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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마스만의 파우스트 박사와 선택된 인간, 독일안의 이성과 광기 그리고 냉전 본문
괴테의 파우스트와 근대성의 비극
괴테의 파우스트. 이 작품은 총 2부로 나눌 수 있는 작품인데 보신분은 거의 없을거라 예상하고 내용설명을 가볍게 해보겠다. 파우스트라는 사람이 있다. 그는 평생을 놓고 모든 공부를 다 하고 모든 것을 다 깨우쳤다고 생각하지만 결국 이 세상의 본질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알지 못한채 늙어버렸다고 한탄을 하게 된다. 이를 본 악마 메피스토펠레스가 계약을 맺자고 꼬시는데 원하는 것은 전부 이루게 해줄테니 니가 만족을 하는 순간 너의 영혼은 악마의 것이 된다는 것이다.
1부는 관두고 2부는 흔히 헬레나 비극과 지배자 비극이라고 부르는데 지배자 비극 부분만 조금 더 살펴보자. 여기서 파우스트는 왕을 도와 공을 세우게 되고 그리하여 일정 정도의 땅을 하사받게 된다. 그리고 파우스트는 이 땅을 간척하게 되는데 쉽게 말해 자연과 맞서 싸우겠다는 의지를 불태우게 된다. 결국 그는 엄청난 제방공사를 감행하게 되고 이를 위해 백성들의 노동력을 무지막지하게 짜내서 결국 이를 완성하게 된다. 이 순간 파우스트는 만족감을 얻게 된다. 만족을 얻었으니 악마는 그의 영혼을 거두려 하지만 이때 천사들이 내려와 파우스트를 구원한다는 내용이다.
사실 파우스트는 저 공사를 쉽게 이루어내진 못했다. 그 땅에 사는 백성들을 말그대로 쥐어짜낸 것이다. 심지어 어떤 집이 공사가 방해가 되자 이를 없애려고 하게 되고 그 과정에서 그 집에 살던 노부부가 불에 타 죽는 사건도 발생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파우스트의 욕망은 더욱 강렬해진다. 자연과 신에 맞서고자 하는 근대 이성에 대한 확신은 파우스트의 구원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듯 엄청난 영향력을 가지게 된다. 그리고 이러한 이성에 대한 확신은 대중에 대한 계몽으로 이어지게 된다.
이러한 이성은 크게 두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다. 객관적 이성과 주관적 이성이다. 객관적 이성은 객관적 현실에 내재하는 합목적적 이성과 그걸 파악하는 주체의 능력을 동시에 가리키는 용어이다. 객관적 이성을 지향하게 되면 수단보단 목적에 관심을 두게 된다. 그럼 주관적 이성은 무엇인가?? 주관적 이성이란 추론이나 영역 따위의 능력을 의미하는 개념어인바관적 이성은 목적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이 없고 목적을 이루기에 가장 적합한 수단에만 관심을 가지는다. 이는 역시 데카르트의 코키토 이후 나타나게 된 현상으로 인간을 중심에 세우고 주체가 중심에서면서 자기 보존이나 자신의 유용성이나 이득에만 관심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사실 객관적 이성의 지배를 받던 시절 계몽이라는 이름으로 종교나 도덕 등 다양한 중세적 가치관들이 엄청난 비판을 받게 되는데 여기에 주관적 이성이 전면화 되면서 계몽의 역할이 야만성을 줄이기는 커녕 야만성을 더 늘리는 웃기는 현상을 불러오게 된다. 주관적 이성은 수단에만 관심을 가진다. 무슨 원칙이 있는 것도 아니다. 어느정도냐면 노예제도도 어떤 목적을 이루기 위한 수단으로서 유용성이 입증 된다면 아주 합리적인 제도가 된다. 여성에 대한 탄압도 어떤 목적을 이루기 위한 수단으로서 유용하다면 역시 합리적이게 된다. 이는 자연파괴 역시 마찬가지이다. 지금 현재를 보자면 경기를 살리기 위한 수단으로서의 건설로 운하를 파는게 유용성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이 역시 합리적이게 된다. 이게 바로 도구적 이성이다.
