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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크 나이트 라이즈(2012), 전설의 끝? 전설의 시작!! 본문
다크 나이트 라이즈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8번째 영화이다. 배트맨 비긴즈에서 시작된 놀란 감독의 배트맨 시리즈는 다크 나이트를 거쳐 다크 나이트 라이즈(이하 라이즈)에서 완결을 보게 되었다. 원작 코믹스는 본적이 없어 뭐라 말할 순 없지만 굉장히 대단한 작품이라는 점은 익히 들어왔는데 이에 놀란 감독 작품 전반에서 들어나는 주체에 대한 집요한 물음이 더해진다고 하니 자연스럽게 관심이 갈 수 밖에 없을 것이다. 더욱이 다크 나이트에서 보여주었던 그 굉장한 재미와 질문들을 생각해보다면 그 열망은 더욱 더 커지지 않나 생각된다.
많은 이들이 이 작품을 두고 배트맨 비긴즈의 연장선이라고 말하는 것을 보았다. 라즈 알굴이 나오는 것이 가장 큰 이유가 될 것인데 사실 라이즈는 배트밴 비긴즈와 다크 나이트에서 던져졌던 수많은 질문들을 정리하는 영화로 보는 것이 정확할 것 같다. 사실 글을 쓰고 있는 이 시점에도 다크 나이트에서 다 언급한 것을 굳이 또 할 필요가 있을까? 라는 의문이 지속적으로 떠오를 정도이니 말이다. 고담 시민들에게 던져지는 질문은 이미 조커가 행했었고 배트맨 개인이 가지는 주체적 분열상과 레이첼의 죽음은 필연적으로 그를 폐인으로 만들 수 밖에 없는 요소이다.
배트맨과 주체의 문제
2008년도 다크 나이트를 보면 첫 장면이 굉장히 인상 깊다. 첫 등장부터 던져지는 질문인데 배트맨의 아류라고 해야 할까? 아무튼 따라할려고 하는 자들이 배트맨을 향해 던지는 말이다. "당신과 나의 차이가 뭐냐?" 이 질문이야 말로 핵심적인 주제의식이 아닐까 생각된다.
일단은 베트맨 비긴즈로 시선을 돌려봐야 할 것 같다. 브루스 웨인은 크게 두가지 핵심적인 기억을 가지게 된다. 첫번째는 어린시절에 우물에 추락한 기억이다. 실수로 우물에 추락하게 되고 그 우물 속에서 극한의 공포에 빠져들게 된다. 그때 박쥐가 나타나게 되고 그로 인해 그 자신이 느끼는 공포라는 감정을 박쥐라고 하는 한 매개물에게 전가하게 된다. 우물이라고 하는 곳은 폐쇄적이면서 깊이가 있는 공간이다. 라이즈에서는 이 우물이 지하감옥의 형태로 재등장하기도 한다. 우물 또는 지하가옥이 가지고 있는 폐쇄성과 깊이는 다양한 상상력의 매개물이 되며 그 상상들은 대부분 공포와 관련을 맺곤 한다. 좁고 폐쇄적인 깊은 우물과 그 속에서의 느낀 공포는 자신의 내면의 두려움이 가지고 있는 폐쇄성과 깊이를 나타나는 하나의 장치가 되고 그러한 내면의 공포가 가지는 모호한 원인을 박쥐라는 것에 전가하게 되는 것이다.
두번째 기억으로는 부모님의 죽음이다. 오페라를 보다가 자신의 두려움으로 인해 일찍 나오게 되고 하필 그때 부랑자를 만나게 되어 부모님은 죽음을 당하게 된다. 어린 시절 다가온 부모님의 죽음과 그 죽음의 인과관계에 자신의 행위가 일정부분 차지하고 있다는 죄책감은 우물의 기억과 쌍벽을 이루는 또 다른 기억으로 이 두가지 기억은 공포라는 하나의 귀결점으로 정리할 수 있다. 부모님의 죽음과 그 죄책감이라는 것도 따지고 보면 그 본질에 죽음에 대한 공포가 숨쉬고 있기 때문이다. 이후 브루스 웨인은 길을 떠나게 되고 라즈 알굴을 통해 훈련을 받지만 그들의 정신을 이어가는 것을 거부한채 돌아오게 되고 배트맨이라는 가면을 쓰게 되며 이때부터 브루스 웨인은 두개의 주체로서 나뉘게 된다.
즉 그는 자신의 내면적 두려움을 이겨내기 위해 그 두려움을 전가시킨 박쥐를 자신의 외면적 표피로 사용하여 허구적 존재를 만들어내게 되며 그것이 바로 배트맨이다. 즉 이는 허구적 외면적 표피를 이용하여 자신의 내면적 두려움을 이겨내려는 시도이다. 그리고 배트맨으로서 자신이 행하는 다양한 악에 대한 응징적 행위들은 자신의 두려움을 외피로 사용한채 이를 역전시켜 외부에서 자신을 두려움의 대상으로 바라보게 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 하지만 여기에도 한계는 존재한다. 브루스 웨인이 자신의 내면적 두려움에서 벗어나긴 했는데 그 벗어남은 배트맨이라고 하는 허구의 상징을 통해서 벗어나게 된다는 것이며 바로 이지점에서 그의 주체성의 분열이 발생한다.
