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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플라이스(2009), 파편화된 것들의 조합체와 변화 본문

영 화/00's 영화

스플라이스(2009), 파편화된 것들의 조합체와 변화

유쾌한 인문학 2010. 9. 1. 15: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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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독은 빈센조 나탈리.  감독이름은 몰라도 영화 큐브는 다들 아실테니 뭐 더이상 언급할 필요는 없겠다.  사실 큐브라는 정말 눈부신 영화를 만든 사람치고는 그뒤 작품 활동이 거의 없다고 봐도 무방할정도로 뜸하다.  큐브가 97년도에 나왔고 중간에 티비 드라마 같은거 하나 만들고 싸이버와 낫씽을 만들고 여기까지 오게 된다.  낫씽은 한국에선 개봉하지 않았다.  아무튼 이 영화 작년부터 얘기를 들은 것 같다.  개인적으로 영화 얘기는 전부 마님을 통해서 듣게 되는데 이걸 꼭 봐야 한다고 꽤나 강조하더라.  

하지만 너무나도 안타깝게도 한국에선 완전 망한것으로 판단된다.  참 의외인데 성공할줄 알았는데 이렇게까지 처절하게 망해갈줄이야.  하긴 생각해보니 큐브도 그렇게 성공했다고 보긴 힘든 영화들 아닌가?  아무튼 개봉한지 열흘만에 전국에서 막을 내릴 것으로 판단되는 안타까운 영화이다.  이 작품은 어떤면에서 보면 큐브와 아주 유사한 영화인데 큐브가 가지고 있는 구조안에서의 사라진 주체와 그 탈출가능성에 대한 제시가 조금 확장된 것으로 볼 수 있겠다.  




파편화된 것들의 조합체
일단 극중 주인공인 드렌이라는 생물체는 생명공학으로 탄생하게 되는 생명체인데 처음에는 단순히 각종 동물들의 유전자를 조합하여 이상한 생명체를 만들다가 호기심에 인간 유전자까지 조합하여 나오게 되는 생명체이다.  즉 각 생명체의 부분을 조합하여 구성한 생명체라고 볼 수 있겠는데 이러한 구성이라는 측면이 대단히 흥미로운 부분이다.  구성된다라는 동사는 능동과 수동 두가지 양상으로 바라볼 수 있다.  즉 주체라는 측면에서 바라보았을때 내가 스스로 구성을 하느냐?  내가 구성을 당하느냐?  바로 이부분이다.  

사실 드렌의 탄생과 인간의 탄생은 크게 다를바가 없다.  드렌이라는 생명체가 연구자들에 의해서 각기 다른 유전자의 조합체로서 구성된 생명체라면, 인간은 유전적으로는 동일하겠지만 다른 측면 즉 인간을 둘러싼 문화나 사회적 환경에 의해서 구성되는 생명체라고 볼 수 있겠다.  흔히 우리가 하는 말중 하나인 사회적 생물로서의 인간이라는 것은 단순하게는 홀로 살아갈 수 없다는 의미에서 더 크게는 그 사회를 이루고 있는 다양한 문화적, 관습적 측면들이 언어라는 것을 통하여 인간을 구성시킨다고 볼 수 있게 된다.  그리고 이러한 인간주체성의 확립은 인간이 언어라는 것을 습득하면서 직접적으로 제시되게 된다.

이러한 측면을 영화에서는 단어퍼즐이라는 측면으로 표현하게 된다.  드렌은 말을 할 수 없다.  물론 수컷이 된 이후에 딱 한마디 해주시긴 하지만 암컷일때는 단어 퍼즐을 가지고 의사소통을 하게 된다.  수컷이 되어 말을 하는건 단순하게 영화내에서 표면적으로 드러나는 부분만 본다면 드렌은 그냥 새롭게 진화를 해서 말을 할 수 있는 기관이 생겨난 것으로 볼 수 있겠지만 파편화된 유전자들의 조합과 그것들의 발현과정 그리고 언어습득 과정이 하나로 묶이면서 드렌의 성장 과정 자체가 인간의 형성과정을 정확히 드러내게 된다.  

중요한건 사람이건 드렌이건 최초의 경계설정.  즉 나와 외부를 정확히 가르는 경계설정을 통해 나라는 존재의 개별성을 획득하게 되는 최초의 단계는 반드시 수동적일 수 밖에 없다는 점이다.  둘러싸고 있는 구조안에서 철저하게 만들어지고 구성되게 되는 것이 최초의 경계설정이 가지고 있는 본질적 한계이다.  금기시되고 한정지워지는건 그 사회의 문화적 측면이다.  그리고 언어 습득 과정을 통해서 깨닫게 되는 한가지 사실은 언어를 통해 욕구를 표현할 수 있다는 것이며 이렇게 표현된 욕망은 아무리 즉각적으로 만족이 이루어진다고 하더라도 틈을 가질 수 밖에 없는 본질적 한계가 존재하게 된다.  그렇기에 인간은 끊임없이 욕망한다.  절대 가질 수 없는 것을 말이다.  

