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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린존(2010), 아버지 부시와 이라크의 자유 본문

영 화/10's 영화

그린존(2010), 아버지 부시와 이라크의 자유

유쾌한 인문학 2010. 4. 19. 08: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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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라크 전쟁
2001년 911 테러사건이 발생한 이후 2002년 부시대통령은 소위 말하는 악의 축 발언을 하게 된다.  악의 축으로 제시된 국가는 이라크, 북한, 이란이며 그중 타킷이 된 국가는 독재국가인 이라크이다.  북한은 역학관계상 건들기도 힘들고 건들 이유도 없는 국가이며 이란 역시 마땅한 명분은 없지만 이라크는 갖다붙일려면 뭐든 갖다붙이는게 가능하다.  독재국가라는 명분위에 대량살상무기라는 명분을 더 얹어서 전격적으로 전쟁이 시작되는데 911 테러가 생긴 이후 정확히 6달만에 모든 결정이 내려지고 침공에 들어가게 된다.

다들 알다시피 미국이 벌이는 전쟁의 중심이야 항상 석유가 있는 것이고 정확히 말하자면 석유라는 물체 그 자체에 전쟁의 목적이 있다기 보다는 석유를 거래하면서 발생하는 화폐에 더 큰 이유가 존재하게 된다.  미국의 입장에서는 석유 거래량이 세상에서 제일 양이 많은 것이고 그것은 모두 달러로 거래가 되어야 한다.  그런데 왠만한 기름은 다 중동에 파묻혀있지만 이슬람과 유태의 관계 그리고 유태와 미국의 관계로 인해 묘한 긴장관계가 형성되고 그로 인해 과거 수많은 전쟁이 일어나기도 한다.  그리고 그 중심에 서있는 두 국가가 마음에 안드는 것이다.  통제가 안되니 말이다.  미국이라는 거대한 제국을 유지하기 위한 필수적인 힘은 바로 화폐에 존재하는데 통제가 안되는 국가는 어디로 튈지 모르니 마음에 어찌 들겠는가.




작전명 Freedom of Iraq
마음에 안들지만 마땅한 전쟁 명분도 없는게 사실인데 어처구니 없게도 미국 본토에서 테러가 일어나게 된다.  일단 하나의 꼬투리가 잡힌다면 이것의 인과를 확대시키는 것은 그다지 어려운일이 아니니 6개월만에 전격적으로 이라크로 진군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초기 작전명은 이라크의 자유이다.  이부분이 참 흥미로운 부분이다.  자유라..   미국 대통령들의 연설문이라는걸 유심히 보다보면 상당히 재미있는 현상이 발견되는데 특정 단어의 강조이다.  이는 하나의 프레임을 이루게 된다.

즉 하나의 프레임으로서 연설을 시도하여 사람들을 그 프레임속에 가둬버리는 방법론이다.  그리고 이 프레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핵심 단어의 선택이다.  내용따윈 중요하지 않다.  어차피 연설의 목적은 사람을 논리적인 사고로 이끌어가는것이 아니라 사람을 흥분시키고 자극시켜 원하는 방향으로 이끌어내는게 주목적이니 말이다.  그렇기에 논리일관성이나 진실을 담보하는 연설문은 그렇게 중요한것이 아니다.  중요한건 단어의 선택이고 사람들을 비논리적으로 이끌어내는 것이다.

주요 연설문을 확인해보면 주로 사용되는 단어가 좌파적 시각의 글은 억압, 권력 이런류가 많고 이론적 틀을 가지고 설명을 해야 하는 부분이 많아진다.  하지만 우파적 시각의 글은 주로 경제, 배고픔, 그리고 제일 중요한 자유 이런 단어들이 주로 사용하며 선동만 하면 된다.  이는 절대로 우연이 아니다.  의도적으로 사용하는 것이다.  제일 멍청한 인간은 좌파적 시각의 글에서 자유를 강조하는거다.  아마 당시의 부시의 연설을 기억하시는 분들은 다들 아실것이다.  지긋지긋한 자유타령 이라크의 자유와 평화를 위해서 이라크 민중을 위해서.  급기야 작전명도 이라크의 자유라고 갖다 붙이게 된다.


프레임
한 사회에는 그 사회를 지배하는 여러가지 룰이 존재하게 되고 그 룰은 일종의 프레임이 되어 교육을 통해 우리의 뇌리속에 깊이 박히게 된다.  이러한 프레임은 하나의 이데올로기 또는 지배적 담론과 비슷한 성격인바 뭐 여러가지를 확인할 수 있다.  중요한건 이러한 프레임의 핵심은 단어이다.  우리는 흔히 하나의 단어를 봤을때 그속에 어떠한 생각을 가지게 된다.  그리고 이 프레임속에서 단어의 선택을 통해 사람을 원하는 방향으로 끌어내 프레임에 가둬버리는 방법이다.

예컨대 통일이라는 단어를 외국인이 본다면 아무런 감흥을 못느끼겠지만 한국인이 본다면 뭔가 가슴 벅차오르는 그런 느낌 같은것 말이다.  배고픔이라는 단어는 어떠할까.  이 단어는 아마 세대에 따라서 다르게 각인될 것이다.  노년층은 이 단어를 보는 순간 아주 큰 고통과 서글픔, 슬픔을 느끼겠지만 젊은층은 그냥 동정 정도에 불과하지 않겠는가?  이는 경험의 차이에서 비롯되는 문제이다.  이것이 바로 말의 덫이라는 것이다.  보수적인 정당들이 툭하면 자유와 경제, 먹거리를 강조하는게 우연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보수성을 대표하는 사람들의 프레임의 핵심은 아버지의 절대성에 존재하게 된다.

