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image or real
테스(1979), 남성적 보수성과 폭력의 희생자 본문
반응형
테스(Tess)
로만 폴란스키 감독의 10번째 영화이다. 테스라는 제목에서 토마스 하디를 떠올리는 분들이 많을텐데 정확히 짚으신거다. 이 작품은 토마스 하디의 테스를 영화로 만든 작품이다. 로만 폴란스키 감독의 특징이라고도 할 수 있는데 대부분의 작품들이 기존의 원작을 토대로 하여 만들어지는 경우가 많다. 사실 개인적으로 시대극을 싫어하는 성격상 로만 폴란스키 전작을 하면서 테스는 넘기 힘든 벽처럼 느껴졌었다. 너무 보기 싫은 마음이랄까? 그래도 시작한 일은 진행을 해야 하니 억지로 보았는데 이게 왠걸? 꽤나 흥미롭게 볼 수 있는 영화였다. 테스를 보다보니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작품이 마틴 스콜세지의 순수의 시대였다. 사실 두 작품은 그 어떤 공통점도 찾아볼 수 없는 아주 동떨어진 작품인데 왠지 분위기나 느낌 같은 것이 묘하게 비슷하게 느껴졌다.
구도와 빛의 사용
일단 외관만 보았을때 눈에 띄는건 기가 막히게 아름다운 영상들이다. 자연주의 회화에 기반을 둔듯한 마치 모든 장면들이 그 자체로서 풍경화가 되어버리는 기가 막힌 구도와 아름다움을 보여준다. 특히 몇몇 장면들은 밀레의 작품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구도를 변형하여 사용하기도 한다. 또 한가지 인상 깊은건 빛의 사용 방법이다. 단순히 바깥에서 찍었으니 빛이 드러나는것 아니냐? 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그런 수준이 아니다. 이 작품에서 드러나는 빛 역시 밀레의 작품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그런 것인데 빛의 효과를 통해서 그 공간 내에 존재하는 인물의 감정을 그대로 드러나는 방법론이다.
사실 이런 작품은 거의 보기가 힘들다. 일단 로만 감독 작품을 볼때 항상 염두에 둬야할 부분은 공간이 그 캐릭터를 규정한다는 것이다. 즉 공간 자체가 캐릭터의 감정을 드러내거나 전체적인 성향을 결정짓게 된다. 이것이 바로 로만 감독의 강점이다. 그런데 테스에서는 공간이 자연으로 오픈되어 버린다. 즉 공간이 캐릭터를 규정하기 위해서는 그 공간 자체가 어느 정도 한정되어야 하는데 테스는 대자연의 품으로 들어가버리니 공간이 캐릭터를 규정하기 매우 힘들어진다. 이때 로만 감독의 선택이 바로 빛이다.
영화를 안보신분들에게 이걸 말로 설명한다는 것이 대단히 어려운데 일단 위의 그림을 보자. 저 그림은 밀레의 만종이다. 해질녘의 들판에 있는 농민을 그린 그림인데 저 그림을 보신 분들은 단순히 잘그렸다가 아니라 저 그림 내에 존재하는 인물들이 가지는 어떤 감정을 느끼게 된다. 그것이 가능한 이유는 뒷 배경에 존재하는 빛이 주된 원인이다. 넓은 공간이지만 저 빛이 감정을 규정하게 되는 것이다. 그렇기에 많은 사람들이 만종을 보고 감동을 느끼는 것이다. 영화 테스에서도 저런 장면들이 꽤나 많이 등장하게 된다.
일단 몇장면만 살펴보자면 위의 스샷 1번은 산속에서 겁탈당하는 장면이다. 어두운 산속과 짙게 깔린 빛이 테스의 상황을 잘 표현해주고 있다. 2번은 겁탈 당한 이후 그 집을 떠나는 장면인데 외길과 저뒤쪽에 깔린 안개가 역시 테스의 상태를 잘 표현하고 있다. 3번은 아기에게 젓을 먹이는 장면인데 그 뒤에 깔린 구름이 인상 깊다. 4번은 엔젤을 만나게 되는 장면인데 어두워서 잘 안보이는데 길이 나무로 둘러쌓여 그늘이 진 상태인다. 마치 터널처럼 보이는데 그 끝에 있는 빛과 그곳에서 등장하는 엔젤의 모습을 통해 테스의 앞으로의 상황을 암시하게 된다. 5번은 엔젤에게 버림받고 친정으로 돌아오는 장면인데 짙게 까린 안개가 모든 상황을 표현한다.
