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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분노의 포도(1940), 대공황시대의 농민의 비참한 삶 본문

영 화/고전 영화

영화 분노의 포도(1940), 대공황시대의 농민의 비참한 삶

유쾌한 인문학 2010. 11. 14. 2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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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포드(John Ford)
존 포드는 자기 자신을 소개 할때 이런 말을 하였다고 한다.  '나의 이름은 존 포드이며 나는 서부영화 감독이다'  정말 아주 간결하고 핵심적인 자기 소개가 아닐련지.  1894년에 태어나 1973년에 사망하게 되는 그는 무성영화 시대부터 서부영화를 만들기 시작한다.  그의 모든 영화들이 대단한 성공을 거둔 것은 아니고 초기의 그의 작품들은 성공과 실패를 거듭하게 된다.  1924년에 만든 철마라는 작품은 큰 성공을 거두게 되지만 이년후인 26년 세 악당은 엄처어 대 실패를 하게 되고 그 이후 그는 한동안 서부 영화를 멀리하게 되며, 그 이후 그는 다양한 코미디물이나 액션, 멜로 영화들을 만들게 된다.

그러다 유성영화시대가 열리면서 1939년 역마차라는 작품으로 다시금 서부영화로 돌아온 그는 어마어마한성공을 거두게 되며 역마차라는 작품은 서부영화 최고의 명작으로 거듭나게 된다.  존 포드는 철저하게 헐리웃의 시스템에 의존한 감독이었지만 다른 한편으론 그러한 시스템을 적절히 활용할 줄 아는 유능한 감독이었다.  그의 초기 작품들은 아무래도 초기 서부극의 한계점을 뚜렷하게 보여주는데 그것은 인디언에 대한 멸시적 측면이다.  하지만 그의 후기 작품으로 들어가면 이러한 웨스턴에 수정을 가하려는 시도가 생겨나게 되고 그 대표적인 작품이 그의 마지막 작품인 '샤이엔 족의 최후(1964)'이다.

자기 자신을 대놓고 서부영화 감독이라고 소개하였지만 그의 작품세계가 오직 서부영화라는 하나의 주제에만 국한되지는 않는다.  예컨데 역마차, 분노의 포도, 나의 계곡은 푸르렀다로 이어지는 일련의 작품들이 보여주는 수준 높은 주제성은 많은 고찰점을 남겨주게 되는데 이러한 일련의 사색의 공간을 남겨두는 그의 작품 스타일이야 말로 그를 설명할 수 있는 또 다른 기준점이 아닐련지. 




분노의 포도(The Grapes Of Wrath)
존 스타인벡의 원작 소설을 존 포드가 영화화 한 것이다.  역마차와 어느정도의 교차되는 주제의식을 가지고 있지만 역마차보다는 훨씬 깊이가 있다.  그 이유야 당연히 원작 자체가 최고의 고전이니 당연한 것일테고.  사실 이런 작품이 당시의 헐리웃 시스템 그것도 폭스사에서 나왔다는거 자체가 실로 놀라운 일이 아닌가 생각된다.  혹자는 존 포드가 오직 서부영화만을 만든 것으로 생각하고 이런 영화를 제작하였던가? 이라고 말할수도 있겠지만 존 포드의 영화세계를 쭉 살펴본다면 그렇게 특별할건 없다고 생각된다.  역마차에서도 한계점은 뚜렷하지만  평등의식에 대한 늬앙스는 풍겨내고 있으니 말이다.  

아무튼 이영화는 존 포드가 만들었고 서부가 배경이긴 하지만 서부영화는 아니다.  서부영화라고 칭할수 있으려면 서부영화 특유의 전형적 내러티브를 따라야 하는데 이 작품은 그런 부분은 존재하지 않는다.  영화의 시대적 배경은 1930년대 대공황 당시의 미국이며 그 속에서 살아가던 사람들의 모습을 그려내게 된다.  시대설정이 이러하다보니 기본적으로 자본주의의 문제점과 농업의 대자본화 등의 문제점을 직접적으로 건들게 되고 대공황 당시 사람들의 비참한 생활상을 보여주게 된다.  그러면서 존 스타인벡의 원작에 함몰되지 않고 자신만의 스타일을 정확히 보여주게 된다.

