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image or real
이웃집 토토로(1988), 합리적 이성과 토속자연신앙 본문
이웃집 토토로
성과 속은 명확히 반대되는 개념으로 인류 초기부터 생겨난 사고관이다. 이는 일종의 종교적 태도로서 구원이라는 것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게 된다. 고대인들은 이해할 수 없는 자연적 현상이나 전염병 또는 사회적인 관계에서 오는 다른 부족과의 충돌에서 벗어나기를 희망하게 된다. 만약 이것이 인간의 힘으로 극복이 가능하였다면 성속의 개념은 생겨나지 않았을지도 모르지만 이해할 수 없는 자연적 현상에서 느끼는 무기력함은 인간을 자연스럽게 구원에 대한 열망으로 나아가게 한다. 즉 인간의 힘만으로는 어찌할 수 없는 한계에 대한 인식이다. 고대인은 기본적으로 만물에 대한 완전성의 인식을 가지게 된다. 이는 마치 창세기 당시의 낙원과 같은 완전성에 대한 인식으로 모든 자연적 재난 및 전염병과 사회적 충돌의 원인은 이러한 완전성에서의 분리에서 비롯된다고 생각하며 바로 이 지점에서 성과 속의 구분이 발생하게 된다. 이러한 성속의 구분은 주로 민속 종교에서 확인이 되며 이미 세계 보편종교로 확립된 것에서는 이러한 점을 쉽사리 확인하기는 어렵다. 이러한 성과 속은 몇가지 특징을 가지게 된다.
이 작품은 일본의 근대 초기를 그려내는 작품으로 아직 완벽하게 현대화되지 않은 시골의 풍경을 그려낸다. 특히 일본 특유의 종교적 공간이 두드러지게 나타나게 되는데 이는 성과 속을 나누는 경계로서 역할을 하게 된다. 그중 특히 중심에 서게 되는 것은 사츠키와 메이가 살고 있는 집 옆에 있는 커다란 나무이다. 이 나무는 미야자키 하야오의 대부분의 작품에서 확인할 수 있는 자연의 상징으로서의 세계수의 역할을 하는 것으로 이는 성의 공간으로 자리매김하게 되고 그외 인간문명이 싹트는 마을은 속의 공간이 된다. 메이 가족이 이사오자말자 그 집에서 살아가던 숯검댕이와 새끼 토토로는 이사를 가게 되는데 바로 성과 속의 공간이라는 측면에서 숯검댕이와 새끼 토토로가 이사가는 이유가 도출된다. 즉 숯검댕이와 새끼 토토로는 자신들의 영역이었던 성의 공간으로서의 집에 인간들이 들어왔기에 그 영역은 속의 영역이 변화하게 되었고, 따라서 그들은 성의 공간인 나무로 이주를 하는 것이다. 그럼 여기에서 한가지 의문이 제기된다. 왜 토토로와 숯검댕이는 인간이 사는 속의 영역에서 같이 살지 못하고 이사를 가는 것일까?
새로운 세계와의 조우
숯검댕이와 토토로의 존재를 직접 눈으로 볼 수 있는 사람은 사츠키와 메이 두 자매뿐이다. 그 동네에 오래살던 할머니만이 그것의 존재에 대해 인식하고 있을뿐 역시 보지는 못한다. 그렇다면 왜 어린아이에게는 보이는 토토로가 어른들에게는 보이지 않을까? 간단한 이유로 그들이 보여지길 원치않기 때문이라는 점을 지적할 수 있다. 그러니 새끼 토토로를 메이가 발견했을때 도망가는 것 아닐까? 이렇듯 이들이 이사를 가는 장면을 통해 그들이 인간을 피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를 확인할 수 있는 또 다른 장면으로 메이가 제일 처음 새끼 토토로를 발견했을때 반투명인 것을 들 수 있다. 처음엔 반투명 상태로 이사를 가다 메이가 발견하자 도망치다 갑자기 투명으로 변해버리게 된다. 그걸 메이는 기어코 다시 발견해내는 것이다. 그럼 이사가던 새끼 토토로가 투명으로 변했음에도 불구하고 왜 메이의 눈에는 보였을까? 심지어 메이는 숲속 깊숙한 곳까지 들어가 토토로를 만나기까지 한다. 거기서 토토로 배위에 앉아서로 고함을 지르다가 토토로가 하는 말을 메이는 알아듣고 이 정체불명의 동물이 토토로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럼 이런 능력은 갑자기 어디서 나온 것일까?
