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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피아니스트(2002), 음악의 치유와 폭력의 자기조직화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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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아니스트(The Pianist)
로만 폴란스키 감독의 16번째 영화이다. 이 영화는 2차 대전 당시 유태계 폴란드인 피아니스트에게 닥친 상황을 담담하게 그려낸 작품이다. 상도 쓸어 담게 되는데 55회 칸에서 황금종려상, 03년도 미국 아카데미에서 감독상과 각색상 남우주연상 뭐 이정도? 그외에도 아주 많은 상들을 획득하게 된다. 당시 아카데미에서 이 작품을 대신에 작품상을 받은 영화가 시카고이다.
사실 로만 감독이 이 주제를 가지고 2002년에 이르러서야 작품을 만들었다는 것이 실로 대단히 놀랍다. 이미 전전 작품인 진실에서 비슷한 주제를 가지고 오긴 했지만 결국 변형일뿐이고 직접적으로 건드리는게 중요한바 그의 인생 만년에 이르러서야 그것이 이루어진것이다. 이유야 본인만 아는거겠지만 아마도 어린시절의 경험을 이제서야 직시할 수 있게 되었다가 정답이 아닐까 판단된다. 진짜 고통을 당한 사람은 그 고통을 함부로 얘기하지 못하는 법이다.
네이버 영화에 가면 이에 대해 자세한 언급이 있는데 그대로 긁어와 보겠다. "유태계 폴란드인을 부모로 파리에서 태어나 4세 때 폴란드의 크라코로 이주했는데 나치가 폴란드를 침공하면서 그의 가족은 풍비박산이 났다. 어머니는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사망했고 8세된 폴란스키는 크라코의 유태인 게토를 탈출, 전국을 전전했다. 그는 때론 독일군의 사격 연습 목표가 되면서 죽음의 공포를 생생히 경험하기도 했다."
반유대주의
사람이라는 동물은 어느 누구나 똑같다. 두개의 눈을 가지고 두개의 팔과 다리를 가지고 있다. 생식하는 방법도 동일하며 먹고 자고 하는 것도 다르지 않다. 이렇듯 태어날때부터 동등하게 벌거벗은채 태어난 인간은 그 후 다양한 기준에 의해서 인간을 구별짓게 된다. 작게는 가족에서 크게는 국가까지 그 방법은 다양하다. 결국 인간을 구별짓는 것은 어떻게 무리짓는가. 즉 집단 형성의 기준이라는 결론이 내려진다. 그리고 하나의 집단과 그외의 모든 집단은 배타적 관계를 이루게 되는바 바로 이 지점에서 유대인의 상징성이 도출된다. 즉 인간이라는 집단과 유대인이라는 상징적 인간집단의 '다름'이다.
당시 유대인을 대하는 인간의 태도는 뚜렷하게 대조되는 두가지로 표현된다. 하나는 돈이나 아는 벌레와 같은 아주 경멸의 대상으로서의 태도이며, 다른 한가지는 유대인의 돈과 지식을 이용하기 위해서 행하는 은근한 경외로서의 태도이다. 이러한 경외로서의 태도는 유대인을 말살하기 위한 태도를 정당화시켜주는 요소로서 작용하게 되며, 이런 일련의 과정속에서 전체주의적 요소가 나타나게 된다. 우리가 꿈꾸는 유토피아적 환상을 유지하기위한 필수적인 요소는 소극적 환상의 개념적 요소가 필요하게 되는바 이것이 바로 타자에 대한 과장으로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
즉 타자를 소외시키는 과정은 타자의 권력에 대한 과장이 동시에 일어나는 이중과정이다.쉽게 말해보자면 사실 유대인이라는 집단이 전부다 부자일리도 만무할테고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전형적인 유대인이라는 인간상 역시 존재하지 않은 허상의 것에 불과하다. 따지고 보면 그러한 전형성은 굳이 갖다붙이면 모든 인간들에게서 발견할 수 있는 보편소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결국 이는 그들을 개념지은 인간의 상상적 가정이라고 볼 수 있다. 즉 구조의 문제이지 개인의 문제는 아니라는 말이다. 그럼에도 유대인을 그렇게 개념짓는 것은 내부적 억압의 외부적 돌림을 뜻하게 된다. 이는 인간과 비인간으로서의 유대인의 대립 그리고 더 넘어 "우리안의 다름"이라는 개념을 정확히 표현할 수 있는 상징적 징표가 되는 것이다.
