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응형
Notice
Recent Posts
Recent Comments
관리 메뉴

★ image or real

분노의 역류(1991), 방화범과 불의 원형적 이미지 본문

영 화/90's 영화

분노의 역류(1991), 방화범과 불의 원형적 이미지

유쾌한 인문학 2010. 6. 10. 11:28
반응형





분노의 역류(Backdraft)
론 하워드 감독의 8번째 작품으로 그의 출세작이 된 작품이다.  순직한 소방관 형제들의 이야기이며 불을 다룬 영화로서 이정도의 완성도를 보여주는 작품도 흔친 않다고 생각된다.  소방영화를 떠올려 보자면 일단 1977년도에 타워링이 생각난다.  빌딩에 불이나서 탈출하는 영화이고 마지막에 옥상에 있는 물탱크를 터트려 불을 끄는 영화인바 아마 많은 분들이 기억하실것 같다.  그외에는 딱히 생각나는게 없다. 

그럼 분노의 역류 이후에 괜찮은 소방영화가 있었던가?  역시 존재치 않는다.  사실 뭐 소방영화라는게 딱히 많이 만들어지지도 않고 이작품을 뛰어넘기도 힘드니 말이다.  분노의 역류는 우리나라에서도 꽤나 유명한 작품으로 아마 많은 분들이 티비에서 여러번 반복하여 보았을것으로 예상된다.  아 그리고 이 작품에서도 로버트 드니로가 출연하게 된다.  최근 이배우가 출연한 영화를 너무 많이 보아서 그런지 눈에 팍팍 박히는 기분이랄까? 

내용은 간단하다.  어느 위대한 소방수 아버지를 둔 두 형제들이 주인공이다.  그중 동생은 아버지의 화재진압 현장에 따라 구경갔다가 그만 아버지가 사고로 희생되는 것을 두눈으로 바로 보고만다.  그뒤 장성한 그들은 둘다 소방관의 길을 걷게 되는데 형은 동생의 소방관됨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어느날 Backdraft 현상을 이용한 방화범이 발생하게 되고 동생은 그것을 조사하다가 그것이 현직 소방관의 짓임을 밝혀내게 된다. 

그는 의원들의 소방예산 삭감과 그로 인한 몇몇 사람들의 금전적 이득을 목도하고 난 이후 지속적으로 죽어나가는 대원들을 보고 분노하여 이 일을 저지른것이다.  이 사실을 알게된 형은 초대형 화재현장에서 그와 다툼을 벌이다 탈출할 기회를 잃게 되고 이를 동생이 구해내지만 결국 형은 사망하게 되고 동생은 다시금 현장 소방관의 길을 걸어 소방관으로서의 가업을 이어나가게 된다.




방화범과 불의 원형적 이미지
불이라고 하는 것이 참 재미있다.  불이 가지고 있는 양가적 성격 즉 창조와 파괴로서의 성향은 참 많은 이야기거리를 던져주는 것 같다.  일단 가장 먼저 드는 생각은 불이란 무엇일까?  저걸 물질이라고 보아야 할까?  어떻게 보면 일종의 유체인 것 같은데 하나의 플라즈마 상태로 보면 정확할까?  하지만 사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불을 바라보면서 불이 가지는 존재로서의 실체에 대해서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이를 두고 바슐라르는 이렇게 말하지 않았던가.  "촛불을 바라보는 사람은 불을 보는 것이 아니라 명상에 잠겨드는 것이다"

불이 가지고 있는 최초적 이미지는 동서를 불문하고 동일하게 나타나게 된다.  아무래도 원시 인간이라는 것이 동서에 따라 달라지진 않을테니 말이다.  원시인간에게 있어 불은 파괴적이면서 감히 다가설 수 없는 숭배의 대상으로서 역할을 하게 된다.  하지만 어느순간 인간은 그 불을 지배할 수 있게 되었고 그 불을 사용하게 되면서 그때부터 불은 파괴가 아닌 창조의 영역으로 발을 들여놓게 된다.  불을 가지고 음식을 해먹기도 하고 불을 가지고 무언가를 만들기도 하고 불을 이용하여 자기 자신을 지켜내기도 하니 말이다.

