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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던 타임즈(1936), 자본 그 환상적 세계 본문

영 화/고전 영화

모던 타임즈(1936), 자본 그 환상적 세계

유쾌한 인문학 2010. 8. 10.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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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던 타임즈(Modern Times)
정말 유명한 작품이고 고전의 반열에 오른 몇안되는 영화중 하나이다.  여러분들은 고전을 뭐라고 생각하시는가?  뭐 듣기 좋은 말로는 인류의 위대한 유산 등등으로 말할 수 있겠지만 난 고전을 이렇게 말한다.  "모든 사람이 봤다고 착각하지만 정작 본사람은 거의 없는 무엇"  모던 타임즈 역시 마찬가지로 많은 사람들에게 이 영화 얘기를 하면 봤다고 말하지만 정말로 본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내용을 간단히 말해보자면 채플린은 포드주의가 적용된 공장에서 나사를 조으는 노동자이다.  너무 나사만 조으는 일을 반복하다보니 결국 그는 신경쇠약에 걸려 회사에서 잘리게 된다.  병원에서 치료가 끝난 뒤 일자리를 찾아다니다 그만 시위대에 휩쌓여 시위대의 주동자로 오해를 받아 감옥에 갇히게 된다.  감옥생활에 너무 잘적응한 그는 나가기 싫어하지만 결국 나오게 되고 새로운 일자리를 얻지만 사고만 치게 되어 그는 다시 감옥에 가기로 결심한다.  한편 주인공 여성이 한명 있는데 그녀는 어머니 없이 동생둘을 키우고 아버지는 실업자인 상태이다.  너무 가난하여 빵을 훔치다 잡히게 되고 이때 채플린과 만난다. 

채플린은 대신 감옥에 가고 싶었기에 자신이 훔쳤다고 말한채 잡히게 되는데 조금후에 그녀는 다시 잡혀 경찰차에 올라타게 되고 그때 둘은 도망을 치게 된다.  둘다 거지상태로 떠돌다 채플린은 우연히 백화점 경비로 취직을 하게 되는데 밤에 여자를 불러 잠을 재우는 등의 행각을 벌이게 된다.  하지만 이 역시 잘못되어 결국 짤리게 되고 버려진 허름한 판자집에서 기거를 하다 다시 공장에 취직하는데 성공하게 되는데 그만 경찰에 체포되어 다시 감옥을 살게 된다.  한편 여자는 댄서로 취직하여 춤을 추며 먹고 살게 되고 출소한 채플린을 데려다 같이 일하게 된다.  하지만 여자를 쫓아온 경찰때문에 여기에서도 도망을 치게 되고 둘은 그렇게 길을 떠난다.




포드주의와 노동투쟁
포드주의는 다들 아시다시피 자동차 공장의 라인을 생각하시면 된다.  생산량을 극대화시키게 위해 도입된 시스템으로 자동화된 라인에서 노동자들은 자신이 해야할 일만 반복적으로 행하면 된다.  쓸데 없는 움직임을 극도로 제한시키고 한두가지의 행위만 반복하기에 아주 숙련된 노동력을 보여주게 된다.  포드주의도 분명한 장점은 존재한다.  절대적 노동시간을 줄이되 생산량은 극대화 시킬 수 있는 시스템이고 노동자의 불만을 잠재우기 위해 고임금을 지불하게 된다.  그렇기에 이론적으로만 본다면 분명 장점이 많은 시스템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모든 경제이론은 이론대로 흘러가지도 않고 독특하게 뒤틀리기 마련인바 포드주의는 공간의 협소화 그리고 움직임의 제한 등으로 통한 자유의 제한을 불러오게 되고 이는 자본가의 노동자 통제가 더욱 쉬워지는 결론을 불러오게 된다.  이러한 측면이 영화에서 잘 들어나는데 위의 스샷 두번째 장면을 보자.  화장실에서 잠시 담배를 피며 쉬려고 하는 채플린을 화장실에서까지 감시하며 일을 하라고 재촉하는 장면이다.  자본가의 통제를 잘 보여주는 장면이라고 볼 수 있겠다.  세번째 스샷 역시 인상 깊은데 밥먹는 과정을 자동화하여 노동자의 식사시간을 단축시켜 생산성을 높이려는 시도중 하나이다.  영화에서 저 기계는 대단히 웃긴 코미디로 활용되면서 망가지게 되는바 당시 만연하였던 자동화시스템에 대한 풍자라 볼 수 있다.

사실 자본주의의 발전과정에서 정말 획기적인 발명품이라고 볼 수 있는 포드주의는 근본적으로 한계를 가질 수 밖에 없었다.  고임금과 절대적 노동시간의 저하는 결국 노동자 계층의 전반적인 교육수준의 향상을 불러오게 되고 이런 상황에서 노동의 위계적 차별과 비인간화를 노동자가 감내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즉 포드주의 하에서는 인간 자체가 언제든지 대체가능한 하나의 부속품으로서 자리매김하게 되고 지나친 표준화와 규격화로 인해 되려 경직성을 불러오게 되는 등으로 인해 오히려 생산력이 저하하는 현상이 생기기도 한다.  이것이 극대화 되는 시점이 70년대 초반이며 이때부터 나오는 말이 노동 유연성이다. 