배트맨의 분열적 주체성이 보여주는 조커와 하비덴터
이렇듯 배트맨이라는 존재는 아이러니한 존재이다. 그러한 측면을 지속적으로 드러내는 것이 2008년도 다크 나이트의 핵심이다. 위에서 언급한 "너와 나의 차이점이 무엇이냐?"라는 질문은 배트맨 자체가 가지고 있는 모순성에 대한 질문인 것이며 이러한 배트맨의 이원적 성격은 조커와 하비덴터라는 인물을 통해 극적으로 재현된다.
일단 배트맨과 조커는 너무나도 닮은 존재이다. 조커가 가지고 있는 사회적 무존재성은 배트맨이 가지고 있는 존재하되 존재하지 않는 사회적 무존재성과 일치한다. 즉 배트맨이라는 외피를 쓰고 있는한 그는 이름도 없고 주소도 없고 직업도 없는 자이다. 이렇게 보면 배트맨이라는 인물은 주체성이라는 측면에서 보았을때 조커와 비슷한 양상을 가지는 인물이라고 볼 수 있다. 그와 동시에 배트맨과 조커가 보여주는 공통된 특징 즉 공포의 공유는 그들의 유사성을 극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이다. 이들이 보여주는 공포는 사회적 무존재성에서 비롯된다.
이에 배트맨은 검사 하비 덴트에게 큰 기대를 걸 수 밖에 없다. 자신 스스로도 자신의 모순됨을 알고 있을 것이며 배트맨 자체가 가지는 공포와 억압들의 형상은 '법안의 무법'과 '정의를 위한 무법'이라는 식으로 표현되며 다크 나이트 말미에는 핸드폰 소나라는 막강한 힘을 통해 보여지기도 한다. 그렇다면 브루스 웨인이 진정으로 자기 자신을 되찾을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일까? 결국 사회적으로는 배트맨의 존재 의미가 없어지게 되는 그 순간에 더불어 개인적으로는 허상적 외피가 필요 없어지는 순간일 것이다. 그리고 그때 그는 사회적 무존재인 배트맨에서 벗어나 브루스 웨인이라는 자기 자신으로 회귀할 수 있게 된다. 그리고 이러한 꿈을 항상 꿀 수 있게 해주는 힘은 바로 어린시절부터 항상 함께 지내왔고 자신의 정체를 알고 있는 사랑하는 여인인 레이첼이다.
하지만 결국 레이첼은 죽게 되고 하비 덴트는 투페이스로 변신하며 브루스 웨인이 가지고 있는 분열적 주체성에 대해서 다시금 환기 시키게 된다. 이러한 하비 덴트가 보여주는 투페이스로의 분열상은 "나는 도대체 누구인가"라는 질문을 다시금 배트맨에게 던지는 것에 다름이 없다. 결국 하비 덴트의 타락은 배트맨이라는 영웅이 행하고자 했던 '정의를 위한 무법'이라는 것의 무의미성과 자신의 존재 의미에 대한 회의를 가져오는 것이며 거기에 더해진 레이첼의 죽음은 자연스럽게 브루스 웨인을 브루스 웨인으로서 살아갈 수 없게 만드는 문제가 된다. 즉 투페이스의 죄악을 자신이 다 뒤집어 쓴채 만들어진 하비 덴트라는 조작된 영웅과 그에 기반한 조작된 평화는 스스로의 정립의 가능성을 붕괴시키는 것에 다름아니다. 이를 두고 영웅의 모습이라고 칭하기도 하지만 브루스 웨인이 가지는 주체의 모순과 관련한 문제는 여전히 해결이 안된 상태이다. 이는 되려 주체적 붕괴이며 더욱이 이러한 조작된 평화는 왜곡된 형태의 하비덴트 법 '법안의 무법'을 불러와 이미 시스템 자체적으로 베인을 불러 올 수 밖에 없는 자기 모순이 되는 것이다.