하지만 인간이 아무리 불을 제어한다 하더라도 불은 항상 그 제어 범위를 넘어서기 마련이다.  그리고 그 제어범위를 넘어서는 순간 불은 다시금 원시적 파괴성을 드러내며 그 자신이 가지고 있는 본질을 여김없이 발휘하게 된다.  그렇기에 인간은 불을 향해 가지고 있던 원형적 이미지로서의 파괴성에서 벗어날 수 없는 것이다.  한 일천년 이후에 불을 완벽하게 제어해 그 어떤 화재사건도 발생하지 않는다면 그 이미지가 사라질려나?  하지만 현대 기술로서는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기에 현대인이나 수만년전의 원시인이나 불을 향한 같은 이미지를 공유하게 되는 것이다.

결국 인간이라면 누구나 불이 가지고 있는 저 파괴적 이미지를 내포하게 된다는 것이고 그 파괴적 성향을 정확히 이해하게 된다.  이러한 이해가 인간이 가지고 있는 근원적 공격성과 만나게 될때 방화범이라는 것이 탄생하는게 아닐까.  마치 촛불을 바라보며 몽상에 빠지듯 엄청나게 자라난 큰 불을 바라보며 자기 내면에 존재하는 다양한 억압들을 같이 태워버리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찰나적인 만족감일뿐 근본적인 해결은 될 수 없는 것이고 그렇기에 방화범들은 지속적으로 불을 질러 그 만족감을 얻고자 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두 형제와 불
단순히 내용요약만 보더라도 극중 두 주인공 특히 동생이 얼마나 큰 정신적 외상을 가지고 있을지는 어렵지 않게 예상되는 부분이다.  어린시절 아버지를 잃는다는것 그것도 그 아버지가 자랑스럽게 여기던 작업 현장에서 사고로 죽어간 것을 두눈으로 목격한다는 것은 쉽게 극복할 수 없는 문제의 것이니 말이다.  결국 동생은 학업을 중단하고 소방관의 길로 들어서게 된다.  하지만 두 형제는 큰 마찰이 생겨나게 되고 형이 보여주는 위험천만한 행위를 이해할 수 없는 동생은 현장 소방관을 떠나 조사관이 된다.  그곳에서 극중 로버트 드니로를 만나 방화범을 추적하게 되고 말이다.

사실 동생이 보여주는 일련의 행동과 방화범이 보여주는 일련의 행동은 그 매커니즘에 있어서 크게 다를바가 없다.  방화범은 자신의 억압을 해결하기 위해 방화를 수단으로 삼는다면 극중 주인공인 동생 역시 어린시절의 경험으로 인한 정신적 외상을 해결하기 위해 소방관이 된 것이니 말이다.  형이 보여주는 과도한 위험한 문제 해결 방식도 마찬가지로 볼 수 있다.  사람을 구하기 위해서라곤 하지만 그가 벌이는 소방행위와 구조활동은 위험하기 짝이 없다.  왜 그렇게까지 하는것일까?  그것역시 간단한바 아버지의 죽음앞에서 무기력했던 자신을 아버지와 똑같은 사람이 됨으로써 해결하고자 하는 것이다. 

결국 두 형제 모두 아버지의 죽음 앞에서 스스로를 불 앞으로 내던진 것이다.  그리고 두 형제 모두 그 불앞에서 선채 그 기억을 태워버리기 위해 뛰어들게 되고 그렇기에 대단히 위험한 양상을 보여주게 된다.  그와 동시에 두 형제는 서로가 가지고 있는 그 상처를 가장 잘 이해하기에 그러한 위험한 행동을 용납할 수 없기도 하다.  그래서 형은 동생이 소방관이 되지 않기를 바란 것이고 동생은 형의 위험한 진화작업을 용납할 수 없는 것이다.  두 형제가 보여주는 극한의 대립적 양상은 바로 이지점에서 발생하는 것이다.  자신의 상처를 태우려다가 정말로 그 자신이 타버릴까 두려운 것이다.     



마무리
자고로 이런 영화가 글쓰기는 대단히 어렵다.  그래서 꽤나 오랜 시간동안 내가 가지고 있는 지포라이터를 켜놓은채 그 불을 바라보며 방화범의 마음을 이해해보려고 생각에 잠겼는데 그 과정에서 그만 고장이 나고 말았다.  오호 통제라.  이 라이터는 조인성이 출연한 비열한 거리를 기념하여 나온 500개 한정판 라이타로 마님이 이영화 광고디자이너로 참여하여 받아온 것인데 그만 망가져버린 것이다.  큰일났다 싶어 이리저리 알아보니 고장이 아니라 부싯돌이 다 달아버린 것이다.  쓸데 없는 여담이었다.


Image Copyright (c) Universal Pictures. All rights reserved.
반응형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