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응형
Notice
Recent Posts
Recent Comments
관리 메뉴

★ image or real

드래곤 길들이기(2010), 기술혁명시대의 예술작품 본문

영 화/애니메이션

드래곤 길들이기(2010), 기술혁명시대의 예술작품

유쾌한 인문학 2010. 9. 17. 13:51
반응형





드래곤 길들이기(How To Train Your Dragon)
인생자체가 유치한지라 만화를 되게 좋아하는데 이 만화는 되게 늦게 가히 막내리기 일보직전에서야 간신히 보게된 작품이다.  이미 오래전부터 관심이 조금 있어 올라오는 글들을 유심히 살펴보았는데 인상 깊은 글은 보지 못했다.  특히 미제국주의와 연결시키는 시도는 나쁠건 없지만 그 논리가 대단히 유치한건 사실이다.  어쨌든 이작품은 내 인생에 있어서 3D라는걸 처음 경험해본 영화가 되었다.  그 유명한 아바타도 3D로 보지 못했고 줄줄이 쏟아져나오던 3D영화에 큰 관심을 두지도 않았었다.  여러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3D 극장까지 원정나가는게 너무나도 귀찮았던 것이 주된 이유이다.  

아무튼 결국 나는 3D영화라는 것을 보게 되었고 요상한 안경을 쓰는 체험까지 하고 보니 기술의 발전이라는 것이 정말 놀랍다는걸 다시금 깨닫게 된다.  요즘은 말을 들어보니 4D라는게 있다고 들었다.  4D라..  무슨 물리학도 아니고 현실세계에서 무슨 4D란 말인가?  궁금해서 마님에게 물어보니 물뿌리고 향수뿌리고 바람도 불게 하고 뭐 그런거라고 하더라.  이 말을 듣고보니 기술이 추구하는 방향은 오감의 일체화 정도로 정리가 될 것 같으며 그 궁극에 서있는 기술의 정점은 바로 가상오감의 극단적 사실화라고 볼 수 있겠다.  뭐 SF 영화에서 흔히 나오지 않는가?  모자같은거 쓰고 뇌파를 조정하여 어떤 경험을 실제로 하는 것 같은 느낌을 주는 그런것 말이다.




현대 기술과 매체미학
기술의 발전은 필연적으로 매체의 변화를 가져오게 된다.  멀리는 인쇄술의 발달로 인한 매체기술의 발전으로 인해 읽는 행위의 변화와 그 변화로 인한 전체적인 변화상을 들 수 있겠다.  읽기라는 행위는 어느순간 이미지적이면서 충격적이고 오감을 활용하는 양상으로 변화하게 되고 그로 인해 비평 방식 역시 많은 부분에서 변화하게 된다.  이러한 변화상은 기술의 발달이 진화되면 될수록 더욱 기술 의존적으로 바뀌게 되면서 오늘날은 대부분의 예술 매체가 기계장치에 상당부분 의존하게 된다.  

즉 모든 인지를 기계 장치를 거쳐서 행한다고나 할까.  결국 우리와 자연현상의 사이에 기계라고 하는 하나의 표상도구가 위치하게 되고 그 도구가 제시하는 것을 우리는 그대로 인지하게 되며 이는 지각하는 행위 자체의 변화를 의미하게 된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우리의 위치가 대단히 수동적인 양상으로 변화하였다는 것은 아니다.  어떤 도구를 거치던 결국 뇌리에 표상되는 순간 그것은 해석하고 판독되어야 하는 어떤 것이기 때문이다.  사실 따지고보면 인간의 신체가 가지고 있는 다양한 인지기관들도 기계랑 다를바는 없으니 말이다.

