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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메리칸 뷰티(1999), 이름 붙일 수 없는 문제들 본문
아메리칸 뷰티, 이름 붙일 수 없는 문제들
완벽해 보이는 중산층이 가져야할 필수적 요건은 다음과 같다. 가정 넓은 집과 장미꽃이 심어진 정원, 착한 아이와 성실한 아내 그리고 좋은 이웃들. 이러한 이상적인 삶의 모습이야 말로 미국인이 꿈꾸는 이상향으로서의 아메리칸 뷰티일 것이다. 이런 모습은 비단 미국이 아니더라도 어느곳이던 쉽게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한국 사회에서 이상적인 삶의 모습은 4인가족이 50평 남짓되는 아파트에서 살면서 좋은 직장을 다니는 아버지와 가정적인 어머니 그리고 순종적인 아이들로서 그려진다. 하지만 이러한 이상적인 삶의 모습은 남에게 보여지기 위한 모순되고 허황된 가식적인 삶에 불과하다. 완벽해 보이는 가족의 이면에는 서로간의 소통불가능과 불안만이 잠재되어 있다. 다만 그것을 인정하지 않으려 할뿐이다.
아메리칸 뷰티에 등장하는 가족은 크게 세가족이다. 첫째는 레스터 번햄(케빈 스페이시 분)의 가족으로 레스터는 무기력에 빠진 무능한 아버지상을 그려내고 있다. 그의 부인인 캐롤린(아네트 베닝 분)는 부동산 중계업자로서 남편에 대한 실망과 성공을 향한 열망이 뒤섞인채 지역 최고의 부동산 업자와 바람이 난다. 마지막으로 딸 제인(도라 버치 분)은 사춘기에 접어든 소녀로서 아버지에 대한 혐오감이 상당한 상태이다. 둘째는 프랭크 피츠 중령(크리스 쿠퍼 분)의 가족으로 프랭크는 매우 권위적이고 위압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그의 부인인 바바라(엘리슨 제니 분)는 남편에게 억눌린채 그 어떤 말도 제대로 못하는 억압된 가정주부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으며, 그의 아들인 릭키(웨스 벤틀리 분)는 마약을 팔아 돈을 벌고 몰래 카메라를 촬영하는 취미를 가지고 있다. 이 두가족은 모두 겉으로는 이상적인 가족상을 보여주지만 그 내면은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가족 관계가 망가져버린 상태이다. 그리고 마지막 세번째는 동성애 가정이다.
이러한 가식적인 가족의 모습은 베티 프리단이 언급한 이름 붙일 수 없는 문제와 밀접한 연관성이 있다. 즉 이상적인 가족을 강요하는 가족 이데올로기가 내포하고 있는 모순과 허상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이다. 베티 프리단은 페미니즘의 제2물결을 불러온 연구자로서 당대 미국 여성이 보여준 정신적 붕괴에 천착하여 문제를 제기하였지만 그녀의 문제제기는 단순히 여성의 문제를 넘어 가족 전체를 향해 나아갈 수 있다. 완벽한 가정에서 살아가는 여성들이 왜 불행해하는지에 대해 연구를 하였지만 이는 똑같은 논리로서 완벽한 가정에서 살아가는 남성들과 아이들이 왜 불행해하는지에 대한 대답도 줄 수 있기 때문이다. 페미니즘과 관련된 논의는 여성차별에 대한 저항에서 비롯된다. 여기에서 어느곳에 방점을 두느냐에 따라 바라보는 시각이 조금 달라질 수도 있겠지만 차별과 그 속에 담겨있는 억압에 방점을 둔다면 페미니즘 이론은 더 큰 가능성을 향해 나아갈 수 있는 것이다.
