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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있는 시체들의 밤(1968), 공간의 문제와 이데올로기적 측면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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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있는 시체들의 밤(Night Of The Living Dead)
좀비 영화의 아버지 조지 로메로의 데뷔작품이자 좀비 장르 영화의 공식이 만들어진 영화라고 볼 수 있다. 혹자는 좀비 영화따위라고 말할수도 있겠지만 이 작품은 교과서적인 영화라고 볼 수 있을정도로 대단히 중요한 작품이다. 사실상 이 작품은 사실상 딱히 관람할 수 있는 방법이 없었는데 최근 포탈에서 제시하는 영화 다운로드 서비스에 이 영화가 걸려있는걸 발견했다. 500원이다. 이 작품은 98년도에 필름을 약간 손을봐서 30주년 기념으로 다시 나오기도 한다. 이글은 68년 원작을 기준으로 쓰여진다.
일단 기본적으로 흑백으로 촬영되다보니 좀비 영화 특유의 긴장감은 확실히 떨어진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지금의 시각인 것이고 당대의 관점에서 바라본다면 좀비 장르가 가지고 있는 의미론적 구성요소의 확립. 예컨데 사람을 먹으려고 하는 좀비의 특징이나 고어적인 모습들. 어기적 어기적 걸어다니는 일련의 행위들. 그리고 그속에 담긴 다양한 메세지까지. 이러한 장르적 특성을 확립시킨 작품으로 그 가치가 매우 높은 B급 영화이다.
이 작품 이후로 조지 로메르 감독은 살아있는 시체들의 밤 시리즈를 내놓게 되는바 2탄은 시체들의 새벽이며 3탄은 시체들의 낮이다. 결국 새벽, 밤, 낮으로 바뀌는 형태라고나 할까. 2탄과 3탄은 최근에 리메이크되기도 하는데 2탄은 04년도에 새벽의 저주로 리메이크 되었고 3탄은 08년도에 데이 오브 더 데드로 리메이크 되었다. 리메이크된 작품들의 특징이라면 좀비의 진일보에 있다. 즉 좀비 특유의 느릿느릿한 걸음에서 과감하게 탈피하여 매우 빠르고 날렵한 좀비상을 보여주는 것이다. 하지만 그 외에는 좀비 장르 특유의 요소들을 그대로 함유하게 된다.
내용을 간단히 언급해보자면 다음과 같다. 부모님의 묘를 찾아 오빠와 함께 한 시골 마을에 온 바바라는 묘지에 도착하자마자 이상한 사람의 공격을 받게 되고 그에 오빠는 죽게 되고 그녀는 근처의 농가로 피하게 된다. 하지만 묘지에서 봤던 이상한 사람들과 같은 종류의 사람들에게 또다시 공격을 받게 되고, 그 와중에 벤(흑인)이라는 남자의 도움을 받는다. 두 사람은 당분간 이 농가에서 피해있기로 하는데, 둘뿐인 줄 알았던 이 농가의 지하실에 먼저 도착해있던 사람들이 더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이들은 각기 의견이 엇갈리게 되는데 지하실로 가 구조를 기다리자는 쿠퍼와 출구가 없는 지하실보다는 1층에 남아 저항하며 기다리자는 벤의 주장이 서로 엇갈리게 된다. 한편 티비에서는 이 모든 사건의 원인이 금성을 탐사하고 돌아오던 위성에 담긴 방사능때문이라는 주장이 나오게 되고 탈출을 하라고 권하게 된다. 이에 트럭을 타고 탈출을 시도하다 실패하여 전부 다 죽게 되고 흑인만 살아남는 상황이 된다. 아침이 되어 구출하고자 하는 사람들이 몰려오게 되고 벤(흑인)은 이에 창가를 슬쩍 내다보다 그만 좀비로 오인받아 그 역시 죽게 된다.
이들은 각기 의견이 엇갈리게 되는데 지하실로 가 구조를 기다리자는 쿠퍼와 출구가 없는 지하실보다는 1층에 남아 저항하며 기다리자는 벤의 주장이 서로 엇갈리게 된다. 한편 티비에서는 이 모든 사건의 원인이 금성을 탐사하고 돌아오던 위성에 담긴 방사능때문이라는 주장이 나오게 되고 탈출을 하라고 권하게 된다. 이에 트럭을 타고 탈출을 시도하다 실패하여 전부 다 죽게 되고 흑인만 살아남는 상황이 된다. 아침이 되어 구출하고자 하는 사람들이 몰려오게 되고 벤(흑인)은 이에 창가를 슬쩍 내다보다 그만 좀비로 오인받아 그 역시 죽게 된다.