남성적 보수성과 폭력의 희생자
사실 토마스 하디의 테스를 보지 못한지라 두 작품이 완벽하게 동일한 것인지 아닌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두 작품 모두 내세우는 핵심적 주제는 동일 할 것으로 보이는바 그것은 바로 여성에 대한 억압과 폭력의 희생자로서의 테스가 아니겠는가? 테스는 정말 철저하게 희생양으로서 등장하게 된다. 자신의 욕망을 위해 딸을 부자집으로 보내버린 아버지에서부터 시작된 폭력은 귀족집안의 아들의 겁탈과 버려짐 그 이후 마을 사람들 전체가 보여주는 폭력도 상당하다. 특히 인상 깊은 부분은 종교가 보여주는 폭력이다. 아이가 죽었을때 장례를 치뤄달라는 테스의 요청을 신부는 매몰차게 외면하게 된다.
사실 뭐 이런식의 폭력이야 흔하게 볼 수 있는 것이고 현대에도 딱히 달라진건 없다. 무슨말인고 하니 현대에 들어 여성 인권이 아무리 성장하였다 하더라도 그건 특정 계층에 한정된 이야기일뿐이라는 것이다. 즉 중산층 이상의 가정에서 태어나 대도시에서 성장하여 일정 수준이상의 교육을 받은 여성. 딱 여기까지가 신장된 여성인권의 수혜자이다. 이 범위에서 벗어나는 여성은 엄청난 폭력 앞에 노출된채 그 어떤 보호도 받지 못하게 된다. 실제로 집안이 가난하거나 높은 수준의 교육을 받지 못한 여성들은 21세기 현재에도 여전히 테스와 비슷한 취급을 받으며 살아가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심지어 저 범위안에 들어간 여성일지라도 테스와 비슷한 일을 당하게 된다면 그 즉시 별볼일 없는 여자가 되면서 엄청 폭력앞에 놓이게 된다.
더 재미있는 것은 이러한 불편한 현실을 철저하게 외면해버리는 현실이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자기 눈앞에 보이지 않으니 그런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해버리는 것이다. 갑자기 떠오르는 것이 하나 있는데 한미 FTA가 큰 이슈가 되었을때 방송에서는 멕시코의 현실을 적나라하게 보여주었고 그중에서 가장 인상 깊은 것은 바로 길건너에 굶어죽어가는 사람들이 있지만 멕시코 부유층들은 진심으로 그들의 존재를 알지 못하고 있는 장면이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그 장면을 보고 비난을 해댔었는데 난 되묻고 싶은바 한국이라고 다를거라 생각하시나? 이글을 보는 대부분은 이나라의 지랄같은 현실을 눈꼽만큼도 이해 못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좋은 환경이 좋은 교육을 보장한다면 그 좋은 교육을 받은 사람의 주변에 이 사회 내의 최약자들이 있을리도 만무하고 그들을 보았을리도 만무하다. 바로 이지점에서 사회 전체적인 몰이해와 모순 그리고 격차가 벌어지는 것이다.
더 문제인 것은 폭력에 대한 무감각이다. 모든 것을 사랑하라고 가르치고 있는 기독교라는 종교마저도 이 폭력앞에 무감각하다. 폭력 자체가 그사회의 근간을 이루기에 모든 사람들이 폭력에 중독되어버린 현상이다. 사회 전체가 폭력에 중독되면 그 희생자도 대단히 수동적인 양상을 보여주게 된다. 즉 자신을 향한 폭력이 잘못이 아니라 내가 문제라는 식으로 길들여진다는 것이다. 그러니 테스의 운명이 비극적일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이 부분 역시 현대 사회와 크게 다를바가 없는 부분이다. 우리 사회 전반을 지배하고 있는 온갖 불합리와 폭력에 대해서 얼마나 자연스럽게 순응하고 있는가? 이에 대해서 지적하는 사람은 나약한 인간일뿐이며 정신력이 약한 인간일뿐이다. 정말 무시무시한 폭력아닌가?