이러한 이성의 지배를 받는 근대. 저러한 계몽의 정신. 이성의 빛에 대한 믿음이 과연 근대를 빛나게 밝혔던가? 현실은 정말 시궁창이었다. 두번의 전쟁. 대학살. 이성은 변질되고 말았다. 이것이 바로 근대적 이성의 폐단이다. 도구적 이성의 지배를 받는 인간은 데카르트적 주체에 인간이 아닌 국가나 민족을 세우게 되었고 그로 인해 2번의 대전쟁과 대학살을 통해 인간 자체를 도구화 시켜버리게 된다. 결국 극심한 인간소외를 불러오게 되었다.
분열된 독일과 낭만주의
하지만 저러한 이성의 변질만으로 독일의 광기를 설명하기는 뭔가 1프로 부족하다. 독일의 광기를 설명함에 있어 얼마나 많은 원인들이 복합적으로 작용을 하였겠는가? 아시다시피 도이치 사람들은 거대한 도이치 국가라는 것을 가진것이 얼마 되지 않는다. 작은 도이치 국가들이 엄청나게 많았고 30년 전쟁을 통해 뭉칠 기회도 자꾸 잃어만 간다. 유럽의 한복판이라는 지정학적 이점을 거의 누리지 못했다. 주변국가들은 강력한 통일국가를 형성해나가는데 비해 도이치 나라들은 맨날 소국들이 난립하며 통일된 국가를 이루지 못한다..
물론 합스부르크 왕가가 존재하긴 했지만 역시 도이치라는 큰 틀에서 본다면 주변국가들에 비해서 많이 뒤쳐졌다고 보는게 맞다. 이때즈음 해서 괴테가 탄생하고 나폴레옹 등의 위협을 통해 도이치 통일에 대한 논의가 활발하게 나오게 되며, 위대한 음악가 베토벤도 활동을 하고 조금 더 있다 브람스와 바그너의 시대가 열리게 된다. 우리가 확인할 부족한 1프로는 분열된 독일과 그 하에서 나타난 예술가 그중에서도 바그너이다.
18세기 즈음 하여 독일의 지식인들 사이에서는 프랑스 혁명의 토대가 되는 계몽주의와 프랑스 문학의 영향에서 맞서기 위해 도이치적인 것을 찾는 것에 주력하게 된다. 이는 프랑스 혁명의 이념인 계몽주의가 아직 뿌리도 못내린 도이치 전통을 없애버릴 수도 있다는 위기의식에서 비롯한다. 계몽사상이란 무엇일까? 흔히 사람들은 남을 가리치는 것 정도로만 생각하는데 아주 틀린건 아니지만 아주 맞는것도 아니다. 계몽이란 비이성적인 것의 배제를 말한다. 즉 미신이나 종교 그외 비합리적인 이해할 수 없는 관습따위의 배제를 뜻한다.
결국 도이치도 이를 받아들이게 되지만 도이치는 뭔가 구심점이 되는 나라도 없고 같은 말 쓴다는거 말고는 딱히 공통점도 없는 사람들인지라 이성 중심의 계몽과 동시에 다른 방향의 사상도 함께 드러나게 된다. 즉 계몽이념을 통한 시민계급 형성 이전에 소국들로 쪼개져있는 시민들의 계급적 유대를 위한 민족적 토대를 먼저 구축하려 시도하게 된다. 이에 예술, 종교, 신비주의까지 도이치적 특성을 확인할 수 있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관심을 가지게 된다. 괴테의 파우스트도 그 이전에 도이치 사람들 사이에 내려오는 구전문학 같은 것을 괴테가 약간 손본 것이 파우스트이다. 이때부터 개발되기 시작하는 개념이 바로 민족이다. 도이치 지성인들의 목표는 철저한 이성중심적이 될 수가 없었다. 일단 하나로 뭉쳐야할 필요성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를 위해 과거로 돌아가 도이치적인 것을 찾고 이에 몰두하기 시작하게 된다. 각종 민담이나 도이치어 문법책도 나오고 그림 형제는 사전도 펴낸다.
