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응형
Notice
Recent Posts
Recent Comments
관리 메뉴

★ image or real

트루먼 쇼(1998), 자본과 대중문화 본문

영 화/90's 영화

트루먼 쇼(1998), 자본과 대중문화

유쾌한 인문학 2012. 7. 16. 06:30
반응형





트루먼 쇼

피터 위어 감독의 X 번재 영화이다.  상당히 오래된 기억이긴 한데 이 작품이 고딩시절 부산국제 영화제에 초청되었고 그곳에서 영화를 봤던 것 같은데 정확하지는 않다.  영화제에서 본건지 아님 바깥에서 본건지 너무 옛날이라.  아무튼 당시 친구가 이영화를 보고 엄청난 감동을 받아 허우적 되었던 기억이 아직도 난다.  사실 이 작품이 굉장히 흥미로운 부분이 많은 건 사실이다.  한 인간의 삶 전체를 방송으로 내보내 그것을 소비한다는 설정은 당시로선 굉장히 충격과 공포로 다가왔으니 말이다.  물론 비슷한 주제를 가지는 영화가 이전에도 있었지만 나의 나이때에서는 볼 수도 없었고 뭔지도 몰랐기에 이 영화가 가장 크게 다가왔었던 것 같다.  아무튼 자본에 의해 제시되는 한 인간의 전체 삶을 보여주는 방송이란 도대체 무엇일까?



프랑크푸르트 비판이론

칸트의 비판철학에서 프랑크푸르트학파의 비판이론에 이르기까지 비판이라는 말은 꽤나 다양한 의미로서 사용이 가능하다.  칸트의 비판철학에서 사용된 비판의 의미는 좁은 의미로 사용된 비판으로 이성이 스스로 이성을 검토하는 비판으로서의 의미를 가진다.  하지만 오늘날의 비판이라 하면 넓은 의미에서 사용되는 경우가 많으며 대부분의 경우 사회적 경제적 정치저 측면에서 발생하는 문제점에 대한 비판이 주안점을 이루게 되며 프랑크푸르트 학파의 비판 이론 역시 크게 다르지 않다.

 

비판이론과 대립되는 지점에 있는 전통이론 즉 관념론적 전통하에 있는 이론은 근대 자연과학의발전과 더불어 체계성을 추구하며 보편성을 추구하는 학문의 수립을 주안점으로 삼게 된다.  하지만 이러한 이론의 수립은 많은 경우에 있어 현상의 본질에 대한 직시보다는 현상을 자기에게 맞게 짜맞추는 자기 합리화 현상을 보이며 다른 한편으론 이론 자체가 초월적 위치에 점해지고 그러한 이론이 만연하는 지배적 상황아래에서 초월적 주체의 형성과 더불어 대단히 폭력적인 양상을 선보이게 된다.   

 

그러한 폭력적 양상이 보여준 근대적 비극을 목도한 비판이론은 자연스럽게 지나친 체계적 지식의 추구를 넘어 실천적인 측면을 강조하게 된다.  이러한 실천적 비판이론이 가져야할 목표로 첫째 사회 현실의 문제점을 드러낼 수 있어야 하며 둘째 원인을 파악하며 문제를 변화시킬 수 있어야 하며 셋째 이러한 두가지 측면을 만족시키기 위해 기본적인 규범성을 제시하여야 한다.

 

 

계몽과 이성

계몽사상이란 무엇일까?  여러가지 측면으로 바라볼 수 있겠지만 계몽이란 비이성적인 것의 배제를 말한다.  즉 미신이나 종교 그외 비합리적인 이해할 수 없는 관습따위의 배제를 뜻한다.  그와 동시에 확인할 수 있는 계몽의 또 다른 측면은 자연적인 힘에 맞서는 인간의 자기보존성이다.  결국 이성이 내세우는 계몽은 비합리적인 것들을 배제하며 자연의 힘에 감히 맞서 자연을 지배할 수 있는 길로 들어서게 하는 것이다. 

 

이러한 측면은 괴테의 파우스트 박사를 통해서도 쉽게 확인 할 수 있다.   사실 인간이라는 종족 전체로 보았을때 가장 위험한 존재는 자연 그 자체 아닌가??  자연의 위대함 앞에서 인간이 얼마나 하찮은 존재인지는 어렵지 않게 확인 할 수 있다.  이러한 자연과 싸우기 위해서는 사회 또는 국가가 발전해야 한다.  어떤 체계적인 모습이라고 할까??  쉽게 이해하자면 군대 조직을 생각하시면 된다.  단결된 인간의 힘은 산을 하나 없애버릴 수 있을 정도 아닌가??  어디 그뿐인가??  자연의 힘에 대항하기 위해 댐을 만들고 수로를 만들고 이런 모든 것들이 자연에 대항하기 위한 수단이다.