여성운동 제2차 물결의 시작
1920년 9차 수정 헌법에서 투표권을 얻어낸 여성들은 공적 영역과 경제 영역으로 진출하게 된다. 이른바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사회생활과 정치 생활이 가능해진 것이다. 이것이 여성운동 첫번째 물결이 얻어낸 성과이다. 1820~1920년까지의 첫번째 물결이 일어나던 시점만 하더라도 여성은 적극적이고 능동적이었으며 계몽과 자유주의의 기치아래에서 스스로의 삶을 결정하려고 노력하였다. 하지만 이는 2차 세계대전의 종전과 함께 많은 부분에 있어서 변하게 된다. 미국사회의 여성들에게 있어 2차 세계대전은 커다란 도약의 기회였다. 사실 참정권이 부여되었다하여 여성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이 바뀌는 것은 아니다. 여성에 대한 고용 기피는 여전했었고 정치의 영역에서 목소리를 높이는 여성에 대한 부정적 인식도 여전했었다. 형식적인 평등은 주어졌을지언정 실질적인 평등은 아직 요원한 상태인 것이다. 하지만 2차 세계 대전이 터지면서 상황은 달라진다. 전쟁을 하러간 남성의 빈자리를 여성이 매워야만 했던 것이다. 이에 여성이 생산의 중심에 서게 되고 사회와 국가의 유지에 큰 역할을 하게 된다.
그런데 이러한 상황은 종전과 동시에 뒤바뀐다. 종전 후 전쟁터에서 돌아온 남성에 대한 배려가 우선시 되었던 거이다. 여성은 다시 남성에게 일자리를 내놓아야만했다. 게다가 큰일을 치르고온 남성들에게 심적인 안정을 취할 수 있는 안락한 가정을 제공해야만했다. 전쟁 영웅인 그들에게 주어져야하는 당연한 보상일 수도 있을 것이다. 이에 여성들은 가정으로 돌아가야만했다. 1950년대 미국 사회는 전후복구사업으로 인하여 엄청난 활력을 얻게 된다. 중산층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고 경제적인 부 또한 상상을 초월할만큼 쌓여갔다. 집집마다 티비와 냉장고, 세탁기가 보급되었으며 포드주의[1]는 최고의 전성기를 맞이하여 소비야말로 최고의 미덕이 된다. 1950년대 미국은 가장 바람직한 국가의 모델이었으며 넘쳐나는 재화와 헐리웃 영화의 달콤한 속삭임 속에서 영원히 황금기를 구사할 것만 같았다.
이때 미국 사회는 가정주부로서의 여성의 삶을 찬미하기 시작한다. 풍족한 재화를 바탕으로 하여 교외에 넓은 마당이 있는 커다란 집, 아이들과 강아지가 뛰어노는 마당, 존경받는 아버지, 충실한 어머니. 이러한 행복한 중산층 가정의 이미지는 여자들로 하여금 중산층 주부를 꿈꾸게 만들어간다. 실제 2차 대전 종전 이후 여성들의 교육율은 점점 하락하고 결혼연령 또한 점점 낮아지게 된다. 많은 여성들이 대학진학을 포기하게 되고 설사 진학을 한다 한들 대학에서 자신의 남편을 찾는 일에 몰두하게 된다. 빠른 결혼이 일상화되니 출산율도 비약적으로 늘어나게 된다. 이른바 베이비붐의 시작인 것이다. 이 시대 미국의 중산층 가정은 전 세계의 이상적인 모델로 자리매김한다. 이는 비단 미국뿐만 아니라 근대화의 시작과 경제의 급성장이 이루어지는 나라에서는 대부분 확인할 수 있는 현상이다. 한국 사회에서도 고도 경제 발전 시절 중산층과 2층 양옥집이 주는 낭만적 이미지는 미국의 그것과 대동소이하다.
이름 붙일 수 없는 문제들
잔디가 깔린 넓은 마당, 각종 가전 제품들, 멋진 가구, 아이들 모든걸 다 가진 것처럼 보였고 미국 사회가 가장 바람직한 삶의 모델이라고 칭하였으며, 많은 여성들이 꿈꿔온 중산층 여성들이 붕괴하기 시작한다. 이른바 실존적 붕괴에 직면한 것이다. 모든걸 다 이룬 것처럼 보이지만 정신적으로 황폐화되기 시작한다. 아무런 이유도 없이 감정이 격해지고 우울해기에 더욱 더 완벽한 현모양처가 되기위해 노력한다. 하지만 그러면 그럴수록 도대체 알 수 없는 현상들이 자신을 괴롭힐 뿐이다. 혹자는 이를 두고 여자들이 너무 편한해서 배가 불러서 그러는 것이라고 치부하기도 하였지만 그렇게 치부하기에는 중년 여성들이 느끼는 상실감이 너무나도 크다. 아무리 배고픔과 추위에서 벗어나게 해줄 수 있을만큼의 부를 이루었지만 그것이 행복을 가져다주진 않는다. 이를 두고 베티 프리단은 이름 붙일 수 없는 문제라 칭한다.