중요한 것은 강한척 해대는 저러한 생각 자체가 이미 폭력앞에 철저하게 굴복하는 인간들이기에 보여줄 수 있는 태도라는 점이다. 폭력앞에 길들여지고 폭력을 두려워하기에 그 폭력의 앞잡이가 되어버리는 현상이다. 결국 폭력을 행사하는 인간들이야 말로 가장 나약한 인간이다. 테스라는 작품이 명작의 반열에 오른 것은 바로 이 폭력에 대해서 지독하게 성찰할 수 있는 길을 열어주기 때문이다. 저런 곳에서 어떻게 살지? 라는 생각이 들때 생각은 한걸음 더 나아가 지금도 다를바가 없잖아? 로 이어지게 된다. 테스가 고전인 이유는 시대를 불문하는 보편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며 그 보편성은 바로 폭력 그 자체에 존재하게 되는 것이다. 충분히 이해하셨을리라 믿는다.
마무리
이 영화를 보고 여성의 순결이니 뭐니 하는 헛소리는 다 집어치워라. 한 사회가 어떠한 폭력을 행사하고 그 폭력앞에서 한 인간이 어떻게 망가져가는지 그것을 눈여겨 보아야 할 것이다. 그리고 과연 21세기 현대 한국 사회가 저 영화와 뭐가 다른지에 대해서도 진지하게 고민해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다시금 강조 하고 싶은 말은 우리 사회는 정말 미친 폭력들로 휩쌓인 사회라는 점이고 그것을 직시해야 한다는 것이다. 테스를 강간한 영화속의 사회를 욕하고 싶은가? 미안하지만 이 사회는 영화보다 더 지독하다. 여러분들의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폭력을 외면하지 마시라. 당장 눈앞에 없다고 해서 존재하지 않는 것이 아니다. 끝까지 외면한다면 그 폭력은 결국 당신의 목을 죄어올 수 밖에 없다.
내용을 간단히 말해보자면 가난한 농민인 테스와 그의 부모님이 어느 마을에서 살고 있다. 어느날 테스의 아버지가 자신이 귀족 출신이라는 비밀을 알게되었다면서 그 집안에 가서 자신들이 친척임을 알리라고 테스를 보내게 된다. 그곳에서 귀족아들인 알렉을 만나게 되고 그에 의해 그 집안에서 일을 하게 된다. 테스에게 반한 알렉은 지속적으로 구애를 하다 결국 어느 숲에서 그녀를 겁탈하게 되고 그녀는 그 집을 떠나게 된다. 딸을 낳게 된 테스는 마을에서 손가락질 받으며 지내다 그만 딸이 죽게 된다. 졸지에 나쁜여자가 된 테스는 그 마을을 떠나 다른 마을에서 살아가게 되고 그곳에서 엔젤이라는 남자를 만나게 된다.
그를 만나 사랑에 빠지게 되고 결혼을 하는데 신혼 첫날밤에 그에게 자신의 비밀을 밝히게 되고 이에 실망한 엔젤은 그녀를 친정으로 보낸채 떠나게 된다. 마을로 돌아온 테스를 보고 알렉은 다시 지속적으로 구애를 하지만 그녀는 엔젤을 기다리게 된다. 하지만 오랜 시간이 지나도 엔젤이 자신을 용서하지 않자 결국 알렉의 정부로 들어가게 되고 그렇게 살아가게 된다. 한편 엔젤은 뒤늦게 테스를 용서하기로 하고 데리로 오지만 이미 테스는 알렉의 정부가 된 상태이다. 이때 테스는 알렉에게 환멸을 느끼고 그를 죽인 이후 엔젤을 쫓아가게 되고 둘은 도주하다 결국 잡히게 되고 테스는 교수형 당한다.
그를 만나 사랑에 빠지게 되고 결혼을 하는데 신혼 첫날밤에 그에게 자신의 비밀을 밝히게 되고 이에 실망한 엔젤은 그녀를 친정으로 보낸채 떠나게 된다. 마을로 돌아온 테스를 보고 알렉은 다시 지속적으로 구애를 하지만 그녀는 엔젤을 기다리게 된다. 하지만 오랜 시간이 지나도 엔젤이 자신을 용서하지 않자 결국 알렉의 정부로 들어가게 되고 그렇게 살아가게 된다. 한편 엔젤은 뒤늦게 테스를 용서하기로 하고 데리로 오지만 이미 테스는 알렉의 정부가 된 상태이다. 이때 테스는 알렉에게 환멸을 느끼고 그를 죽인 이후 엔젤을 쫓아가게 되고 둘은 도주하다 결국 잡히게 되고 테스는 교수형 당한다.