가부장적 사회의 특징은 아버지의 절대성에 존재한다.  가장이 식구들을 책임진다는 생각이나 식구들을 올바른 길로 이끈다는 생각이 가부장적 사회를 잘 설명하고 있는 부분이다.  이러한 프레임의 지배를 받는 사회는 권위를 중시하게 되는 특징을 보여주게 되므로 가정에서는 아버지의 권위가 정치에서는 특정 지도자의 권위가 중요시되게 된다.  우리 머리속에 깊숙히 박혀있는 가부장적 프레임은 권위에 대한 도전을 감히 생각할 수 없게 만드는데 쉽게 말해 당신의 가정에서 아버지에게 감히 도전할 수 없는 그 생각이 무의식적으로 다른 영역으로 발현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런 현상은 다양한 모습으로 보여지는데 예컨대 한나라당이 진보정당을 향해 무능하고 국민을 지킬 수 없는 자들이라고 비난하는 것을 보고 거기에 공감을 일으킨다거나 특정 정치인의 비리에 대해 저정도 해먹는거 가지고 라는 발언들 그리고 정치에 대한 무관심 등을 들 수 있다.  좀 더 부연설명을 해보자면 '무능하고 지킬 수 없다'는 비난을 통해 국민들의 무의식에 돈못벌고 무능한 가장의 모습을 떠올리게 되는데 이러한 가장의 모습은 가부장적 사회에 있어서는 바람직한 모습이 아니기에 그에 대한 거부로 이어지게 된다. 

그리고 저정도 해먹는거 가지고 라는 발언과 정치에 대한 무관심 역시 우리의 가정생활을 생각해본다면 쉽게 이해될 수 있다.  즉 당신은 당신의 아버지가 비자금을 좀 챙긴다고 비난할 수 있겠는가??  그리고 아버지의 일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고 이래라 저래라 할 수 있겠는가?? 
결국 이런 가부장적 사회의 지배를 받고 있는 우리의 삶 그 자체가 정치에 대한 불신 그리고 부패를 불러왔다고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아버지 부시와 대랑살상무기
자 저러한 일련의 이론을 근거로 하여 생각해보자.  당시 많은 미국인들은 저 프레임에 완벽하게 갇혀버리게 된다.  테러라는 어마어마한 전대미문의 미국 본토 공격앞에서 그들은 이성을 잃었고 거기에 자유라는 가치관이 급속이 팽창하면서 애국심을 극도로 자극하게 된다.  상실의 고통과 애국심 앞에서 자유라는 가치가 부여되니 전쟁이 가져다올 참혹함따위는 그다지 중요해지지 않는다.  그런데다 이미 미국인들은 전쟁 자체가 게임이 되어버린지 오래이다. 

처음엔 그들을 위해 눈물도 흘리지만 어느순간을 넘어서면 무감각해진다.  일단 나의 일이 아닌데다 전투장면들은 결국 화면속에서의 이미지에 불과하기에 현실을 이해할리도 없다.  그러다 어느 순간 이미지가 현실을 대체하기 시작한다.  사실을 통해 사고한다기보다는 이미지를 통해 사고한다고 해야 할까.  이미지를 통해 사고를 하기에 전쟁에 대한 갖가지 정당론이 펼쳐지기 시작한다.  진보를 위한 희생이라는 논리인데 글쎄..  과연 자신들이 그 현장에 단 1분이라도 있었다면 그런말이 나올련지 그리고 그 진보를 위한 희생은 누가 하는 것이며 그 결정은 희생자가 해야 하는 것이 아닐련지.

아무튼 상황이 이렇게 돌아가자 부시대통령은 가부장적 사회에서의 아버지의 자리에 정확히 매김하게 된다.  순식간에 그의 지지율은 급상승하게 되고 사람들은 그의 행위에 큰 의문을 던지지 않는다.  애국심이라는 단어는 가정의 안위로 치환되어 미국 전체의 안녕을 위해 모든 것을 감안하고 참아내기에 이른다.  이라크라고 불리는 티비속이 어느 나라에 있다고 하는 대량살상 무기를 제거하여야 미국이라는 가정이 안정되고 위험에서 벗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일단 믿고 들어가긴 했는데 어느곳에도 대량살상무기는 존재하지 않는다. 

분명히 대량 살상 무기를 찾으로 들어갔는데 그것이 존재하지 않다는 것이다.  바로 이순간 가정의 안녕은 자유라는 가치관으로 다시금 치환된다.  즉 대량살상무기라는 기표는 자유와 평화라는 기표로 치환되면서 우리에게 새롭게 제시되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대량살상무기의 존재 자체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그리고 국가의 입장에서도 이는 어차피 중요하지 않은 문제이다.  어차피 다양하게 치환되어 제시되는 기표 밑에 흐르는 진짜 기의 즉 전쟁의 진정한 목적만 이루면 되기때문이다. 

결국 수많은 미국인들은 끊임없이 치환되어 제시되는 수많은 기표들에 속아 어처구니 없느 전쟁을 수행하였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뒤늦게 깨달아봤자 이미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나간 상황이고 그속에 자신들의 가족과 이웃도 존재한다는 사실을 깨달았을땐 이미 그들은 이세상 사람이 아니다.


마무리
감독이 폴 그린그래스라는 감독인데 본 시리즈의 2,3탄으로 널리 알려져있는 감독이다.  하지만 이 감독의 진짜 수작은 블러드 선데이에 있는바 어느 정도 맥을 같이 하는 영화라고 볼 수 있을듯하다.  이 감독에 대해서는 좀더 두고 봐야 하지 않을까 생각된다.  작품의 편차가 조금 느껴진다고 해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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