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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리가리 박사의 밀실(1920), 표현주의 영화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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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리가리 박사의 밀실(1920), 표현주의 영화

유쾌한 인문학 2011. 3. 8. 08: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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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라는 매체는 흔히 종합 예술이라는 말로서 표현되듯 기존에 존재하던 예술 형태의 총합으로서의 모습을 보여준다.  영화속에 등장하는 모든 예술 형태들이 다 중요하겠지만 가장 본질에 서는 부분은 이미지 그 자체이다.  영화의 본질은 본다는 행위의 연속인 것이고 이 행위를 극한으로 끌어올리기 위해 이런 저런 요소들이 더해지는 식이다.  사실 움직이는 영상의 본질은 정지된 화면의 빠른 연결 아닌가?  이런 측면을 생각해보았을때 영화와 회화는 아주 밀접한 관계를 가질 수 밖에 없다.  특히 이런 현상은 초기 영화에서 많이 등장하는데 그중 가장 인상 깊은 사조는 바로 독일 표현주의이다.


독일 표현주의
보통 표현주의는 정의를 뚜렷하게 내리기가 힘들다.  사실 많은 현대 미술의 이즘들이 그런 면모를 보이긴 하지만 표현주의만큼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일단은 일반명사로 사용되고 있는 단어이고 두리뭉실하게나마 대략의 공통을 이끌어내기도 한다.  하지만 명확한 미학에 근거를 둔 운동이라 보기엔 힘들기에 그 표현 양식이 다양하게 등장하게 된다.  그러다보니 표현주의와 관련된 책을 보면 이 단어의 기원부터 추적하는 경우가 많다.  표현주의는 당시 독일의 전체적인 분위기를 보면 의외로 쉽게 잡히는데 1차 대전 전후즈음하여 독일의 분위기는 굉장히 불안정한 양상을 보여주게 된다.  가치붕괴, 전쟁, 불안 이러한 감정들이 혼재하게 되면서 가치에 대한 불확신이 일어나게 되고 그로 인해 이러한 감정의 표현이 중심에 서게 된다.

사실 근대 독일이 보여준 도대체 이해하기 힘든 현상들은 전체적으로 보아 그 궤가 하나의 흐름으로 통합되는 양상을 보여준다.  즉 독일의 광기에서 비롯된 정치적, 문화적, 인류학적 모든 현상들은 독일의 역사와 계몽주의의 흐름에서 쉽게 발견된다. 
아시다시피 도이치 사람들은 거대한 도이치 국가라는 것을 가진것이 얼마 되지 않는다.  작은 도이치 국가들이 엄청나게 많았고 30년 전쟁을 통해 뭉칠 기회도 자꾸 잃어만 간다.  유럽의 한복판이라는 지정학적 이점을 거의 누리지 못했다.  주변국가들은 강력한 통일국가를 형성해나가는데 도이치 나라들은 소국들의 모여있는 형국이었다.  물론 합스부르크 왕가가 존재하긴 했지만 역시 도이치라는 큰 틀에서 본다면 주변국가들에 비해서 많이 뒤쳐졌다고 보는게 맞다.  이때즈음 해서 괴테가 탄생하고 나폴레옹 등의 위협을 통해 도이치 통일에 대한 논의가 활발하게 나오게 되며, 위대한 음악가 베토벤도 활동을 하고 조금 더 있다 브람스와 바그너의 시대가 열리게 된다. 

18세기 즈음 하여 독일의 지식인들 사이에서는 프랑스 혁명의 토대가 되는 계몽주의와 프랑스 문학의 영향에서 맞서기 위해 도이치적인 것을 찾는 것에 주력하게 된다.  사실 괴테의 파우스트도 그 이전에 도이치 사람들 사이에 내려오는 구전문학 같은 것을 괴테가 약간 손본 것이 파우스트이다.  계몽사상이란 무엇일까?  흔히 사람들은 남을 가리치는 것 정도로만 생각하는데 아주 틀린건 아니지만 아주 맞는것도 아니다.  계몽이란 비이성적인 것의 배제를 말한다.  즉 미신이나 종교 그외 비합리적인 이해할 수 없는 관습따위의 배제를 뜻한다.  도이치도 이를 받아들이게 되지만 도이치는 뭔가 구심점이 되는 나라도 없고 같은 말 쓴다는거 말고는 딱히 공통점도 없는 사람들인지라 이성 중심의 계몽이 아닌 예술, 종교, 신비주의까지 아주 그냥 두루두루 건들게 된다.  도이치 지성인들의 목표는 철저한 이성중심적이 될 수가 없었다.  일단 하나로 뭉쳐야할 필요성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를 위해 과거로 돌아가 도이치적인 것을 찾고 이에 몰두하기 시작하게 된다.  각종 민담이나 도이치어 문법책도 나오고 그림 형제는 사전도 펴낸다. 

