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응형
Notice
Recent Posts
Recent Comments
관리 메뉴

★ image or real

시티 라이트(1931), 대공황 시대의 비판과 휴머니즘 본문

영 화/고전 영화

시티 라이트(1931), 대공황 시대의 비판과 휴머니즘

유쾌한 인문학 2010. 8. 27. 08:12
반응형




시티 라이트(City Lights)

어느덧 세상은 유성영화시대에 돌입하게 되었다.  하지만 찰리 채플린은 여전히 무성영화를 들고 나와 작품을 내놓게 된다. 이제 미국 사회는 완전한 대공황시대에 돌입하게 되고 사회 불안은 아주 극심해지고 있는 시점이다.  이 시점에서 채플린이 내놓은 작품은 대단히 감동적이면서 인간적인 면모를 보여주게 된다.  이 작품은 상당히 유명한 작품으로 흔히 100대 영화 하면 15위권안에 랭크는 그런 작품중 하나이다.  

내용을 간단히 말해보자면 채플린은 도시를 떠도는 떠돌이인데 어느날 길에서 꽃파는 눈먼 여자를 보고 반하게 된다.  그날밤 그는 강변가에서 술에 취해 자살하려는 백만장자를 구하게 되고 둘은 친구가 된다.  급속도로 친해져 백만장자는 채플린을 자신의 집으로 초대하게 되고 그때 우연히 다시 눈먼 여자를 만나게 되어 백만장자의 차를 이용해 집에 데려다 주기도 한다.  그런데 웃기는것이 이 백만장자는 술에서 깨어나면 채플린을 몰라본다는 점이다.  오직 술에 취했을때만 그를 친구로 받아들이게 된다.  

어느날 채플린은 그 눈먼 소녀가 집세를 못내 쫓겨날 상황임을 알게 되어 돈을 구하기 위해 권투를 하는등 다양한 방도를 모색하지만 실패하게 된다.  해필 그 시점은 부자가 유럽으로 떠난 시점이다.  도심을 헤매다 때마침 유럽에서 돌아온 술취한 부자를 다시 만나게 된 그는 그에게서 돈을 얻게 되지만 다시 그가 술에 깨면서 도둑으로 몰리게 된다.  채플린은 그 돈을 그녀에게 쥐어준채 눈수술을 하라고 하게 되고 그녀는 눈을 뜨게 되지만 채플린은 감옥에 갇히게 된다.  몇달 뒤 감옥에서 나온 그는 그녀의 주변을 배회할뿐 다가가지는 못한다.  우연히 다시 만나게 된 둘.  그녀는 채플린이 따뜻한 손 감촉에 단번에 그임을 알아보고 행복하게 잘 살게 된다.

 


대공황 시대의 비판과 휴머니즘
시작부터 상당히 웃기고 코믹하다.  평화와 번영을 기원하며 시민들에게 조각상을 바친다면서 기념행사를 하는 것이 첫장면인데 미국 국가가 울려퍼짐과 동시에 채플린은 그 조각상 위에서 코믹한 연기를 선보이게 된다.  즉 평화와 번영이라는 행사 자체를 대놓고 비웃어버리는 것이다.  당시 미국 사회 분위가 어떠했는지 사실 살아보지 못했기에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사회적 모순이 희안한 방향으로 표출되었음은 어렵지 않게 예상할 수 없다.  굳이 경험해보지 않더라도 작금의 우리네 현실을 바라보자면 정답은 의외로 간단히 도출되니 말이다.

영화에서 등장하는 평화와 번영의 조각상이라는 것은 쉽게 말해 사회적 혼란을 어떤 환상의 제시를 통해 가리려는 시도라고 볼 수 있다.  당장 우리 사회를 보더라도 사회의 심각한 혼란상을 입맞대로 짜맞춘 도표 그리고 삽질을 통해서 눈가리지 않나?  이 환상의 제시는 저것만 되면 나아질 것이라는 희안한 희망을 품게 하는 묘한 효과를 가지게 된다.  환상속에서 안주하고 고통을 잊어가는 일종의 마약같은 것으로 볼 수 있겠다.  영화내에서 이러한 환상은 지속적으로 제시된다.  술만 먹으면 갑자기 친구가 되었다가 술에서 깨어나면 다시 지독한 부르주아가 되어버리는 백만장자의 모습을 통해 존재하지 않는 환상으로서의 가능성의 제시에 대한 허구를 정면으로 비판해들어간다.  이러한 부분 역시 오늘날에도 유효한 부분이다.  많은 사람들이 흔히 착각하게 되는 허구의 진실성에 대해서 말이다.

이러한 환상은 아래 두번째 스샷인 권투 장면에서 극대화 된다.  노력하면 누구나 부자가 될 수 있다는 아메리칸 드림과 당시 극도로 자유 방임주의적인 자본주의 시스템의 모순을 잘 표현하는 장면이다.  사각의 링위에서 과연 시합 자체가 정당하게 이루어지는가?  심판이 있지만 의미도 없고 온갖 반칙이 남무하는 권투 경기일뿐이다.  결국 공정이란 불가능한 일이며 이는 지금도 마찬가지이다.  자유방임의 모순이 극대화될때 사회의 선택은 자유의 제한과 폐쇄적인 정책의 도입이다.  물론 이것 역시 문제점을 보였기에 현재 다시 자유방임으로 돌아가려는 시도가 등장하게 되고 이것이 신자유주의의 모습이다.  그리고 또 다시 등장하게 되는 자유방임의 모순.  인간에게는 역사를 통한 학습능력이 전혀 없는것인지.  개탄스러울따름이다.  물론 이는 한국에서 가장 극심화되어 나타나게 되고 말이다.

이러한 기본적 풍자 정신에 입각한채 영화의 전체적인 스토리는 대단히 인간적인 양상을 보여준다.  특히 마지막 장면은 지금봐도 정말 감동적이다.  눈이 먼 시절에 자신을 돌봐준 사람에 대한 얼굴도 모르지만 그의 손을 잡고 단번에 알아보고 해피엔딩으로 마무리 되는 엔딩씬은 정말 군더더기가 하나 없다.  무성영화이기에 말도 없지만 유성영화라도 말이 필요없는 장면이다.  쓸데 없는 설명을 완전히 배제시켜버린채 바라보는 눈빛 하나로 지독한 감정을 불러오게 된다.  이런 장면을 보고면 초창기 영화들이 보여주는 영화미학이 가장 영화답지 않은가 라는 생각이 들때가 있다.




마무리
마지막 장면을 보고 눈물을 흘렸노라 고 말하고 싶지만 심한 뻥이 될테니 그럴수는 없고 어쨌든 정말 재미있는 작품이다.  시간도 이제 점점 늘어나 1시간 25분 정도로 늘어나게 된다.  이 다음 작품이 바로 그 유명한 모던 타임즈이다.  흔히 우리는 가장 유명한것 가장 1등이 되는 것만 기억하려는 습관때문에 채플린 하면 모던 타임즈만 보려하고 그것만 기억하려 드는데 그 바로 앞에 이렇게 멋진 작품이 존재한다는 사실.  이런걸 놓치고 가는 것이야 말로 진정한 비극이 아닐련지.


반응형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