그외에도 도이치 낭만주의의 특성으로 낭만주의적 사랑을 들 수도 있겠다. 뭐 이런거 있지 않은가? 고뇌에 빠진 남성. 그리고 그를 구원하는 여성. 낭만적 사랑이라 한다면 크게 두가지 측면에서 바라 볼 수 있는데 하나는 여성을 여신으로 숭배하는 것이고 두번째는 철저하게 에로틱한 육체적인 사랑을 들 수 있다. 예를 들면 카사노바 같은.. 낭만주의 시대의 문학중에 이런 유형의 작품이 꽤나 많다. 바그너의 작품도 마찬가지 이고. 그외에도 여러가지 특징을 잡아낼 수 있겠지만 낭만주의는 여기서 그만하도록 하겠다.
바그너
바그너를 이야기하는데 바그너를 들어본사람이 거의 없다는게 안타까운 부분이다. 웅장함이란 무엇인가? 가슴이 터져버린다는게 어떤 것인가? 그걸 느껴보고 싶다면 바그너의 서곡 모음집이라도 사서 오디오에 걸어놓고 들어보시라. 바그너의 음악을 들어보면 왜 그렇게 도이치 사람들이 미쳐버렸는지 이해 할 수 있을터.. 오늘날 왜 그렇게도 많은 사람들이 바그네리안이라는 칭호를 단채 바그너에게 열광하는지를 알 수 있을 것이다.
바그너는 어떤 사람인가? 바그너는 '니벨룽겐의 반지'라는 오페라로 매우 유명하다. 총4개의 개별 오페라로 합쳐진것인데 내용이 이어진다. 4일동안 가서 봐야 하고 아마 가장 긴 음악일 것이다. 전체 곡시간이 14시간정도 생각하시면 된다. 참고로 '반지의 제왕'과는 아무 관계없다. 북유럽신화에서 모티브를 딴건 맞지만 전혀 다른 내용이다.
바그너는 베토벤을 계승하려고 했으나 베토벤과는 약간 다른 길을 걷게 된다. 이유인즉슨 베토벤은 혁명가이기 때문에 그의 개혁정신을 따르는 것이 진정으로 베토벤을 계승하는 것이라고 생각했것이다. 이러한 문제로 바그너는 브람스와 매우 사이가 안좋았다. 두 진영이 파를 이루어서 죽자고 싸웠을 정도로 말이다. 둘다 낭만주의 시대의 음악가인데 베토벤의 스타일을 계승하려 했던 브람스와 베토벤을 혁명하려 했던 바그너의 길은 극명하게 갈리게 된다.
즉 브람스는 고전적 형식미 안에서의 낭만성의 추구이고 바그너는 형식자체를 박살내버린다고 보시면 된다. 그래서 바그너는 전형적인 의미의 교향곡이라는 것이 있긴 있는데 거의 연주가 안된다. 그냥 없다고 봐도 된다. 바그너는 오직 오페라와 각종 서곡들만이 유명하다. 바그너는 불행히도 반유태주의자였고 나치에게서 아주 환영을 받게 된다. 나치정권의 바그너 숭배가 어느 정도냐면 바그너가 자신의 음악만을 연주하기 위해 만든 극장인 바이로이트 극장은 나치의 성지가 되어버린다. 오늘날에도 매년 그곳에서 바그너음악의 축제가 열리는데, 나치의 기억때문인지 전통적인 연출은 하지 않는걸로 알고 있다.