구도와 빛의 사용
일단 외관만 보았을때 눈에 띄는건 기가 막히게 아름다운 영상들이다. 자연주의 회화에 기반을 둔듯한 마치 모든 장면들이 그 자체로서 풍경화가 되어버리는 기가 막힌 구도와 아름다움을 보여준다. 특히 몇몇 장면들은 밀레의 작품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구도를 변형하여 사용하기도 한다. 또 한가지 인상 깊은건 빛의 사용 방법이다. 단순히 바깥에서 찍었으니 빛이 드러나는것 아니냐? 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그런 수준이 아니다. 이 작품에서 드러나는 빛 역시 밀레의 작품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그런 것인데 빛의 효과를 통해서 그 공간 내에 존재하는 인물의 감정을 그대로 드러나는 방법론이다.
사실 이런 작품은 거의 보기가 힘들다. 일단 로만 감독 작품을 볼때 항상 염두에 둬야할 부분은 공간이 그 캐릭터를 규정한다는 것이다. 즉 공간 자체가 캐릭터의 감정을 드러내거나 전체적인 성향을 결정짓게 된다. 이것이 바로 로만 감독의 강점이다. 그런데 테스에서는 공간이 자연으로 오픈되어 버린다. 즉 공간이 캐릭터를 규정하기 위해서는 그 공간 자체가 어느 정도 한정되어야 하는데 테스는 대자연의 품으로 들어가버리니 공간이 캐릭터를 규정하기 매우 힘들어진다. 이때 로만 감독의 선택이 바로 빛이다.
영화를 안보신분들에게 이걸 말로 설명한다는 것이 대단히 어려운데 일단 위의 그림을 보자. 저 그림은 밀레의 만종이다. 해질녘의 들판에 있는 농민을 그린 그림인데 저 그림을 보신 분들은 단순히 잘그렸다가 아니라 저 그림 내에 존재하는 인물들이 가지는 어떤 감정을 느끼게 된다. 그것이 가능한 이유는 뒷 배경에 존재하는 빛이 주된 원인이다. 넓은 공간이지만 저 빛이 감정을 규정하게 되는 것이다. 그렇기에 많은 사람들이 만종을 보고 감동을 느끼는 것이다. 영화 테스에서도 저런 장면들이 꽤나 많이 등장하게 된다.
일단 몇장면만 살펴보자면 위의 스샷 1번은 산속에서 겁탈당하는 장면이다. 어두운 산속과 짙게 깔린 빛이 테스의 상황을 잘 표현해주고 있다. 2번은 겁탈 당한 이후 그 집을 떠나는 장면인데 외길과 저뒤쪽에 깔린 안개가 역시 테스의 상태를 잘 표현하고 있다. 3번은 아기에게 젓을 먹이는 장면인데 그 뒤에 깔린 구름이 인상 깊다. 4번은 엔젤을 만나게 되는 장면인데 어두워서 잘 안보이는데 길이 나무로 둘러쌓여 그늘이 진 상태인다. 마치 터널처럼 보이는데 그 끝에 있는 빛과 그곳에서 등장하는 엔젤의 모습을 통해 테스의 앞으로의 상황을 암시하게 된다. 5번은 엔젤에게 버림받고 친정으로 돌아오는 장면인데 짙게 까린 안개가 모든 상황을 표현한다.
남성적 보수성과 폭력의 희생자
사실 토마스 하디의 테스를 보지 못한지라 두 작품이 완벽하게 동일한 것인지 아닌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두 작품 모두 내세우는 핵심적 주제는 동일 할 것으로 보이는바 그것은 바로 여성에 대한 억압과 폭력의 희생자로서의 테스가 아니겠는가? 테스는 정말 철저하게 희생양으로서 등장하게 된다. 자신의 욕망을 위해 딸을 부자집으로 보내버린 아버지에서부터 시작된 폭력은 귀족집안의 아들의 겁탈과 버려짐 그 이후 마을 사람들 전체가 보여주는 폭력도 상당하다. 특히 인상 깊은 부분은 종교가 보여주는 폭력이다. 아이가 죽었을때 장례를 치뤄달라는 테스의 요청을 신부는 매몰차게 외면하게 된다.