하지만 분명한 차이점은 존재한다.  인간의 신체가 그 생존 그자체에 적합하게 진화하여 구성된 하나의 구성적 인식의 틀이라면 기계는 그 인식의 범위를 확장시키게 된다.  그 확장된 범위를 통해 저 멀리 있는 우주의 은하도 보게 되고 적외선이라는 독특한 기술을 통해 볼 수 없었던 더 새로운 존재하는 세상을 인식하게 된다.  이러한 인식범위의 확장성은 영화라는 매체를 두고 보았을때 새로운 시공간적 지각을 새롭게 구성해야 한다는 필연성을 가져오게 된다.  뭐 단적인 예로 내러티브와 플롯의 시간적 관계성을 들 수 있겠다. 

시간의 측면을 조금 더 자세히 살펴보자.  흔히 우리는 내러티브와 스토리 그리고 플롯을 하나로 뭉그트려 사용하는 경우가 많다.  이는 개념정의가 정확히 되어있지 않기에 생겨나는 현상이다.  보통은 내러티브를 스토리와 대부분 동일어로 사용된다.  내러티브는 일련의 시간과 공간에서 발생하는 사건들의 인과관계적 묶음으로서의 이야기라고 볼 수 있다.  포인트는 시간, 공간, 인과관계로 관객은 이 세가지 요소에서 발생하는 사건들을 연결시켜 서사구조를 완성시키게 되는 것이다. 

결국 스토리란 작품내에서 명백하게 제시된 정보와 제시되진 않았지만 관객이 상상하고 추론할 수 있는 것들을 포함하는 것이 된다.  그럼 플롯이란 무엇인가?  플롯이란 작품내에서 명백하게 제시된 것만을 의미하게 된다.  정리하자면 탐정영화는 극의 초반 ABC만 제시한 이후 D와 E에 대한 상상력을 관객에게 불어넣은채 경찰이 수사를 하면서 D와 E를 나중에 제시하는 식이다.  결국 플롯상으로는 ABCED의 순으로 나타나게되지만 스토리상으로는 EDABC가 되는 것이다.  즉 기승전결이 완전한 스토리를 플롯은 그 순서를 뒤섞어 제시하거나 생략하는 과정을 거친다는 것이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은 영화가 가지고 있는 기술로서의 플롯의 조작을 통해 시간의 인지를 변화하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사실 이런 플롯상의 변화는 영화 이전에 존재하였던 문학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것에 불과하다.  결국 기술의 발전으로 일한 매체의 변화와 지각구조의 재구성의 핵심은 공간과 오감을 어디까지 관람자에게 제시할 수 있는가 아니겠는가?  그런 측면에서 바라보았을때 3D영화는 우리에게 공간이라는 측면을 진일보하여 제시하게 된다.  즉 기술의 발전이 공간적 체험을 극대화시킨 것이다.  하지만 여기에도 분명한 한계는 있다. 

공간을 느끼는 지각을 더욱 진일보시켜 우리에게 제시한다 하더라도 우리는 그 공간속으로 들어갈 수는 없다.  여전히 우리와 영화사이에는 스크린이라는 단절된 면이 존재하게 되고 그 면 너머에서의 진보된 공간감의 제시에 불과하다는 점이다.  결국 3D라고는 하지만 현재로선 기존의 2D영화와 본질적으로 다를건 없다.  어떤면에서 보면 3D라는 것은 시네마스코프의 연장선으로 보아도 무방할 정도이며 실제 폭스사가 지속적으로 행해온 영화스크린의 역사속에서 3D는 시네마스코프 탄생 직후부터 이미 예견된 상황이었다.  그리고 더 눈여겨 볼부분은 현재 진행되고 있는 4D라는 시도 그 자체에서 볼 수 있듯 3D를 뛰어넘어 기술이 추구하는 영화적 경험의 궁극점은 인간 지각의 한계를 넘어선 일체화라는 것이다.  즉 이른바 예술과 지각의 일체화이다. 