그렇다면 바그너 오페라의 특징은 무엇이 있을까? 일단 엄청난 대규모 연출을 꼽을 수 있다. 4일간 진행되는 무지막지한 오페라. 웅장함을 잘 표현하기 위해 자신만을 위한 극장을 만들어내는데 이 극장의 구조도 매우 독특하다. 무대 아래로 오케스트라 피트가 동굴처럼 파고 들어가는 형태를 보이는데 그로 인해 소리가 웅 하고 울리면서 엄청난 웅장미를 자랑한다. 그뿐인가? 바그너는 자신의 음악을 위해 바그너 튜바라는 것도 만들어낸다.
이러한 특징은 결국 제의적 성격을 가진다고 볼 수 있다. 즉 도이치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집단 무의식속의 원형적 갈망이라고나 할까.. 이를 제의적 공연을 통해 자극시키는 것이다. 실제로 가서 보면 신비로운 느낌마저 든다고 하는데 난 뭐 DVD로만 본사람이라. 여기에 게르만신화에 기본을 두고 있는 오페라의 내용은 게르만 사람들의 집단무의식을 들쑤시기에는 아주 적합하다. 우리는 이미 위의 낭만주의의 설명에서 게르만 민족주의의 태동에 대해서 대충 알아보았으니 대충 이해가 되시리라 믿는다.
독일의 광기의 원인
이제 정리해보자. 독일 광기의 원인은 무엇인가? 결국 근대의 합리적 이성의 태동과 그것의 도구적 이성으로의 변질이 첫번째 이유가 될 것이다. 그리고 독일이 가지는 특유한 역사적 문화적 상황에 의해서 만들어진 낭만주의적 예술 사조와 이 사조가 만들어낸 바그너의 신화적 웅장함을 가진 오페라 음악들이 두번째 이유가 될 수 있다.
이것들이 도이치 사람들의 집단무의식의 실질적 내용을 이루는 원형을 건들게 되었고 이것이 타민족 또는 타 국가에게 투사되면서 벌어지는 현상이 바로 독일의 광기이다. 투사란 내 무의식 속의 욕망을 상대방에게 떠넘겨 버리는 것을 말한다. 쉽게 말해... 내가 어떤 물건이 사고 싶을때 부모님에게 대놓고 사달라고 말은 못하겠고 은근슬쩍 "내친구가 저거 좋아한다 가지고 있다" 이런식으로 말하는 것. 이 현상이 전형적인 투사현상이다.
우리는 독일의 광기를 설명하기 위해 이렇게 먼길을 돌아왔다. 토마스만 설명하는데 이렇게 긴 전제내용이 필요한가? 필요하다. 이것도 엄청나게 줄인거다. 토마스만이 괜히 1급 소설가인게 아니다. 그는 위대함 그 자체이다. 이제 토마스만의 작품속으로 들어가보자.
토마스만의 파우스트 박사와 선택된 인간
파우스트 박사는 1947년에 발표된 소설로서 그의 후기 작품에 속한다. 이 작품은 사실 토마스만의 작품중 그렇게 알려진 작품은 아니다. 한때는 정말 아주 귀한 책이었는데 2년전에 새번역이 나와있는 상태이다. 내용은 간단한데 어느 천재 예술가의 이야기이다. 즉 파우스트 이야기에 천재 예술가라는 설정을 부여한 것이다. 내용 설명은 하지 않겠다. 그러기엔 너무 방대한 내용이고 2년전에 본지라 기억도 가물가물하다.
파우스트박사의 주된 테마는 예술가로서의 토마스만 스스로의 자기비판과 2차대전 당시의 독일의 죄악에 대한 반성적 이야기이지만, 결국 핵심은 전자보단 후자. 즉 독일에 관한 이야기이라 생각된다. 독일이라고 하면 무엇이 떠오르시나? 난 위대한 음악이 떠오른다. 독일이 탄생시킨 저 수많은 위대한 작곡가들을 보라. 소설 내에서 천재 작곡가 레버퀸은 바로 독일의 화신이다.
