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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플래쉬(1984), 오이디푸스와 인어동화이야기 본문

영 화/80's 영화

스플래쉬(1984), 오이디푸스와 인어동화이야기

유쾌한 인문학 2010. 4. 22. 07: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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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플래쉬(Splash)
론 하워드 감독의 세번째 작품으로 초기작품이지만 꽤나 수준 높은 동화적 이야기를 들려준다.  아마 티비에서 보신분들 많을거라 예상된다.  남자주인공은 톰 행크스가 맡게 되는데 톰의 입장에서는 자신의 4번째 출연작이 되는 그런 작품이다.  여자주인공인 인어는 대릴 한나라는 배우가 맡게 된다.  상당히 유명하다고 들었는데 나로선 잘 모르겠다.  어쨌건 젊은 시절의 톰 행크스를 보는 재미가 아주 쏠쏠하다.  어째 요즘의 모습과 비교해본다면 크게 변한게 없다고나 할까?  얼굴에서부터 목소리 톤에 이르기까지 거의 변화가 없다. 

내용은 아주 간단하다.  인어이야기이다.  톰은 어린시절 우연히 물에 빠져 인어를 만나게 된다.  하지만 그 사실을 잊은채 그 이후 수십년이 흘러 장성한 그는 식료품 가게 사장이지만 사랑을 찾이 못해 괴로워하게 된다.  어느날 그는 다시 바다에 빠지게 되는데 그때 인어가 그를 구해주게 된다.  톰을 사랑하게 된 인어는 인간의 다리를 한채 톰을 찾아가게 되고 둘은 사랑에 빠지게 된다. 

한편 인어를 연구하던 어느 학자가 있는데 그는 바다속에서 주인공 인어를 우연히 만나게 되고 이에 그녀를 찾아 해매다 대통령 만찬식에서 그녀에게 물을 뿌려 인어임을 많은 기자들 앞에서 확인시키게 된다. 
결국 그녀는 그로 인해 연구대상이 되어 연구소에 격리수용되고 톰은 그녀를 다시 구해내 다시 바다로 돌려보내게 된다.




인어와 동화이야기
어느 문명권을 가던 바다를 끼고 사는 문명권이라면 반드시 인어와 관련된 설화가 존재하게 된다.  물속에 존재하는 사람.  반은 사람이고 반은 물고기인 인간.  그리고 대부분 이 인어들은 여성의 형태로 등장하게 된다.  여러분들은 남성 인어를 생각해본적이 있는지 모르겠다.  나로선 남성인어라는건 듣도 보도 못했으니 말이다. 

그럼 왜 인간들은 인어라는 것에 대해서 환상을 품게 된 것일까?  두가지측면에서 접근이 가능할 것 같다.  첫째는 인간 자체가 바다에서부터 진화해온 동물이라는 점에서 어떤 근원성에 대한 회귀적 욕망이라고 볼 수 있다.  아무래도 인간의 신체가 거진 물로 이루어져있고 또 다양한 원형적 이미지들을 살펴보면 물과 관련된 이야기들도 상당수 많이 존재하니 말이다.  그럼 두번째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어머니의 모태에 있을때 경험했던 원시바다와 비슷한 환경적 요소에 대한 회귀적 욕망이라고 볼 수 있다.  뱃속에서 느끼는 따뜻함과 편안함 그리고 심장소리에 대한 갈망이라고나 할까?  결국 두가지 이유라고 했지만 따지고 보면 궁극적으로는 하나의 이유로 합쳐지게 되는바 그건 바로 바다와 포근함 그리고 근원에 대한 회귀적 욕망이라는 것이다.

그러다보니 자연스럽게 인어는 여성이 될 수 밖에 없다.  아무래도 바다가 가지는 이미지 그 자체가 생명의 요람으로서 어머니와 같은 이미지를 가지게 되고 태아시절로의 회귀 욕망 역시 어머니의 모태로의 회귀로 귀결되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모태로의 회귀적 욕망은 오이디푸스 이전의 상황으로의 회귀 문제로 직결되게 된다.  즉 어머니를 욕망하고 어머니의 욕망의 대상이 되는 것을 꿈꾸는 욕망이라고 볼 수 있다. 

