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응형
Notice
Recent Posts
Recent Comments
관리 메뉴

★ image or real

영화 업(UP), 우리가 꿈꾸는 행복과 변증법적 삶에 대해서(2009) 본문

영 화/애니메이션

영화 업(UP), 우리가 꿈꾸는 행복과 변증법적 삶에 대해서(2009)

유쾌한 인문학 2010. 2. 21. 12:13
반응형





UP
픽사의 10번째 작품으로 2009년에 공개된 작품이다.  감독은 피트 닥터가 맡게 되었는데 피트 닥터는 픽사의 4번째 작품인 몬스터 주식회사의 감독이다.  피트 닥터는 앤드류 스탠튼과 함께 픽사의 초기 멤버로서 존 라세터 감독이 토이스토리2 이후 재충전을 위해 감독의 자리에서 물러났을때 그의 뒤를 이어 01년, 03년에 몬스터 주식회사와 니모를 찾아서를 각각 감독하여 최고의 성과를 거두게 된다.  이러한 두 감독이 이번엔 순서를 바꾸어 2008년도에 앤드류 스탠튼이 월e를 제작하고 바로 뒤이어 09년에 피터 닥터가 업을 내놓게 된 것이다.

피트 닥터는 존 라세터가 픽사를 세우고 난 이후 3D CG 기술을 지속적으로 개발하고 있던 시절 디즈니 애니메이션 학교를 졸업한 후 존에 의해 고용되어 간 케이스이다.  물론 앤드류도 마찬가지이고.  컴퓨터라는것 자체를 모르는 상황에서 그들은 맨땅에 해딩하듯 컴퓨터를 익히고 그렇게 픽사의 주된 창립멤버로 자리매김하게 된다.

업이라는 작품이 보여주는 가장 큰 특징은 주인공이 사람이라는 사실이다.  드디어 사람이 주인공을 맡게 된 것이다.  인크레더블이 있지 않느냐고 말할수도 있겠지만 사실 인크레더블은 기존에 존재하던 만화주인공을 따온 것이니 예외라 하겠다.  사실 이 작품은 피트가 과거에 선보였던 몬스터 주식회사와 그 주제에 있어서 큰 차이점을 보이지는 않는다.  두 작품 모두 우정이라는 것에 초점을 맞추게 되고 각 캐릭터의 성장적 요소도 똑같이 포함하고 있으니 말이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보면 픽사가 내보이는 주제라는 것들이 딱히 큰 독특함을 보인다고 보기도 힘들다.  항상 바른말만 하고 옳바른 세상을 그려내는게 그들이니 말이다.  비슷비슷한 주제를 지속적으로 내보이게 되면 보통 지루하다는 평을 듣기 마련인데 이들은 그런 평에서 비교적 자유로운 편이다.  그 이유는 역시 보편성을 표현해내는 특이성에 존재하는것 아니겠는가?

이번 작품에서 눈여겨 보이는 부분은 일상생활에서 나타나는 작은 것들을 포착하여 표현한 부분이다.  예를 들어 오래된 창문이 주는 느낌.  먼지라던지 오래된 창문을 닦았을때 나타나는 현상이나 유리창에 얼룩따위들.  이런것을 정말 기가막히게 표현해낸다는 것은 기술도 기술이지만 그것을 정확하게 관찰해내는 애니메이터들의 관찰력이 얼마나 대단한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부분이다. 

마음껏 상상하고 마음껏 그 상상을 내뱉어내고 작은 것 하나하나를 관찰하고 거기에 또 다시 상상력을 불어넣는 그들의 창의력을 보고 있자면 왜 우리사회가 픽사와 같은 회사를 내놓지 못하는지에 대한 이유가 명확히 도출된다고나 할까.  티비광고에서는 생각대로 하라고 난리이지만 정작 현실에선 획일성, 집단성으로 꽉 막힌 우리 사회가 나아갈 길이 어디인지 그리고 진정한 경쟁력이란 무엇인지에 대해서 픽사라는 회사를 통해 다시금 생각해보게 된다.




동반자와 모험
극중 주인공 할아버지인 프레드릭슨은 그의 부인인 엘리와 어린시절 만나 평생을 함께 해온 동반자이다.  둘다 항상 모험을 동경했었고 모험을 떠나기 위해 준비했었지만 삶이 주는 무게에 결국 떠나지 못하고 엘리는 그만 죽게 된다.  그 이후로 프레드릭슨의 성격은 고집불통 영감으로 변하게 된다. 

