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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탈리콜(1989), 나는 누구인가? 본문

영 화/80's 영화

토탈리콜(1989), 나는 누구인가?

유쾌한 인문학 2010. 2. 24. 1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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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탈리콜(Total Recall)
폴 버호벤 감독의 9번째 작품으로 1989년에 개봉한 작품으로 로보캅과 원초적 본능 사이에 껴있는 영화이다.  SF영화이고 주연은 아놀드 슈왈츠제네거가 맡게 된다.  아마 이영화는 보신분들이 많지 않을까 생각된다.  이 영화를 과거 극장에서 보셨다면 상당한 연세를 자랑하시는 분일테고 그외분들은 아마 대부분 토요명화에서 보지 않았을까 생각된다.

내용은 상당히 단순한데 먼 미래에 인간은 화성을 식민지로 삼게 되고 그곳에서 광물을 캐서 주요 에너지원으로 사용하고 있는 상태이다.  그리고 재미있는 기술을 가지고 있는데 기억을 조작할 수 있는 기술이다.  마치 어딘가에 여행을 가지는 않았지만 갖다온 것처럼 기억을 조작하여 추억을 심어준다는 식의 여행사도 존재니 말이다.  아무튼 현재 지구에서 전쟁이 일어나서 화성에 대한 지배력이 떨어지게 되었고 이틈을 타 화성의 최고 지배자가 화성을 점령한채 거의 왕과 같은 독재를 행하게 되고 이에 반대하는 레지스탕스들이 존재하는 상태이다.  이러한 독재자를 막기 위해 아놀드가 저항을 하다가 기억을 지워지게 되고 다른 기억을 주입받아 살아가고 있다가 우연히 자신의 존재를 알게 된다. 

다시 화성으로 돌아간 그는 독재자를 막기 위해 노력하다가 결국 모든 레지스탕스와 함께 체포되는데 이때 엄청난 반전이 일어난다.  알고보니 자신이 저항했었던 그 사실 마저도 조작된 기억이라는 것이다.  즉 그는 처음부터 독재자의 최측근이었는데 레지스탕스를 잡기 위해 첫번째로 기억을 조작하여 레지스탕스에 가담한 것처럼 보이게 하고 그 뒤 다시 기억을 조작하여 은폐시켜 레지스탕스의 완벽한 신뢰를 얻고 그렇게 일망타진에 성공한 것이다.  물런 이 모든 일은 애초에 아놀드가 계획한 일이다.

이 영화는 크게 봐서 두가지 측면으로 접근이 가능하데 그것은 화성의 상황과 기억이라는 부분이다.  화성에 살고 있는 거주민들의 상황이 상당히 재미있고 그와 동시에 아놀드라는 인물이 아주 재미있다.  그것에 대해서 짚어 보겠다.




지배자와 피지배자
화성에는 과거 우주인이 남긴 기가막힌 유적이 하나 존재하고 있다.  그것은 바로 산소를 만드는 발전소이다.  이 영화의 마지막에 이르면 아놀드가 그 기계를 활성화 시키게 되고 그로 인해 화성은 지구와 동등한 환경으로 거듭나게 된다.  그런데 재미있는건 이러한 기술을 지배층이 알고 있음에도 일부로 실행시키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되려 그 기술을 사용하게 되면 화성이 폭발한다는 식으로 선동하여 모든 정보를 차단한다.  그리고 화성에서 살아가기 위한 필수적 요소인 공기를 아주 비싼값에 팔고 있다.  즉 생존을 담보로 막대한 이득을 가지는 것이다.  이러한 공기를 제대로 공급받지 못한 사람들은 위의 스샷에서 볼 수 있듯 기형이 되어 살아가게 된다.

더 재미있는건 이 공기가 그렇게 부족하지는 않다는 것이다.  공급의 부족에서 비롯되는 현상이 아닌 오직 가치의 유지를 위해서 사람들을 저지경으로 만들고 이를 가지고 협박하고 있는 형국이다.  화성과 지구와의 관계도 상당히 재미있다.  화성에선 저런 지옥같은 상황이 연출되고 있어도 지구에선 내부문제로 인해 전혀 관여를 하지 않고 있는 상황이다.  이쯤오면 누구나 어렵지 않게 몇가지를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  하나의 사회를 이루고 있는 두 계층적 요소와 지배계층이 가지고 있는 억압적 수단같은것 말이다.  우리 사회를 가만히 돌아보자면 공기와 마찬가지로 절대적 부의 총량은 절대로 부족하지 않다.  길바닥에서 자야할 이유고 없고 급식비를 못내는 상황으로 갈 이유도 없다.  그렇지 않은가? 