베티 프리단의 여성의 신비[2]는 여성운동의 제2차 물결을 이끌어낸 중요한 저서이다. 이 책을 두고 앨빈 토플러는 역사의 방아쇠를 잡아당긴 책이라 칭하기도 하였다. 20세기 중반의 미국 여성들이 겪은 문제는 전형적인 자존감 상실의 문제이다. 미국이 만들어낸 중산층 가정과 현모양처의 이미지는 가정주부 이외의 모든 선택지를 배제시키는 결과를 가져온다. 완벽한 가정의 이미지를 유지하기 위해서 여자는 완벽한 주부가 되어야 하고 그외에 공적, 사회적, 경제적 모든 영역에 관심을 두어서는 안된다. 완벽한 여성다움은 완벽한 현모양처와 일치되고 바로 여기에서 새로운 여성의 신화가 탄생한다. 이러한 관점하에서 사회적으로 능력있고 경제적으로 부유한 커리어우먼은 현모양처 이미지와 완전히 배치되는 여성상으로 악한 여성으로 그려진다. 커리어우먼의 악한 여성의 이미지는 한국의 90년대 드라마에서도 흔하게 찾아볼 수 있다. 드라마속 주인공은 항상 착하고 여리며 피해를 입지만 현모양처로서 입지를 다지게 되고 이러한 착한 여주인공을 괴롭히는 인물은 대부분 커리어우먼이다. 이 커리어우먼은 성공을 향한 욕망에 미쳐버린 여자쯤으로 그려지는 경우가 많다.
여성상에 대한 논의는 프로이트 이론을 이용하여 더욱 과격하게 등장한다. 페미니스트들은 남성을 싫어하며 자유로운 섹스에 집착하는 여자로 그려지는 경우가 많다. 게다가 페미니스트들은 얼굴도 못생겼으며 여자로서의 매력도 없기에 쓸데 없이 자신의 권리를 주장하고 나서는 경우가 많은바 이 또한 하나의 남근 숭배에 다름이 없다는 것이다. 즉 여자로서의 매력이 없고 현모양처가 될 가능성이 없는 여성이기에 남자가 되기를 바라게 되고 이에 남근 숭배의 현상으로서 페미니스트가 되어 권리주장을 강하게 한다는 것이다. 이와 더불어 당대 미국의 학교는 여자아이들에게 직업을 가지기보다는 현모양처가 되라고 교육시키기에 이른다. 쓸데 없는 것에 관심을 두지 말고 자신을 꾸미고 가꿔 사교모임에서 주목받는 여성이 되고 졸업파티에서 여왕이 되는 것이야 말로 여성으로서 가장 가치 있는 일이라고 교육시킨다. 고도로 발달한 자본주의는 소비의 주체인 여성에게 왜곡된 창조성을 강요한다. 이 전자제품을 사면 훨씬 더 완벽한 현모양처가 될 수 있다. 이 믹서기를 사면 훨씬 현명하고 창조적인 어머니가 될 수 있다. 가정주부는 이러한 광고문구에 현혹되어 끝없는 소비를 일삼는다. 소비를 함으로써 자신의 존재를 확인하려들고 바겐세일을 하는 물건을 샀을때 자신의 현명함에 도취된다. 자신이 행하는 모든 것은 가족과 가정을 위한 것이며 이를 위해 최첨단 물건을 사는 자신이야 말로 현명한 여성의 전형이라 여기게 된다.
가정주부의 역할 모델은 아이들이 장성한 이후 극심한 혼란을 겪게 된다. 자녀들이 어린아이인 시절에는 어머니로서의 역할 모델이 있지만 장성한 이후에는 더이상 어머니의 역할을 유지할 필요가 없어진다. 이에 극심한 존재감 상실을 경험하게 되지만 스스로 자신의 존재를 되찾을 능력도 없다. 평생을 현모양처만을 바라보고 살아온 수동적인 존재이기에 자신의 존재 의미가 무엇인지 묻는 것조차도 쉽지 않은 것이다. 이에 여성들은 다시 아이를 낳기 위해 성에 집착한다. 그러지 자연스럽게 남편들은 자신의 부인이 부담스럽기 시작한다. 심각한 상실감과 공허감에 빠진 여성에게 성은 그것을 극복하기 위한 수단이다. 이에 여성들은 이웃남자를 탐하기 시작한다. 이웃집 남자는 남편과는 뭔가 다를 것 같다는 낭만적 환상은 일탈을 부추긴다. 하지만 그 이웃집 남자도 그의 부인에게는 그냥 그런 남편일 뿐이다.