 

이렇듯 외적 자연을 지배하고 이성의 발 아래 두려는 이성의 계몽의 시도는 더 나아가 인간 자체가 가지고 있는 인간 내적 자연의 지배로 나아가게 된다.  쉽게 말해 인간의 욕망, 감정 따위를 철저하게 이성과 합리적 주체라는 미명아래 배제하고 억압시키게 되는 것이다.  재미있는건 이러한 내적 자연의 지배는 처음엔 억압이었으나 후에는 이게 당연한 것이 되어버린다.  오늘날 학생들을 보면 쉽게 확인이 되는데 그들은 끊임없이 무언가를 욕망하고 있지만 이를 억제하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고 스스로를 억압하는 현상을 보여주게 된다.  결국 억압 자체가 내면화 되어버린 것이다.  이를 두고 억압의 지배를 받는 자이자 억압의 지배를 행하는 자라고 표현하는 것이다.  이는 결국 극심한 인간소외를 불러오게 된다.  차가운 이성 앞에 나의 존재의 무의미성. 

 

 

그렇다면 이러한 이성이란 도대체 무엇일까?  이성은 크게 두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다.  객관적 이성과 주관적 이성이다.  객관적 이성은 객관적 현실에 내재하는 합목적적 이성과 그걸 파악하는 주체의 능력을 동시에 가리키는 용어이다.  객관적 이성을 지향하게 되면 수단보단 목적에 관심을 두게 된다.  주관적 이성이란 추론이나 영역 따위의 능력을 의미하는 개념어인바 주관적 이성은 목적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이 없고 목적을 이루기에 가장 적합한 수단에만 관심을 가지는다.  이는 역시 데카르트의 코키토 이후 나타나게 된 현상으로 인간을 중심에 세우고 주체가 중심에서면서 자기 보존이나 자신의 유용성이나 이득에만 관심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사실 객관적 이성의 지배를 받던 시절 계몽이라는 이름으로 종교나 도덕 등 다양한 중세적 가치관들이 엄청난 비판을 받게 되는데 여기에 주관적 이성이 전면화 되면서 계몽의 역할이 야만성을 줄이기는 커녕 새로운 야만을 불러오게 된다.

 

 

세이렌의 유혹과 도구적 이성론

이러한 인간소외는 지배 하는 자나 지배 받는 자나 똑같이 발생한다는 점이다.  이는 세이렌을 통해 확인이 가능하다.  세이렌은 호메로스의 오뒷세이아에 나오는 요정인데 바다에서 배타고 가면 노래를 불러서 유혹하여 빠져죽게 만든다는 요정을 말한다.  오디세우스는 세이렌의 노래가 너무 나도 듣고 싶었지만 그걸 듣고 죽을수는 없었다.  그래서 내놓는 방법이 부하들은 귀를 막고 노만 젓게 하고 자신은 돗대에 꽁꽁 묶어놓은채 그 노래를 듣는 것이다.  이 이야기를 통해 피지배계층의 인간소외는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즉 실질적인 생산을 해내는 노동계층이지만 세이렌의 노래로 대표되는 어떤 예술적 향유와는 괴리된채 이루어지게 된다.  따라서 노동을 하되 향유할 수 없기에 소외가 발생하게 된다.  그렇다면 반대로 지배계층인 오디세우스의 인간소외는 어떠한가?  그는 자기 나름대로는 세이렌의 음악을 들었다고 하겠지만 결국 이는 자기 자신의 통제에 기반한 향유에 불과한 것이다.  음악은 오디세우스에게 아무런 영향도 주지 못하며 되려 자신의 감정이나 욕망을 억제한채 듣는 것에 불과한 것이다.