사실 뭐 이런식의 폭력이야 흔하게 볼 수 있는 것이고 현대에도 딱히 달라진건 없다. 무슨말인고 하니 현대에 들어 여성 인권이 아무리 성장하였다 하더라도 그건 특정 계층에 한정된 이야기일뿐이라는 것이다. 즉 중산층 이상의 가정에서 태어나 대도시에서 성장하여 일정 수준이상의 교육을 받은 여성. 딱 여기까지가 신장된 여성인권의 수혜자이다. 이 범위에서 벗어나는 여성은 엄청난 폭력 앞에 노출된채 그 어떤 보호도 받지 못하게 된다. 실제로 집안이 가난하거나 높은 수준의 교육을 받지 못한 여성들은 21세기 현재에도 여전히 테스와 비슷한 취급을 받으며 살아가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심지어 저 범위안에 들어간 여성일지라도 테스와 비슷한 일을 당하게 된다면 그 즉시 별볼일 없는 여자가 되면서 엄청 폭력앞에 놓이게 된다.
더 재미있는 것은 이러한 불편한 현실을 철저하게 외면해버리는 현실이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자기 눈앞에 보이지 않으니 그런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해버리는 것이다. 갑자기 떠오르는 것이 하나 있는데 한미 FTA가 큰 이슈가 되었을때 방송에서는 멕시코의 현실을 적나라하게 보여주었고 그중에서 가장 인상 깊은 것은 바로 길건너에 굶어죽어가는 사람들이 있지만 멕시코 부유층들은 진심으로 그들의 존재를 알지 못하고 있는 장면이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그 장면을 보고 비난을 해댔었는데 난 되묻고 싶은바 한국이라고 다를거라 생각하시나? 이글을 보는 대부분은 이나라의 지랄같은 현실을 눈꼽만큼도 이해 못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좋은 환경이 좋은 교육을 보장한다면 그 좋은 교육을 받은 사람의 주변에 이 사회 내의 최약자들이 있을리도 만무하고 그들을 보았을리도 만무하다. 바로 이지점에서 사회 전체적인 몰이해와 모순 그리고 격차가 벌어지는 것이다.
더 문제인 것은 폭력에 대한 무감각이다. 모든 것을 사랑하라고 가르치고 있는 기독교라는 종교마저도 이 폭력앞에 무감각하다. 폭력 자체가 그사회의 근간을 이루기에 모든 사람들이 폭력에 중독되어버린 현상이다. 사회 전체가 폭력에 중독되면 그 희생자도 대단히 수동적인 양상을 보여주게 된다. 즉 자신을 향한 폭력이 잘못이 아니라 내가 문제라는 식으로 길들여진다는 것이다. 그러니 테스의 운명이 비극적일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이 부분 역시 현대 사회와 크게 다를바가 없는 부분이다. 우리 사회 전반을 지배하고 있는 온갖 불합리와 폭력에 대해서 얼마나 자연스럽게 순응하고 있는가? 이에 대해서 지적하는 사람은 나약한 인간일뿐이며 정신력이 약한 인간일뿐이다. 정말 무시무시한 폭력아닌가?
중요한 것은 강한척 해대는 저러한 생각 자체가 이미 폭력앞에 철저하게 굴복하는 인간들이기에 보여줄 수 있는 태도라는 점이다. 폭력앞에 길들여지고 폭력을 두려워하기에 그 폭력의 앞잡이가 되어버리는 현상이다. 결국 폭력을 행사하는 인간들이야 말로 가장 나약한 인간이다. 테스라는 작품이 명작의 반열에 오른 것은 바로 이 폭력에 대해서 지독하게 성찰할 수 있는 길을 열어주기 때문이다. 저런 곳에서 어떻게 살지? 라는 생각이 들때 생각은 한걸음 더 나아가 지금도 다를바가 없잖아? 로 이어지게 된다. 테스가 고전인 이유는 시대를 불문하는 보편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며 그 보편성은 바로 폭력 그 자체에 존재하게 되는 것이다. 충분히 이해하셨을리라 믿는다.