이러한 장면은 미국의 드라마 위기의 주부들에서 잘 표현된다. 아메리칸 뷰티를 벤치마킹한 이 작품의 첫회는 완벽에 가까운 중산층 가정을 보여준다. 완벽한 마을과 예쁜 집들, 출근하는 남성과 운동하는 여성, 집집마다 있는 잔디밭과 그 안에 핀 꽃. 아침에 일어나자말자 주부는 마당으로 나와 꽃을 바라보며 하루를 시작한다. 가족을 위한 완벽한 아침식사, 집안일, 가정을 예쁘게 꾸미기 위한 DIY. 등 무엇하나 부족함이 없는 가정이지만 가정주부는 자살을 하게 되고 그 장례식장에 주요 인물들이 모이면서 극이 시작된다. 장례식장에 모여드는 인물들에 대해 하나하나 소개를 하는데 다들 나름의 문제가 있는 가정을 유지하고 있지만 모두 행복하다고 가식적으로 드러내며 장례식장에 모여든다. 위기의 주부 시즌1 제1화야 말로 베티 프리단의 문제 제기를 가장 잘보여주는 작품이라 할 수 있다. 아메리칸 뷰티에서 등장하는 중산층 가정의 외면은 어느정도 현실성을 감안한채 표현되지만 위기의 주부들에서 등장하는 중산층 가정은 마치 현실에는 존재하지 않는 동화같은 모습으로 표현된다. 완벽하게 동화같은 삶을 던져놓은채 그안의 모순된 삶을 코미디로 풀어내는 것이 이 작품의 백미인 것이다.
베티 프리단은 여성은 더이상 편안한 포로수용소인 가정에 안주해서는 안된다고 말한다. 가정이라는 우물을 벗어던져 한명의 완전한 독립적인 인간으로서 자신을 회복할 수 있을때 어머니로서의 역할도 큰 성취를 이룰 수 있다고 본다. 가정주부로서의 역할에 몰입하여 아무리 가정일에 최선을 다한다 하여도 결코 자존감을 확립할 수 없다. 따라서 가정주부는 가정일이 직장이 될 수 없다는 사실을 명확히 인식해야 하며, 여성의 신화로서의 가정의 이미지를 파괴한채 가정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목도할 것을 요구한다. 신화와 같은 이미지를 유지하기 위해 자원봉사 따위의 일을 통해 자아를 확립하려고 들어선 안된다. 반드시 보수를 받는 일을 통해 사회적으로 인정을 받아 자존감을 높이고 스스로의 삶의 계획을 능동적으로 설계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이를 통해서 가정도 완벽하게 유지될 수 있다고 말한다.
The Second Stage[3]
프리단이 여성의 신비에서 요구한 것은 사실상 슈퍼우먼에 다름이 없다. 집안일을 최대한 빠르고 효율적으로 처리해야할 일로 인식하고 어머니로서 역할모델을 자신의 전부가 아님을 인식한 다음에 직장일을 하여 자아감을 높이라는 것이 그녀의 주문이다. 그렇다고 가정의 역할을 포기하라고 하는 것은 아니다. 최대한 가정일을 빠르게 처리하고 직장일을 통해 자아를 발전시키라는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태도는 또 다른 문제가 발생할 수 밖에 없다. 남성으로 하여금 집안일을 담당하도록 끌어들이지 않은채 여성만 바깥으로 내모는 행위는, 여성에게 슈퍼우먼을 강조하여 또 다른 신화를 만드는 것에 다름이 없다. 이것이 바로 여성의 신비가 가지고 있는 주된 모순이다. 이에 프리단은 The Second Stage를 저술하여 여성이 사회생활을 하는 일과 동시에 남성 역시 가정일을 수행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남녀 모두가 변화를 해야 한다는 것이며 이는 안과 바깥 모든 영역에서 동시에 이루어져야 한다. 즉 여성의 신비에서의 주된 주장이 여성이 남성성을 가지길 바란 것이라면 The Second Stage에서는 여성성을 강조하여 양자의 조화를 추구하는 것[4]이라고 볼 수 있다. 남녀 차별을 없애기 위해 남녀가 동등하게 취급받아야할 이유는 없다. 모든 것을 동등하게 취급한다면 이는 여성의 남성화에 다름이 없다. 도리어 여성적인 것의 장점을 긍정하고 차이를 인정하는 평등이 중요하다고 주장한다.