아우라의 붕괴와 예술의 영역적 확장
기술이 발전하면서 새롭게 창출된 예술이 크게 두가지 존재한다.  그건 바로 사진과 영화.  이는 카메라라는 물건을 가지고 무언가를 찍어내는 기술을 사용하는 모든 예술대상을 지칭할 수 있다.  이러한 예술의 특징은 무한대의 복사가 가능하다는 점이다.  단하나의 원본은 존재하지 않는다.  제일 처음 인화한 사진과 두번째 인화한 사진 사이에 어떤 차별점을 부여할 수는 없지 않은가? 

이러한 기술복제 시대의 예술은 아우라의 상실을 가져오게 된다.  아우라란 무엇인가? 
이 아우라라는 것을 잘 뜯어보면 어떤 숭배적 가치를 발견할 수 있다.  단 하나의 원본.  단 하나의 원본이 만들어졌던 그 상황.  그리고 그 단하나의 원본을 멀리서 바라보며 느끼는 단하나의 경험.  여러분들은 수많은 명화들을 인터넷에서 보곤 하지만 인터넷에서 보는 것과 직접 가서 보는 것은 분명히 다르다.  이 경험의 차이가 바로 아우라의 유무를 결정짓게 된다.  직접가서 보게 되는 과거의 명화들은 대상을 향한 어떤 엄청난 몰입과 숭배 및 경외를 품게 된다.  그럼 단순히 몰입과 경외만 품으면 아우라의 경험이라 칭할 수 있는가?  그런거너 아니다.  예를 들자면 내가 최후의 만찬이라는 그림을 본다고 하였을때 그 그림과 내가 시선을 주고 받아야 한다. 

즉 상호 교감이 필요하다.  최후의 만찬이라는 대상물과 나 사이에 있는 경계가 해체되어 사라지는 느낌.  저 그림도 나를 보고 나에게 무언가 이야기를 하고 있다고 느끼는 그 경험.  대상과 내가 통일되고 교감하는 것.  바로 이게 아우라이다.  하
지만 이러한 아우라를 지니는 예술은 기술복제의 시대에 들어와 급격히 사라지게 되는데 이는 예술이 대중과의 거리를 급격히 좁히면서 나타나는 현상이다.  바로 이지점에서 예술이 기존에 가지고 있던 제의적 가치 즉 숭배와 일정한 수용적 태도의 요구가 해체되고 전시적 가치의 부각이 드러나게 된다.  이러한 전시적 가치의 부각을 불러온 것은 바로 기술이다.  그리고 이러한 아우라의 상실을 불러온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은 재미있는 현상을 불러오는데 이를 두고 '예술의 사회적 기능전환'이라 부른다. 

이러한 측면이 잘 들어나는 신예술이 바로 영화이다.  영화라는 것은 엄청난 자본이 투입되는 것이면서 영화는 그 본질상 사진들의 연속체로서 복제의 연속으로 이루어지게 된다.  즉 사진을 통해 한번 복제를 하면 그것은 다시금 편집 과정을 거치게 되고 심지어 촬영하는 스튜디오 그 자체가 모사로 이루어지면서 복제의 복제가 되기도 한다.  배우들의 연기도 마찬가지이다.  그들의 연기는 연속성이 없다.  짧게 짧게 숏으로 끊어진 연기를 행하게 되고 그 관계도 기계와 배우사이의 관계맺기에 불과하다.  이렇게 관계맺어진 영상물은 기계를 통해 스크린위에 전시되고 우리는 그 전시된 무언가를 집단적으로 바라보게 된다.  이른바 집단적 동시수용성이다.  바로 이지점에서 영화가 기존 예술과 차별되는 정치적 이데올로기적 측면을 그대로 드러내게 된다.  이는 사진도 마찬가지이다.