그렇다면 과연 존재는 영원히 구성되어지기만 하는 그런 수동적 존재로서 사라져버린 주체에 불과한 것일까?  그렇다고 보기는 힘든 것이 구조 자체가 완벽하게 정지되고 폐쇄적인 것으로 보긴 힘들기 때문이다.  어느정도의 개방성은 분명히 가지고 있는 것이고 그안에서의 약간의 변화상과 지속적인 관계맺기를 통해 과정안에 놓이게 된다.  그렇기에 주체는 한순간도 완성되지 않게 된다.  지속적으로 구성되는 구성되고 있는 주체성이라고 볼 수 있다.  




드렌의 성장과정과 변화
여기서 눈여겨 볼 부분은 드렌과 인간의 궁극적 차이점이다.  일단 둘다 태어난 존재이기에 최초의 경계설정과 언어습득이라는 일련의 동일한 과정을 거치게 되지만 드렌은 인간과 본질적인 차이점을 하나 가지고 있으니 드렌에게는 모태와의 일치화라는 경험을 가진적이 없다는 것이다.  인공자궁에서 태어난데다 엄마로부터 절대적 사랑을 느껴본적도 없다.  오직 드렌은 철저하게 자신을 만들어낸 두 연구자들과의 관계맺기만 존재할뿐 그 이외의 사회적 노출은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  이러한 무경험의 차이가 드렌이 보여주는 변화적 양상과 밀접한 관계가 있게 된다.

드렌은 철저하게 실험체로서 창조된 실험물에 불과하다.  처음엔 조금만 해보다가 폐기하려고 했는데 어쩌다보니 저렇게 키워버린 그런 존재라고나 할까.  그렇기에 드렌은 크게 세번의 변화과정을 겪게 된다.  정확히 말하자면 드렌을 바라보는 타자의 시선의 변화라고 할 수 있겠다.  처음에는 실험체로서의 드렌 그 다음에는 딸과 같은 느낌의 드렌 세번째는 성적 대상자로서의 드렌이다.  실험체로서의 드렌은 인공자궁에서 태어나게 되는데 태어난 이후에서 무슨 동물과 비슷한 취급을 받게 된다.  그렇기에 드렌의 입장에서는 모성의 경험, 모태화의 일치감 따위를 경험해본적이 없게 된다.

그러다 드렌이 성장하게 되자 짐승의 모습에서 사람과 비슷한 모습을 보이게 되고 이때부터 사람옷을 입힌채 사람처럼 대하게 되는데 이때의 드렌은 어떤 자식같은 느낌 또는 애완동물 같은 그런 느낌으로 취급하게 된다.  즉 외부에서 드렌을 바라보는 시선이 바뀐 것이다.  어느정도 아이와 비슷한 양상을 보여주기에 두연구자는 단어 퍼즐 놀이따위를 통해 지능 실험을 행하지만 드렌의 입장에서는 그 모든 것이 일종의 자극이고 습득 과정이 된다.  그러다 드렌은 우연히 자신을 만든 두 남녀의 성관계 장면을 목격하게 된다.

여기에서 중요한건 타자의 시선의 변화이다.  드렌도 결국 인간의 유전자를 가지고 있는 존재이기에 인간과 유사한 형태의 성장과정을 거치려고 한다.  지속적으로 바깥으로 나가려고 하고 따분하다고 말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녀는 뭔가 실험체도 아닌 것이 동물도 아닌 것이 즉 드렌을 대하는 어떤 태도가 아주 불분명하다는 점이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중요한 지점은 그녀는 모체와의 일치화 과정과 그것의 분리를 경험해본적이 없다는 점이다.  즉 가졌다는 사실을 알기도 전에 잃어버린 것이라고 해야 할까.  