공간의 문제와 이데올로기적 측면
이 작품이 재미있는건 아무래도 저예산 영화이다보니 집안에서 모든 사건이 벌어지게 되고 그외에 요소들은 거의 나타나지 않는다는 점이다. 집 밖이라고 해봐야 근처 자연적 요소들을 활용하는 정도에 지나지 않는다. 또 한가지 특징이라면 흑인이 사건 해결을 위해 주도적 위치에 선다는 점이다. 현명한 흑인과 우유부단한 백인. 상당히 재미있는 설정이다. 1960년대에 이런식으로 역전시켜 나타나는 영화가 있었던가? 그런면에서 상당히 진일보한 영화가 아닌가 생각된다.
보통 좀비 영화의 특징이라면 좀비가 왜 생겨났는지에 대해서 특별한 언급이 없다는 점이다. 그냥 어느날 아무 이유없이 생겨난 좀비라는 식으로 툭 던져놓고 시작하게 되는데 이작품은 아무래도 아직 초기작이라 좀비가 생겨난 이유를 제시하게 된다. 방사능이 주된 이유라는 것인데 이는 아무래도 1962년도에 있었던 쿠바 미사일 사태와 일련의 연관이 있다고 보여진다. 다들 아시다시피 쿠바 미사일 사태는 미국과 소련간에 핵전쟁 직전까지 갔었던 사건으로 핵전쟁이 발발하였다면 벌어졌을 일련의 상황들을 좀비라는 것을 통해 은유하는 것이다.
그와 동시에 눈여겨볼 부분은 공간이라는 측면이다. 영화는 크게 바깥과 집안의 공간으로 나눌 수 있다. 바깥의 공간에는 좀비들이 우글거리며 다니는 상황이고 집안의 공간은 인간들이 숨어서 버티고 있는 상황이다. 그리고 집안의 공간에서는 그 속의 사람들 사이에서 의견이 나뉘게 되는바 지하실로 숨자고 하는 것과 1층에서 있는 것이 옳다는 의견이 대립이다. 사실 이러한 공간이 의미하는 것은 대단히 간단하다.
등장인물들의 입장에서는 무엇인지 모를 정체불명의 인간도 아닌 괴물도 아닌 것들이 집밖에서 자신들을 공격하려는 상황이다. 등장인물들의 입장에선 이 모든 상황이 집이라고 하는 경계선을 사이에 둔채 안의 안정과 바깥의 불안, 혼란 등으로 표현될 수 있으며 이러한 바깥의 불안과 혼란은 결국 배타성이라는 측면으로 다가오게 된다. 즉 좀비들이 정확히 뭔지 알 수가 없기 때문에 맹목적인 공포와 증오를 가지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측면은 당시 미국과 구소련의 양진영이 가지고 있던 상대방에 대한 인식과 정확히 일치하게 된다. 서로가 서로에게 좀비와 같은 괴물일뿐이니 말이다.
그와 동시에 집 안에서의 대립도 재미있다. 지하실로 들어가자는 자와 1층에서 머물러야 한다는 자. 사실 극중 상황을 보면 지하실로 들어간다는 것은 문제해결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지하실에 다른 통로가 있는 것도 아니고 나가는 문은 오직 하나뿐인 상황에서 지하실로 들어간다는 것은 스스로를 고립시켜 결국 자멸하게 하는 것에 다름아니니 말이다. 결국 지하실로 들어간다는 것은 바깥과의 소통 불가능성을 의미하게 된다. 이는 냉전 하에서의 양진영간이 보여준 내부에서의 대립적 요소를 은연히 은유한 것이라 볼 수 있다.
마무리
이 영화를 지금 보신다면 사실 그닥 재미는 없을 것이다. 요즘 좀비들과 같이 빠르지도 않고 아주 하드한 고어물로 보기도 힘드니 말이다. 오늘날 만들어진 좀비를 보신 후 이 영화에서의 좀비를 본다면 아마 저게 무슨 좀비냐 라고 반문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무엇이 되었건 처음은 있기 마련인 것이고 오늘날 우리가 재미있게 즐기는 좀비 장르영화의 시초는 바로 이영화에서 비롯된다. 저예산 영화임에도 불구하고 완성도가 상당히 높고 좀비라는 매개를 이용하여 던지는 메세지도 아주 강렬하다. 그러면서 대단히 은유적인지라 별 생각 없이 보면 전혀 이런 측면을 짚어내기도 힘든 영화라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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