이러한 독일의 특수성 안에서 비스마르크의 철혈 정책, 산업발전 일변의 정책, 초기 자본주의의 모순적 양상과 가치붕괴 현상, 도시의 발달이 복합적으로 작용하면서 소위 말하는 문화적 빈혈 증세로서 아주 살벌한 분위기를 풍기게 된다.  이러한 사회적 분위기가 조성된 것은 결국 독일의 특수성안에서 비롯된 것이고 그 안에서 예술 사조로서의 표현주의가 탄생하게 된다.  그리고 이러한 분위기속에선 사람들은 대단히 화려한 언변에 잘 넘어가게 된다.  굉장히 이성적인 사람들이라고 표현되고 하는 독일인이라도 이러한 사회적 분위기속에서 그들은 히틀러의 언변에 넘어가거나 눈감아 버린다.  사실 예술이라는 것은 당대 시대상황과 밀접한 관련을 가질 수 밖에 없다.  너무나도 불안한 세상에서 불안의 감정과 내면을 표출하는 그림이 등장한다는 것은 어떻게 보면 지극히 당연하다.  중요한건 이렇게 말을 하면 어느날 갑자기 이러한 생각이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으로 생각하는 분들이 많은데 그런건 아니다.  이미 인상주의 내에서도 이러한 내면의 표현 양식을 확인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는 점을 지적하고 싶다. 


사실 이렇게 말하면 이게 뭔가 하는 분들이 많은데 간단하게 예를 들어보겠다.  이글을 읽는 여러분은 행복한가?   1 행복하다.  2 그저 그렇다.  3 불행하다  이에 대한 답변으로 3번보단 1,2번으로 몰릴 확률이 높다.  대단히 막연한 질문이고 행복의 객관적 가치가 사람마다 조금씩 다르기 때문이다.  즉 비중을 어디에 두느냐에 따라 달라진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질문을 바꿔서 당신은 불안함을 느끼는가?  1번 불안하다.  2번 그저 그렇다.  3번 전혀 불안하지 않다.  이 질문을 들은 한국인이 3번을 택하는 경우가 과연 존재할까?  단언하긴 힘들지만 최근에 있었던 행복과 관련된 다큐를 보더라도 1번을 선택할 확률이 대단히 높다. 불안이라는 감정은 행복과는 직결되지 않는 다는 점은 자명한 사실이다. 

불안감이 만연한 사회는 전체적으로 가치붕괴 현상을 자주 보여준다.  외부적 요소에 의해 나라는 인간 자체가 붕괴되는 상황에선 그 어떤 가치도 사실 힘을 발휘하기 힘들다.  오늘날 한국인을 상대로한 가장 중요한 요소가 돈이라는 것을 보더라도 가치 붕괴와 불안이 얼마나 심각한지를 잘 보여준다.  이러한 사회적 배경하에서 화가가 그림을 그리는데 너무 행복하고 에덴 동산에서 사는 듯한 그런 양식을 보여준다면 과연 공감을 이끌어낼 수 있을까?  되려 강렬한 터치, 원시적인 색감, 전체적으로 흐르는 불안의 감정이 만연한 그림을 통해 큰 공감을 이끌어낼 것이다.  즉 나의 감정상태와 회화가 동일시 되는 것이다.  우리는 독일 표현주의 하면 독일의 불안과 피폐 혼란 이런 이야기를 하곤 하는데 따지고보면 현대 한국도 저 감정과 딱히 다를바가 없다.  물론 그렇다고 행복감을 강조하는 그림들이 아주 의미가 없는 것은 아니다.  나의 감정상태와의 동일시를 통한 공감대 형성도 중요하겠지만 그에 못지 않게 이상향의 갈망도 중요한 것이 사실이며 핵심은 표현의 방식에 있다.