어렵게 생각할거 하나도 없다.  우리나라를 보더라도 간단하게 도출되는거 아닌가?  하나의 영화를 백만명이 보았다고 뿌듯해하는 현실.  하나의 공간에 수백명을 앉혀놓은채 하나의 전시된 영상물을 다같이 바라보며 우와 하는 현실.  이 모든 과정속에서 대중은 스스로 조직되고 스스로 통제된다.  그렇기에 수많은 헐리웃 영화들이 은연중에 정치적 장치들을 끊임없이 집어넣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이 가지는 본질의 확장이다.  바로 예술의 사회적 기능전환.  즉 예술의 정치화이다. - 정치의 예술화와는 구별되는 개념이다 -




예술과 지각의 일체화와 기술우위의 예술
이러한 예술이 가지던 아우라의 붕괴는 결국 기술이 가져온 지각하는 행위의 변화에서 나타나는 현상이라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변화상은 예술의 영역적 확장을 가져오게 된다.  사실 뭐 예술의 정치화라고 하면 뭔가 협의의 정치적인 양상만을 상상하시는 분들이 많은데 꼭 그런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영화에서 나타나는 사디즘적인 양상들 예컨대 폭력이나 살인 이런 것들을 통해서 대중이 가지고 있는 무의식적 공격성을 해소해주는 역할도 하게 된다.  꼭 뭐 폭력만 들건 아니다.  웃음을 들어보자면 수많은 코미디 영화들을 통해서 이끌어내지는 정치적 현상은 영화관람이라는 집단적 행위속에서 집단적 웃음을 행하게 되고 그속에서 안정을 꾀할 수 있게 된다.

이러한 일련의 양상은 인간이 가지고 있는 무의식적 충동을 카메라라고 하는 기계가 정확히 포착해낸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부분에 대해서 좀더 말해보자면 인간이 지난 2천년이라는 세월동안 지속적으로 보여준 하나의 문명화 과정이라는 것은 겉으로 보기에는 대단히 진보적인 양상으로 보일 수도 있겠지만 그 실상은 지속적인 금기와 억압의 연속으로 볼 수 있다.  이러한 문명화 과정이 보여주는 단하나의 양상은 정상과 비정상의 지속적인 구분이다.  그리고 비정상은 끊임없이 정신병으로 치부되게 된다.  사실 뭐 아닌게 아니라 어떤사람이 귀신이 들렸다라고 하면서 거품물고 쓰러지면 과거에는 이 역시 정상의 범주에 속하는 행위이지만 오늘날에는 정신병에 불과하니 말이다.  이러한 비정상의 확장은 억압된것의 확장으로 나타나게 되고 이는 새로운 정신병의 위험을 가져오게 된다. 

이러한 수많은 비정상을 영화는 포착하여 하나의 정치성으로서 대중에게 제시하게 되고 그것을 대중은 소비하게 된다.  수많은 대중들이 흔히 하는 말로 "나는 영화를 골치아프려고 보는게 아니다.  즐기기위해 보는 것이다"  이 말의 의미는 결국 자신의 억압된 무언가를 영화가 해소해주는 것에서 카타르시스를 느낀다는 것이 된다.  그리고 이것을 가장 잘 만족시켜주는 것이 바로 영상이라는 신기술이다.  영화와 문학의 가장 큰 공통점은 이야기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고 가장 큰 차이점이라면 시각화와 청각화라는 새로운 감각을 제시하였다는 점이다.  새로운 감각의 제시는 수용을 원하는 대중적 욕망을 더욱 정확히 충족시켜주게 되고 이것이 영화가 급격히 발달하게 된 주된 원인이다.  그리고 현재 나타난 3D영화라고 하는 신기술은 바로 이러한 일련의 흐름위에 서있는 하나의 사건에 불과하게 된다. 