폭력의 자기조직화
이 영화는 폭력들을 아주 다양한 방법으로 제시하는 작품으로 볼 수 있겠다. 폭력이라고 하는 것은 단순히 폭행 등에서 확인 할 수 있는 아주 좁은 의미에서 사회 구성원이 보여주는 폭력인 넓은 의미의 폭력까지 다양한 형태로 나타나게 된다. 이러한 폭력들을 피아니스트의 입장에서 제시하게 되는 것이 바로 본 작품의 특징이다. 본 영화는 2차대전 개전부터 시작하여 2차 대전이 끝나는 시점까지 이어나가게 된다. 그러다보니 러닝타임이 조금 길어지는데 사실 이 러닝타임도 부족한게 사실이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할까? 간단하다. 극의 큰 흐름만 살려둔채 쓸데 없는 부분을 다 삭제하고 이벤트 위주로 전개해 나가면 해결이 가능하다. 그렇기에 이 영화에서 지속적으로 날짜 같은 것이 등장하게 되는 것이다.
일단 기본적으로 유태계 폴란드인들이 당한 고통을 중심에 놓게 되는데 그 과정에서 다양한 인물이 등장하게 된다. 같은 폴란드인이면서 앞잡이 노릇을 하는 사람들도 보이고 어떤이는 삶과 죽음의 경계에 놓인 그들을 놓고 사기를 치기도 한다. 독일인들이 보여주는 폭력앞에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침묵하게 되고 어떤이는 동조하기까지 한다. 극한의 배고픔 앞에서 인간이 짐승이 되기도 하고 독일인의 만행에 맞서 저항하는 이들도 생겨난다. 특히 인상 깊은건 영화의 마지막에 이르러 등장하게 되는 독일 장교이다. 숨어지내는 피아니스트를 발견했을때 그의 직업을 묻게 되고 피아니스트라고 대답하자 연주를 해보라고 한다. 연주를 들은 그는 감동하여 그를 살려주게 된다.
이렇듯 어떤 상황이 제시되었을때 그것에 반응하는 인간의 행동양상은 정말 다양하게 나타나게 된다. 사실 좀 더 정확히 표현하자면 각기 다른 개인이 하나의 상황을 각기 다르게 받아들이기에 각기 다른 행동 양식이 나온다고 볼 수 있겠다. 이러한 수많은 개인은 자신의 주변에 이런 저런 영향을 끼치게 된다. 즉 위와 같은 그림의 형태로 각 개인은 자신 주변의 사람들에게 주고 받음이 가능해진다는 것이다. 그것이 넓게 펼쳐지면 저런 형태의 그림의 그려지게 되는데 중요한건 저 안에서도 몇가지 흐름을 발견할 수 있게 되고 그 일련의 흐름은 그 주변을 둘러싼 인간들을 규정짓게 된다. 재미있는건 이때 등장하는 폭력들 그 자체에 존재한다. 무슨말인고 하니 분명 존재하지 않던 것들인데 각 개인의 주고받음의 과정속에서 우리도 모르는사이 폭력이 슬며시 생성된다는 것이다. 이걸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나의 견해로는 이러한 현상도 자기-조직화라는 이론으로 어느 정도 설명이 가능하지 않은가? 판단된다.