허상의 가치 아메리칸 뷰티
사실 완벽한 중산층의 삶이란 허상에 불과하다. 수많은 각기 다른 사람들이 만나 수많은 가정을 이룬채 살아가는게 인간의 삶이라면 그것을 완벽한 하나의 모습으로 환원시킨다는 것이 가능이나 할까? 완벽이라는 말 그 자체는 상당한 폭력성을 내포한 단어에 불과하다. 완벽하고 이상적인 단 하나의 가능성을 위해 노력하는 과정에서 완벽에서 배제된 다른 것들은 무시되고 억압받기 때문이다. 완벽하고 이상적인 삶인 아메리칸 뷰티의 강요는 나를 무능하고 무기력한 인간으로 만들뿐이다. 외부에서 주어진 완벽에의 추구는 필연적으로 실패할 수 밖에 없는 현실을 내포한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실패할 수 밖에 없는 그 길을 추구하고 그 길을 걷지 않으면 무능하다고 비판한다.
아메리칸 뷰티의 프랭크 가족은 권위적인 가족의 전형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퇴직한 남편은 과거의 영광에 집착한채 매일매일 과거 해병대였던 시절의 비디오를 보면서 과거를 회상한다. 그리고 플랭크 부인과 그의 아들인 릭키는 이에 동참해야만 한다. 비디오를 같이 봐주지 않는다는 것은 프랭크의 과거를 무시하는 것고 이는 곧바로 그의 권위에 도전하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프랭크의 권위에 도전했을 경우 남는 것은 폭력뿐이다. 겉보기엔 좌우대칭이 뚜렷한 거실에서 세가족이 모여 티비를 보는 정말 아름다운 장면이지만 이는 굉장히 불안하고 불편한 장면일 수 밖에 없다. 프랭크 부인은 아예 존재하지 않는 사람처럼 보인다. 극중에서 그녀는 거의 대사가 없으며 오직 순종하고 바라보며 불안해할뿐이다. 프랭크 부인의 문제는 바깥에서 봐서는 결코 알 수 없을 것이다. 프랭크 집안 역시 해병대 중령에서 예편한 이상적인 롤모델로서의 가정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프랭크 부인은 말도 제대로 못할 정도로 억압된채 불안에 떨며 살아간다. 베티 프리단이 말한 이름을 알 수 없는 문제는 중산층 가정의 주부들이 주로 겪게 되는 문제로서 그녀의 초기 관점에서 본다면 프랭크 부인은 자기 일을 갖디 못하였기에 저러한 삶을 살아간다고 쉽게 진단내릴 가능성이 다분하다. 즉 완벽하고 이상적인 가정을 유지하기 위해 애쓰는 가정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상실하기에 다가오는 주체적 붕괴 현상이 바로 그것이다.