중요한 것은 첫장에서 언급하였듯이 기술은 지속적으로 변화할 것이고 결국 기술의 궁극은 예술과 지각의 일체화라는 점이다.  이렇게 되면 과연 우리는 예술을 소비하는 것인가?  기술을 소비하는 것인가?  라는 궁극적인 질문에 직면하게 된다.  이른바 기술 우위의 예술이라는 점이다.  이러한 기술 우위의 예술은 아우라의 상실이 가져온 현대적 예술이 가지고 있는 정치적 요소와 만나게 되면서 어떠한 양상으로 진행될지 심각한 의문을 들게 한다.  고민할 거 없이 대부분의 3D영화에 달려있는 글들을 보면 기술과 관련된 이야기들이 엄청난 홍수를 이루게 된다.  이자리에서 단하나의 질문을 던져보자면 여러분은 3D영화를 관람하면서 영화를 소비한 것인가?  3D라는 기술을 소비한것인가? 

아직까지는 3D영화의 초창기이므로 후자가 더 강하다고 보아야 할 것인데 만약 후자의 것이 지속적으로 강하게 나타난다면 즉 기술을 이용한 쾌락 그 자체가 목표가 된다면 기술 우위의 예술은 거대한 이데올로기로서 대중 종속의 역할이 더욱 심화될 것이고 이는 기술이 발전하여 지각과 예술의 일체화가 이루어지는 그 순간 최악의 국면으로 나타나게 될 것이다.  바로 이러한 디스토피아적 양상을 잘보여주는 영화가 바로 써로게이트이다.  써로게이트(2009), 원본이 사라진 복제의 세상  이 영화는 영화 기술이 나아갈 수 있는 궁극을 보여주고 있다.  단순한 관람자가 아닌 행위자로서의 투입말이다. 

결국 무엇이 되었건 영화는 사람들의 오감을 기술의 아래에 두게 하는 하나의 도구로서 충실한 매체가 될것이라는 점은 의심할 필요가 없다.  그리고 이는 영화가 가지고 있는 본질적 한계 즉 대자본에의 종속성과 맞물리면서 기술 우위의 세상에서 기술아래의 인간을 훈련시키고 적응시키는 아주 좋은 훈련장치로서도 작용할 것이다.  즉 기술이 하나의 틀로서 작용하게 된다는 점이다.  사실 우리가 문화라고 하는 것 또는 예술이라고 하는 것은 그 사회가 규정한 것에 불과한 것이고 현대에 이르러서는 그 규정성을 대표하는 자리에 기술이 들어왔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틀로서의 기술을 얼마나 대중에게 빠르게 익숙하게 하는것이 중요해지고 그 첨병으로 영화가 자리매김하게 된다는 말이다. 

그리고 이 영화를 통해서 새로운 지각혁명이 다가오게 되고 이때 예술은 새로운 혁명으로 나아가게 된다.  이때의 예술은 과연 뭐라고 말해야 할지.  나로선 모르겠다.  새로운 이론이 필요할 것이고 이미 그 시도는 인지과학과 함께 많은 연구가 진행된 상태이다.  물론 현재의 3D스크린은 2D의 스크린과 크게 다를바가 없다.  첫장에서 언급하였듯이 3D라고 하여도 관객과 영상 사이에 스크린이 놓이는 그 본질은 변화가 없기 때문이다.  입체영상이라고 해봤자 결국 스크린 너머의 영상에 불과하다.  하지만 중요한건 미래이고 그 미래에 예상되는 기술적 발전과 그 시점에서의 예술이 어떠할지에 대한 논의는 현재 3D영화의 시작과 함께 본격적으로 시작될 것이다.


마무리
3D고 뭐고간에 솔직히 난 너무 어지러워서 멀미증상에 시달려야 했었다.  사실 내가 이런 것에 대단히 취약하다.  오락같은 것도 1인칭 총싸움게임 이런거 어지러워서 잘 하지 못한다.  자고로 문명의 이기도 촌놈이 즐기기엔 무리가 따르지 않는가?  뭐 그런 생각.  하지만 결국엔 익숙해질테고 언젠가는 당연시될테고 그렇게 현재는 다시금 추억속으로 사라져갈테고. 



반응형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