다크 나이트 라이즈
라즈 알 굴이 돌아왔다. 그들의 선두에 선 베인은 조커와 비슷한 형태의 질문을 던지기 시작한다. 사실 조커와 베인이 던진 질문은 동일하다 보아도 무방하다. 그 질문의 핵심은 고담시가 가지고 있는 그 자체의 모순을 지적하는 것이다. 도시는 일련의 질서에 의해서 유지된다. 그런데 그 질서라는 것은 우리가 알다시피 이성적이고 합리적이면서 정의로운 것에 의해서만 유지되는 것이 아니다. 인간이 근대적 이성을 통해 정초한 인간 중심의 주체와 이에서 비롯되는 비롯되는 또 다른 형태의 인간 주체 중심의 이원적 사고관은 필연적으로 균열을 가질 수 밖에 없으며 이것이 바로 탈근대가 가지는 핵심이다. 인간과 마찬가지로 (고담)도시 역시 이성적 측면과 광기적 측면 등 여러 측면을 동시에 가지게 되고 이러한 다양한 측면 모두가 도시의 핵심적 요소가 되므로 단순하게 도식적 이원론으로 바라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결국 질서 그 자체가 도시의 존재 근거라면 그 질서는 모순된 질서이며 균열적 질서인 것이다. 라이즈는 이러한 모순성과 균열성을 직설적으로 보여주게 된다. 다양한 형태로 드러나니 영화를 통해서 확인하시기 바란다.
그런데 이부분에서 베인이라는 캐릭터가 굉장히 아쉽다. 조커와 극명하게 비교가 될 수 밖에 없는데 그 이유는 연기력 따위에서 근거하는 것이 아니라 막판의 그 반전이 문제인 것으로 판단된다. 그 반전은 베인이 가지는 케릭터를 죽여버리는 것에 다름이 없다. 그 반전 덕분에 베인에게 던져졌던 그 수많은 질문들이 허공으로 사라져버렸다. 캣우먼의 캐릭터가 불분명한 것은 나름 감안한다 치더라도 베인을 그렇게 만들어버리는 것은 정말 아닌 것 같다.
이후 브루스 웨인이 보여주는 행위는 그가 가지고 있는 주체적 분열상을 해결하기 위한 투쟁적 일대기로 보아도 무방하다. 배트맨이 가지고 있는 두려움과 공포라는 외면적 표피는 죽음에 대한 직시와 지하 감옥에서의 탈출을 통해 벗어던지게 된다. 특히 지하 감옥에서의 탈출을 통해 드러나는 것은 배트맨 비긴즈에서 주어졌던 그의 한계 즉 배트맨이라는 허구적 상징을 통한 두려움에 대한 벗어남을 넘어 배트맨이라는 허구적 상징 자체가 필요 없어짐을 보여주게 된다. 이때 브루스 웨인은 주체성을 정립하게 되고 자신이 가지고 있는 분열성을 회복하게 된다. 사실 회복이라기 보다는 직시라는 것이 더 정확한 표현일 것 같다. 내 안에 있는 또 다른 나에 대한 직시 그리고 최소한 그것에 잡아먹히지 않는 것에 대한 직시. 그리고 이러한 직시는 배트맨 뿐만 아니라 거대한 질문이 던져졌던 도시 전체가 그 사실을 직시하게 되면서 영화는 마무리된다. 즉 모든 개인 또는 집단은 브루스 웨인이 가졌던 분열상을 어떠한 형태로든 가질 수 밖에 없으며 문제는 그것에 잡아먹히느냐 아니면 직시하여 지양하느냐의 차이일 것이며 진정한 의미의 Rises는 바로 지양(止揚)으로서의 태도일 것이다.
마무리
놀란 감독의 배트맨 시리즈는 끝이 났다. 로빈이 이어받아서 또 나올 수 있지 않겠느냐? 라는 질문이 던져질 수도 있겠지만 큰 주제인 주체의 문제가 해결이 되었다고 판단되기에 더이상 이어갈 필요는 전혀 없다고 보여진다. 물런 이러한 지양적 태도는 결국 다시금 다른 반적 태도를 가져오긴 하겠지만 말이다. 중요한건 한번 지양을 했다는 경험일 것이고 이러한 경험이야 말로 전설의 끝이 아닌 전설의 시작으로 바라볼 수 있을 것이다.
사실 라이즈 자체는 어떤 면에서 보면 굳이 안나와도 될 영화가 아닌가 생각되지만 그래도 긍정적으로 바라보자면 마무리 지어지는 완결적 의미에서 의미를 가질 것이고 또 우리에게 나름의 거대한 즐거움을 선사해주니 그 자체만으로 더 큰 의미를 가진다 볼 수 있다. 다만 개인적으론 아쉬움이 많이 남는 영화가 아닌가 생각된다. 하지만 이 또한 취향의 문제이고 본인만 좋으면 그뿐인 것이니 남의 평은 크게 신경쓸 필요는 없다.
대략 2년 간격으로 영화를 발표하는 감독이라 다음 작품은 특별한 이변이 없는한 2014년이 되지 않을까 판단되는데 한가지 확실한건 놀란 감독이 던진 주제의식은 언제나 동일했고 또 같은 주제의식의 어떠한 변주가 이루어질지 그리고 그때는 얼마나 더 큰 즐거움을 선사해줄지 기대되는 대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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