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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테스, 인습과 편견의 폭력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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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테스, 인습과 편견의 폭력

유쾌한 인문학 2011. 4. 27. 05: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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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습과 편견
지극히 인간 중심적인 사고방식 중 하나는 인간이 인지하는 모든 것들이 절대적 객관성을 담보한다고 믿는 것이다.  하지만 현대 과학의 발전은 인간의 인지 능력이 절대적 객관성을 담보할 수 없다는 점을 분명히 밝혀내고 있다.  우리가 듣지 못하는 걸 동물들은 듣기도 하고 우리가 보는 것과는 완전히 다른 형태의 본다는 개념을 가지는 동물들도 존재하니깐 말이다.  중요한건 각기 다른 이종들 간에 가지는 인지의 틀의 차이는 인간 내에서 각 사회적 주체들간의 인식의 틀의 차이로 확장하여 바라볼 수 있다는 점이다.

우리는 흔히 인간을 사회적 동물이라는 표현을 사용하곤 하는데 보통은 혼자서는 살 수 없다는 정도의 의미로 받아들이곤한다.  하지만 이를 조금만 확장하여 생각해본다면 유기적 사회가 가지고 있는 전체적인 인식의 틀을 각 주체들이 내부로 받아들이는 일련의 과정이라고 볼 수 있다.  즉 사회적 동물이란 결국 속해있는 유기적 사회화의 과정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일련의 화라는 과정은 다양한 형태로 나타날 수 있는데 보통은 통과의례의 형태를 가지는 경우가 많다.  그렇게 확립되고 철저하게 교육받은 틀은 특정한 사안이나 행태를 바라봄에 있어서 일정한 방향성을 가지게 한다. 

우리는 흔히 '당연하다'라는 말을 정말 자주 사용하는데 그 말의 의미에 대해서 한번쯤 생각해본적이 있는지 모르겠다.  어떤 사안에 대해서 당연하다는 말이 나오기 위해서는 그 사안에 대한 획일적인 정답이 그 사회를 지배하고 있다는 말을 의미한다. 이러한 사안은 단순히 수학적 진리와 같은 자명한 것에서부터 사변논리적이고 정치적인 문제까지 다양하게 등장하게 되는바 문제가 되는 부분은 바로 후자이다. 다양성이 가능한 부분에 대해서 당연하다는 식의 말이 나온다는 것은 그 사안에 대한 인식의 틀이 대단히 확고하다는 것이다. 사실 우리가 흔히 사용하는 진보니 보수니 하는 분류도 정확히 말하자면 인식의 틀에 대한 한도내에서의 유연성이라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인식의 틀은 어쩔 수 없이 생길 수 밖에 없는 것이고 필연적인 이것에서 사회적 동물이라는 명제가 도출한다. 

문제는 유기적 사회라는 말에서 알 수 있듯이 사회란 고정 불변한 무엇이 아니라는 점이다.  그 자체로서 살아있는 생명과 유사한 이것은 지속적으로 변하기 마련이며 가끔씩 특정한 충격에 의해서 그 변화가 단기간 급격히 발생하기도 한다.  이때 문제가 되는건 유기적 사회의 변화와 인식의 틀의 불합치의 발생이다.  이러한 불합치를 흔히 인습이라 부리기도 하고 편견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사전적 정의로는 "예로부터 내려오는 관습 중에서 합리적·진보적 관점에서 가치가 의심되거나 부정되고 있는 것"으로 나와있는데 결국 핵심은 지나치게 고정된 인식의 틀과 현재의 사회적 현상과의 불일치라고 볼 수 있다.  재미있는건 이러한 불일치가 대단히 폭력적인 양상으로 나타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이런 불일치가 불러온 폭력.  바로 이것이 테스의 핵심적 주제라고 볼 수 있다.