 

그렇다면 저러한 형태의 인간소외가 가능하게 된 근본적인 원인은 어디에서 나오는가??  결국 이는 인간의 효율적 지배를 위해 인간을 양화 가능성에서 시작한다.  양화 가능한 즉 수치화된 인간은 전체로서 파악될뿐 인간이 가지는 개개의 차이와 개성을 외면하게 된다.  이러한 점을 적나라하게 비판하고 있는 소설이 '멋진 신세계' 이다.  결국 이러한 계량화된 인간은 사유할 수 있는 능력을 잃어버리게 되고 인간의 이성은 수단에 대한 비판보다는 수단 그 자체의 효율성에만 집중하게 된다.  이것이 바로 이성이 가지는 인간을 합리성이라는 미명아래 통제와 도구로서 설정하게 되는 도구적 이성의 성격이다.  결국 데카르트 이후의 인간을 중심에 세운 합리성에 기반한 계몽의 세계는 철저한 자기통제의 시스템으로 전락하게 된 것이다. 

 

 

대중 문화

이러한 도구적 이성이 문화라는 측면으로 발현되면 문화산업이라는 독특한 비판이론을 생성하게 된다.  즉 대중문화를 인간 지배의 수단으로 파악하게 된다.  우리는 흔히 대중문화가 우리가 원했기에 우리에게 제공된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은데, 되려 대중문화는 지배계층에 의해 표준화되어 우리에게 제시되고 우리는 그것을 소비하는 것이다. 이러한 표준화된 대중문화를 소비하다보니 스스로가 종속되어버리고 다시 순환하여 소비자는 이런 것을 다시 요구하는 현상을 불러오게 된다.

물론 대중문화가 정말 똑같은것만 제시한다면 금방질릴테니 약간씩 변화를 주긴 하지만 결국 표준화 안에서의 변화에 불과하다.  간단히 말해 우리는 수많은 티비방송 채널을 보면서 나름 선택한다고 생각하시겠지만 결국 수많은 티비 채널도 결국 자본이 생산하고 제시한 것에 불과하고 우리의 선택은 그 안에서의 선택일뿐이라는 것이다.


또 다른 예로 어느 한 사람이 다큐를 보면서 자본의 논리에 휘둘리지 않는다고 생각할 지도 모르겠지만 그 또한 자본에 의해 만들어지고 제공되는 채널에 불과하다.  진정한 목적은 티비 앞에 앉히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자극적인 것을 좋아하되 싫어하는 사람 마저도 티비 앞에 앉혀놓기 위해 저러한 것을 만들어서 제공을 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마케팅 분야로 넘어가면 니즈라는 말로 표현되기도 한다.



트루먼 쇼와 자본

결국 트루먼 쇼란 무엇인가?  거대한 자본이 생각해낸 거대한 쇼로서 왠만한 사람들은 다 티비 앞에 앉혀놓을 수 있는 쇼이기도 하면서 일생을 놓고 관람할 수 있는 초 장기적인 관점에서의 쇼이기도 하다.  한 인간의 삶을 저렇게까지 지나치게 양화 가능한 무엇으로 바라본다는 것이 과연 옳은가? 에 대한 질문은 영화내에서도 지속적으로 던져진다.  PD에 대한 비판.  트루먼에게 이건 가짜라고 끊임없이 외치는 수많은 사람들.  하지만 그럼에도 쇼는 지속된다.  완벽하게 수치화된 인간에 대한 양화가능성이 불러온 결과이다.  결국 트루먼은 마지막에 그 초거대한 스튜디오에서 벗어나게 되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그의 삶은 여전히 자본에서 벗어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리고 트루먼 쇼를 시청하며 트루먼의 탈출을 응원하였던 많은 시청자들 역시 또 다른 자본의 제시에서 벗어나기는 대단히 힘들 것이고 말이다.  스튜디오는 자본안의 자본일 뿐이다.  밖은 더 큰 자본이 모두를 기다릴테니 말이다.



마무리

문화산업론을 오늘날 어떤식으로 바라볼 수 있을까?  여전히 이 이론의 타당성을 옹호하는 사람들 못지 않게 문화 산업이 가지고 있는 긍정적 측면을 지나치게 축소화 한다는 비판도 가능할 것이다.  하지만 정말 중요한 것은 큰 틀에서의 문제의 제기에 대한 확인이다.  사실 문화산업론이라는 것은 계몽의 변증법 안의 한 챕터에 불과한 것이고 진정한 의미에서의 문제는 계몽과 합리적 이성이 가져온 문제점에 대한 비판인 것이고 이러한 진의에서 바라본다면 계몽의 변증법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설득력과 영향력을 가지고 있다고 볼 수 있겠다.

  




반응형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