결국 드렌은 인간과 같은 경계형성에 실패하게 된다.  그렇다고 해서 일치화된 경험을 가지고 있는 것도 아니다.  오직 파편화된 것들의 조합체로서의 드렌만이 존재할뿐이다.  그렇기에 언어에 노출되고 욕구를 표출할수 있긴 하지만 사회적 구성체로서의 주체성은 확립하지 못하게 되고 따라서 대단히 불안하고 공격적인 양상을 보여주게 된다.  고양이를 통해서 채워보려해보지만 결국 죽여버리고 만다.  더욱이 그녀는 어린시절보았던 성관계 장면을 억압시키지도 못한다.  사회적 구성체로서의 드렌이 형성되지 않았기에 금기시되는 것의 억압 자체가 존재하지 않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그녀는 극중 남자주인공인 어떤면에서 보면 자신의 아버지라고 볼 수 있는 자를 욕망하게 되고 급기야 둘은 성관계를 맺게 된다.  실로 대단히 충격적인 장면이다.  더 흥미로운건 그뒤에 드렌은 갑자기 성별이 변하면서 수컷으로 바뀐다는 점이다.  이부분때문에 영화를 보게 되었다고 할 정도로 대단히 충격적인 부분이다.  영화 내에서 성별이 바뀐 이유는 그냥 파충류의 유전자가 어떻게 발현되서 바뀌는 것으로 설정되어 있는데 성별이 바뀌게 되면 정말 극단적으로 공격적인 성향과 같은 성별의 인간에 대한 분노와 파괴 그리고 생식본능만 남게 되는 것으로 판단된다.

처음부터 가지지못했던 상실감.  이것은 물자체에 대한 상실감이라고 볼 수 있다.  뭔지 모르겠지만 한번도 경험도 못해봤지만 뭔가 느낄 수 있는 어떤 상실감.  그것이 바로 암컷으로서의 드렌이 지속적으로 감당해야할 몫이다.  어떻게 채워야 할까?  그것조차 알 수 없다.  그것이 뭔지 모르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인간이 창조해낸 동물도 아닌 사람도 아닌 애매한 존재인 드렌이 가질 수 밖에 없는 안타까움이다.  그렇기에 언어는 배우되 말을 할 수 없고 오직 파편화된 단어 낱말 퍼즐로만 약간의 의사소통이 가능해질뿐이다.

그러다 드렌은 섹스를 행하게 되는데 그만 여자 주인공인 엘사에게 들키고 만다.  엘사의 입장에선 정말 충격적인 장면일터.  남자는 엘사를 뒤쫓아 가게 되고 결국 드렌은 홀로 남겨지게 된다.  뭐랄까.  어린시절에 우연히 본 성관계 장면을 보고 그대로 행해보았지만 드렌은 결국 아무것도 충족시키지 못한채 홀로 남게 된다.  홀로 남은 드렌에게서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는 영화에선 나오진 않지만 결국 그녀는 물속에서 잠긴채 일시적인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물론 이 죽음은 표면적으로는 성이 바뀌기 위한 과정이지만 말이다.




그로테스크적 표현기법
드렌의 표현 양식 또한 아주 흥미롭게 바라볼 부분이다.  전형적인 그로테스크 양식으로서 드렌을 표현하게 된다.  다리도 이상하고 온몸에서 날개가 나오질 않나.  이러한 영화에서의 그로테스크적 이미지는 팀버튼 영화에서 자주 확인할 수 있는 부분이다.  그로테스크가 공유하는 하나의 생각이라면 급격한 시대변화와 그속에서 나타나는 가치관의 혼란 그리고 인간에 대한 억압과 비명에 대한 관심과 불안, 긴장, 반항적인 측면들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바로 이 왜곡과 원시주의라는 측면에서 그로테스크가 발전하게 되는바 카이저가 규정한 그로테스크의 본질은 첫째 낯설어진 세계에 대한 표현.  둘째 소외된 세계의 표현.  셋째 부조리한 것과의 유희.  넷째 악마적 요소의 통제 정도로 나열할 수 있겠으며 필립 톰슨이 규정한 그로테스크는 현실과 비현실의 뒤얽힘을 전제로 한 갈등, 충돌, 이질적인 것들의 혼합 그리고 본질적으로 다른 것들의 융화가 기본이 된다고 한다.  

무엇이 되었건 드렌을 이루고 있는 그로테스크한 표현 양식은 결국 드렌이 가질 수 밖에 없는 존재적 측면에 대한 표현으로서 아주 적절하게 사용되었다고 볼 수 있겠다.  과학기술의 발전에서 오는 가치관의 혼란과 드렌 자체가 가지고 있는 불안과 멜랑콜리한 면들을 드렌을 표현하는 몸뚱아리 자체를 통해서 드러낸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마무리
대단히 흥미로운 영화이지만 많은 사람들이 수간물 또는 근친상간 정도로 정리하고 비난을 해대고 있는 형국이다.  모르겠다.  겉으로는 유전공학과 관련된 도덕성 문제를 들고 나온 영화이지만 그 내면은 상당히 복잡다단하게 진행되는 작품이라고 볼 수 있겠다.  그런 측면을 감안하여 작품을 보는게 좋지 않을까.  뭐 그런 아쉬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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