존 스타인벡의 원작 소설은 기본적으로 출애굽기의 구성과 동일한 형태를 보여주게 된다.  애굽으로의 탈출부터 이집트에서 당하게 되는 이방인으로서의 고통, 그리고 가나안으로 떠나는 여정은 오클라마호에서 캘리포니아로 떠나는 여정과 캘리포니아에서 당하는 이런 저런 차별적 요소와 동일시 할 수 있다.  영화 역시 이런 일련의 과정들을 그대로 답습하게 된다.  내용은 아주 단순하다.  오클라마호에서 농사짓고 살던 한 가족이 대자본에 의해 땅을 빼앗기게 되어 그들에게 있어 나름 약속의 땅인 캘리포니아로 낡은 트럭 하나에 모든 것을 실은채 떠나게 된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가족들은 죽고 헤어지는 과정을 반복하면서 급기야 어이없이 살인까지 저지르게 되어 쫓기는 신세에 이르게 된다.  결국 그들은 정부에서 운영하는 어느 한 캠프에 도착하게 되고 이 캠프는 일련의 공동체적 모습을 보이게 된다.  일종의 농민 결사체같은 것이라고 볼 수 있는데 이 단체를 전복하기 위해 기업과 결탁한 경찰권력의 모습이 대단히 아이러니하다. 

이 영화는 기본적으로 아주 직선적인 형태로 나타나게 된다.  쓸데 없는 것들을 배재한채 출애굽의 과정처럼 동쪽에서 서쪽으로 나아가는 그들의 일련의 과정과 그 속에서 나타나는 삶을 담담하게 그려낼뿐이다.  과장도 없고 축소도 없이 사실 그 자체만을 표현하는 이러한 스타일은 당시의 시대상황과 그 속에서의 고통을 피부에 집적 맞닿도록하는 효과를 가져오게 된다.  영화는 자본의 폭력에 대해서 직접적으로 비판을 하게 되는데 사실 영화를 보면 대공황시대라고 하더라도 자본가는 여전히 부유한 삶을 살아간다는 것을 알 수 있게 된다.  가장 인상 깊은 장면은 어느 농장에 도착했을때의 사건인데 그 농장에는 파업단체가 있었기에 수확하는 박스당 5센트의 돈을 받게 된다.  하지만 그들이 처리되자 돈은 바로 2.5센트로 줄어들게 되는 모습을 보여주게 되고 이러한 경험을 통해 극중 주인공은 이러한 노동운동의 길을 떠나게 된다.

사실 가만히 생각해보면 극중에서 노동자와 농민을 탄압하는 사람들도 따지고 보면 고용된 노동자라는 측면이 대단히 아이러니하다.  오클라마호에서 살아오던 집을 트랙터로 밀어버리는 일을 하는 것도 이웃사람이 행하게 되고 이러한 일련의 노동자들의 분열양상속에서 자본가들의 모습은 크게 드러나지 않는다.  영화의 초반에는 이 모든 사태의 책임자를 총으로 쏴 죽여버리겠다며 누구에게 책임이 있느냐? 라는 질문을 던지게 되자 그 답변으로 기업을 말하게 되고 그 기업을 어떻게 하겠냐는 식으로 반응이 나온다.  이에 그 기업주를 죽여버리겠다고 하니 그 기업주는 은행이 시키는대로 할뿐이라고 말한다.  은행에 가서 죽여버리겠다고 하니 그사람은 그냥 은행에서 고용된 사람일뿐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어느날 쫓겨난 그들은 누굴 쏴 죽여야 할까?  그들은 아무도 쏴죽이지 못한채 그렇게 떠나게 된다.  결국 이러한 사태의 근본적 원인은 어느누구도 아닌 자본이 가진 폭력성 그 자체가 아닐련지.  이러한 자본의 폭력 앞에 인간성에 대한 어떤 진지한 반성이 생겨나게 되고 그와 동시에 자본주의 자체를 수정하려는 움직임이 생겨나게 된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결국엔 자본주의는 다시 과거로 회귀하는 모습을 보여주게 되니 그것이 바로 신자유주의라는 새로운 자본주의 형태이다.  그리고 불과 몇십년전에 발생하였던 그 고통들은 전부다 잊어버린채 경쟁력 운운하며 스스로 속해있는 계급을 스스로 적으로 돌리며 스스로 자멸해버리며 이를 확대재생산하는 일련의 모습을 보고 있자면 결국 역사는 반복된다는 자명한 진리를 다시금 깨닫게 된다. 