칼리가리 박사의 밀실(The Cabinet Of Dr. Caligari, Das Cabinet Des Dr. Caligari)
표현주의 회화운동이 전개되면서 당시 영화도 이에 영향을 받게 된다.  표현주의 영화는 결국 표현주의 회화의 동영상이라고 보아도 무방할 정도이다.  이러한 생각은 칼리가리 박사의 밀실의 미술을 맡은 화가 바름의 명제를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 영화는 살아 움직이는 회화이어야 한다 - 당시 사회 전반을 흐르고 있던 사실주의 예술에 대한 반기와 내면의 표현을 표현하기 위한 표현주의 운동 안에서 완성된 칼리가리 박사의 밀실은 영화 자체가 대단히 불안과 강박을 환상적으로 잘 표현하게 되기에 표현주의 영화에서 가장 중심에 서는 작품이라 할 수 있다.  철저하게 세트 내에서 만들어진 영화로 세트의 구성요소, 색상, 음악, 선, 빛의 효과 전부 철저하게 연구되어 세트가 만들어지게 된다. 

전체적으로 보았을때 모든 세트는 대단히 혼란스럽고 기하학적이면서 아라베스크적인 양식도 조금 보여준다.  즉 굉장히 환상적인 양상을 보여주는데 이는 영화의 전체적 주제.  즉 정신병자의 외부세계인식에 대한 표현으로 집약할 수 있다.  세트 촬영의 장점이 바로 이런 측면인데 외부 자연에서의 촬영은 완벽한 제어가 불가능하다.  완벽하게 마음에 드는 장소도 존재하지 않고 말이다.  더욱이 이러한 추상표현방식에서는 외부 자연에서의 촬영은 사실상 의미가 없다.  그렇기에 완전한 제어가 가능한 세트에서 인위성이 강조되는 것이다.  사실 어떤면에서 보면 세트 그 자체도 비현실성을 그대로 상징하는 공간으로서의 측면을 가진다. 




위의 1번 장면은 마을 전체의 모습이다.  집약적이고 통일성이 없는 기하학적인 지붕이 꼭대기의 건물을 향해 치우친듯보인다.  사실 하나의 장면으로서 완전한 회화의 모습을 보여주는 이 장면은 무생물인 마을의 전경에 어떠한 감정을 불어넣어 표현한 전형이 된다.  즉 아름답고 평화로운 마을의 모습이 아닌 뽀죡하고 불안한 전경의 표현을 통해 이 마을에서 일어난 사건의 집약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2번 장면도 인상 깊은데 인물이 살해된 장면이다.  공간 내에 존재하는 창문을 보시면 아시겠지만 뽀죡하게 표현되어 있다.  전형적인 공간의 묘사가 아닌 공간의 일그러트림의 그 방법에 있어서 불안감의 조성은 저 장면이 가지고 있는 전체적인 감정을 부각시키게 된다.  3번 장면은 케사르가 제인을 납치하여 도망가는 장면인데 마을 전체의 표현을 왜곡시킴으로써 상황이 던져주는 감정을 표현하게 된다.




공간의 왜곡을 통한 감정의 표현조 중요하지만 그에 못지 않게 인물의 분장이나 그림자를 이용한 표현도 인상 깊다.  위의 1번 장면은 마치 팀 버튼의 그것을 떠올릴 정도로 대단히 독특한 분장을 보여주는데 무언가 텅비어있는 듯한 분위기를 강조한다.  두번째 장면은 살해 장면으로 조명을 활용한 그림자를 이용한 장면의 묘사가 심리묘사에 아주 효과적이다.  특히 이런 장면이 많이 보이는데 예컨대 그냥 서있는 인물과 뒤의 그림자를 대립시키는 방법론이다.  즉 실제 인물은 뭔가 그냥 평범해보이지만 뒤의 그림자는 대단히 사악해보이는 느낌을 풍기는 방법론이다. 


마무리
오늘날에도 이런식의 표현 방식은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아마 많은 분들이 팀 버튼과 비슷한 느낌을 가진다고 생각하실텐데 그의 작품 대다수가 이의 영향을 강하게 받게 된다.  똑같은 길을 걷고 있는 두명이 사람이 있다고 했을때 한명은 행복한 감정에 휩쌓여 있고 다른 한명은 분노에 휩쌓인 상태라고 생각해보자.  그렇다면 그 둘은 나란히 걷고 똑같은 풍경을 보더라도 그것의 받아들임은 분명 다를 것이다.  이를 표현하는 방법은 연기자의 연기력에 의존하는 방법도 있을 것이고 인위적으로 그 장면을 약간 다르게 묘사하는 방법론도 존재한다.  즉 똑같은 풍경이라도 행복감의 표현으론 조금 밝게 분노의 표현으론 어두컴컴하게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오늘날에는 사실주의의 영향을 많이 받은 것인지 첫째의 경우가 많지만 분명 이러한 표현 방식도 여전히 진행되고 있다는 점을 지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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