또 한편으로 이런 의문을 가질 수도 있다.  왜 인어는 다리가 없는걸까?  왜 하반신만이 물고기의 형상을 가지게 된 것일까?  간단해보이지만 결코 간단한 질문이 아니다.  내 생각에는 모태가 가지고 있는 특이성때문인 것 같다.  임산부가 아이를 가진다는 것을 부착개념으로 바라보게 된다면 출산은 그것의 상실을 의미하게 된다.  즉 태중에 존재하던 아이의 빠져나감은 여성에게 있어 일종의 거세와도 같다는 것이다.  좀 더 자세히 진행시켜보자면 여자가 아이를 가지게 되면 자신의 신체에 무언가가 부착되게 된다.  이것은 일종의 팔루스의 가짐 즉 상징적 남성 성기의 부착으로 생각해볼 수 있는 문제이다. 

여성으로서는 자신이 애초부터 가진적도 없고 가질 수 없는 것을 가지게 되었기에 여성은 일종의 나르시즘에 빠져들게 된다.  그리고 이러한 나르시즘은 어머니와 태아의 상상적 관계에서 더욱 심화되게 된다.  그런데 아이가 출산하게 된다는 것은 그것의 상실 즉 상징적 거세가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출산은 여성으로 하여금 자신의 나르시즘을 만족시켜주던 상상의 아이가 실재의 아이로 바뀌게 된다는 것을 의미하게 된다.  그리고 바로 이지점에서 어떤 괴리감이 발생하게 된다. 

더이상 논의를 진행할 것 없이 딱 여기까지만 생각을 해본다면 인어가 다리가 없는 이유는 비로서 밝혀지게 되는데 인어는 바다를 향한 근원적 회귀성과 생명의 요람에 살아가는 어떤 생명창출의 상징과도 같은 존재이다.  그러면서 다리가 없다는 것은 다리 벌림이 불가능하다는 것이고 이는 성관계 및 출산의 거부를 의미하게 된다.  이미 생명을 내포하고 있기에 굳이 남성 성기의 일시적 삽입을 통한 만족을 추구할 이유도 없고 그와 동시에 태아의 가짐으로서 느끼게 되는 나르시즘을 포기할 이유도 없다는 것이다. 

아무튼 우리가 과거부터 흔히 들어오던 인어와 관련된 동화의 주 목적은 이러한 아이들의 오이디푸스적 욕망의 단절이 주 이유라고 할 수 있다.  그렇기에 동화속 인어들은 반드시 사랑에 실패하게 되는 것이다.  그 실패의 이야기를 내재화하면서 아이들은 오이디푸스 욕망에서 벗어날 수 있는 것이고 말이다.  사실 수많은 동화들을 자세히 살펴보면 어떠한 매커니즘을 가지게 되는바 그것들은 다 그럴만한 이유가 있는 것이다.





마무리
오랜만에 이런걸 보니 가슴이 찡해지는 기분이 느껴졌다.  이것이 바로 동화의 힘인 것인가?  한동안 머리속에서 완벽하게 사라져있던 인어라는 존재 그 자체를 다시금 떠올리게 된 시간이었다고 할 수 있겠다.  문득 드는 생각인데 사람은 나이가 들면 들수록 점점 동화적 사고관에서 멀어지게 되는 것 같다.  지속적으로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것만을 강요받으면서 생겨나는 현상이라고 볼 수 있는데, 곰곰히 생각해보면 과거에 읽었던 수많은 동화 이야기들 전래동화에서부터 서양의 동화에 이르기까지 거의 모두 기억이 안난다.  잃어버린 기억속에서 내가 놓쳐버린건 도대체 무엇일까?  그런 생각이 스쳐지나가는 아침이다.



Image Copyright (c) Touchstone Pictures. All rights reserv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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