마무리
이 영화를 보고 여성의 순결이니 뭐니 하는 헛소리는 다 집어치워라. 한 사회가 어떠한 폭력을 행사하고 그 폭력앞에서 한 인간이 어떻게 망가져가는지 그것을 눈여겨 보아야 할 것이다. 그리고 과연 21세기 현대 한국 사회가 저 영화와 뭐가 다른지에 대해서도 진지하게 고민해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다시금 강조 하고 싶은 말은 우리 사회는 정말 미친 폭력들로 휩쌓인 사회라는 점이고 그것을 직시해야 한다는 것이다. 테스를 강간한 영화속의 사회를 욕하고 싶은가? 미안하지만 이 사회는 영화보다 더 지독하다. 여러분들의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폭력을 외면하지 마시라. 당장 눈앞에 없다고 해서 존재하지 않는 것이 아니다. 끝까지 외면한다면 그 폭력은 결국 당신의 목을 죄어올 수 밖에 없다.
[영 화/로만 폴란스키] - 거장 로만 폴란스키의 작품세계
[영 화/로만 폴란스키] - 유령작가(2010), 거대한 연극과 유령 그리고 권력관계
[영 화/로만 폴란스키] - 올리버 트위스트(2005), 코믹과 과장된 캐릭터와 분위기
[영 화/로만 폴란스키] - 영화 피아니스트(2002), 음악의 치유와 폭력의 자기조직화
[영 화/로만 폴란스키] - 나인스 게이트(1999), 당신안의 악마를 향한 욕망
[영 화/로만 폴란스키] - 영화 진실(1994), 집단과 폭력 그리고 남겨진 기억
[영 화/로만 폴란스키] - 비터 문(1992), 욕망의 순수성과 파멸성
[영 화/로만 폴란스키] - 실종자(1988), 로만 폴란스키 스타일의 스릴러
[영 화/로만 폴란스키] - 테스(1979), 남성적 보수성과 폭력의 희생자
[영 화/로만 폴란스키] - 테넌트(1976), 아파트와 정신분열증
[영 화/로만 폴란스키] - 차이나타운(1974), 필름느와르의 최고 명작
[영 화/로만 폴란스키] - 영화 맥베드(1971), 내적 두려움과 잠재된 씨앗
[영 화/로만 폴란스키] - 악마의 씨(1968), 현대속의 공포와 소외
[영 화/로만 폴란스키] - 박쥐성의 무도회(1967), 엽기 코믹 드라큐라
[영 화/로만 폴란스키] - 혐오(1965), 현대인의 찢겨짐과 강박
[영 화/로만 폴란스키] - 물속의 칼(1962), 묘한 성적 긴장감
[영 화/로만 폴란스키] - 유령작가(2010), 거대한 연극과 유령 그리고 권력관계
[영 화/로만 폴란스키] - 올리버 트위스트(2005), 코믹과 과장된 캐릭터와 분위기
[영 화/로만 폴란스키] - 영화 피아니스트(2002), 음악의 치유와 폭력의 자기조직화
[영 화/로만 폴란스키] - 나인스 게이트(1999), 당신안의 악마를 향한 욕망
[영 화/로만 폴란스키] - 영화 진실(1994), 집단과 폭력 그리고 남겨진 기억
[영 화/로만 폴란스키] - 비터 문(1992), 욕망의 순수성과 파멸성
[영 화/로만 폴란스키] - 실종자(1988), 로만 폴란스키 스타일의 스릴러
[영 화/로만 폴란스키] - 테스(1979), 남성적 보수성과 폭력의 희생자
[영 화/로만 폴란스키] - 테넌트(1976), 아파트와 정신분열증
[영 화/로만 폴란스키] - 차이나타운(1974), 필름느와르의 최고 명작
[영 화/로만 폴란스키] - 영화 맥베드(1971), 내적 두려움과 잠재된 씨앗
[영 화/로만 폴란스키] - 악마의 씨(1968), 현대속의 공포와 소외
[영 화/로만 폴란스키] - 박쥐성의 무도회(1967), 엽기 코믹 드라큐라
[영 화/로만 폴란스키] - 혐오(1965), 현대인의 찢겨짐과 강박
[영 화/로만 폴란스키] - 물속의 칼(1962), 묘한 성적 긴장감
반응형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