그런데도 불구하고 여전히 길바닥에서 자야하는 사람이 있고 급식비를 못내서 구박는 학생들이 존재하며 심지어 형편의 문제로 학업조차도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은 경우가 부지기수이다.  그런사람 없다고?  그건 당신이 모르는 것이다.  정확히 말하자면 관심이 없는것이지.  이상하게 어느정도 준선진국에서 선진국의 반열에 오른 국가의 국민들이 가지지 못하는게 한가지 있는바 자기 국가에 존재하는 빈곤계층에 대한 인식부족이다. 

과거 한미FTA가 체결되던 당시 티비에서는 멕시코의 예가 끝도 없이 나왔었다.  옆동네의 빈곤계층과 부유계층.  그리고 부유층사람들에게 리포터가 물었었다.  "저 너머에 아주 극단적 빈곤의 사람들이 존재한다 아느냐?"  대답은 모른다였다.  그 다큐멘터리를 보고 많은 사람들이 그 멕시코인을 욕했을것 같은데 까놓고 말해서 멕시코나 대한민국이나 똑같다.  안그런가?  누군가 당신에게 와서 저 너머에 극단적 빈곤계층이 있는데 아느냐?  라고 묻는다면 뭐라고 대답할것 같은가?  한번 생각해보시라.

그렇다면 부의 절대적 총량이 부족하지도 않음에도 불구하고 이런 현상이 생기는 이유가 무엇인가?  그건 바로 구별짓기에서 비롯된다.  과거에는 단순히 먹는걸 조금 잘먹거나 식사예절을 잘 갖춘것 정도만으로도 너와 나의 구별짓기가 가능했었지만 현대에 이르러서는 돈의 액면적 가치에 의해서 구별짓기가 가능하다.  그리고 그 구별짓기를 위해 상대적 가치를 유지하기 위해 이런 일을 벌인다고 볼 수 있다. 




나는 누구인가?
위의 얘기는 그냥 곁다리이고 이 영화의 핵심은 바로 이부분에 존재한다.  아놀드가 가지고 있는 세가지 기억 그리고 세가지 인격.  인간에게 있어서 기억이라는 것은 어떤 것일까?  기억이라는 것은 지나간 사건을 뇌라는 정보처리시스템이 저장한 것이다.  오래된 저장은 점점 사라져가고 수시로 꺼내고 확인한 저장은 지속적으로 기억나게 된다.  이는 우리가 사용하는 컴퓨터를 생각해봐도 자명한 일이다.  사용자가 수시로 확인하는 데이터는 그 위치와 내용을 정확히 기억하고 있지만 자주 사용안하는 데이터는 어느순간 기억속에서 사라진채 저 구석에서 썩어가고 있지 않던가?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자체가 사라지지는 않는다.  꺼낼일이 없을뿐.  

그럼 인간이란 무엇일까?  영혼이 있는 그런 생명체?  현대과학이 발달하면 할수록 내려지는 인간이라는 동물은 대단히 단순해지는바 영혼?  그런건 없다.  인간은 그냥 입력기관과 출력기관 그리고 정보처리기관을 가지고 있는 하나의 탄소로 이루어진 거대 컴퓨터라고 볼 수 있다.  다양한 감각기관으로 많은 것을 인지하고 그 인지한 것을 뇌에서 처리하고 어떤 행동을 결정하면 팔다리라는 출력장치를 통해 행동을 하게 된다.  그리고 각각의 기관은 수많은 단일 세포로 이루어져있는바 신체내에서 많은 세포는 생사를 반복하고 있는 상황이다.  결국 독립적인 개별세포의 모임이 인간이고 그 개별세포들의 상호작용속에서 자신이 탄생한다. 

그리고 그 세포들 특히 뇌세포들의 상호작용 속에서 기억이라는 것을 저장하게 되는바 인간에게 있어서 기억이라는 것은 자신의 존재를 이루게 되는 주된 요소가 된다.  결국 '나'라는 인간이 '나'라는 인간으로 존재하게 하는 것은 '나'라는 영혼이 존재하기 때문이 아니라 '나'를 이루고 있는 세포들이 살아오면서 만들어낸 기억에서 '나'가 탄생하게 된다.  결국 몸뚱아리는 그렇게 중요한 문제가 아니라는 결론이 내려진다. 

극중으로 돌아가보자.  아놀드에게는 크게 세가지 기억이 존재한다.  처음부터 자신이 살아왔었던 독재자의 최측근으로서 기억.  그리고 두번째로 뒤늦게 독재자가 잘못되었음을 알고 레지스탕스들에게 협력하려고 하는 기억.  마지막으로 세번째는 독재자에게 잡혀 다시금 기억을 지워진채 저기 변두리에서 어느 광산 노동자로서 살아가는 기억.  총 세가지이다.  물론 이 모든 기억의 흐름들은 제일 처음의 아놀드가 다 계획한 것이다. 