메이가 보여주는 저런 능력은 사츠키와 토토로가 친구가 되는 장면을 통해 그 원인을 파악할 수 있다. 사츠키는 비오는 밤에 아버지에게 우산을 건네주기 위해 배웅을 나갔다가 토토로를 만나게 된다. 거기에서 비맞고 있는 토토로가 안스러웠는지 우산을 토토로에게 건네주고 되고 토토로는 그 우산을 쓰게 된다. 이렇게 둘은 친구가 된 것이다. 결국 이러한 관계를 통해서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성에 대한 믿음이다. 현실에서 흔히 확인할 수 있는 어른 인간들처럼 배타적이지 않으며 계산적이지도 않고 합리적이지도 않다. 문자그대로 이 자매는 아이들이다. 근대 이후 인간이 잃어버린 것중 하나는 바로 자연과 소통하고 성을 직접 만날 수 있는 능력이다. 이성과 합리성이라는 미명아래에서 성에 대한 체험과 그 경외에 대한 태도는 미신적인 것으로 치부되기에 자연스럽게 현대의 인간은 성과 거리를 두게 되고 이에 오늘날의 사람들은 더이상 토토로를 만날 수가 없는 것이다. 따라서 극중 사츠키와 메이는 합리적 이성이 지배하는 인간세계에서 잃어버린 자연과 소통할 수 있는 매개체로서의 역할을 하게 된다.
한편 토토로는 극중 아이들이 가지고 있는 결핍을 채워주는 역할을 한다. 극중 상황은 전형적인 어머니의 부재를 그려내고 있다. 미야자키 하야오의 작품에서 부모의 부재는 흔하게 볼 수 있는 모티브로서 본작에서는 어머니의 부재와 이사라고 하는 공간적 변화를 통해 새로운 세계를 조우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열게 된다. 즉 부모의 부재를 통하여 아이들의 삶에 어떠한 변화를 이끌어내는 논리적 연관성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만약 부모가 존재한다면 아이들은 저러한 특별한 경험을 할 이유가 없다. 평범한 삶을 살아갈 것이지만 어머니가 존재하지 않기에 아이들은 그 결핍을 매꾸기 위해 새로운 세상과 조우하게 된다. 그리고 그때 만나게 되는 것이 성의 직면이며 그 중심에 서는 것이 바로 토토로이다. 토토로가 가지고 있는 결핍 충족의 역할은 메이가 토토로를 최초로 만난 나무 속 공간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어머니가 부재하는 자신들의 집과는 다르게 토토로의 공간은 편안함과 안락함이 존재하는 마치 어머니의 뱃속과 같은 양상을 드러내게 된다. 메이가 토토로와 가장 먼저 만나게 주된 이유 역시 어머니에 대한 갈망이 더 크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합리적 이성과 토속자연신앙
사실 우리 곁에는 항상 토토로가 존재하고 있다. 다만 우리가 보질 못할뿐이다. 그럼 우리는 왜 토토로를 보지 못하는걸까? 합리적 이성의 지배를 받는 현대의 사람들은 그들을 만날 수 있는 방법을 잊어버린 것이다. 데카르트 이후 근대합리적 이성의 발전은 우리가 가지고 있던 자연신앙 또는 토속신앙을 잃어버리게 만들었고 이러한 성에 대한 체험의 방법을 잃어버리면서 나타나게된 현상은 자연과의 소통방법을 잊어버린 것이다. 결국 토토로 역시 하야오의 근본적 생각으로 돌아가게 된다. 하야오가 가지고 있는 단 하나의 문제의식. 도구적이성의 사회지배로 인한 자연의 도구화 그리고 자연파괴. 이것을 막아낼 수 잇는 방법론으로서 자연과의 소통을 중시하는 것이다. 그리고 상징적 매개체가 바로 사츠키와 메이 두 아이들이 된다.
[영 화/미야자키 하야오] - 하울의 움직이는 성(2004), 세가지 지식인과 파괴적 남성문화
[영 화/미야자키 하야오] -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2001), 새로운 나를 찾아서..
[영 화/미야자키 하야오] - 이웃집 토토로(1988), 합리적 이성과 토속자연신앙
[영 화/미야자키 하야오] - 원령공주(1997), 인간과 자연의 화해는 가능한가?
[영 화/미야자키 하야오] - 미야자키 하야오 On Your Mark(1995), 짧고 굵은 메세지
[영 화/미야자키 하야오] - 붉은돼지(1992), 파시즘과 그안에 담긴 두가지 상처..
[영 화/미야자키 하야오] - 마녀배달부 키키(1989), 마녀의 상징과 현대의 통과의례
[영 화/미야자키 하야오] - 천공의 성 라퓨타(1986), 유토피아의 양면적 성격과 도구적 이성
[영 화/미야자키 하야오] - 바람계곡의 나우시카(1984), 자연과 인간 그 궁극의 변증법
[영 화/미야자키 하야오] - 미야자키 하야오 작품세계의 전반적 특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