레스터 가족 역시 분명 나름의 중산층 가정을 이루는데 성공한 케이스이다. 하지만 어떤 이유에서인지 레스터는 심각한 무기력증에 빠진채 부인과의 성관계도 전혀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레스터 부인은 완벽하고 깔끔한 성격을 가진 자유주의자였는데 가정주부의 삶을 살다 남편의 무능함으로 인해 뒤늦게 자기 일을 찾은 것으로 보인다. 문제는 이러한 중산층 주부의 문제가 과연 단순히 여성이 직장을 얻어 돈을 번다고 해서 해결이 되는가? 라는 점이다. 실제로 극중에서 레스터 부인은 공인중개사로서 일을 하고 있는 상황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하여 그녀의 삶이 주체적이고 능동적인 삶으로 바뀌었는가? 라고 묻는다면 회의적일 수 밖에 없다. 그녀는 오직 물질만능이라는 자본의 논리에 사로잡힌채 과거의 자유롭고 당당했던 자신의 모습을 여전히 상실한 상태이다. 베티 프리단에 의하면 직장을 얻은 여성은 다양한 기계들의 도움을 얻어 집안일과 아이의 양육에도 더 큰 효과를 얻어야 하는데 실상은 그렇지 못하다. 레스터 부인은 여전히 자기 상실의 상태에 빠져있으며 겉보기에 좋아보이는 가정은 붕괴 직전의 상태로 몰려있다. 대화를 통해 가정을 유지하기엔 이미 서로간의 골이 너무 커져버린 상태에서 각자의 취향만을 내세운채 가족 구성원간의 이해도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 완벽하게 셋팅된 식탁에서 다같이 모여 저녁 식사를 할때는 항상 레스터 부인이 좋아하는 음악만을 틀어야 하고 아버지가 딸과 친해지고자 대화를 건내면 딸은 우리가 언제부터 친했냐면서 화를 내버린다. 겉보기엔 너무나도 아름다운 저녁 식사 광경이지만 그 속은 곪을대로 곪아있는 것이다.
결국 각 가정의 구성원은 대화와 이해를 통해 문제를 해결하기보다는 자신의 부족한 상처를 나름의 방식으로 해결하고자 한다. 레스터는 딸의 친구인 안젤라(미나 수바리 분)와의 성적 판타지를 통해서 자신의 자존감을 확인하려 들고, 레스터 부인은 잘나가는 동종업종의 남성과 혼외관계를 맺어 상처를 치유코자 하며, 부모님에 대한 경멸만이 남은 제인은 뭔가 비슷한 고통을 담고 있는듯한 릭키와의 사랑을 통해 문제를 해결하고자 한다. 이는 프랭크 역시 마찬가지이다. 프랭크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동성애적 성향을 숨기기 위해 남성다움에 지나치게 집착한다. 남성답고 강하며 권위있는 가장의 모습을 강요하다보니 프랭크의 부인 역시 완전히 억압된 순종적인 여성의 모습으로 등장하며 그의 아들인 릭키는 그런 아버지에게 순종하는척 하면서 뒤로는 대마초를 판매하는 방식으로 반항을 행한다. 이상적인 중산층 가족의 현실은 바로 이런 것이다. 사실 완벽한 중산층 가정이라는 것은 상징계가 만들어낸 허상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사회의 안정적인 유지를 위해 만들어낸 하나의 이데올로기로서 이상적인 가족 이데올로기가 형성되는 것이다. 하지만 상징계의 이면에는 언제나 남겨진 잔여가 존재하며 그것이 바로 이 가족들의 실재이다. 많은 가정들이 가지고 있는 문제이지만 마치 우리는 그렇지 않은것처럼 행동해야 하기에 말해서는 안되는 비밀과 같은 실재이다.
아메리칸 뷰티에서 가장 건강한 가족은 동성애 부부처럼 보인다. 동성애 부부에 대해서 많은 이야기를 하진 않지만 그들의 사이에는 큰 문제가 없어보이고 육체적으로 건강하며 이웃에게 가식없이 친절하다. 가족이데올로기가 비정상으로 규정한 동성애부부가 오히려 이상적인 가족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다. 결국 중요한 것은 모든 억압과 차별은 이상적이고 완벽한 삶이라는 규정성에서 비롯한다는 것이다. 남성은 능력있고 남자다워야 하며 여성은 순종적이고 요리를 잘해야 한다는 식의 규정성이 이름붙일 수 없는 문제를 불러오는 주된 이유이다. 이러한 규정성이 계속 남아있는한 여성에게 닥쳐오는 이름붙일 수 없는 문제는 단순히 취직을 한다는 식의 방법으로 해결할 수 없을 것이다. 