이 위대한 천재 작곡가와 독일의 운명은 동일하다. 도저히 설명할 수 없는 천재적 예술국가의 이성적 광기. 독일과 메피스토펠레스의 계약. 도대체 독일은 어떠한 만족을 얻길 바란것일까? 무엇을 바랬든 결국 독일의 영혼은 메피스토펠레스에게 빼앗겼다고 볼 수 있지 않겠는가? 레버퀸은 괴테의 파우스트와 달리 궁극적으로 파멸하게 되지만 그에 대한 구원은 존재하지 않는다. 이러한 레버퀸의 파멸은 그의 다음작품인 선택된 인간과 비교했을때 참 재미있는 양상을 보여주게 된다. 이에 대해선 이 글의 말미에서 다시금 언급해보겠다.
선택된 인간은 파우스트 박사 이후 2년뒤인 1951년에 발표되는 작품으로 이 역시 토마스만의 작품중 그다지 알려지지 않은 작품으로 파우스트박사의 후속작인 선택된 인간의 주된 테마는 엄청난 죄악을 저지른 인간의 참회를 통한 궁극적인 용서이다. 많은 차이점이 있지만 궁극적인 죄와 용서라는 측면에서 많은 유사점이 존재한다고 생각된다. 토마스만 자신은 파우스트 박사의 해학적 후속극이라고 지칭하기도 하였으며, 이런 모습은 대공전하와 부덴브로크가 사람들, 마의 산과 베니스의 죽음에서도 유사한 관계를 보인다.
파우스트 박사의 작품내에서도 짧은 챕터로 선택된 인간의 이야기가 나오게되는데 이것을 독립시켜 확장한것이 선택된 인간이다. 근친상간에 또 다시 근친상간을 범하게 되는 이야기로 토마스만의 작품치고는 정말 재미있고 쉽다. 오이디푸스 이야기에 근친상간 하나가 더 얹어져 있다고 보면 된다. 이 작품은 국내에서는 홍신문화사에서 번역되어 있는 상태이고 가격도 매우 저렴하니 꼭 구입해서 보시길 권하는 바이다.
간단히 내용을 설명하자면 주인공인 그레고리우스는 어느 쌍둥이의 근친상간으로 태어난 인간이다. 그는 태어난 후 버려지게 되고 어느 외딴 섬의 어부의 손에 길러지게 된다. 어찌 저찌하다 수도원에 들어가게 되나 그는 자신의 비밀을 알게 되고 육지로 나오게 된다. 그곳에서 여자 군주를 만나 그녀와 결혼을 하게 되는데 알고보니 그 여자가 자신의 어머니였다. 결국 그는 어느 호수 가운데에 있는 바위섬에서 17년동안 자신을 참회하게 되고 결국 17년 후 신의 섭리에 의해 교황의 자리에 오르게 된다.
선택된 인간에서 나오는 주인공들의 공통점은 둘 다 자의식이 매우 강하다는 점이다. 실제 작품내에서도 그들은 최고의 아름다움과 귀족적 특성을 갖추고 있는데 그들은 근친상간의 상대방만이 자신과 동등한 가치를 가진다고 생각한다. 즉 서로를 통해 나르시스를 느낀다고 해야 할까? 이는 용서라는 측면은 별개로 하고서 파우스트박사에서의 죄와 아주 유사점이 많다고 생각된다. 레버퀸 또한 자의식이 강하고 오만하며 나르시즘에 빠져있다는 느낌을 강하게 받을 수 있다.
이러한 나르시즘은 반유대주의의 직접적 원인의 한가지으로 제시될 수 있는 부분이다. 독일의 광기에는 독일이 꿈꾸는 이상적인 세계에 대한 망상에 근거한다. 아리아인들만이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는 유토피아적 세상. 이를 이루기 위해 독일인은 유대인을 아주 독특하게 바라보게 된다. 독일인이 유대인을 태도는 뚜렷하게 대조되는 두가지로 표현된다. 하나는 쓰레기 인종으로서 엄청난 경멸의 대상으로서의 태도이며, 다른 한가지는 그들이 엄청난 권력과 부를 가지고 있다는 식의 경외로서의 태도이다.