중요한건 하나의 몸을 가진 상태에서 세가지 기억이 존재하니 이 세명은 각기 다른 사람으로 보아야한다는 것이다.  몸은 그냥 탄소덩어리로서 세포들의 집합체이지만 인간으로서의 '나'라는 존재는 기억에서 비롯되는 것이니 말이다.  결국 아놀드의 제일 첫번째 기억은 모든 것을 다 마무리한채 제일 처음의 자신으로 돌아갈 수 있을거라 생각하지만 제일 마지막의 아놀드가 그것을 거부하고 자신의 삶을 살아가게 된다.  조작된 기억이라 할지라도 그것이 존재하기에 바로 '나'가 존재하는 것이고 앞선 아놀드의 장난질은 자신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게 되는 것이다.  결국 그는 자신의 의지로서 선택을 하게 되고 그 선택으로 공기 발전소를 시행시켜 화성을 해방시키고 자신은 사랑의 사랑도 되찾게 된다.


이데올로기적 측면
기억이라는 측면을 가지고 한가지 더 생각해볼 부분이 존재한다.  극중 주인공인 아놀드에게는 세가지의 기억이 존재한다.  그리고 이 세가지의 기억은 각기 단절되고 세번째 기억의 아놀드는 앞선 두개의 기억으로 존재하는 아놀드를 정확히 알게 된다.  이것이 의미하는 것은 각각의 아놀드가 살아온 세상은 각각의 이데올로기를 반영한다는 것이다.  이데올로기의 가장 큰 목적은 통제이다.  상징적 권위가 행사되는 이뎅로로기는 그 내부의 주체들에게 의미를 부여하고 그것에부터 통제를 강화시켜나가게 된다. 

그리고 그 이데올로기 이면에 존재하는 대타자는 모든 의미의 기초를 제공하게 되고 그러면서 유의미한 세상을 강화시켜나가게 된다.  의미의 기초를 제공한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  어떤 하나의 의미가 시작한다는 것은 변화를 의미하게 되고 그 변화는 과거의 것과의 단절을 의미하게 된다.  그리고 대타자가 가지는 권위는 이러한 과거의 것을 철저하게 말소시키게 된다.  이러한 측면을 영화에서는 아놀드의 세가지 기억으로 표현하는 것이다.  아놀드의 기억을 조작하는 행위는 이데올로기가 어떻게 인간을 통제하고 강화시켜나갈 수 있는지에 대한 확실한 고찰을 제시해준다. 

그런데 어느날 아놀드는 자신의 조작된 기억의 진실을 알게 된다.  이게 어떤 의미일까?  이데올로기에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현재가 아닌 과거이다.  과거를 단절시킨채 과거를 재해석한다면 과거와 현재의 연속성이 발생하게 되고 이 연속성에서 인간은 안정감을 느끼게 된다.  따라서 이데올로기의 강화가 가능하게 된다는 점이다.  그런데 단절된 과거를 주체가 정확하게 인식하게 된다면 이데올로기가 제시하는 재해석된 과거와 현재의 연속성이 무너지게 되고, 이러한 무너짐은 새로운 미래의 재창조의 가능성을 제시하게 된다. 

그것이 바로 극중 주인공인 아놀드인 것이다.  아놀드는 재해석된 과거가 아닌 자신의 과거의 실체를 보게된 인물이다.  이말은 과거의 현재의 연속성이 무너졌다는 말이다.  그렇기에 그는 이데올로기의 안에서 살아가기보다는 새로운 미래를 재창조하는 것이 가능해지는 것이고 그렇게 아놀드의 혁명이 시작된 것이다.




마무리
이상으로 이것저것 살펴보았는데 역시 기가막힌 영화라는 생각이다.  극중의 사회가 담고 있는 다양한 요소들을 통한 비판적 정신을 가지면서 그와 동시에 아놀드의 기억을 가지고 인간에 대한 많은 사유를 가능하게 하는 영화이다.  그러면서 SF 액션 영화이기에 재미가 있다.  영화라는 매체가 멋진게 바로 이런 지점이 아닐련지.  가장 대중적인 매체이면서 그 속에 무엇을 담느냐에 따라서 대중에게 많은 것을 선사해줄 수 있다.  그러면서 자본과 아주 친하다.  자본과 어느정도 친숙함을 유지할 수 있기에 쉽게 사라지지도 않는다.  결국 핵심은 그 매체를 활용하는 관중의 능력에 달린게 아닐까 판단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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