마무리
영화의 가장 마지막 장면이 대단히 인상 깊다.  포드 자동차들에 몸을 실은채 다시 일자리를 찾아 해매는 일련의 노동자들의 모습.  그들은 그들이 타고 있는 대량생산의 상징인 포드 자동차와 뭐가 다를까?  스스로 하나의 부품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한채 그리고 그들이 모이면 강력한 힘이 될 수 있다는 것도 모른채 나만 아니면 된다는 식의 철저한 복불복 정신에 입각한 개별적인 생존투쟁은 결국 문제 해결에 아무런 도움이 될 수가 없다. 

오늘날 사회를 보더라도 마찬가지 아닌가?  과연 이 국가의 절대적 부의 총량이 부족할까?  절대적 부의 총량은 이미 차고 넘치는 수준에 이르고 있지만 여전히 생존에 위협을 느끼는 사람들이 수두룩하다는 이 아이러니를 도대체 무엇으로 설명해야 하나?  바로 옆에서 굶어 죽어가는자가 생겨나더라도 가격의 안정을 위해 오렌지 농장을 불태우고 돼지들을 파묻어 죽여버리는 자본의 폭력과 저들의 생존을 가지고 구별짓기를 시도하려는 일련의 모습들이 어찌 우습다 하지 않을 수 있을까?  그러면서 허구헌날 한민족을 외치며 우리는 하나라는 식의 어처구니 없을 정도의 국가주의ㆍ민족주의적 선동질이나 일삼고 거기에 또 감동하여 아 대한민국을 외치는 꼴이라니.  

영화를 보면 존 포드가 가족이라는 것에 부여하는 가치가 실로 어마어마함을 알 수 있다.  간단히 보면 가족이겠지만 넓게 보면 같은 계층의 사람이라고 볼 수 있다.  결국 연대성이야 말로 문제 해결의 유일한 해답이라고나 할까?  그대의 삶을 보듬어줄 수 있는 사람은 국가도 뭐도 아닌 그대와 같은 삶을 살아가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는 이상에선 영원히 이 상태에서 나아가지 못하리라는 생각이다. 

긴말하고 싶지 않다.  영화는 됐고 존 스타인벡의 원작 소설을 꼭 한번 보라고 권하고 싶으며 그 소설속의 주인공들과 우리의 현실이 본질적으로 뭐가 다른지에 대해서 그리고 우리가 흔히 외치는 너무나도 자명하다고 생각해왔던 가치들에 대해서 한번쯤 생각해볼 필요가 있겠다.  그리고 그를 통해 깨달았으면 한다.  당신은 스스로 서있는자가 아니라는걸..  당신의 생각은 스스로 생각하는게 아니라는걸..  당신의 생각과 행동을 넘어 당신의 삶 자체가 무엇에 의해 구성되어있는가? 에 대해서 말이다.  그리고 그 무엇이 우리에게 던지는 지독한 폭력에 대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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