이 문제는 프랭크의 삶을 돌아보더라도 쉽게 확인할 수 있다. 동성애자인 그는 자신의 욕망을 숨기기 위해 노력한다. 이에 해병대가 되었고 최선을 다해 남성성을 확인하려 들었지만 자신의 아들이 동성연예자라는 오해를 한 이후 상황은 걷잡을 수 없게 나아간다. 자신의 아들 역시 자신과 같은 동성애자라고 생각한 그는 아들을 내쫓아버리고 고통에 몸부림치다 레스터를 찾아가 키스를 한다. 그의 생애에서 첫번째일지도 모르는 욕망의 드러냄은 단칼에 거절당한다. 어떤면에서 보면 프랭크는 상당히 불쌍한 남자이다. 평생을 놓고 자신의 욕망이 그릇된 것이라고 판단내린채 정형화된 기준에 자신을 맞추려고 노력했기 때문이다. 결국 진짜 자신은 사라진채 그릇된 허상만이 남게 된다. 진짜 욕망을 추구할 수 없으니 그에 대한 분노가 푹력으로 드러난다. 그러한 사실을 모르는 프랭크의 부인은 프랭크로 인해 불행하다. 아마 둘사이에서 원활한 섹스가 이루어졌다고 보긴 힘들 것이다. 결국 프랭크 부인에게 닥쳐온 이름붙일 수 없는 문제는 단순히 직장의 문제가 아닌 가족 내의 옳음에 대한 편협한 시선때문에 생겨난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가장 적극적으로 저항하는 사람은 레스터이다. 매일아침 샤워도중 자위행위를 하는 것에서 초라한 만족을 얻던 그는 좋은 직장을 관둔채 햄버거 가게에서 패티를 굽고 안젤라에게 잘보이기 위해 운동을 하는 과정에서 진장한 기쁨을 얻는다. 이러한 기쁨은 가식적인 아메리칸 뷰티가 아닌 삶의 뷰티인 것이다. 여성해방에 대한 논의는 자연스레 남성해방을 불러온다. 사실 여성 해방이라는 것은 여성에 대한 규정성에서의 해방을 의미하는 것이며 이렇게 해체된 규정성은 연쇄효과를 불러와 남성에 대한 규정성도 해체할 수 있는 가능성을 제시한다. 보수적이고 가부장제적인 사회에서 남성의 삶이란 아주 풍요롭고 자기 충족적일것 같지만 사실 남성의 삶도 딱히 여성보다 나을 것이 없다. 그들에게도 규정되어있는 임무와 책임이 존재하기에 가부장적인 부담감에서 헤어날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영화속 프랭크의 삶은 불행하기 이를때 없다. 정상이라고 규정된 책임을 제대로 수행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의 실재는 오히려 다른곳에 있는데 아무도 그것을 봐주려 하지 않으며 스스로도 그것을 애써 외면한다. 결국 마지막에 자신의 욕망을 레스터에게 드러내지만 다시금 그는 강한 수치심을 느껴 그사실을 알고 있는 레스터를 죽여버린다.
베티 프리단이 보여준 이름붙일 수 없는 문제에 대한 통찰은 완벽한 삶의 이면에 존재하는 가식과 허상을 통렬하게 보여주었다. 비록 그녀는 백인 중산층 여성의 문제에 천착하여 이러한 논의를 전개하였지만 결국 이는 여성 해방을 넘어 다양한 차별과 억압에 놓여있는 인간 해방이라는 논점으로 나아갈 수 있는 하나의 가능성을 제시한 것에 다름이 아니다. 융에 따르면 인간은 각자의 성과 반대되는 성향인 아니마와 아니무스의 원형을 가진다. 그리고 인간은 자기실현의 과정에서 아니마와 아니무스를 의식화하여 더욱 성숙한 자아의식을 가질 수 있게 된다. 이러한 융의 통찰이 보여주는 것은 남성성과 여성성이라고 규정된 삶을 살아가는 것은 절반의 자신밖에 모르는 절반의 삶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절반의 내가 누구인지 모른채 외부적 규정에 맞추어 살아가니 자연스럽게 이름붙일 수 없는 문제가 발생할 수 밖에 없다. 이름 붙일 수 없는 문제는 어떤면에선 이름 붙여진 인간의 비극일지도 모르겠다. ‘나’라고 하는 인간의 본질은 과연 무엇이며 뭐라고 이름 붙일 수 있는 것일까? 이름 붙인다는 것은 결국 규정짓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지만 인간은 자기 스스로도 자신의 본질이 무엇인지 알기 힘든 오히러 이름붙일 수 없는 존재에 더 가깝다. 아메리칸 뷰티의 허상은 이름붙일 수 없는 존재에 부여된 이름때문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