인습이 불러온 폭력
테스는 정말 철저하게 희생양으로서 등장하게 된다.  자신의 욕망을 위해 딸을 부자집으로 보내버린 아버지에서부터 시작된 폭력은 귀족집안의 아들의 겁탈과 버려짐 그 이후 마을 사람들 전체가 보여주는 폭력에서 정점을 찍는다.  특히 인상 깊은 부분은 종교가 보여주는 폭력이다.  아이가 죽었을때 장례를 치뤄달라는 테스의 요청을 신부는 매몰차게 외면하게 된다.  사실 이런식의 폭력이야 흔하게 볼 수 있는 것이고 현대에도 딱히 달라진건 없다.  무슨말인고 하니 현대에 들어 여성 인권이 아무리 성장하였다 하더라도 그건 특정 계층에 한정된 이야기일뿐이라는 것이다.  즉 중산층 이상의 가정에서 태어나 대도시에서 성장하여 일정 수준이상의 교육을 받은 여성.  딱 여기까지가 신장된 여성인권의 수혜자이다.  이 범위에서 벗어나는 여성은 엄청난 폭력 앞에 노출된채 그 어떤 보호도 받지 못하게 된다.  실제로 집안이 가난하거나 높은 수준의 교육을 받지 못한 여성들은 21세기 현재에도 여전히 테스와 비슷한 취급을 받으며 살아가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심지어 저 범위안에 들어간 여성일지라도 테스와 비슷한 일을 당하게 된다면 그 즉시 별볼일 없는 여자가 되면서 엄청 폭력앞에 놓이게 된다.

재미있는 것은 이러한 불편한 현실을 철저하게 외면해버리는 현실이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자기 눈앞에 보이지 않으니 그런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해버리는 것이다.  갑자기 떠오르는 것이 하나 있는데 한미 FTA가 큰 이슈가 되었을때 방송에서는 멕시코의 현실을 적나라하게 보여주었고 그중에서 가장 인상 깊은 것은 바로 길건너에 굶어죽어가는 사람들이 있지만 멕시코 부유층들은 진심으로 그들의 존재를 알지 못하고 있는 장면이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그 장면을 보고 비난을 해댔었는데 난 되묻고 싶은바 한국이라고 다를까?  이글을 보는 대부분은 이나라의 현실을 눈꼽만큼도 이해 못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좋은 환경이 좋은 교육을 보장한다면 그 좋은 교육을 받은 사람의 주변에 이 사회 내의 최약자들이 있을리도 만무하고 그들을 보았을리도 만무하다.  바로 이지점에서 사회 전체적인 몰이해와 모순 그리고 격차가 벌어지는 것이다.

더 문제인 것은 폭력에 대한 무감각이다.  모든 것을 사랑하라고 가르치고 있는 기독교라는 종교마저도 이 폭력앞에 무감각하다.  폭력 자체가 그사회의 근간을 이루기에 모든 사람들이 폭력에 중독되어버린 현상이다.  사회 전체가 폭력에 중독되면 그 희생자도 대단히 수동적인 양상을 보여주게 된다.  즉 자신을 향한 폭력이 잘못이 아니라 내가 문제라는 식으로 길들여진다는 것이다.  그러니 테스의 운명이 비극적일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이 부분 역시 현대 사회와 크게 다를바가 없는 부분이다.  우리 사회 전반을 지배하고 있는 온갖 불합리와 폭력에 대해서 얼마나 자연스럽게 순응하고 있는가?  이에 대해서 지적하는 사람은 나약한 인간일뿐이며 정신력이 약한 인간일뿐이다.  정말 무시무시한 폭력아닌가?

중요한 것은 강한척 해대는 저러한 생각 자체가 이미 폭력앞에 철저하게 굴복하는 인간들이기에 보여줄 수 있는 태도라는 점이다.  폭력앞에 길들여지고 폭력을 두려워하기에 그 폭력의 앞잡이가 되어버리는 현상이다.  결국 폭력을 행사하는 인간들이야 말로 가장 나약한 인간이다.  테스라는 작품이 명작의 반열에 오른 것은 바로 이 폭력에 대해서 지독하게 성찰할 수 있는 길을 열어주기 때문이다.  저런 곳에서 어떻게 살지?  라는 생각이 들때 생각은 한걸음 더 나아가 지금도 다를바가 없잖아? 로 이어지게 된다.  테스가 고전인 이유는 시대를 불문하는 보편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며 그 보편성은 바로 폭력 그 자체에 존재하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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