흔히 인공지능이라고 하는 것의 시발점은 자기-조직화라는 이론에서 비롯된다. 물리학적 실체 또는 생물학적 실체를 불문하고 내부작용원인에 따라서 일정패턴을 구성하는 과정과 결과를 의미하는 것으로서 내부 구성요소들 사이의 상호작용이 하나의 망을 형성하면서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되는 것이다. 결국 자기조직화의 핵심은 자립적 개체와 이들간의 상호작용 그리고 그 과정에서 나타나는 질서혹은 패턴이다. 이를 잘 확인시켜주는 예로 베나르 불안정성의 물리현상을 들 수 있다. 물을 천천히 가열하면 일종의 열흐름을 나타내지만 아래위의 온도차가 임계치에 도달하면 불안정한 상태고 변하고 그때 벌집모양의 육각형이 드러나게 된다. 흔히 카오스 상태에서 등장하는 육각형 모양과 동일한 것이다. 중요한 것은 이러한 자기조직화는 물리학 생물학을 불문하기에 인간에게도 적용이 되는 부분이다. 즉 인간은 엄청나게 많은 단일 세포들의 조합인바 이 세포들은 그 자체로서 하나의 개체성을 가지게 되고 인간의 내부구성요소인 세포들의 상호작용으로 하나의 조직화 능력을 가지게 되어 인간이 유지된다는 것이다.
위의 설명에서 가장 중요한 핵심은 자립적 개체와 상호작용 그리고 질서이다. 결국 위의 그림에서 볼 수 있듯 개개인을 자립적 개체로 보고 그 주변에 주고 받는 상호작용속에서 일정한 패턴이 나타나게 되는바 그 패턴이 폭력이라는 형태로 등장하게 된다는 점이다. 중요한건 이 과정에서 등장하는 메커니즘인데 확인이 가능할지 어떨지. 상당히 복잡하게 전개되고 등장하는 폭력의 양상들도 제각각이기 때문에 어떠한 형태로 폭력이 자생하는지 간단한 문제는 아니다. 그러니 세상에서 젤 복잡한게 인간 아니겠는가? 인간을 이해할 수 있다면 그것은 세상을 가지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어쨌든 자생하는 폭력은 그자체가 일정한 범위를 그 폭력으로 물들이게 된다. 그 범위안에 있는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사고가 그쪽으로 흘러가게 되고 기존의 생각과 가치관에 대해서는 점점 무감각해지게 된다. 쉽게 말해 길들여진다고 보면 될 것이다.
이러한 우울한 상황에서 로만 감독은 음악이라는 매체를 이용하여 해결책을 제시하려고 한다. 영화는 음악이라는 특정 예술을 사용하였지만 비단 음악이어야할 필요는 없다. 중요한건 자신을 둘러싼 어떤 흐름을 깰 수 있는 힘이고, 그 힘이 꼭 음악에서 나와야 한다는 보장은 없다는 것이다. 다양한 형태로 등장할 수 있겠으며 그것들은 보편성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그게 뭘까? 바로 예술이다. 결국 음악이라는 것은 예술 그 자체로 치환될 수 있다는 점을 지적하고 싶다. 그럼 왜 음악을 선택했을까? 그야 당연히 드라마를 완성하기에 가장 좋은 매체이니깐. 여기에 한가지를 더 말해보자면 음악 자체가 예술 중에서 가장 큰 힘을 가졌기 때문이다. 짧은 시간안에 수많은 사람의 마음을 뒤흔들어놓기에 음악만큼 좋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마무리
개인적인 입장에서 이러한 반유대주의 영화와 관련된 글을 상당히 많이 쓰다보니 더이상 할말이 없어졌다. 기존에 쓰여진 글들은 홀로코스트에 대한 기존의 이론을 확인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하지만 곰곰히 생각을 하다보니 이 양상 자체가 자기-조직화와 매우 흡사하다는 것에 생각이 닿았는데 내가 아는한 이부분에 대해서 연구한 학자는 없다. 누군가 나에게 연구비를 준다면 한번 해보겠는데 아쉬운 부분이다. 하긴 뭐 따지고 보면 Structuralism 자체가 비슷한 아이디어의 시작이니 아주 없다고 볼 수도 없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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