흔히 사람들은 평생을 함께 살아가게 되는 배우자를 보고 자신의 반쪽이라는 표현을 하곤 한다.  배우자를 보고 반쪽이라고 표현한다는 것은 자신은 불완전한 존재라는 것을 전제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자신이 불완전 하기에 자신의 반쪽을 통해 완전한 자신을 이루게 되기를 꿈꾼다고나 할까.  완전한 자기를 이룬채 삶을 살아가게 되는 것은 그 자체로서 대단한 모험이 아닐련지.  결국 프레드릭슨은 엘리와 함께 비록 원하던 곳으로 떠나지는 못했지만 그들의 삶을 통해 대단한 모험을 했다고 볼 수 있다.

그런 프레드릭슨에게 엘리의 죽음은 상실을 의미한다.  완전한 자기는 무너지고 다시금 반쪽이 된 자신의 모습을 확인한다고나 할까.  이러한 상실을 통해 고집불통 영감으로 변하는 것은 인간이 가지는 어린시절의 근원적 경험과 어느정도 일치하는 측면이 있다.  즉 유아기 시절의 인간이 가지는 자신의 불완전성에서 자신의 거울상이 될 수 있는 부모를 통해 완전한 이미지를 자신의 자아로 삼게 되고 그를 통해 완전성을 획득하여 안정을 얻게 되는바 이러한 일련의 과정이 단한번으로 끝난다기 보다는 여러번 지속적으로 반복되게 되고 그중 하나가 결혼이라는 제도를 통해 나타나게 된다. 

결국 프레드릭슨은 부인의 죽음을 통해 완전성의 상실을 경험하게 되는데 그 완전성의 기간이 상당히 길었기에 그 고통에서 헤어나오지를 못하는 것이다.  그는 그자리에서 선채 화석이 되어버채 과거속에 자신을 묻고 현재와 충돌을 일으키며 억지로 자신의 삶을 유지하는 것에 불과한 것이다. 




또다른 만남
그러한 프레드릭슨은 결국 사고를 치게 되고 자신의 집은 허물어지게 되는 대위기의 상황에서 떠나기로 결심한다.  집에 풍선을 달아놓은채 자신과 엘리가 꿈꿔왔던 그곳으로 가게된 것이다.  이때 프레드릭슨은 꼬마아이인 러셀과 우연히 같이 떠나게 된다.  우여곡절 끝에 꿈꿔왔던 그 장소에 도착하게 되고 거기에서 러셀과 강아지 그리고 도요새와 함께 대단한 모험을 경험하게 된다.  프레드릭슨이 떠나는 것을 보고 새로운 나아감이라고 하기는 무리가 있다.  사실 그가 떠나는 이유는 엘리와의 추억 때문이다.  자신이 살고 있는 집을 엘리 그자체로 생각하면서 떠나는 그는 몸은 떠날지언정 정신은 여전히 과거에 묶인채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그런 그가 변화하게 되는 주요 요인은 러셀이다.  쉽게 말해 러셀이 프레드릭슨이 가지고 있던 빈자리를 채워주었다고나 할까.  위에서 언급한 어린시절의 그 경험을 러셀을 통해서 다시금 하게 되는 것이다.  러셀 역시 프레드릭슨을 통해서 빈자리를 채우게 된다.  프레드릭슨을 통해 아버지의 자리를 채우게 되는 것이다.




변증법적 삶에 대해서
사람은 항상 완전한 삶을 꿈꾼다.  언제나 행복하길 원하고 안정감을 느끼기를 원한다.  이러한 안정감은 유아기시절 만나게 되는 최초의 타인인 어머니를 통해서 형성되는 완전함에의 경험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파편화된 신체의 경험에서 자신의 거울상으로서의 어머니를 통해 완전함을 얻게 되고 어머니와의 이자적 구조를 통한 나르시즘적 경험이 평생을 두고 그것을 갈망하게 만드는 것이다.

이러한 경험은 대단히 변증법적이라고 할 수 있다.  최초로 형성되는 자아라는 것은 결국 거울에 비친 타인의 효과에 불과한 것이니 말이다.  이러한 경험은 한번에서 끝날 수는 없는 것이고 살아가는 과정에서 지속적으로 반복되게 된다.  현재에 완성된 완전함은 불안해질 수 밖에 없는 것이고 그때 또 다른 반의 등장을 통해 반복된다는 것이다.  이 만화가 우리에게 던져주는 시사점은 결국 이런 것이다.  멈추지 말라.  두려워하지도 말고.  사람은 누구나 잃을것을 알면서 사랑하는것 아니겠는가.  왜냐면 또 다른 사랑이 다가올것이기에....


 
반응형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