을 낀 젊은이들, 나무속의 새들

-저 죽어가는 세대들-은 저희들의 노래를하고,

연어의 폭포, 고등어 득실거리는 바다,

물고기나 짐승이나 새들은 긴 여름 내내 찬미한다,

무엇이고 잉태되고 태어나서 죽는 것을.

모두가 저 관능적인 음악에 빠져서

늙지 않는 지성의 기념비를 경시한다.

늙은이란 다만 보잘것 없는 것,

막대기에 걸친 누더기 옷일 뿐이다, 만일

영혼이 손뼉치며 노래하지 않는다면, 육신의 옷이

갈가리 찢어지는 것을 큰소리로 노래하지 않는다면.

또한 영혼의 장엄한 기념비를 공부하지 않으면

노래를 가르쳐줄 학교는 어느 곳도 없으니,

그래서 나는 바다를 항해하여 왔다

성스런 도시 비잔티움으로.

, 황금 모자이크 벽에서와 같이

신의 성화 속에 서 계신 성현들이시여

그 성화에서 나와 빙빙 선회하며 내려오사,

내 영혼의 노래 스승이 되어주소서,

내 심장을 소멸시켜주소서, 욕망에 병들고

죽어가는 동물에 얽매여서

내 심장은 제 처지도 모르오니, 그리하여

나를 영원한 세공품으로 만들어주소서.

한 번 자연에서 벗어나면, 나는 정녕코

내 육신의 형상을 어떤 자연물에서도 취하지 않고,

그리스의 금공들이 망치질한 금에

황금유약을 발라 만드는 그런 형상을 취하리라,

꾸벅꾸벅 조는 황제를 깨우기 위하여,

혹은 황금 가지에 앉혀놓고 비잔티움의

남녀 귀족들에게 과거나 현재나 미래를

노래로 들려주기 위하여 만드는 그런 형상을.

1927

(한국예이츠학회, 예이츠 시 번역 총서4, 건국대학교 출판부, 2006)

 

최초 원고 2009/08/08 06:13

1차 수정 2014/0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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