이러한 경외로서의 태도는 유태인을 말살하기 위한 태도를 정당화시켜주는 요소로서 작용하게 되며, 이런 일련의 과정속에서 전체주의적 요소가 나타나게 된다. 우리가 꿈꾸는 유토피아적 환상을 유지하기위한 필수적인 요소는 소극적 환상의 개념적 요소가 필요하게 되는바 이것이 바로 타자에 대한 과장으로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 즉 타자를 소외시키는 과정은 타자의 권력에 대한 과장(誇張)이 동시에 일어나는 이중과정이다. 결국 이러한 일련의 현상은 내부적 억압의 외부적 돌림을 뜻하게 된다.
결국 파우스트 박사와 선택된 인간 두 작품에서 주인공들의 모습을 통해 토마스만이 스스로의 자기모습을 투영하고 자기비판을 가하고 있다고 생각된다. 그리고 이러한 나르시즘은 독일이 2차대전 당시 가졌던 인종주의와 선민의식과도 아주 밀접한 관련이 있다고 보여진다. 독일이 지은 죄악은 결국 위에서 언급한 이유에서 비롯된 것이며 이는 그레고리우스가 보여준 정도의 참회를 통해서 용서받을수있다는 점을 강조한다고 보여진다.
양 소설의 관계와 냉전시대
두 소설의 관계가 아주 재미있다. 둘은 분명 매우 연관성이 높은 소설들이다. 심지어 선택된 인간의 이야기는 파우스트 박사 내부에 아주 짧게 언급될 정도이다. 그런데다 두 작품 모두 주인공들이 엄청난 천재이자 미모를 가진 나르시즘의 화신들이라는 점이다. 이러한 일련의 양상은 대전 당시 독일이 보여줬던 위대한 아리아인으로서의 나르시즘을 정확히 지칭한다고 볼 수 있다.
재미있는점은 파우스트 박사에서는 레버퀸이 궁극적으로 그 어떤 구원도 없이 파멸하게 되는데 선택된 인간에서는 그레고리1세가 참회를 통해 용서를 받고 교황의 지위에 올라 신에게서 용서를 받게 된다는 점이다. 이러한 두가지의 대립적 결말의 제시는 토마스만 스스로가 생각하는 인간 이성에 대한 양가적 태도라고 볼 수 있다. 사실 토마스만이 이 작품을 발표하기 1년전 한국에선 한국전쟁이 발발하게 된다. 이러한 전쟁의 양상이 의미하는 것은 마치 몇년전에 있었던 2차대전의 미친 광기를 완벽하게 잊어버린듯 다시금 냉전이라고 하는 새로운 광기로의 진입을 뜻하게 된다.
사실상 한국전쟁은 이성이 보여준 또다른 광기의 발현인 것이다. 냉전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의 경계선에서 나타나는 서로가 서로를 향한 억압적 양상의 하나이다. 항상 상대방을 경멸하면서 또 한편으론 상대방을 우월하게 바라보게 된다. 이는 2차대전 당시 독일이 반유태주의를 실행했던 일련의 양상과 다를바가 없는 현상이다. 즉 각 진영이 꿈꾸는 유토피아적 환상을 위해 타자에 대한 과장이 일어나게 되고 이것이 바로 냉전의 핵심이다.
이러한 냉전의 새로운 발현을 보고 만년의 토마스 만은 과연 무엇을 느꼈을까? 그는 조용히 이 두 소설을 통해 또다른 가능성을 제시한 것이다. 미친 전쟁을 경험한 인간의 이성. 또다시 광기를 발휘하여 스스로 자멸할 것인가? 스스로 구원할 것인가에 대해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