또 한가지.  짧게 처리되는 파업장면들이 대단히 인상 깊다.  미국 역사에서 파업과 노동투쟁은 정말 어마어마하게 많이 일어나게 된다.  미루어 말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수의 노동 투쟁이 일어나게 되며, 이부분에 대해 연구하여 대중서를 낸 사람이 하워드 진인데 축적된 자료를 가진채 책을 내었음에도 자료가 부족하다고 말할정도이니 대단하다 아니할 수 없다.  이러한 노동 투쟁에 휩쌓인 채플린과 도둑질한 여자는 정말 마지막 순간까지 경찰의 추적을 받게 된다.  그냥 냅뒀으면 알아서 잘 살았을텐데 지속적인 추적 앞에 마지막으로 얻어낸 안정감 마저도 포기하게 만들어버린다.

이는 체계가 금하는 것을 행한 자에 대한 즉 체계에서 비정상이라고 규정한 것들에 대한 심각한 폭력이다.  이러한 현상은 오늘날에도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다.  오늘날 대한민국에서 비정상이라고 규정되어버린 비합리적인 것들이 얼마나 많은가?  아무리 이성적으로 비합리적이고 어처구니가 없더라도 사회가 비정상이라고 규정하였기에 체계는 그것에 대해서 엄청난 폭력을 행사하게 된다.  한국사회에서 대표적인 예가 바로 좌파 아니던가.  성장과 자유에 조금이라도 반하는 발언을 하면 좌파로 몰리고 그 좌파는 곧 북한과 이꼴이 되어버린다.  좌파라고 전부다 김일성을 신봉하는 자들인가?  이런 어처구니 없는 일이 벌어지는게 작금의 현실이다.  노동투쟁만 해도 마찬가지 한국은 투쟁자체가 존재하지 않는 나라라고 보아도 무방할정도이다.  




자본 그 환상적 세계
이 작품의 풍자가 극에 달하는 부분이 바로 위의 스샷들이다.  채플린이 백화점 경비로 취직을 하게 되어 백화점 문을 닫게 되면 그곳에서 여자를 불러와 잠을 재우는 등의 행위를 하게 된다. 최소한 그 순간 만큼은 이들은 정말 백화점 내에 존재하는 최고의 물품들과 함께 부자가 된듯한 기분을 만끽할 수 있다.  최고급 침대에서 최고급 가운을 걸친채 잠을 잘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낮이 되면 이 환상은 그자리에서 무너지게 된다.  그리고 다가오는 현실은 위의 스샷 5번째에 나오는 저 허름한 판자집이다.
 
이것이 바로 자본의 환상이다.  욕망 자체를 가질 수 있다와 없다로 딱 나눈 이후 너도 가질 수 있다는 가능성의 제시.  이것이 바로 자본주의가 돌아가기 위한 필수적 요소이다.  중요한건 전제가 되는 가질 수 있다는 것에서 have 이다.  즉 가진다는 것에 행복을 투여하게 되고 그 가지는 것에 모든 욕망이 투여되도록 유도하게 된다는 것이다.  하지만 모든 사람이 모든걸 가질 수는 없는것이 사실이다.  이는 인간이 본연적으로 가지고 있는 구별짓기의 성향에서 비롯되는 현상이다.  간단히 말해 가질 수 있다는 것은 그자체로서 고급문화의 향유를 상징하게 되고
이러한 고급 문화를 즐기는 특성은 하나의 구별짓기의 양상으로 나타나게 된다. 

예를 들어 우리가 흔히 아주 대단한 고급문화라고 생각하는 오페라나 발레 그외 현대 미술등의 감상등은 사실 일정한 문화적 코드에 익숙해져야 함을 전제로 한다.  문화적 코드 그 자체에 익숙해지지 않으면 왠만해선 즐기기 힘든 그런 양상의 문화들이 바로 저러한 것들이다.  저러한 문화적 코드에 익숙해진다는 것은 착취라고 하는 경제적 이해관계에서 벗어날 수 있는 귀족들이 대부분 향유하게 되는 것은 자명한 것 아니겠는가?  이러한 착취에서의 자유로움은 지배라는 방향으로 나아가게 하는 하나의 원동력이 된다.  이는 문화적 코드에 의한 지배 문화의 압도이다.  그리고 이러한 문화적 코드는 그들만이 향유할 수 있는 교육에 의해서 형성된다.

결국 가질 수 있다는 것 그 자체로서 계급 형성이 되기에 가질 수 있다는 가능성이 쉽게 주어지는 것이 될 수가 없다.  그렇기에 이것은 환상 그자체가 된다.  채플린은 이러한 지점을 정확히 포착하여 영상화 시키게 된다.  이른바 백화점과 판자집의 경험의 대비를 통해서 말이다.  자본이 만들어낸 모든 가질 수 있는 것들이 모여있는 곳이 바로 백화점이기에 백화점은 have의 환상 그 자체로서 존재하게 된다.  반면 판자집은 아무도 가지고자 하지 않는 버려진 곳.  버려진 곳이기에 백화점과 정확히 대척점을 이룰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마무리
정말 다시봐도 대단한 작품이다.  유성영화 시대로 이미 돌입하였지만 그는 여전히 무성영화를 유지하게 된다.  오직 슬랩스틱과 상황 제시 하나만으로 모든 풍자를 해내버리는 감독으로서의 역량이 상당하다. 
코미디가 진정함 힘을 발휘하는 곳은 바로 풍자에 존재하며 그것을 온몸으로 보여주게 되는 것이다.  채플린은 사실상 무성영화의 정점을 찍어버린 인물이라고 보아도 무방하리라.  이 작품으로 인해 채플린은 모든 사람들의 기억속에서 살아남게 되지만 정작 이 작품으로 인해 메카시에 의해 당시에 공산주의자로 오인받아 미국에서 쫓겨나게 되는 시발점이 되는 영화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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